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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 세간리 현고수 宜寧世干里懸鼓樹> 곽재우 생가 및 은행나무
교과서의 인물, 전설속의 인물이 느티나무를 타고 나와 우리의 일상에서 천연스럽게 함께한다. 현고수 앞의 곽재우 동상이 현실감을 완성한다. 아, 한국은 곽재우의 나라, 의병의 나라가 맞구나. 우리 모두 이렇게 의병이 되었구나. 정치가, 관군이 미흡해도 의병이 건재해서 이만한 나라를 만드는구나. 의병의 나라, 그 오랜 내력의 징표를 목도한다.
1.방문지대강
명칭 : 의령 세간리 현고수 宜寧世干里懸鼓樹, 곽재우 생가, 은행나무
위치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 1000번지
전화 :
입장료 : 없음
방문일 : 2023.10.
2. 둘러보기
곽재우와 의병들의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너른 광장에서 현고수에 걸어놓은 북을 치며 의병들이 홍의장군 아래 연습하는 거 같다. 일본의 임란 패배는 의병 때문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상명하복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왜군은 의병의 존재를 상상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이미 관군을 물리쳤는데, 의병이 나타나다니,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깔끔하지 못한? 행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일본인들은 일본 천황이 2차대전 항복을 선언하고난 후 아무도 이에 저항하지 않았다. 전국민이 일사불란하게 패배를 인정했다. 국민은 각자 사고를 할 필요가 없었다. 위에서 명령하고 결정하는 대로 따르면 그만이었다. 우리는 식민통치를 당해도 만세를 부르고 급기야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를 세워 저항했고, 해방 후 바로 그 임시정부를 이어 대한민국정부를 수립했다. 의병이 관군이 되고, 관군이 의병이 되었다.
관군이 패배하고 물러난 한양도성을 점령하면 깨끗하게 모두 항복하고 전쟁은 끝이어야 하는데, 선조는 할복을 하지 않고 의주까지 피란을 갔다. 할복을 하지 않는 비겁한 수장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선조가 항복하지 않고 피난을 간 건 얼마나 슬기로운 처사인가. 항복하면 조선이 멸망했을 거 아닌가. 일본은 군대만 준비했지 한국문화 이해의 준비까지는 하지 못했던 것이다. 국가 차원의 준비가 아닌 다이묘 차원의 군대 징발이어서 그런 것인가.
관군은 물론 국왕까지 나라를 버려도 백성들은 버리지 않고 스스로 지킨다는 것을 몰랐다. 그 백성들이 평소에는 농민이지만 위기 상황에서는 금방 군사로 돌변한다는 것도 몰랐다. 심지어 승려도 승병이 되는 나라라는 것을 꿈에도 알 수 없었다. 농민과 무사가 엄격히 구분되는 일본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평소 군인이 아닌 농민으로 사는 것이 생산성이 높고 인간다운 일상 영위에 유리하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십만양병을 했더라면 민생이 얼마나 피폐할 뻔했는가. 평시에는 농민, 전시에는 의병으로의 변모가 일상 행복에 훨씬 유리한 경제적 방식이라는 것을 일본은 알 수 없었다. 곽재우는 그것을 현실로 보여주었다. 곽재우는 선비에서 장수로 변모하였다. 그의 엄청난 재물은 그대로 의병들의 군량미가 되었다. 시인의 입으로는 군령을 외쳤다.
농민이 의병, 선비가 장수인 것은 우리의 오랜 내력이다. 육진을 개척한 김종서도 그랬고, 많은 장수들이 그랬다. 곽재우도 문과에 급제한 선비였다. 인간에 대한 이해와 세상을 보는 안목을 구비하는 것이 그래서 유리했다. 백성을 선비로, 농민으로 살게 한 그것이 나라를 지켜온 힘이 되었다. 물론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금수강산에서의 풍요로운 수확 덕분에 다른 나라 공략이 불필요했던 조건이 전제되었기 때문이다.
2-1. 곽재우
곽재우는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전투, 화왕산성전투에 참전한 의병장이다. 1552년(명종 7)에 태어나 1617년(광해군 9)에 사망했다. 34세 때 과거에 합격했으나 지은 글이 왕의 뜻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무효가 되자 평생 은거할 결심을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관군이 대패하자 의병을 일으켜 뛰어난 통솔력과 전법으로 수많은 전과를 올렸다. 붉은 옷을 입고 의병을 지휘하며 스스로 홍의장군이라 했다. 조정에서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거듭 고사하여 은거의 결심을 버리지 않았다. 시문에도 능하여 저서로 『망우당집』을 남겼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재)
곽재우는 이순신이 죄없이 잡혀가고, 의병장 김덕령이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죽는 것을 보고 조정에서 내리는 수많은 벼슬을 물리치다가, 영창대군 탄핵 소식을 듣고 소를 올렸다.
