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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의 부르심과 파송 / 마 10:1-15
어느 학교 한문 시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주관식 시험으로 이런 문제가 나왔습니다. ‘산기슭 변방에 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노인의 말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노인은 태연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영감님, 말이 없어졌는데 왜 그렇게 여유로우세요?” 노인이 대답합니다. “허허허, 뭘 그리 걱정하나? 곧 나타나겠지.” 그리고 며칠 후 정말 말이 새끼까지 데리고 나타났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노인의 노련함에 감탄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사자성어로 뭐라고 합니까?”라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썼습니다. 그러나 한 친구는 다른 답을 쓰고는 선생님께 와서 맞게 해달라고 떼를 썼습니다. 선생님이 확인한 그 학생의 답은 ‘예상적중’이었습니다. 그 기발함에 반점을 주었다는 멋있는 선생님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훈계하신 말씀인데, 이 말씀을 다르게 표현하자면 그리스도인의 멋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멋있는 삶을 살아갈 것인가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시기에 따라 여러 형태가 있습니다. 모태신앙은 부모가 신앙인이었기에 모태로부터 주님께 부름받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태신앙은 최고의 복입니다. 물론 죽을 날을 며칠 앞두고 구원받는 것도 복입니다. 요양원에서, 병석에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도 복입니다. 그러나 그건 모태신앙에 비할 복은 아닙니다. 모태로부터 부름받아, 유아세례를 받고, 교회학교를 거쳐, 입교한 후, 한 평생 주와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해 산다는 것은,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복입니다. 나는 중간에 예수 믿게 된 분들을 존경합니다. 중간에 믿었음에도 모태신앙인보다 더 잘 믿는 분들은 배나 존경합니다.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판단하시길, 어떤 사람은 중간에 부르면 힘들 것 같으니까, 아예 모태에서 불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부르심을 받고도 응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고, 그 부르심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다 교회 밖에 있습니다. 부르심에 응하지 않는 사람들이 불신자들이요, 부르심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낙심자들입니다.
낙심을 국어사전에서는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 마음이 상함’이라고 풀이했습니다. 한자사전에서는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 마음이 풀어짐’이라고 풀이했습니다. 신앙을 가질 때, 바라는 것이 있는데 그 바라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자 마음이 상하거나 풀어져서 교회를 떠난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바라는 것입니다. 누가 바라는 것이냐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바라는 것이냐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낙심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중심을 주님께 두어야 하는데, 나에게 두어서 문제가 생깁니다. 내가 바라는 것과 주님이 바라는 것이 일치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신앙의 기본은 주님이 바라는 것을 위해, 내가 바라는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자기 부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단계까지 안 갑니다. 앞의 과정을 생략하고, 신앙을 소원성취로 오해했습니다. 기독교를 믿어서 소원성취에 실패하니, 다른 종교를 찾습니다. 여러 종교를 두루 섭렵하다가, 그래도 안 되니 지금은 반종교인이 되어 있습니다. 종교라는 말만 들어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 말입니다. 모태에서 부름 받아, 지금까지 몇 십 년을 믿음의 경주하는 분들은 대단합니다. 또한 중간에 부름을 받아, 한결같은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해온 것도 더 대단합니다. 예수님의 12제자 중에도, 자기의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자, 마음이 상해 중도에 탈락한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옆 사람을 서로 격려해 봅시다. “당신의 믿음은 대단한 겁니다.” “우리 끝까지 달려갑시다.”
1절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예수님이 드디어 12제자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이 첫 번째 제자로,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 잡던 현역 어부인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 야고보와 요한 형제를 부르셨습니다. 지금까지 물고기를 잡는 어부로 살아온 그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신 것입니다. 하루에 4명의 제자를 부르셨으니까, 꽤 소득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를 얻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아무나 제자로 부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무리야 주위에 널려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관심 있어 하는 사람들도 꽤 있습니다.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도 무척이나 많습니다. 그러나 제자감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짤막함을 아신 주님이었기에, 제자를 찾는데 여유를 부릴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서두르지 않으셨습니다. 한 번 택한 제자와는 끝까지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좀 시원찮다고 “야 아무래도 너는 안 되겠다”며, 중간에 하산시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순종하기만 하면 만들어서 쓰실 작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신자로 불러 성도가 되게 하고, 양육훈련하여 제자를 만드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신자와 성도 그리고 제자가 따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신자가 성도였고, 신자가 곧 제자였습니다. 성도 아닌 신자가 없었고, 제자 아닌 신자가 없었습니다.
행 4:4절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행 6:7절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주님은 처음부터 우리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나는 처음부터 제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당신은 처음부터 제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처음부터 제자로 부름 받았는데 제자훈련이 필요합니까? 제자훈련은 훈련하여 제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제자를 훈련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닌데 교육하여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니 교육하는 원리와 같습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나면서부터 사람입니다. 하지만 태어나서 얼마 있지 않아 교육에 들어갑니다. 무려 이십 년을 교육합니다. Post Dr. 과정까지 하면, 교육을 삼십년 받는 것입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요즘엔 평생교육과정을 통해 평생 교육 받습니다. 군인도 그렇습니다. 영장을 받고 훈련소에 입소하는 순간 군인이 됩니다. 훈련하여 군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군인이니까 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훈련소에 들어가 기초훈련을 받는 사람을 훈병이라고 부릅니다. 훈병은 아직 계급도 없습니다. 해병대나 공군은 명찰 색깔도 다릅니다. 그래도 군인입니다. 훈병이 비록 계급장이 없어도, 명찰 색깔이 달라도, 그는 엄연한 군인입니다. 군인에게 훈련은 숙명과 같습니다. 장군도 훈련을 받습니다. 장군도 군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훈련이 언제 끝납니까? 제대할 때 끝납니다. 제대하면 더 이상 군인이 아니기 때문에, 훈련을 시킬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불러 권능을 주셨습니다. 어떤 권능을 주셨습니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그럼 제자들에게만 이런 권능을 주셨습니까? 막 16:17-18절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모든 믿는 자에게 주셨습니다. 권능의 원천이 신자나 제자나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 이름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이 믿는 자에게 권능을 주셨다고 했는데, 권능이 있다고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권능을 사용하는 훈련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설교 때나 성경 공부시간 때는, 그걸 다룰 수 없습니다. 특별한 훈련시간을 내야 합니다. 그래서 제자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은 직접 부르신 제자들을, 3년 동안 데리고 다니면서 훈련시키셨습니다.
2-4절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나인 시몬 및 가룟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보면 사회적으로 저명하거나, 종교적으로 유력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같이 평범한 소시민이었습니다. 그보다 못한 세리 출신도 있었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일을 이어가고, 자신의 삶을 재현할 제자들을, 그런 평범한 사람들로 세우셨습니다. 주님이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성 프란시스에게 제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기도할 때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생애에는 놀라운 기적이 나타납니다. 선생님을 보면 성자 같은 인격을 느낄 수 있는데, 그 비밀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프란시스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간단한 거야. 하나님께서는 이 지구를 내려다보시고 사람을 찾고 계셨어. 가장 추한 사람이 누군지, 가장 불결한 사람이 누군지, 고통 가운데 고민하는 사람이 누군지, 가장 병든 인생이 누군지 찾고 계셨어. 그 하나님의 눈길이 나에게 머물렀어. 그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고 난 후에, ‘저 사람이야. 저 사람을 붙들어 내가 한 사람의 생애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를 보여 줘야겠어’ 라고 생각하시고, 나를 선택하신 거야.”
