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들은 참으로 기인한 존재들이다. 상처를 가만 놔두질 않는다. 더 아플 텐데, 더 괴로울 텐데, 들쑤셔보고 입김으로 불어보고, 심지어는 깨물어보기까지 한다. 소설가 김소진(1963~1997)에게 있어 그 오래된 상처는 바로 아버지란 존재다. 그는 부권에 대한 도전적인 공격이 이뤄졌던 1980년대의 우리 소설과는 다르게 새로운 기호체계로 아버지란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한 1990년대의 신예작가로 기억된다.
<자전거 도둑>(강출판사/1996)은 33살 젊은 나이에 췌장암으로 세상을 등진 작가가 그 전 해에 묶어낸 소설집으로, 작가 자신이 ‘어설픈 기억의 장사꾼 노릇’이라고 자조하며 펴낸 세 번째 작품집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아버지는 ‘아들의 중학교 등록금을 빼돌려 정분이 난 여인의 단솟곳 속으로 밀어넣어준 사내’(‘아버지의 자리’)이고, ‘자신의 도둑질을 대신 누명쓴 아들의 뺨을 때리는 연극을 벌이는 인물’(‘자전거 도둑’)이며, ‘곤충을 잡아먹는 기이한 육식 습관으로 정신적 허기를 달래는 사람’(‘원색 생물학습도감’)이다. 그래서 작중 화자는 차라리 죽는 한이 있어도 애비라는 존재는 되지 말자고 다짐하기도 하는데, 세월은 어느덧 그를 한 사람의 애비로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이 소설집에서 주인공은 기억 속의 아버지의 상을 언제나 회고만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삶을 사는 ‘나’를 통해 아버지와 만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 때문에 누추하고 불우한 삶을 살았던 어린 시절의 화자가 이제는 오늘의 삶을 사는 ‘나’의 존재 때문에 아버지를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 보는 것이다. 이럴 때 아버지의 문제는 곧 나의 그것으로 된다.
작가는 전후 이탈리아 감독 비토리오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을 통해 표제작이기도 한 ‘자전거 도둑’을 풀어내고 있다. 포스터를 붙이는 직업에 필요한 자신의 자전거를 도둑맞은 후 남의 것을 훔치려다 망신만 당하는 아버지 안토니오의 아들 부르노를 소설 속의 인물과 대응시키고 있다. 또다른 부르노란 소설 속의 화자는 한사코 아버지되기를 거부하지만, 어느덧 딸 세련에게 무시당하는 등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아버지의 자리에 서게 된다. ‘아버지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 것인가’라는 작중 화자의 내면 독백은 아버지 끌어안기의 새로운 시도의 의미에 값하고 있다. 아버지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로 이 화두는 마땅히 되돌려져야 하리라.
199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인 ‘쥐잡기’에서 보인 김소진의 아버지 탐구는 여성 작가들에게는 다소 낯설게 다가왔던 게 사실이다. 아버지들의 그 막강한 힘, 권력적인 언어와 그 그늘 속의 또 다른 삶 등이 더 익숙한 문학적 주제였던 까닭이었다. 이런 관점 때문에 김소진의 소설 속에 나오는 무능한 아버지 옆에서 기거하는 고단한 어머니의 삶에 보다 더 눈길이 갔었다. 그러나 김소진은 ‘열린 사회와 그 적들’ ‘고아떤 뺑덕어멈’ ‘장석조네 사람들’ 등을 통해 아버지의 존재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변주, 성숙시켜 나갔고, 이런 노력들은 여성적 관점을 변환시키는 데 성공했다.
과거의 회한이나 연민, 증오, 섣부른 화해 대신 왜소한 삶을 살다간, 역사의 큰 줄기에서 벗어난 주변부 사람들의 삶을 정밀하게 구축해내는 이 작가의 힘은 감탄스럽다. 사전을 찾아야 겨우 독해할 수 있는 잊히는 우리 토착어와 사투리를 풍성하게 가꾸어서 리얼리티를 살리고 있는 점도 마찬가지다. “작가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작가”라는 말을 들었던 작가가 김소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