만약 우리의 시 속에 아침이 오지 않는다면
김중일
공기 청정기와 나
정기적으로 공기 청정기를 분리해
먼지가 잔뜩 낀 검은 필터를 꺼내 볼 때면
마치 활자로 시커멓게 가득 찬 내 시집 속 한 페이지 같다
공기 청정기가 되었다는 전설의
죽은 시인들의 시를 읽고 침대에 누운 밤이면
죽은 시인들이 지금 자고 있는
잠의 깊이로 잠시나마 빠져들기를 고대하게 되지만
그 ‘깊은 잠’은 비극만을 기록한 죽은 시인들이 독과점하고
오히려 나는 완전한 불면이다
번개탄을 피운 듯 매캐한 잠냄새에
깊은 밤 공기 청정기를 켠다
청정기 속의 죽은 시인들과 죽은 독자들은
먼지 한 톨 만큼의 잠도 남기지 않고
시집의 페이지와 페이지
활자와 활자 사이로 필터링한다
페이지마다 활자마다 시커먼 잠이 슬픔의 때처럼 잔뜩 끼어 있다
이제 청정기 밖 공기에는 먼지 한 톨만 한 잠도 떠다니지 않는다
잠을 걸러낸 청정한 시간의 공기를 청정기는 밤새 내뿜고 있다
내가 뒤척이며 한숨을 내쉴 때마다 하품을 내뱉을 때마다
청정기가 윙윙 힘겹게 그러나 힘차게 모터를 돌린다
그때마다 나는 청정기처럼 자꾸 깬다
밤새 내 콧구멍 속에서 흘러나온 잠이 청정기 속으로 빨려 들때마다
청정기도 나도 자꾸 윙윙, 놀라며 깬다
살얼음 같은 선잠 위에 아슬아슬하게 누운 공기 청정기와 나
결국 뜬눈의 청정기와 나
‘둘 중 누가 완전히 잠들기 전에는
결코 먼저 잠들지 못한다‘
애초에 누구도 잠들지 못할 모순이다
남은 방법은 단 한 가지, 새벽에 몰래
나는 침낭 속으로 기어들 듯 공기 청정기 속에 들어갔다
그제야 잠시 잠에 들었다가, 나오니
또 밤이다
공기 청정기가 어느새 나를 옆에 뱉어내고
윙윙 힘겹게 모터를 돌린다
금연에 대한 우리의 약속
우리는 금연을 하지 않기로 굳게 약속했다.
금연은 하면 결코 안 되는 것이다
너는 세상 사람 모두가 금연을 하게 되면 지구가 정말 땅바닥으로 추락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되면 다 죽는 것이다. 세상을 걱정한다면 단 한 명이라도 남아 담배를 피워야 한다.
세상에 마지막 남은 흡연자가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나여야 할 것이다. 너는 약속을 끝까지 지키기에는 건강 상태가 썩 좋지 못하다.
약속을 지키는 데 ‘의자’가 필요하다면
나는 그 의지를 너에게서 한 개비처럼 빼앗아오고 싶다.
특별히 두 손을 다 써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우리는 늘 온갖 걱정에 담배에 불을 붙여놓고 있다.
아주 길고 가는 연기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고요히 하늘로 올라가는 걸 지켜보는 건, 걱정을 깜박 잊을 만큼 보기 좋은 일이다.
하늘에 올라가 구름에 비끄러매인 연기가 우리 지구를 공중에 부양하고 있다.
지구라는 작은 바스켓에 우리는 다 함께 타고 있다.
그중에 희생자들을 태우는 화장장의 연기나
흡연자들이 피우는 가느다란 담배 연기들이 열기구의 무수한 날줄처럼 둥근 ‘공중’에 매달려 있다.
땅이 꺼지듯 추락하는 바스켓 속에 갇힌 유족들의 뜨거운 탄식이나
흡연자들이 내뿜는 하얀 입김이
밤낮으로 ‘공중’을 둥글게 부풀린다.