일찍이 바울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각을 밝히셨습니다. 고전 1:27-29절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구원을 은혜로 받게 하신 이유도 동일합니다. 엡 2:8-9절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하나님이 왜 우리를 부르셨다고요?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고요. 굳이 자랑하고자 하면, 자신을 자랑하지 말고 누구를 자랑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정 자기를 자랑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고후 11:30절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고후 12:5절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자기의 연약함을 자랑해야 합니다.
어떤 분이 아주 재미있는 얘기를 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 열두 명의 이력서를 경영 컨설팅 전문회사에 의뢰해, 컨설팅을 받은 것처럼 상상해서 만든 얘기입니다.
나사렛 예수 귀하!
당신이 의뢰한 열두 명의 이력서를 검토하고, 심리 테스트와 직업 적성검사 자료를 모아 컴퓨터에 넣어 결과를 뽑았습니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귀하가 계획하는 새 단체의 간부 사원으로 적합하지 않습니다. 전반적으로 학력이 낮고 단체생활을 할 능력이 없으며, 협력 정신이 약해 경영 관리자로서 부적합합니다. 시몬 베드로는 정신적 안정성이 결여돼 있고, 성격이 과격해 지나친 부분이 많습니다. 안드레는 한마다로 무능력합니다. 다른 사람을 지도할 만한 사람이 못됩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회사의 이익을 제쳐놓고, 자신들의 이익만을 챙기기에 급급한 사람들입니다. 도마는 매사에 부정적이고 질문도 많지만, 추진력을 갖고 일할 사람은 아닙니다. 마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두 사람은 사회혁명을 노리는 과격분자들입니다. 불온사상에 감염돼 귀하가 이룰 온건한 기업에는 합당하지 못합니다. 귀하가 추천한 열두 명 중 긍정적인 대답을 들을 수 있는 사랑은 단 한 명,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능력 있고, 사회에 대한 지식도 풍부합니다. 경영 감각이 있고, 상류층 사람들과 교제할 수 있는 예의와 기풍도 갖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 경영상담소는 가룟 유다 한 명만 추천하고, 나머지는 다시 찾을 것을 권고합니다.
누군가 지어낸 말이지만, 그 당시 사람들이 볼 때 가장 유능한 제자는 가룟 유다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그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그를 제외한 나머지 제자들은 가룟 유다에 비해서 특별한 것이 조금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부르신 제자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학력도 낮으며, 사회적 지위도 형편없었습니다. 어부, 세리, 열심당원으로 뛰어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비범하고 뛰어난 사람들을 무시하시거나 배격하신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학벌과 문벌이 좋은 바울을 뽑은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첫 제자를 뽑으실 때, 이렇게 보잘 것 없고 미련한 사람들을 택하셨을까요? 아무리 부족해도 주님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위대한 인물로 만드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통해 성경이 기록되었고, 초대 예루살렘교회가 세워졌고, 세계에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겉모습으로 자기 스스로를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지구상의 인구가 얼마입니까? 우리나라만 해도 인구가 얼마입니까?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갈보리교회 믿음의 식구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부르심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주의 부르심이 헛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5-6절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예수님은 제자를 부르신 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제자를 자기 곁에 두실 목적으로만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으로 무장시킬 목적으로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그럼 주님이 그들을 왜 부르셨습니까?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신학자 호켄다이크는 ‘흩어지는 교회’라는 책을 썼습니다. 모두가 모이는 교회를 말할 때, 그는 흩어지는 교회를 말했습니다. 실제로 교회는 모이는 교회여야 하고, 동시에 흩어지는 교회여야 합니다. 모이는 교회여서만도 안 되고, 그렇다고 흩어지는 교회여서만도 안 됩니다. 모였다가 흩어지고, 흩어졌다가 모여야 합니다. 모여서 예배하고, 흩어져서 전도하는 교회가 이상적입니다. 모여서 예배하는 열정과 에너지가, 흩어져서 전도하는 열정과 에너지로 분출되어야 합니다.
옥한흠 목사님은 교회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동시에 세상으로 보냄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것은 은혜입니다. 세상으로 보냄 받은 것은 소명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된 은혜와 그리스도의 제자된 소명이 어우러져야 합니다. 그게 바른 교회상이요, 바람직한 제자의 모습입니다.
제자는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렇다고 제 맘대로 가면 안 됩니다.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주님이 가라시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이방인의 길로 가고 싶어도 가라고 할 때 가야 하고, 아무리 사마리아인의 고을에 들어가고 싶어도 가라는 명령이 없이는 가면 안 됩니다. 주님은 우선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잘 아는 사람한테 가라는 말입니다. 평소 친분이 있는 사람한테 가라는 말입니다. 잘 아는 사람들, 평소 친분이 있는 사람들을 다 전도했다, 그러면 새로운 관계 맺기를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찾았으면, 이방인의 길로도 가야 하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제 갓 출발했습니다. 그럼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야 합니다. 처음부터 이방인의 길로 가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 갔다가는, 잘 안 되면 출발부터 삐끗할 수 있습니다. 국내에서 전도를 해보지도 않은 사람이, 국외에서 선교를 잘 할 수 있겠습니까? 국내에서 전도를 잘하는 사람이, 국외에서도 무리없이 선교를 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나이 더 들면 선교 나가겠다고 계획하는 사람들은, 먼저 교회에서 전도에 힘써야 합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고, 바울이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이방 지역에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어디를 가든지 회당을 찾았고, 회당을 거점으로 선교했습니다. 그러다 이방인 선교로 사역의 지경이 넓혀져 갔습니다. 그게 자연스럽습니다.
7절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주님은 제자들을 보내실 때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주님이 세례를 받고 광야의 시험을 통과하신 후, 본격적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그 때 주님의 첫 메시지가 그거였습니다. 마 4:17절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보다 한 발 앞서, 주의 길을 예비했던 세례 요한의 메시지도 그거였습니다. 마 3:1-2절 ‘그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그건 오늘 우리가 전파해야 할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최권능 목사님은 그 메시지를 요약하여, “예수 천당”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천당”이란 말 한 마디로, 일제강점기 때 수많은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했고, 자신은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요즘 수많은 전도 방법이 개발되고, 전도 내용도 진화했지만, 메시지의 핵심은 천국입니다. 천국이 없는 기독교는, 다른 종교보다 나을 게 없습니다. 천국을 믿지 못하는 기독교인보다 불쌍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 땅이 전부라면 기독교는 매력 없습니다. 뭐 하러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겠습니까? 천국이 없다면 굳이 그렇게 살 필요 없습니다.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다가, 제명에 죽으면 그만입니다. 사는 게 힘들면, 중간에라도 목숨 끊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천국을 믿으면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쩌다 세상에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주의 부르심을 받았고, 또한 주의 보내심을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가정에 보내심을 받은 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걸 믿으면 함부로 이혼 소리 안 합니다. 가정을 지상 천국으로 만들려고 몸부림치게 됩니다. 따라서 “나는 가정 행복 설계사입니다.” 우리는 우리 일터에 보내심을 받은 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걸 믿으면 일터에서 보다 성실할 수 있습니다. 일터에서 선교사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일터 선교사입니다.”
