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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륜 [徐相崙, 1848~1926]
한국기독교회의 첫 열매라고 할 수 있는 서상륜 선생은 평북 의주 출신의 국경 무역상이었다. 서상륜은 또한 성경을 한국말로 번역, 성경을 들고 다니면서 전도한 평신도 매서인(=권서)이었으며, 황해도 장연에 소래교회라고 하는 조선 최초의 교회를 창립하였다. 또한 서울 새문안교회의 실질적 조직자였으며,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오기도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 1876년(고종 13) 행상으로 만주 뉴좡[牛莊]에 갔다가 로스 목사를 만나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어 세례를 받고 헤이룽장성[黑龍江省]에 사는 동포에게 전도하였다.
한국 복음선교의 역사는 언더우드, 아펜젤러, 매킨타이어와 로스 목사 등과 같은 선교사의 직접적인 복음 전도의 공이 컸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 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오기 이전에 이미 성경이 번역되어 보급되기 시작했다. 한국 복음선교의 역사는 선교사들에 의해 일깨워진 소수의 한국인 선구자들을 통해 주체적 능동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히 인식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능동적인 복음수용과 전파를 통해 한국교회의 초석을 닦은 사람들은 만주의 한국인 최초 수세자들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서상륜이 대표적이다.
서상륜을 이야기하기 전에 우선 그의 친구이자 한국인 최초의 순교자인 백홍준(1848~1893) 을 소개할 필요가 있다. 항간에는 그가 옥사한 것은 아니므로 순교자는 아니라는 주장도 있지만 서상륜을 얘기하고자 할 때 빠져서는 안 될 인물이다.
그는 평북 의주출신의 상인으로 1874년 만주에 갔다가 로스 등의 한국어 교사가 되었다가 마침내 기독교인이 된 인물이다.
1882년 서간도 한인촌을 찾아가 전도해 75명의 세례를 주선하기도 했으며, 1883년에는 국내 에 잠입, 의주를 비롯한 평북일대를 돌며 반년 만에 10명의 신자를 모으기도 했다. 의주교회는 정식으로 된 조직교회는 아니었지만 국내 최초의 집회였으며 일종의 기도처였다.
1890년 언더우드가 서울에서 연 신학반에서 공부한 뒤 최초의 유급 교역자(조사신분)로 활 약, 언더우드 게일 마펫 등 선교사들과 협력하여 한국교회의 지평을 넓혀나갔다.
결국 관가의 주목을 받던 중 1892년 평안감사 민병석의 지시로 의주에서 체포되어 2년간 갖은 고초를 겪다가 이듬해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그는 일찍이 친구 서상륜에게 전도한 일도 있으며 초기 매서인(성서의 귀중함을 강조하기 위해 당시에 유가판매가 원칙이었다)의 전형이 되는 인물이다.
모리배 장사꾼 서상륜의 회개
서상륜은 1849년 평북 의주에서 몰락한 양반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4세 때 부모를 여의고 동생과 함께 할머니 밑에서 살다 일찍 장사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첫 사업에 실패하고 어린 나이에 생존경쟁의 냉엄함을 체험한 그는 이후에는 좀 더 철저한 장사꾼이 되기로 결심, ‘교만과 궤휼과 거짓과 간음과 탐냄을 품어 남의 생명을 해하고 재물을 속이며 나만 잘 사는’ 모리배에 가까운 상인이 되었다.
1878년 그가 29세 되던 해 중국에 홍삼장사를 갔다가 심한 장티푸스에 걸렸다. 객사에 직면한 그를 이미 기독교를 접한 의주출신의 친구들인 이익세, 이응찬 등이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 선교사 매킨타이어(John McIntyre)에게 데리고 갔다. 매킨타이어는 그를 영국병원에 입원시켰고 극진히 보살폈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귀향길에 오르는 그에게 매킨타이어는 치료비를 청구하기는커녕 복음서를 건네주며 읽어보라고 권했다. ‘나라에서 금하는 사교’라는 선입견에 처음엔 마지못해 받아온 성경이었으나 그것을 읽는 동안 서서히 복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결국 귀향한지 1년 만에 그는 집안일을 정리하고 선교사를 만나기 위해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
옛일을 다 떨치고 새로운 모험의 길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그가 이번에 만난 선교사는 로스였다. 본격적인 구도가 시작되었다. 로스는 성심껏 지도하였고 서상륜은 로스와 함께 지내면서 지나온 삶을 회개하기 시작했다. ‘양반 장사꾼’으로 가졌던 갈등과 자기모순적이고 이기적인 삶에 견줄 때 그를 사경에서 구해준 선교사의 온정은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감동이었다.