이날 전라 병사 곽재우(郭再祐)가 사직하는 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지난 날 역적 이진(李珒, 임해군)이 스스로 반역의 짓을 했기 때문에 신 역시 소를 올려 법에 따라 처리할 것을 청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이의(영창대군)는 무슨 지각이 있기에 반역의 죄를 준단 말입니까. 온 조정의 사람들이 이의를 처벌하자고 떠들어대면서 전하를 불의에 빠뜨리고 있으므로 신은 감히 반열에 나가지 못하겠습니다." 했다. - 《광해군일기》 권 67, 광해군 5년 6월 21일
낙향한 곽재우는 현풍 비슬산에 살면서 영산의 창암진(滄巖津)에 망우정(忘憂亭)을 짓고 도인처럼 살다가 1617년(광해 9) 66세의 나이로 죽었다. 훗날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충익(忠翼)이란 시호를 받았다.
의병탑
위치 : 경상남도 의령군 의령읍 충익로 1
의병탑은 곽재우 장군과 17인 장령의 위훈을 기리고 그들의 영혼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탑이다. 탑의 높이는 27m이며, 가운데 둥근 18개의 백색 고리는 곽재우 장군과 17장령을 상징하며, 백색 고리 양옆의 팔자형 기둥은 의병이 든 횃불을 상징한다.
의령읍 남산 밑에 위치한 충익사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킨 의병장 곽재우 장군과 그 휘하 장병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충익사의 규모는 면적 23,600m2이며, 건물 9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당 옆에 의병탑이 있다.
3-1. 소개
2008년 3월 12일에 천연기념물 제493호로 지정되었다. 수령은 약 450년으로 추정된다. 나무의 높이는 20m, 뿌리 근처의 줄기둘레는 8.4m이다. 수관 폭은 동서 방향이 16m, 남북 방향이 15m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인 1592년 4월 13일, 왜군이 부산포에 침입하자 당시 41세의 유생이던 곽재우(郭再祐)가 4월 22일에 이 느티나무에 북을 매달아 놓고 치면서 전국 최초로 의병을 모아 훈련을 시켰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유서 깊은 나무이다.
세간리 마을 입구에 위치한 노거수로서 나무 모양이 전체적으로 거의 ‘ㄱ’자형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나무만 보고도 이 나무가 ‘북’을 걸었던 나무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북을 매달았던 나무’라는 뜻으로 현고수(懸鼓樹)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지금도 해마다 열리는 의령 홍의장군축제 행사를 위한 성화가 이곳에서 채화되고 있다.
느티나무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 타이완, 중국 등의 따뜻한 지방에 분포하고 있다. 꽃은 5월에 피고 열매는 원반 모양으로 10월에 익는다. 예전부터 우리나라 마을에는 대개 큰 정자나무가 있었는데, 가장 뛰어난 기능을 했던 것이 느티나무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재)
망우당 곽재우 장군 유허비
2-2. 조선왕조실록 기록 곽재우
선조 25년 임진(1592, 만력)
25-06-28[04]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이 의병이 일어난 일과 경상도 지역의 전투 상황을 보고하다
의령(宜寧)에 사는 고 목사(牧使) 곽월(郭越)의 아들인 유생(儒生) 곽재우(郭再祐)는 젊어서 활쏘기와 말타기를 연습하였고 집안이 본래 부유하였는데, 변란을 들은 뒤에는 그 재산을 다 흩어 위병을 모집하니 수하에 장사(壯士)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가장 먼저 군사를 일으켜 초계(草溪)의 빈 성(城)으로 들어가 병장기(兵仗器)와 군량을 취득하니, 이때 동현(同縣)에 사는 정대성(鄭大成)이란 자가 무리를 모아 도적질을 하였으므로 합천 군수(陜川郡守) 전현룡(田見龍)은 재우까지 도적으로 의심하여 감사(監司)와 병사(兵使)에게 급히 통보하였습니다. 이에 감사와 병사가 마침내 명령을 내려 대성을 사로잡아 참수하니, 재우의 병사도 흩어졌습니다. 도사(都事) 김영남(金穎男)이 그는 도적이 아니라고 말하자 감사(監司) 김수(金睟)는 전현룡의 말을 믿지 않고 신으로 하여금 초유하도록 하기에 신이 즉시 공첩(公貼)을 보내어 재우를 부르니 며칠 뒤에 단성현(丹城縣)으로 신을 찾아 왔습니다. 그 사람은 비록 담력(膽力)과 용맹은 있으나 심원한 계책이 없으며 또 당치도 않게 큰 소리만 잘 칩니다. 패주한 수령(守令)이나 변장(邊將) 등의 소식을 들으면 꼭 참수(斬首)하라고 하여 심지어는 감사와 병사에 대해서도 불손한 말을 많이 하니 그를 비방하는 말이 비등하여 미친 도적이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이런 위급한 때를 당하여 이런 사람을 잘 다루어 쓰면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이기에, 즉시 동현(同縣)으로 보내 돌격장(突擊將)으로 칭호하여 그로 하여금 왜적들을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였더니 재우는 그 아비가 명나라 북경에 갔을 때에 황제가 하사한 붉은 비단 철릭(帖裏)을 입고서, 지금 장사(將士)들을 거느리고 의령현의 경내 및 낙동강 가를 마구 누비면서 왜적을 보면 그 수를 불문하고 반드시 말을 달려 돌격하니, 화살에 맞는 적이 많아서 그를 보면 바로 퇴각하여 달아나 감히 대항하지 못합니다. 왜적에게 사로 잡혔던 사람이 돌아와 ‘왜적들이 「이 지방에는 홍의 장군(紅衣將軍)이 있으니 조심하여 피해야 한다.」고 했다.’ 합니다. 그러므로 의령 한 고을 사람들이 그에 힘입어 조금 편안해졌습니다. 신은 비록 그의 거친 것을 의심합니다마는 격려하고 권장하여 힘을 다하도록 하여 서서히 그의 하는 바를 살피겠습니다.