8절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우리는 천국을 ‘이미’와 ‘아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천국은 예수님과 함께 이미 임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영원한 천국은 임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영원하여 까마득하기만 한 천국을 보여주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눈에 띠는 말씀이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것입니다. 치유 은사를 받은 분들이, 한 때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켰던 적이 있습니다. 돈을 받고 안수기도를 해줬던 것입니다. 기도를 받으러 갈 때, 감사헌금을 준비해 갈 수 있습니다. 그건 그 사람의 믿음입니다. 그러나 기도를 해 주는 사람은, 돈부터 받고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말씀에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받고 치유가 되었다면, 응당 감사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헌금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역자에게도 성의 표시를 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먼저 요구를 하는 것은, 사역자로서 보여야 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닙니다. 거저 받았다고 거저 주면, 하나님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어떤 형태로든 갚아주십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탐욕 부리면, 하나님은 안 주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 거둬가실 수 있습니다. 그거야말로 소탐대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9-10절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이어서 보냄을 받은 자의 복장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간단한 복장입니다. 그래도 너무 간단합니다. 며칠만 지나면 거지될 복장입니다. C.C.C. 전도법에는 사영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지전도법도 있습니다. 일명 거지 전도대라고 합니다. 말씀 믿고 그대로 했더니, 하나님이 책임져주시더라고 했습니다. 현대인의 시각으로 보면, 대책 없는 방법이었지만, 그렇게 대책 없이 나가니까, 하나님이 당황스러워서 책임져주신 것 같습니다. 주님이 보냄을 받은 자의 복장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철저히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전도 나갈 때, 지갑 빼놓고 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전도하다가 더우면 아이스크림도 사먹고, 냉커피도 마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추우면 호빵도 사먹고, 뜨거운 차도 마실 수 있어야 합니다.
11-13절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이어서 보냄을 받은 자의 태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집에 가든지 평안을 빌라는 것입니다. 전도자로 고생한다고 잘 대접해 주는 집도 있고, 그렇지 못한 집도 있을 수 있습니다. 마을 인심이 좋아서, 서로 자기 집에 머물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좀 나은 집에서 초청한다고, 그 집으로 옮겨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럼 처음에 영접했던 사람이, 상처를 받지 않겠습니까? 영혼을 살리러 갔는데, 영혼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것은, 제자로서 바른 태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자가 방문했을 때, 모든 집이 환영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무조건 평안을 빌라고 했습니다. 평안을 빌어서 받아들이면 좋고, 안 받아들이면 되돌아오니 그것도 나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게 일명 메아리법칙입니다. 내가 평안을 빌면 평안이 돌아오고, 악평을 하면 악평이 돌아옵니다. 내가 축복하면 복이 돌아오고, 저주를 하면 저주가 돌아옵니다. 그가 지금 복음을 거부한다고 영원히 거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죽어라고 예수 믿는 사람을 박해하던 사람이, 나중에 직분자가 되고 목회자나 선교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14-15절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그런데 끝까지 영접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했습니다. 그 집을 찾아가느라 발에 먼지가 많이 묻었습니다. 그 먼지를 떨어 버리는 것은, 내 할 일은 다했다는 의미입니다. 내 할 일은 다 했고, 당신이 끝까지 안 받아들였으니, 그 결과에 대해서는 당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해당되는 말씀은, 우리 할 일을 다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이게 은혜입니다. 우리는 다시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이게 소명입니다. 세상 한 복판에서, 가정에서, 일터에서, 주님의 제자로서 주어진 소명을 묵묵히 잘 감당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제자들은 부르시고 파송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르심을 따라 복음을 널리 전파하게 하옵소서. 무슨 일을 하든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않는 성실한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그 성실함의 능력으로 세상을 축복하고 치유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하늘을 바라보며,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깨끗하게 살게 하옵소서. 정직하게 살게 하옵소서. 반듯하게 살게 하옵소서. 거룩하게 살게 하옵소서. 오직 주의 성령께서 친히 인도하여 주시므로, 저희의 모든 언행심사가 오직 하늘 아버지의 은혜로 덧입혀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구원은 끝까지 견디는 자에게 / 마 10:16-33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을 시기에 하루는 로마 황제가 유대 랍비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유대 랍비로부터 여호와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였습니다. 유대 랍비는 신나게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와 2장의 인간 창조에 대하여 강론했습니다. 한참 동안 듣고 있던 로마 황제는 랍비의 말을 잠시 멈추게 한 뒤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깊이 잠재워 놓고는 그의 허락도 없이 갈비뼈 하나를 취하여 갔다고 했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은 분명한 도둑이 아니겠소?” 그때 랍비의 딸이 옆에 있다가 “폐하! 임금님의 부하 하나를 잠시 동안만 저에게 빌려주십시오. 좀 어려운 문제가 있어서 그것을 조사하려고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황제는 껄걸 웃으면서 “그런 부탁은 별로 부담이 가지 않으니 빌려주겠지만, 그 어려운 문제란 도대체 어떤 것인데 야단법석인고?”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랍비의 딸은 “예, 폐하! 실은 어제 밤에 저희 집에 도둑이 들어왔었는데, 강철금고 하나를 훔쳐간 대신에 황금 대접하나를 놓아두고 가버렸습니다. 무슨 까닭으로 그리했는지를 조사해 보려고 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황제는 “응! 그런 도둑이라면 내게도 들렸다 가주었으면 좋겠구만!”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랍비의 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폐하! 그러실 줄을 미리 알았습니다. 그 일은 아담의 일과 동일한 내용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담에게서 갈비뼈 하나를 훔쳐가는 대신 아담에게 더욱 보배롭고 지극히 아름다운 여인 하나를 남겨놓고 갔으니 말입니다.” 결국 로마 황제는 이스라엘 랍비의 딸에게 완전히 매료되어 탄복까지 하였습니다. 지혜는 삶을 윤택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혜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약 1:5절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께서 범사에 함께 하시어 삶의 모든 문제들을 능히 해결받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제자는 부르심과 보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신자로 부르신 후, 훈련을 시켜서 제자를 삼으신 것이 아닙니다. 제자훈련이란 훈련을 시켜서 제자를 만든다는 의미보다, 제자를 훈련을 시킨다는 의미로 봐야 합니다. 주님은 제자로 부르신 후에,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아무리 권능을 받았어도, 훈련을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권능을 함부로 써도 안 되지만, 잘못 써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부르신 자들을 다시 보내셨습니다. 이방인의 길과 사마리아인의 고을이 아닌,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보내셨습니다. 가서 전할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메시지도 주셨습니다. 그 외 전도여행 시 필요한 여러 가지 지침들을 주셨습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했고,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게 했으며, 어느 집에 가든지 평안을 빌게 하셨습니다. 제자로서 복음을 전할 때, 영접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사람을 향해서는 그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영접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자기들이 책임을 져야할 테니, 제자들은 복음 전하는 일만 하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했을 때 꼭 거부 당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얼마든지 거부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단순히 거부 당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미움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건 주님 당시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유대교와 맞선 초대교회 때도 그랬고, 복음이 이방세계로 뻗어나갈 때도 그랬습니다.