“내 나라 친구와 친척은 오히려 나를 인물 좋은 도적놈이라 흉만 보고 말도 아니하며 버린 물건 같이 보는데 타국의 보지도 듣지도 못한 얼굴색 다른 사람은 도리어 나를 친부형같이 사랑하니 이것이 어찌된 연고이뇨. 일 년 전에 마근태(매킨타이어) 목사가 객점에서 죽을 인생 을 그같이 구원하여… 그 때에 애쓴 은공과 약값을 걱정으로 말한즉 마근태 목사가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고마운 마음이 나거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말씀대로 예수를 믿으면 이에 더한 기쁨이 없겠다 하시더니 지금 로스 목사가 이같이 참사람으로 권하시니 예수를 믿는 사 람은 참 하늘나라 백성이로다.”
선교사들의 진정한 사랑과 복음의 참 의미를 깨달은 서상륜은 기독교를 자신의 종교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였다.
“내 마음이 반가움과 이런 불의를 행한 것이 매우 부끄럽고 절통하여 뉘우치는 말을 하니 로스 목사가 묵묵히 듣다가 이에 세례를 베풀며 내가 매우 반가이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 작 정하고 여러 교우들 앞에서 세례를 받고 주의 무리가 되었나이다.”
성서번역에서 매서인이 되기까지
서상륜은 매킨타이어와 로스 선교사에게 한글을 가르쳐주면서 누가복음을 직접 번역하였다. 누가복음의 번역이 끝나자마자 로스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서상륜은 세례를 받은 후 6개월 동안 봉천에 머물면서 로스선교사의 성경번역에 계속 참여했다.
이들 매킨타이어와 로스목사는 한국 민족교회사의 첫 장을 여는데 큰 공헌을 한 인물들이다. 매킨타이어는 최초로 한국인에게 세례를 주었고 로스는 최초의 한국말 성서번역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신앙에 기초한 그의 열정과 재간이 성경번역 뿐만 아니라 목판을 일일이 깎아내어 인쇄하는 일까지 맡아서 결국 1882년 가을에 심양 문광서원 간행으로 <예수셩교 누가복음 젼셔>와 <예수셩교 요안뇌 복음젼셔> 쪽 복음서를 출판하게 된다.
그러나 서상륜의 사명은 번역보다 권서인(勸書人)이 되어 성경을 반포하는데 있었다. 1882년10월 귀국길에 그는 복음서 한 상자를 가지고 서울로 향했다.
압록강 국경을 건너다 관리들에게 검색을 당해 성경을 압수당하기도 했다. 다행히도 그를 심문한 관리가 우호적이었기에 무사히 풀려날 수 있었고, 압수되었던 성경 중 일부도 후에 전달받아 의주에 뿌릴 수 있었다.
그러나 관가에서 박해의 조짐을 보이자 동생 경조와 함께 고향 의주를 떠나 삼촌댁이 있는 황해도 장연의 솔내(소래)로 옮겨간다.
로스는 단편성경 4백여 권을 비밀리에 전하였고 서상륜은 이것을 가지고 전도하여 1883년 말에 '세례지원자 13명' 의 명단을 로스에게 보고하였다.
13명의 세례지원자를 보고받은 로스선교사는 또 상해 제물포간 항로를 통해 성경을 보내왔다. 1884년 봄부터 황해도 장연의 소래는 한국의 성경보급처가 되었다. 서상륜은 1886년에 예배처소를 마련하여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림으로 소래교회는 한국의 최초교회가 되었다.
서상륜, 서경조 두 형제는 전도의 활기를 띠어 70명이 넘는 세례 지원자를 얻었으나, 로스의 입국이 어려워 세례를 받을 수가 없었다. 그 후 언더우드 목사가 입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1887년 1월 23일 주일에 3명의 세례지원자들을 서울로 데리고 가서 알렌선교사와 헤론의사 언더우드 목사 앞에서 서경조, 최명오, 정공빈 등은 세례문답을 받고 세례를 받았다.
