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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연회 재건과 송정근 ․ 신석구 연회장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로 이 땅은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맞이하였다. 하나님을 반대하고 교회를 박해했던 일제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피할 수 없었다. 일제의 종말은 곧 하나님의 심판이었으며 하나님을 갈망하는 우리 민족에게는 광복의 기쁨이었다. 새로운 시대를 맞으면서 70만 기독교인들은 무엇보다 부서진 교회를 다시 세우는데 힘을 모았다. 일제 말기에 행해졌던 탄압 속의 신앙의 모습이 회복되었고 잘못되었던 일들이 시정되었다. 친일 세력으로 인해 강압적으로 만들어진 감리교 혁신안과 황민화 작업은 모두 파기되었다. 무엇보다 북한 지역의 교회들의 회복은 매우 중요한 시대적 과제였다.
이런 때 감리교회는 일제 말기 그 이름을 박탈당했던 서부연회 재건 움직임이 있었다. 서부연회는 1930년 12월 2일 미감리회 조선연회와 남감리회 조선매년회는 합동으로 기독교 조선감리회를 개최하고 조선감리회 자치시대가 열릴 되 조직되었다. 이 창립총회에서 전국을 세 개 연회로 분할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때 서울 서부 지역, 인천과 경기도, 충청도 이남까지를 중부연회, 서울 동부 지역과 강원도 일대를 동부연회, 북한의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을 담당하는 서부연회로 조직했다. 이북 지역은 미국 북감리회에서 해주, 평양, 영변을 담당했고 남감리회에서는 개성, 철원, 원산을 맡아 선교 사업을 펼쳤다. 서부연회는 그 이외 지역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1931년 6월 개성 북부교회에서 열린 제1회 합동연회에서 각 연회의 조직 구성을 완료했다. 이로써 서부연회는 평안남북도 황해도 지역에 있는 감리교회와 교육기관, 의료기관 및 사회사업기관 등을 관할하게 되었다. 이때 서부연회는 영변지방(정찬수 감리사, 6구역), 신창지방(현석칠 감리사, 4구역), 평양지방(오기선 감리사 10구역), 진남포지방(임두화, 14구역), 해주지방(방기순 감리사, 7구역), 사리원지방(안석준 감리사 5구역) 등 6개 지방 46구역으로 조직되었다.
그 후 1939년 5월 3일~10일까지 제7회 중부․동부․서부연회가 합동으로 서울 정동교회에서 개최되었다. 1940년 일제는 당시 영국과 미국과 적대관계였기에 영미사상을 몰아내는데 혈안이 되었다. 이때 영미사상의 본거지가 기독교라는 인식 때문에 일제는 기독교 장악을 정책의 우선순위로 두고 조선의 기독교회 개혁을 단행했다. 1941년 3월 11일에 해산 연회를 끝으로 기독교 조선감리회는 기독교 조선감리교단으로 바뀌었다. 서부연회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북한지역의 교회들은 과거 기독교 부흥의 운동을 재현하고자 각 교파마다 재건운동에 힘을 쏟았다. 서부연회도 재건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즈음에 배덕영(裵德榮) 목사의 주선으로 송정근 목사가 이북 제일의 평양 남산현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당시 남산현교회의 위치로 보아 송정근 목사는 자연스럽게 북한 지역의 감리회 지도자로 부상했다. 성실한 목회생활과 불의에 굴하지 않는 정의감이 그는 해산된 서부연회를 재건하여 날로 심해가는 공산당 세력에 대항할 힘을 키우려는 의도로 신석구, 배덕영, 이진구, 이피득, 조윤승 목사와 함께 남산현교회엑서 서부연회를 재조직하였다. 이러므로 제1회 서부연회가 1946년 10월 평양중앙교회에서 개최되어 연회장에 평양 남산현교회 송정근 목사를, 부회장에 원산중앙교회 이진구 목사를, 서기에 평양 박구리교회 이피득 목사를 선출하여 연회를 조직했다. 이는 1941년 3월 정춘수 감독에 의해서 연회가 해산당한 지 5년 만에 재건된 것이다. 그러나 서부연회 관할지역인 북한은 공산 정권이 수립되었고 공산당은 교회를 심하게 탄압하여 교인들이 수난을 겪었다.