국교가 되어 교회가 국가의 비호를 받을 때도 있었지만, 그때는 기독교 자체가 생명력이 약해졌습니다. 본래 평안하여 복음이 고여 있으면 부패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가끔 교회에 자극을 주어, 복음에 깨어 있게 만듭니다. 우리는 무사태평하면 서서히 신앙이 나태해집니다. 기도를 해도 절박함이 묻어난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련을 허락하시는 이유입니다. 우리를 깨어 있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가슴 아픈 선택입니다. 가끔은 우리 스스로 시험에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도 하나님은 두고 보십니다. 그게 우리의 성장통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을 보면, 성장통과 함께 성장합니다. 성장통의 특징은 치료 없이 괜찮아 진다는 것입니다. 성장통이 심하면 우는 아이들도 있지만, 병원에 가서 통증주사를 맞아야 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시험 든 사람들을 보면 안 그렇습니다. 통증주사로는 효험도 없습니다. 원자력병원에 가서 항암주사를 맞아야 겨우 진정됩니다. 시험을 무엇으로 보라고요? 성장통입니다.
16절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주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며 특별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보냄을 받은 세상이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세상은 정복의 대상이 아닙니다. 동시에 굴복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럼 어떤 대상입니까? 변화의 대상입니다. 굴복하는 것은 쉽습니다. 정복하는 것은 힘만 있으면 쉽습니다. 변화시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짧은 시간에 금방 일어날 수도 없습니다.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그 대상을 알아야 합니다. 대상을 과대평가해서도 안 되지만, 과소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결코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되는 세상입니다. 세상의 어두운 면을 전하는 뉴스만 들으면, 세상이 너무 무섭습니다. 요즘 뉴스를 들어도 욕이 나오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살만한 곳입니다. 즐길 것이 많은 흥미진진한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대해 잔뜩 겁을 먹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세상에 대해 겁을 먹으면, 피하고 싶은 생각부터 듭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세상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세상에 대해 대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세상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라고 하셨습니까? 핵심이 지혜와 순결입니다.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뱀은 간교하면서도 신중한 동물입니다. 위험에서도 곧잘 벗어납니다. 다리도 없으면서 신속하게 빠져나갑니다. 애굽에서 뱀은 지혜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제자들이 가는 세상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복음을 들고 가는 제자들에게, 세상은 위험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때 뱀처럼 위험에서 잘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직 부르지도 않았는데, 미리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무 쉽게 순교할 생각부터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도 공생애를 사실 때, 자주 위험에 노출되셨습니다. 어떨 때는 함정에 빠져 꼼짝없이 죽을 지경에 처하셨습니다. 그때 주님은 지혜를 발휘하여 빠져나왔습니다. 아직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죽는 것만이 용기가 아닙니다. 순교하는 것만이 믿음은 아닙니다.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나에게 맡겨진 영혼을 건지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죽는 길도 있고 사는 길도 있다면, 살아야 합니다. 죽는 것은 서둘지 않아도 됩니다. 동시에 주님 앞에 설 준비는, 늘 하고 살아야 합니다.
비둘기는 순결한 동물을 상징합니다. 문제는 비둘기가 어리석어 쉽게 속아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순결함이 지혜로움과 결합되지 않으면 어리석음이 됩니다. 지혜로움이 순결함을 잃으면 교활함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랍비들의 가르침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해서는 순결하고, 이교도에 대해서는 지혜로워야 한다.’ 세상을 모르면 순결이라는 무기만 들고 나갑니다. 그러면 꼼짝없이 당하고 맙니다. 세상으로 향할 때는, 반드시 지혜와 순결로 무장해야 합니다. 복음에 대해 호의적인 상황에서도 그래야 하고, 복음에 대해 적대적인 상황에서도 그래야 합니다.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는 말씀은, 선교사들의 지침이요, 전도자들의 지침이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사는 지침입니다.
17-18절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이 우리와 상관없는 말씀 같았습니다. 우리 시대와는 상관없는 말씀인 줄 알았습니다. 사실 그 동안 한국교회는 전도의 큰 장애물이 없었습니다. 일제 강점기를 제외하고는, 개인적인 장애요소가 있었습니다. 주로 조상 제사 문제였고, 집안 내 종교 갈등 문제가 대부분입니다. 지금도 대한민국에서 예수 믿는다고, 공회에 넘기는 일은 없습니다. 복음 전한다고 채찍질을 당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앞으로도 계속 그러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보수측 교회에서는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모릅다고 합니다. 기독교의 차별성을 말할 수 없게 된다고 합니다. 다양한 종교가 있고, 자기 종교의 차별성을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엄격히 금지된다고 합니다. 노방전도는 생각할 수도 없게 된다고 합니다. 예배 중에 하는 설교도 문제 삼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일제 강점기 때, 예배 중 순사가 지키고 있는 것과 흡사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고 합니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동성애자의 결혼에 주례서는 것을 거부했다고 목회자가 처벌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차별금지법은 장애인, 이주노동자, 노숙자 등등 사회적 약자나 기타 소수자들을 향한 차별과 혐오를 하지 말자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보수 교회에서는 이를 동성애로 비약하여 결사반대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동성애를 찬성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들도 구원 받을 대상입니다. 예수의 사랑으로 감싸주어야 합니다. 사회에서 소외되고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평안한 세상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 믿기에 좋은 세상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좀 느슨한 신앙으로도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어떻게 변할지 모릅니다. 몇 십 년이 아니고, 불과 몇 년 내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반쯤 잠에 취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정말이지 깨어 있어야 합니다.
19-20절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순간순간 성령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물론 시대에 대해 걱정만 늘어놓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 시대에 사는 게 힘들다며, “빨리 데려가 주세요” 기도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염려하지 말라.” 우리나라가 마지막 시대에 복음의 제사장국가로 쓰임 받기를 위해, 더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러려면 교회가 거룩성을 회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외부의 적보다 더 무서운 적은 내부에 있습니다. 차별금지나 동성애 같은 외부 문제보다, 교회의 거룩성 회복이 더 급한 문제입니다. 교회의 거룩성 회복 없이는, 교회가 세상에 할 말을 못합니다. 세상의 비판이 다 맞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봐도 수긍할 수밖에 없는 게 있습니다. 전에는 교회가 세상에 대해 할 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엔 세상이 교회에 대해 할 말이 많습니다. 전에는 교회를 세상이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엔 교회가 세상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교회가 다시 거룩한 모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21-22절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내 맘속으로만 믿으면 문제되지 않습니다. 그건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모슬렘 국가에서도 그렇습니다. 표현하지 않고 자기 속으로만 믿는데,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표현하면 제재를 받습니다. 신앙을 표현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공동체로 표현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는 내 신앙의 표현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예배 드리지 않으면 가짜입니다. 정규적인 예배 참석은 신앙의 확실한 표현 방법입니다. 개인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시간을 정해놓고 할 수도 있고, 수시로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모슬렘들은 대학교에서 수업 받다가도, 기도 시간이 되면 기도하러 나갑니다. 전국에 모슬렘 회당이나 기도처가 많습니다. 전주에도 모슬렘 교당이 있습니다. 전에는 모슬렘이면서도 외국인노동자선교하는 교회에 적을 두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이 교회에 도움을 받아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숫자가 많아지면서 자체 힘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자기들끼리 따로 기도처에 모이다 숫자가 더 많아지면 교당을 세운다고 합니다.