그러니 혼자만 오래 살겠다고 금연하는 것은 얼마나 이기적인 무임승차인가.
과연 그런가 뭔가 좀 아리송하더라도, 이 순간 한 번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
나는 잠든 너의 담배 냄새 나는 부르튼 입술에 몰래 입맞춤한다.
유족인 너의 몸은 한 개비의 담배처럼 바스러질 듯 깡말라 있다.
조금만 힘을 주어 붙잡으면 툭 맥없이 부러질 것 같다.
내일 나는 너에게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금연을 권유할 생각이다,
대신 흡연을 하는 나를 담배처럼 더 많이 찾으라고 할 생각이다.
보통의 공기보다 4퍼센트 이상 이산화탄소가 많이 함유된 너의 날숨을 키스로 들이마시는 것도 이미 나의 중요한 흡연 활동
열기구 태스크Task 중에 하나이다.
서로가 한 줌 재가 될 때까지, 우리는 서로를 매 순간 마지막 남은 한 개비처럼 피우고 또
피울 것이다
작고 빨간 꽃처럼.
내일 지구에 비가 오고 멸망하여도 한 그루의
-딸과 함께
집 동쪽에 있는 너를 서쪽으로 불렀다.
내리는 비를 보며 사과 한 쪽을 베어 먹다 뱉은 사과 씨 하나를 너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내 장난에 너는 환호하며 주먹을 꼭 쥐고 외쳤다.
“심었다”
네가 들어 올린 그날의 작은 땅.
사과나무의 가장 어린 뿌리는 땅속 제일 깊은 곳에 있기 마련이다.
잔뿌리 같은 너의 손금들이 땅속처럼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작고 캄캄한 주먹 속에서 움트고
어린 너의 몸에 표정과 말들을, 공중의 길처럼 내며 가지를 뻗기 시작했다.
나 때문에 뿌리내린 한 주먹의 비좁은 땅에서
내가 죽기 전에 너를 다른 곳에 심어주고 싶었다.
그날 서해 해변, 우리 키보다 높은 곳에 떠 있는 수평선 앞에 서 있었다.
수평선에 걸린 바다가 끝없는 커튼처럼 하늘거렸다.
젖혀도 젖혀도 결국 젖혀지지 않는 커튼 너머의 창밖을 보여주려
너를 번쩍 들어 목말을 태우며 수평선 위에 올려놓았다.
막 자다 위로 비가 듣기 시작하자 너는 손바닥에 빗방울 하나를 받아
주먹을 꼭 쥐고 외쳤다.
“심었다”
사과를 급히 베어 먹듯
석양을 삼키는 수평선이 후드득 빗방울을 사과 씨처럼 뱉어냈다.
벌써 너의 작은 손에 빗방울이 뿌리내리고 가지를 뻗으며 눈물처럼 자라기 시작했다.
조금 식은 공기
한 사람의 체온이 꺼지자
공기의 온도가 아주 조금 떨어졌다
무게로 환산하면 몸에서 떨어진 눈썹 한 가닥 정도
부피로 환산하면 운동장에 떨어진 새털 한 가닥 정도
온도가 떨어졌다
식은 공기 한가운데서 인파를 향해 조용히 경고 카드를 내미는 신호등
눈금 같은 건널목을 사람들이 수은주처럼 오르내린다
도시의 톱니바퀴처럼 가로수 그늘이 빙글빙글 돌고 있다
맞물리며 도시를 가동시키는 그늘들
톱니바퀴 사이사이를 쓸고 닦고 기름 치는 사람들이 있다
마모되어 떨어진 톱니 같은 낙엽을 끊임없이
톱니바퀴 바깥으로 쓸어내던 사람이
어느 날 순식간에 톱니바퀴 사이로 빨려 들어 끼어 죽었다
그 순간 거리의 공기가 다시 조금 식었다
놀란 낙엽들이 새처럼 푸드덕 날아갔다
그의 후임자가 태양 버튼을 꾹 누르자