【재우(再祐)는 4월 24일에 의병을 일으켜 왜적들을 토벌하였다. 김천일(金千鎰) 등이 뒤에 비록 창의사(倡義使)로 이름하였지만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사람은 실제로는 재우이며 왜적들이 감히 정암진(鼎巖津)을 건너 호남(湖南)으로 가지 못하게 한 것도 바로 재우의 공이다. 재우가 김수가 싸우지 않고 점차 퇴각하는 것에 분격하여, 당초 의병을 일으킬 적에 김수에게 격문을 보내어 수의 죄를 일일이 따져 책망하고 수를 베려고 하자 수가 매우 두려워하여 심지어 치계까지 하여 변명하면서 재우의 일을 마치 역적처럼 말하니 비변사의 여러 사람들도 재우의 심사(心事)를 모르고 의심하였다. 그러자 재우도 이로 인하여 죄를 얻어 마침내 뜻을 펴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자기와 친한 사람을 의주로 보내 상소하기로 하고 수의 죄를 따져 책망한 말을 모두 열거하여 상소문을 만들고 ‘그는 아비도 무시하고 임금도 무시하여 불충 불효하며 패전을 기뻐하고 왜적을 맞아들였다.’고 하였다. 또 금관자(金貫子)를 잃어버리고 달아났으니 머리없는 시체 귀신이라고 수를 욕하니, 수가 마침내 성(城)을 지키면서 재우를 피하고 김성일(金誠一)로 하여금 그를 타이르게 하였다. 성일이 힘껏 저지하지 않았다면 수가 아마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수가 산음현(山陰縣)에 있다가 재우의 선봉이 이미 바싹 다가왔다는 소식을 듣고 함양으로 도망갈 때에는 심지어 말을 거꾸로 타고 달아나니, 좌ㆍ우도(左右道) 사람들이 수가 왜적에게 겁먹고 또 재우에게 겁먹은 것을 비웃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수가 전현룡(田見龍)의 말을 믿지 않았다는 것은 그럴 리가 없을 터인데, 지금 성일의 치계에 ‘김수도 역시 전현룡의 말을 믿지 아니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는 좋은 말로 아뢰어 서로를 화해시키려는 것인가보다.】
세간리 마을 전경
현고수의 새끼줄. 제례의 흔적이 남아 있다.
현고정
여기까지 현고수 이모저모
세간리 은행나무
*의령 세간리 은행나무
1982년 11월 4일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높이는 21m, 가슴높이둘레는 10.3m이다. 수령은 550년 정도로 추정되며, 가지는 동서로 26m, 남북으로 26.2m 정도 퍼져 있다.
마을에서는 옆에서 자라는 느티나무와 함께 이 마을을 지키는 당산목(堂山木)으로 삼고 있다. 특히, 은행나무의 남쪽가지에서 자란 두개의 짧은 돌기는 여인의 젖가슴같이 생겼다고 하여 산후의 여인들이 젖이 잘 나오도록 많이 치성을 드린다고 한다.
은행나무 옆에서 자라는 느티나무도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 곽재우(郭再祐)가 북을 달고 젊은이들을 모아서 훈련시켰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으며, 현고수(懸鼓樹)라고 불리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재)
은행나무
곽재우 생가. 2005년에 복원하였다.
곽재우 생가
위치 :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 세간2동길 33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9일째 되는 날 이곳 곽재우 생가가 있는 마을에서 곽재우장군을 비롯한 17장령들과 함께 책과 붓을 던지고 가재를 던지고 의병을 일으켰다. 이곳 생가는 조선중기 사대부의 사저로서 전형적인 구조를 본떠서 안채, 사랑채, 별당, 큰 곳간, 작은 곳간, 대문, 문간채등으로 구성된 전형적인양반가의 집으로 2005년 복원하였다. (위키백과)
곽재우 생가
은행나무
곽재우 의병장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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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네, 찾아와 살펴봐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