기도는 내 신앙의 표현입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신앙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어디 가서 밥 먹으면서 기도하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집에서 먹을 때는 숟가락 들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며 먹어도, 집 밖에 나가면 확실하게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또 있는데 전도입니다. 전도는 기도보다 더 적극적인 표현입니다. 전도는 내가 만난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내가 효과 본 약을 친구에게 소개하고, 내가 써본 화장품을 절친에게 소개하듯, 자연스럽게 소개하는 것입니다. 다단계처럼 끌어드리는 것이 아닌, 그냥 소개하는 것입니다. 신앙을 표현하기 전에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표현하면 어려움이 생길 수 있습니다. 심지어 가족에게까지 미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미움이 못 견딜 정도는 아닙니다. 견디되 끝까지 견뎌야 합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씀이 끝까지 견디는 것이 쉽지 않다는 의미로 들립니다. 하긴 쉽다면 견딜 필요가 있겠습니까?
고창출신 개그우먼 김지선이 2014년 라디어 DJ상을 받고 소감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물 들어왔을 때 노 저어라. 어떻게 될지 모른다. 인생은 끝까지 버티는 자가 이긴다.” 맞습니다. 인생은 실력 있는 자가 이기는 게 아닙니다. 학력이 뛰어난 자가 이기는 것도 아닙니다. 인생은 끝까지 버티는 자가 이깁니다.
목회자로서 안타까운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목사님, 우리 어머니가 전에 교회를 다녔는데, 몇 년 전부터 다니지 않았어요. 천국에 갔을까요?’ 그럼 나는 대답 정확하게 못합니다. 정확한 것은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나 물어보는 의도는 천국에 갔을 것이라는 마음에서 일 것입니다. 알면서도 그렇게 물어보는 유족의 안타까운 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답은 이미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올림픽사에 길이 남을 경기가 있었습니다. 1908년 런던올림픽의 마라톤경기입니다. 이 경기는 일명 ‘도란도의 비극’으로 불리는데, 이탈리아 출신 도란도 피에트리 선수는 당시 스물두 살의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경쟁자들을 멀찌감치 따돌리고, 가장 먼저 메인스타디움으로 들어섰습니다. 이제 마지막 한 바퀴만 돌면 우승입니다. 관중들은 예비 우승자에게 일제히 환호와 박수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이내 경기장은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결승지점을 300야드(약 270m)를 앞둔 지점에서, 그가 쓰러졌기 때문입니다. 몇 번이나 쓰러졌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더니, 몸을 가누지 못하고, 머리와 팔다리를 흔들거리면서, 트랙 반대쪽으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관중들은 흥분하여 ‘노(No)’를 외쳤고, 잠시 주춤하다가 주위를 살핀 도란도는 방향을 바꾸어 걷더니, 얼마 못 가서 허물어지듯 그만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뉴욕타임즈는 이렇게 전했습니다. “그는 경주로를 따라 마치 꿈을 꾸는 사람처럼 발을 놀렸다. 그의 발걸음은 걷는 것도 아니었고 달리는 것도 아니었다. 허우적댈 뿐이었다.” 도란도는 99.4%를 1등으로 달렸습니다. 0.6% 남겨놓고 쓰러짐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
2014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치러진 유럽육상선수권 남자 3000m 장애물 결승에서는, 더 기막힌 일이 있었습니다. 대회 3연패가 유력했던 29살의 마히딘 멕히시 베나바드는, 1등으로 결승선 통과를 얼마 남지 않지 않은 지점에서 셔츠를 벗었습니다. 벗은 셔츠를 입에 문 채, 상반신 알몸으로 관객들에게 박수를 요구하면서, 8분 25초 30의 기록으로 경기를 마무리했습니다. 하지만 베나바드는 국제육상경기연맹의 경기 규칙 제 143조8항에서 ‘넘버카드는 어떤 방식으로든 안보이게 해선 안 된다’는 규정을 위반했습니다. 세계선수권에서 2차례 동메달을 받았던 베나바드는 당초 경고만 받았지만, 스페인 대표단이 이의를 제기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졌습니다. 베나바다의 금메달은 박탈되고, 2위 이하 선수의 순위가 각각 하나씩 올라갔습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 바울은 믿음으로 구원받고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강조했습니다. 그런 바울을 통해 한 말이 있습니다. 빌 2:12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긴장 풀지 말라는 것입니다. 끝까지 견디고 끝까지 버텨내라는 것입니다.
23절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어떻게 끝까지 견딜 수 있습니까? 주의 재림을 믿을 때 끝까지 견딜 수 있습니다. 주님이 얼마 있지 않으면 오신다는 믿음이, 끝까지 견딜 수 있는 힘입니다. 사실 박해를 피해 다니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일상의 행복을 누리는 건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언제 박해가 끝날지, 언제까지 피해 다녀야 할지 모릅니다. 그러니 주의 재림에 대한 믿음 없이 어떻게 견디겠습니까? 살던 동네에서 피해 다른 동네로 갔다가 배우자가 죽을 수 있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신앙을 지키다가 자녀가 죽을 수 있습니다. 보통 믿음으로는 끝까지 견딜 수 없습니다.
24-25절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미움 받는 게 정상이라고 여길 때 끝까지 견딜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선생인데 세상의 미움을 받았다면, 자신들은 제자로서 세상의 미움을 받는 게 당연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제자는 예수님과 동일한 운명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았는데, 제자는 세상으로부터 호강을 누리려고 하니, 문제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제자라면서 그러고 싶어 합니다. 주를 위한 고난은 근처에도 가기 싫어하고, 어떻게 하면 예수 덕 좀 볼까 생각합니다. 예수님한테 덕 보려고 믿었는데, 예수님 때문에 손해를 본다? 그러면 미련없이 돌아섭니다. 그게 예수님 당시 무리들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 주위에도 믿음 생활 하다가, 중간에 포기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제자에게 고난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제자에게 고난이 없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입니다. 고난이 없다면 끝까지 견디라고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26-27절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끝이 있다고 믿을 때 끝까지 견딜 수 있습니다. 끝없는 고난이 무서운 것입니다. 힘들어도 끝이 보이면 견딜 수 있습니다. 그 끝에는 감추인 것이 드러납니다. 숨어서 행했던 것도 다 알려집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날에는 감춰서 행했던 선행이 드러납니다. 남 몰래 숨어서 봉사하고 헌신했던 일들이 알려집니다. 문제는 그때까지 입에 파수꾼 잘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보고 계신다는 의미의 유대 격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면, 그거로 된 거 아닙니까? 꼭 사람들이 봐줘야 하고, 꼭 교인들이 알아줘야 합니까?
28절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할 때 끝까지 견딜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입니다. 실제로 사람보다 두려운 존재가 없습니다. 몸을 죽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숨보다 귀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이 세상의 무엇으로 자기 목숨과 바꾸겠습니까? 그러나 목숨이 사람의 전부는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바울과 실라의 몸은 가뒀어도 영혼을 가둘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감옥에서 찬양하고 기도했습니다. 사람은 우리의 몸은 죽일 수 있어도 영혼은 죽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죽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영혼까지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사람의 박해와 환경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두려워할 때 끝까지 견딜 수 있습니다.
29-31절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하나님께 생사를 맡길 때 끝까지 견딜 수 있습니다. 참새의 생명도 하나님께 달렸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참새는 가장 값싼 존재를 가리킵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생명도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참새도 괜히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가능합니다. 하물며 우리는 예수 피로 값 주고 산 자들입니다.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실 정도로 주목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분께 우리 생명을 맡겨도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죽고 사는 것을 내가 책임질 수 없습니다. 생사를 하나님께 맡길 때, 우리는 끝까지 견딜 수 있습니다.