작동되는 도시의 가로수 그늘들
햇빛이 반짝이처럼 뿌려진 아름답고 검은 톱니바퀴가 서서히 돌아간다
식은 공기가 조금씩 덥혀진다
호흡의 비밀
-自序
방금 전, 초침이 손목을 긋듯 자정을 스쳐 갔을 때
지구상의 몇 명이 숨을 내쉬고, 또 들이쉬었는지
멈췄는지
호흡들의 부력으로 지구는 간신히 제자리에 떠 있다
차가운 물을 끓이다가 보면 되살아나 커지는 물의 호흡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나는 되살아나려는 물에 죽은 물고기를 빠뜨린다
무와 두부를 잘라 넣고 맑은 탕을 끓인다
딸은 늘 죽은 듯 자는 능력을 타고났다
자기의 잠과
잠이 두부처럼 둥둥 떠 있는
조용히 끓고 있는 열 감기의 호흡 주위로, 혹시 꺼져버릴라
나를 불러들이고 붙잡아두는 능력이 있다
호흡은 각자 잘 숨겨온 비밀 같은 것일지도
몸 안이 자욱해서 할 수 없이
조금씩 흘렀다가 얼른 되삼켜 누구의 주위도 끌지 않으려 조심하는 최소한의 불가피한 행위
내 비밀은, 내가 살아서 여기 있다는 사실
호흡하고 있다는 사실처럼
그것을 나는 자주 잊는다
나의 생존이, 내가 잊은 나만의 비밀이었다는 사실을
살아 있다는 걸 모른 채 살아가야 사는 데까지 살 수 있을지도
백수의 내 할머니가 말했더라도
깜빡깜박 잊히는, 내가 살아 있다는
나만 모르는 것 같은 비밀을 좇으려
내 숨의 온도와 소리와 물결에 구멍 난 두 귀를 띄워보지만
잘 모르겠다
인간은 왜 호흡을 하게 진화했는지
자신도 줄곧 잊고 사는, 자신 말고는 알려는 이도 관심도 없는
알량한 비밀 때문에?
누군가, ‘당신이 그곳에 살아 있다’는 그 비밀을 지켜주려 그렇게 설계했는지도
나도 알아, 하며 불현듯 터지는 옆 사람의 울음
밀물과 썰물 같은 호흡 위에 띄워진 구멍 난 목선 같은 울음
호흡이 없으면, 물밑으로 가라앉지도 못할 울음
우리는 옆 사람이 흘린 울음의 찌꺼기
녹슬고 나중에 먼지나 일으킬 침전물
세상 나무들로 쓱쓱 쓸어, 나무들 밖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도시로 우리를 쓸어 모아놓는다
까만 밤으로 덮어놓고
신은, 쓰레받기를 사러 갔다
그래 어서 우리를 싹 쓸어 담아 가시옵고
두 손을 모으고 안테나처럼 위로 뽑아 올려도 여태 연락 두절이다
세상은 비극으로, 가득하다
그냥 잊고 사는, 또 하나의 전형적인 비밀이다
살아 있다는 걸 잊는 편을 택한다면
그곳이 비극으로 가득하다는 비밀도, 모른 채 살아야 살 수 있어
전생 누구의 당부였더라, 멍투성이 여섯 살 아이는 골똘히 생각한다
울음은, 울음 실은 더운 호흡은
혼자 창틀에 걸터앉아 하염없이 창문을, 만지지도 않고 하얗게 열었다가 닫았다가 한다
그것이 아이의 호흡에 유일하게 분장된 일과다
여섯 살 아이의 울음은 늘 혼자 그러고 있다
창문 밖 누구도 그 호흡의 비밀을 아는 사람이 없다
어제는, 내가 하루 종일 가야 하는 곳에 있는
교회 주차장에서, 태어난 지 하루 된 아기가 호흡을 그만두었다
자신이 살아 있다는 비밀을 혼자서 하루 만에 알아차린 아기가
세상 누구보다 신속히 천국으로 돌아갔다
맑은 탕을 한 그릇 떠 아기가 돌아간 남쪽으로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