1887년 9월 27일 14명의 한국인 교인들과 새문안교회가 언더우드에 의하여 시작될 때 서상륜은 주축 교인이었다. 그는 장로뿐 아니라 어떤 직분도 맡지 않았다. 서상륜은 끝까지 평신도 전도인(매서인)이었다.
나라를 바로 세우는 사상
서상륜의 활약은 비단 기독교 영역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 이후에 쓴 글에서 그는 민족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기독교를 개인 신앙으로서만 아니라 나라를 올바로 세우는 기초로 이해하고 있었다.
1907년 정미의병이 일어났을 때 당시 이완용 내각은 기독교인 가운데 상당수를 선유사(宣 諭使)로 내세워 의병을 진무하려 하였다. 이것은 기독교가 정부쪽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들 에게도 인정받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선유사 위촉을 받은 서상륜은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내각대신에게 올린 글’을 발표한다. 의병이 일어난 것도, 국사가 날로 그릇되는 것도, 민생이 도탄에 빠진 것도, 언론 결사의 자유가 막힌 것도 모두 현정부의 잘못이라 질타하고 내각대신들을 향해 ‘일제히 사직하고 내각에서 물러나와 각 지방에 몸소 가서 저희 눈앞에서 잘못한 일을 자복하고 저희 수중에 죽는 것을 임의로 하게 하여야 소요가 사라지고 나라와 백성이 모두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고 일갈하였다. 그러나 결국 나라는 1910년 일본에 넘어가고 이즈음 서상륜은 교회 일에서 은퇴하여 장연군 대탄으로 물러난다. 그의 나이 이미 60여 세를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조용히 말년을 보내다가 1925년 12월16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의 유해는 장로회 총회장으로 대탄리에 안치되었다. (한줄띄우공)
이들 매서인(권서)은 자신들이 깨달은 ‘생명의 말씀’을 동족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열망에 불탔던 자들이며 실제로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만주와 한국 등 곳곳에 신앙공동체를 일구어냈던 주역들이었다. 그들이 걸었던 전도의 길은 사도 바울의 행로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길가는 순례자’의 이미지는 한국 초기교회의 원형인 것이다.
개항이후 입국한 외국선교사들이 “우리는 씨를 뿌리러 온 것이 아니라 이미 뿌려진 씨의 열매를 거두러 왔다”고 말한 것은 한국교회의 시원 및 서상륜 등 초기 매서인들의 교회사적 위치에 대한 정확한 자리매김이라 볼 수 있다. (여기도 한 줄 띄우공)
서상륜(1848~1925)은 1901년 9월 9일자 ‘그리스도신문’에 자신의 기독교 개종사건을 회고하고 있다. “내가 이십칠년 전에 대청국 봉천성 우장당방 영구라 하는 항구의 여간 사소한 장사를 갔다가 뜻밖에 신병을 나서 거의 죽을 지경에 당하였나이다. 그때에 감사하신 그리스도께서 그곳에 있어 전도하시는 대영국 목사 마근태(매킨타이어)씨에게 감동하사 나를 객점에서 자기 집으로 옮기고 영국의사를 청하여 매일 이삼차씩 진병하며 복약하매 거의 두 주일 동안에 회생하였나이다. 그때에 나는 알지 못하였으나, 감사하신 그리스도께서 그때부터 나를 부르셨나이다. 그때 처음 마근태 목사에게 그리스도 예수씨 복음을 전해 듣고 성경책도 얻어 보았나이다.”
서상륜은 이른바 한국프로테스탄트 ‘북방선교루트’(스코틀랜드장로교계)의 대표자로서, ‘남방선교루트’(미국개신교선교부)와의 연합을 이룩한 주축이었다. 교직도 갖지 않았던 그는 1925년 12월 16일 별세하였고, 그 아우가 최초의 한국인 장로교 목사 중 한 명인 서경조이며, 독립운동가 서병호, 서원석(대한성서공회), 서경석(목사) 등이 모두 그 후손이다.
약력:
1848 평안북도 의주(義州) 출생
1876 만주에서 로스 목사를 만나 세례를 받음
1887 동생 경조(景祚)와 함께 국내 최초의 교회인
1887 소래교회 세움
참조 및 인용: 서정민 교수의 한국교회 인물 이야기/
민족교회 새벽 연 '복음 선구자' - 국내성경반포 주역 서상륜, 전인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