32-33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최후 심판을 믿을 때 끝까지 견딜 수 있습니다. 제자는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이란 게 별건가요? 사람들 앞에서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요” 하고 시인하는 것입니다. 누가 신앙을 맘속으로만 믿으면 된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은 분명히 사람들 앞에서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할 때, 예수님도 아버지 앞에서 시인하겠다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을 저는 오늘 다시 여러분들에게 전합니다. 몸은 죽이나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과 그런 세력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예수 믿는 여러분을 하나님의 방식으로 지키십니다. 이 세상에는 두려운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음식도, 살아가는 것도, 다니는 것도, 사람도 모두가 두려운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이 드러날 것이요,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기에 세상의 것은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아주 섬세하시고 지극한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매일의 삶을 기뻐하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뱀 같이 지혜롭기 원합니다. 비둘기 같이 순결하기 원합니다. 이 세상 썩어질 것들로 인하여 저희의 마음이 나누어지지 않게 하여 주옵시고, 이 세상 악한 것들로 인하여 저희의 심령이 더러워지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이 세상을 두려워하는 어리석음은 지나간 날들로 족하게 하시고, 오직 저희의 남은 날은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는 지혜가 있게 하옵소서. 아버지 앞에서 섰을 때, 나는 예수님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나를 모른다 하면, 그때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 믿음을 끝까지 견디게 하옵소서. 예수 제자로 세상 끝날까지 달려가게 하옵소서. 끝까지 견딤으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무엇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 마 10:34-42
예전에는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하는 것이 건전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회 생활의 하나였고, 매우 유익하고 잘 살 수 있다는 소망을 주었고, 심리적인 안정을 주었는데, 이제는 사회 상황이 하루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국민소득이 늘어가고 강력한 ‘기능적 대행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의 대표적인 것이 ‘여가산업’입니다. 기독교 사회학자들은 대체종교의 발달을 교회 성장 둔화의 가장 큰 원인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가산업이란 한 사회의 경제적인 수준과 비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전 국토가 관광지화 되고 있으며, 전국에 휴양지가 널려있는데 골프장, 스키장, 수영장, 볼링장, 사우나, 한증막, 헬스 센터, 음식점, 도심에서 조금 벗어나기만 하면 수많은 호텔과 모텔, 각종 위락 시설, 유흥시설이 사람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고속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휘황찬란한 모텔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봄이 되면 봄꽃놀이 휴가, 여름이 되면 하기 휴가, 가을이 되면 단풍관광, 겨울 눈꽃 축제 전천후 휴가철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는 집집마다 TV가 완전히 보급되었는데, 기존 공중파 방송만이 아니라, 케이블 방송에 이제는 위성 방송까지 엄청납니다. 전에는 몇 개의 채널이었는데, 이제는 수백 개의 채널로 볼거리가 많아졌습니다. 야외로 놀러 나가지 않는 사람들은 TV 앞에서 꼼짝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그중에서도 주말의 시청 시간을 조사하였는데 평균 7시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사회는 점점 더 재미있어지고, 사람들을 교회에 가지 못하게 붙들고 있습니다. 한국 갤럽에서 조사 분석한 자료가 있는데, 비종교인들이 종교를 믿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필요성을 못 느낀다’고 대답한 것이 32.2 %로 가장 많았다고 합니다. 한 영혼을 귀중히 여기고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구원의 확신을 가진 성도로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성도들이 정신을 차리고 전투적인 자세로 임하지 않으면 우리 도시를 덮고 있는 악한 영들에게 먹혀 들어갈 것입니다. 악한 영들의 간악한 꾀를 무력화시켜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많은 설교를 들었지만’이라는 짧은 글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몇 해 전 영국 주간신문 The British Weekly에 어떤 이가 투고한 글로 인하여 대단한 물의가 일어났습니다. ‘교회의 목회자들은 설교를 대단히 중요시하고 그것을 준비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다. 나는 거의 빠짐없이 30년 이상을 교회에 다닌 사람으로 3천 번 가량의 설교를 들었다. 그런데 나는 대단히 놀라운 사실 한 가지를 발견했다. 그것은 내가 그렇게 많은 설교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중 단 한 개의 설교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으로 미루어보아 목회자들이 설교 말고 다른 일에 시간과 정력을 투자하는 것이 더 유용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런 글이 실린 후 몇 주에 걸쳐 별의별 반응과 응답이 홍수처럼 밀려들어 신문에 실렸고, 그 주간 신문은 많은 사람들의 토론과 관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사람이 보낸 다음의 글이 신문에 실리면서 모든 소리와 소문들은 잠잠해졌습니다. ‘나는 결혼한 지 30년이 된 사람으로 그 동안 32,850번의 식사를 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아내가 요리해서 차려준 음식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내가 그 많은 음식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먹은 음식의 식단을 단 한 가지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와 동시에 내가 확실하게 깨달은 것은, 나에게 그 음식들이 없었다면 나는 벌써 오래 전에 굶어죽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영혼의 양식을 먹어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은 재미있는 말씀을 하셔서 관심 있게 들은 날도 있었고, 어떤 날에는 너무나 딱딱하여 제대로 듣지 못한 때가 있어도,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인하여 자라날 수 있었고,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의 양식으로 받아들이고 지나가지만 우리는 그 힘으로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가장 중요한 성경공부의 하나로 자리잡은 베델성서연구와 크로스웨이 성경공부의 결론은 성숙한 제자 곧 그리스도인은 ‘섬김의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지어주셨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하나로 합쳐놓았습니다. 사랑이란 구체적으로 섬김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신약성경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이웃을 섬기는 것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따로 있고, 사람을 섬기는 것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것은 하나의 계명이라는 몸체에 붙어 있는 두 개의 팔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호의 문제이니 탓해서도 비판할 필요도 없습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만 아니라면, 문제 삼을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위해, 돈을 쓰고 시간을 냅니다. 좋아하는 것을 생각하기만 해도, 심장 박동수가 빨라지고, 기분이 좋아지고, 몸에 엔돌핀이 생성됩니다. 뭐 하나 좋아하는 것이 없는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도 없습니다. 좋아하는 정도를 넘어 지나치게 집착하면 문제가 되긴 합니다. 또한 좋아하는 것으로 인해, 일상생활에 방해가 돼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적당히 좋아하는 것은, 일상의 반복된 생활에 좋은 활력소가 됩니다.
‘팬인가 제자인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가 ‘카일 아이들먼’인데, 그는 어린 시절 마이클 조던 사진 옆에, 예수님의 사진을 붙여놓았었다고 합니다. 곧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팬이었다고 합니다. 그랬던 그가 자라서 목회자가 되어 이렇게 말합니다. “팬이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팬이 많아지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항복하고 헌신하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팬의 특징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와서 환호하라”입니다. 제자의 특징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와서 죽으라” ‘팬인가 제자인가’ 라는 책이 1, 2, 3부로 되어 있는데, 3부 제목이 “가장 충격적인 부르심, 와서 죽으라”입니다. 3부가 세 장으로 되어 있는데, 장 제목이 이렇게 달려있습니다.
12. 나는 ‘어디든지’ 간다. 예수님이 지시하면 어디든지 따라나선다.
13. 나는 ‘언제든지’ 행한다. 더 이상 변명하거나 꾸물대지 않는다.
14. 나는 ‘무엇이든지’ 드린다. 전부를 드리지 않으면 드리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이 자리에 나와 있기 힘듭니다. 일단 현대인의 최고 가치인 돈과 무관한 일입니다. 예배는 돈을 벌기는커녕 돈을 써야 합니다. 예배 시간도 오고 가는 것 포함해서 최소 2시간입니다. 황금같은 주일 오전 시간을 통째로 날려야 합니다. 예배에 빠지면, 편하게 늦잠을 잘 수도 있고, 취미생활을 즐길 수도 있습니다. 이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제자만, 그럴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팬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예로 축구 관람을 위해 전주 월드컵경기장에 다녀오려면, 오가는 것까지 포함해서 최소 3시간은 내야 합니다. 축구장에 그냥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티켓팅을 해야 하고, 그럼 비용이 들어갑니다. 경기가 진행되는 내내 집중해서 봐야 합니다. TV는 리플레이라도 보여주지만, 현장에서는 한 번 놓치면 그만입니다. 또 응원도 해야 합니다. 골을 넣으면 벌떡 일어나 환호성을 지르고, 골을 먹으면 탄식을 하고, 선수들의 멋진 플레이에는 박수를 칩니다. 그것 뿐 아닙니다. 하프 타임에는 군것질하는 재미도 있습니다. 그곳에서 먹으면 안 맛있는 것이 없습니다.
생각해보면 교회 생활과 닮은 면이 있지 않습니까? 혹시 자신이 예수님의 팬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오늘 예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신의 제자됨을 점검하고 돌아볼 수 있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 내용이 무겁고 진지합니다. 뭐 10장 전체가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재미있고 달콤한 말씀만 받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것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의 삶이 아닙니다.
34절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당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메시야가 올 때 샬롬을 생각했습니다. 샬롬은 화평, 평강을 말합니다. 신령한 복은 물론이고, 물질적인 번영까지 포함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토록 메시야를 대망했습니다. 그렇게도 대망했던 그들에게 예수님이 메시야를 연상시켰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고 하지만, 백성들이 보기에는 메시야가 틀림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자기를 향한, 그런 기대를 접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에게 메시야 환상을 깨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단순한 랍비라고 생각했다면, 그렇게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이 메시야가 아닌듯한 말씀을 하십니다. 아무리 제자들을 상대로 하신 말씀이긴 하지만, 헷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평화의 왕으로 고백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하십니다. 여기서 검이 무엇입니까? 검은 무기 아닙니까? 무기는 싸움할 때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슬그머니 넘어가는 나라가 아님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였다면, 예수님이 종교지도자들과 부딪힐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 방식을 이해해주고 공존하면 됐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성전 문제로, 안식일 문제로 다투셨습니다. 자칫 죽을 뻔한 위기를 겪기도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모든 일에 트러블메이커를 지지하셨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피스메이커가 복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아들로 일컬음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마 5:9절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주님이 불화를 선택하신 것은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왜곡되는 것을 보면서, 그들과 화평하게 지낼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모두가 가정 평화를 원합니다. 가정의 화목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전쟁터와 같은 가정을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35-36절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그런데 주님의 말씀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예수와 담쌓고 살던 가정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가정에 화평이 찾아올까요, 불화가 찾아올까요? 물론 신앙을 숨기고 사는 동안에는 화평이 있습니다. 언젠가 예수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기도하며 화평하게 삽니다. 그러나 그런 화평은 계속 될 수 없습니다. 때가 되면,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불화가 생깁니다. 어쩌다 쉽게 교회를 따라나서는 경우도, 혹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그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고, 오래 갈 수도 있습니다. 어느 한 쪽이 항복을 해야 하는데, 그게 어디 쉽겠습니까? 집안에 내전이 계속되고 있으면, 가정 천국은 먼 나라 얘기입니다. 기도 응답이 늦어짐으로 인해, 살짝 힘이 빠지기도 합니다. ‘혹시 저 인간은 택함받은 백성이 아닌 거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더니 그 말이 딱 맞네”란 말이 나옵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집안 식구가 원수처럼 느껴질 때가, 한 두 번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성경적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집안 식구가 아니면, 누가 나한테 원수 노릇하겠습니까?
37절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교회 다니는 사람은 부담스러워하고, 교회 안 다니는 사람은 싫어할만한 말씀이 나옵니다. 가족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합당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는 가족이냐 예수님이냐를 놓고,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예수님을 선택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인 것입니다. 요즘은 항존직 직분자도 교회를 옮겨다니는 시대지만, 항존직 직분자 쯤 되면 자기 집보다 교회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비가 와서 물이 찰 정도다면, 자기 집보다 교회를 먼저 돌아봐야 하다는 말입니다. 37절은 교회 안 다니는 가족에게, 공격의 빌미를 줄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 믿는 것들은 부모도 없고 남편도 처자식도 없냐”며, 항의를 받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 것을 모르실 리 없지만, 그 말씀을 하셔야 했습니다. 신앙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악세사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37절 말씀에 비추어, 주일예배에 대해 생각해봐야 합니다. 가족의 일로 주일에 출타하는 것 지양해야 합니다. “목사님, 그곳에 가서도 예배는 드려요.” 글쎄, 그게 제대로 된 예배일까요? 예수님을 가족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가족행사를 핑계로 예배 빼먹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예배는 목숨을 걸만한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매 주일을 52주 중에 한 주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오늘 예배가 내가 예수 믿고 드리는 첫 예배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오늘 이 예배가 내 인생 마지막 예배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첫 예배니 얼마나 설레고, 또한 얼마나 감격스럽겠습니까? 마지막 예배니 얼마나 집중하고, 또한 얼마나 잘 드리고 싶겠습니까? 1분이 아깝고, 1초가 아깝지 않겠습니까? 오늘 2022년 1월 16일의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내 인생에서 오늘의 예배는 평생 드리지 못한 것이 됩니다. 조는 게 어디 있겠습니까? 스마트폰 만지는 게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먼저 예배 드림으로 증명돼야 합니다. 예수님을 최고로 사랑하는 사람은, 예배 자세가 불량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태도가 중요합니다. 불량한 태도로 사랑한다면, 불량한 사랑이 됩니다.
38절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집니다. 모든 사람에게 자기 십자가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십자가를 꿋꿋이 집니다. 어떤 사람은 그 십자가를 지기 싫어합니다. 자기가 져야 할 십자가를, 남한테 떠넘기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를 주셨습니다. 그게 사명의 십자가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십자가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갈보리교회의 직분과 사역의 십자가입니다. 교회 밖에서의 일에 비하면, 그게 빛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교회 내에서도, 크게 알아줄만한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가요? 그 직분을 주님께 받았고, 그 사역을 주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면 되지 않습니까? 우리의 어떤 직분이나 사역도,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해서 직분 감당하고, 주님을 사랑해서 사역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행복한 직분자, 행복한 사역자가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불평이 나옵니다. 불평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는데, 불평하는 자리가 만들어지고, 불평하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러면 그 다짐이 수포로 돌아갑니다. 십자가는 내가 만들어서 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워지는 것입니다. 내게 지워진 십자가를, 내가 지고 가는 것입니다. 누가 직분자가 되고 싶어서 된 사람이 있겠습니까? 누가 그 사역을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다 지워진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가 우리를 살립니다. 단 그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때입니다. 그런 사람이 주님께 합당한 사람이 됩니다. 여기서 합당하다는 말은, 특정한 평가 기준에 알맞다는 말입니다. 일반적인 평가 기준이 아닙니다. 이성적인 평가 기준이 아닙니다. 합리적인 평가 기준이 아닙니다. 주님의 평가 기준입니다. 주님의 평가 기준에 맞아야 합격입니다.
대학입학사정관제라는 게 있습니다. 입학사정관을 활용해 학생을 선발하는 방법으로, 원래 미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제도였습니다. 입학사정관 전형에서는 수능, 내신과 같은 객관적인 점수는 최소한으로 반영되고, 학생의 가능성과 같은 입학사정관의 주관적인 판단이, 합격 여부를 결정짓는 중요 요인이 됩니다. 여기서 ‘주관적인 판단’이란 말이 중요합니다. 대학이 입학사정관에게 위임을 하고, 입학사정관은 그 대학에 적합한 학생을 선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해 직분자가 되었습니다. 직분에 따른 사역도 맡게 되었습니다. 평가 기준도 주님의 주관적인 판단에 달려 있습니다. 달란트 비유를 통해, 주님이 자신의 기준을 밝히셨습니다. 확실한 것은 실적 위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 받았던 사람에게, 동일하게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하셨습니다.
39절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예수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한테 내 목숨을 맡긴다는 말입니다. 우리 목숨은 하나입니다. 그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생각합니까? 그럼 진지하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목숨을 스스로 책임질 수 있습니까? 천사가 하나님 앞에 가자고 데리러 왔을 때, “뭐 벌써 왔어요? 돌아갔다가 십 년 후에 오세요” 하며, 설득하여 돌려보낼 자신이 있습니까? “백세 인생”을 불러 전국민에게 ‘백세 환상’을 심어준 가수 이애란 씨도, 꼼짝 못하고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어차피 우리 목숨은 주님께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잃는다는 말은, 예수님께 목숨을 맡기고 산다는 의미입니다. 더 나아가 박해 상황에서, 예수님을 위해 이 땅에서의 삶을 포기한다는 의미입니다. 육체적 생명을 포기하고라도, 영원한 생명 얻는 것을 선택한다는 의미합니다. 그러려면 포기하는 것을 연습해야 합니다. 아주 작은 것부터 포기하는 것입니다. 작은 권리부터 포기하는 것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물론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뛰어난 인격을 갖춘 직분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나를 위하여” 곧 주님을 위하여서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입니다. 주님 앞에 나아간 여인의 손은 빈손입니다. 12년 동안의 혈루증으로 인해, 가진 것 하나 없는 빈손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옷자락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옷자락은 빈손이 아니고는 잡을 수 없습니다. 빈손 곧 자기 목숨을 잃는 자만, 주님 곧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40-42절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아닌 제자들을 영접할 사람들을 향해 제자들을 영접하는 사람은 예수님과 나아가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들을 선지자로 여겨 영접하는 사람은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고, 그들을 의인으로 여겨 영접하는 사람은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고, 그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영접하는 사람들은 제자의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셨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본문은 일차적으로 성도 여러분들이 받을 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받을 복에 관한 것입니다. 곧 여러분이 주님의 일꾼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갔을 때 그들이 여러분을 어떻게 영접하는가에 따라 그들이 받을 상과 복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그들에게 ‘복의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어떤 자세, 어떤 신분으로 그들에게 가느냐에 따라, 여러분을 만난 사람들이 받게 될 복이 달라질 것입니다.
제자에게는 상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큰 복을 받았습니다. 그 복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요 1: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최고의 복을 받은 우리가 바라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상입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이 무엇이라고? 하늘 상급입니다. 바울처럼 우리도 상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빌 3:14절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은혜는 손 벌린 자에게 주어지지만, 상은 달려간 자에게 주어집니다. 달리되 끝까지 달려야 합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달려가야 합니다. 그날에 우리를 맞아주실 주님 기대하며 달려가야 합니다. 주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왕이면 큰 상을 기대하며 달려가야 합니다. 히 10:35절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큰 상을 얻기 위해서는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누군가를 영접하는 것에는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저 같이 소심하고 내성적인 경우, 가까이 지내는 목사님들에게 식사 대접하는 것에도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교인들이 목회자에게 식사 대접 한 번 하려고 해도, 담대함이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손님이 방문했을 때도, 담대함이 없이는 선뜻 영접하기 힘들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상을 잃지 않는다는 말씀에 익숙합니다. 그래서 냉수 들고 작은 자 찾아다녀야 하는 줄 압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을 잘 보면 주님이 영접하라는 사람은, 40절 예수님이 보내신 사람입니다. 41절 선지자, 의인입니다. 42절 제자입니다. 그들은 하나 같이 복음 전하는 자입니다. 그들을 영접하라는 말은, 쉽게 말하면 밥 사주라는 말입니다. 영접의 기본은 밥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애환을 들어주고, 필요를 채워주며 격려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기도와 물질로 그 사역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상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일본에 마츠무라 박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북해도제국대학의 전신인 삿보로농업학교를 졸업하였는데, 영광스럽게도 교장으로부터 모교에서 교편을 잡으라는 통지를 받았습니다. 마츠무라는 교수 중에 친근한 이도 별로 없고, 또 자기의 학업성적이 그다지 우수하지도 못한데, 어떻게 해서 교수로 선택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그저 감사하는 마음으로 직무에 충실했고, 연구에 몰두하여 큰 업적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그후 1930년 대에 제네바로 유학 갔을 때에, 국제연맹본부 차장으로 있던 은사인 니토베 이나죠 박사의 저녁 초대를 받게 됩니다. 은사님과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기가 왜 모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스승 니토베 박사가 마츠무라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 준 것입니다. 자신의 아내가 마츠무라에 크게 감사한 일이 있었습니다. 무더운 여름 부채를 들고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칠 때, 실수로 부채를 떨어뜨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학생이 조용히 와서는 그 부채를 집어 선생님께 드렸습니다. 그 학생이 바로 마츠무라였다는 것입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스승의 아내는 마츠무라의 그런 태도와 인품을 보고 훌륭한 장래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는 자주 남편인 스승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그의 스승이 학교의 실제적인 주인이었기에 그를 교수로 채용한 것입니다. 마츠무라는 전혀 기억에도 없는 작은 행동 하나가 그를 교수직에 앉게 해 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최고로 사랑해야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그것을, 혹시 예수님보다 더 좋아하는 것은 아닌지, 늘 조심하고 살피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 받았으니, 우리의 남은 삶을 하늘의 상을 위해 달려가기를 바랍니다. 자기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는, 착하고 충성된 제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때로는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고 조롱을 당할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며, 빛과 소금으로, 그리스도의 편지로 사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혈연관계의 가족으로 만족하지 말게 하시고, 영적으로 하나 되는 가족들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들의 작은 행동으로 인하여 주변 사람들이 선지자의 상을 받고, 의인의 상을 받고, 제자의 상을 받게 하옵소서.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하나님의 상을 받고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게 하옵소서. 이것이 우리가 오늘을 사는 이유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