1947년에 제2회 서부연회는 평양 신양리교회에서 개최되었으나 기독교자유당사건 때문에 연회장 송정근 목사가 감옥에 갔으므로 제대로 회의가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이 기독교자유당은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 시 각 정당 사회단체의 대표로 참석하기 위하여 1946년 11월에 감리교에서 신석구, 송정근, 배덕영, 장로회에서 김화식, 김관주 등이 발기하고 고한규 장로를 당수로 선택하고 결성된 정당으로 북한 지역의 공산정권에 대항하기 위하여 기독교회가 세운 정당이다. 1946년 3월 1일 해방 후 처음 맞이하는 3․1절 기념행사는 공산정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각 교파연합으로 장대현교회에서 모이는 데 전력을 다하여 주일 선거에서 직접 공산주의자들과 투쟁했으며 한편으로는 장로교 측 이북 5도 연합노회 지도자들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매어 공산당에 대항할 기독교 민주지영 세력을 확보하는데 헌신하였다. 그 노력은 결국 1947년 5월 미소공동회담을 계기로 기독교민주당을 결성하는 것으로 총집결하게 되었다. 이때 장로교 김화식(金化湜) 목사가 당수로, 송정근 목사가 부당수로 선임되었다. 송 목사는 탁월한 지도력과 인격으로 수많은 난제를 풀어나갔다. 그러나 이러한 민주주의 진영의 움직임을 공산당이 그대로 둘 수 없었다. 1947년 6월 15일에 북한 정권은 기독교자유당 창당 발기인들을 검거하여 당수인 김화식 목사를 비롯하여 장로교 연합회장인 김진수 목사, 감리교 서부연회장인 송정근 목사, 서기인 이피득 목사와 김기수, 김현석, 이학봉, 허천기, 기형순, 강문구, 조연창, 윤창덕 목사들을 반동이란 명분으로 체포하였다. 이들에 대한 지독한 고문으로 송정근 목사는 빈사상태까지 이르렀다. 결국 이 기독자유당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제2회 연회에서는 신석구 목사를 연회장으로 선택하여 연회를 구성되었지만 점점 커져가는 공산당의 박해로 인해 서부연회 소속 교회들은 계속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결국 연회는 자연 해산되었고 많은 목사들이 월남하여 북한의 교회는 공동화 현상이 나타났다. 1948년 6월에 제3회 서부연회는 남산현교회에서 개최되어 송정근 목사를 연회장으로 다시 선택하여 재건의 노력을 해보았지만, 1949년 7월 9일부터 11일까지 제4회 서부연회가 남산현교회에서 개최된 것을 끝으로 북한의 교회는 재건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 후로는 초교파적으로 북한 공산당 산하의 조선기독교도연맹이 그 기능을 대신하였다. 해방 후 북한지역에서 재건된 서부연회는 이렇게 네 번 연회를 개최하였고 연회장으로는 송정근 목사와 신석구 목사가 맡았다.
재건된 서부연회 제1대 연회장 송정근 목사
송정근(宋貞根, 호 海心) 목사는 1895년 1월 12일에 황해도 서흥군 도면 도리에서 송경호(宋敬浩)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어려서 유학을 공부했으며 양몽학교(養夢學校)를 졸업하고 1913년 평양 숭실중학교를 입학하여 기독교인이 되었다. 숭실에서 베어드(Willian Martyn Baied, 裵偉良) 교장에게 감명을 받아 복음전도자로 헌신할 것을 결심한 후 1917년 숭실중학교 제13회 졸업생이 되었다. 1920년 전도 사업을 시작하고 1921년에 평양장로회 신학교를 입학하였으나 1년 과정만 수료하고 말았다. 1923년 미 감리회 조선매년회에서 전도사 직첩을 받고 1924년 서울의 협성신학교에 편입, 1927년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바로 조선매년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양양(讓陽 1926~1929)교회를 시작으로 고저(庫低, 1929~1932), 고성(高城, 1932~1935), 비석리(碑石里, 1935~1936), 강서읍(江西邑, 1937~1943) 교회를 담임했다. 강서읍교회를 섬길 때 강서지방 감리사를 역임했으며 도산 안창호와 함께 2대 강서인물로 꼽힐 정도로 주민들의 추앙을 받았다.
광복 후에는 평양 남산현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그해 감리사를 겸하여 서부연회장이 된 송정근 목사는 불타 없어진 남산현교회당을 4년 만에 옛 모습 그대로 복원시키고 북한지역 감리교회를 관장하여 공산주의자들과의 투쟁을 전개했다. 계속 북한 공산당에 연행되어 모진 고문과 박해를 받아 건강이 약해졌지만 남산현교회 담임목사로 있으면서 성화신학교 부교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기독교도연맹은 장로교 평양신학교를 수중에 넣을 무렵에 북조선인민위원회 교육부는 당사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평양신학교와 감리교회의 성화신학교를 통폐합시키는 계획을 추진했다. 교명을 평양기독교신학교로 바꾸고 교장은 장로교 이성휘 목사, 교감은 감리교 송정근 목사가 맡도록 했다.
이렇게 북한의 조선기독교도연맹은 1950년에 장로회 평양신학교와 감리교 성화신학교를 통합하여 자신의 손아귀에 넣은 후 송정근 목사를 연행해 갔다. 연행되는 순간 잠깐 동안 송정근 목사는 기도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나는 이미 순교를 각오한 몸이니 아무 염려 말고 예수 잘 믿고 믿음으로 승리하라’는 부탁을 했다. 그때가 6․25 전쟁이 발발하기 하루 전 1950년 6월 24일이었다. 그 후 그의 행방은 알 길이 없다. 다만 1950년 10월 10일 후퇴하던 공산군이 그를 살해하고 도주하였다는 말이 전해질 뿐이다. 유족들은 모두 월남하였고 부인 안정신(安貞信)과의 슬하에 창화, 계화, 태화와 세화, 인화, 영화를 두었다. 그 중 3남 태화는 목사가 되었고 2녀 인화는 목사의 아내가 되었다.
재건된 서부연회 제2대 연회장 신석구 목사
제2대 서부연회장을 역임한 신석구(申錫九, 호 殷哉) 목사는 1875년 5월 3일 충청북도 청주군 미원면 금관리 구개동에서 당시 향리의 명문인 신재기(申在錡)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조실부모(早失父母)하여 15세부터 방황하며 타락한 생활을 하던 중 경기도 고랑포에서 친구 김진우를 만나 기독교의 권유를 받았다. 1907년 7월 14일에 믿기로 작정하고 교회로 갔으니 그날이 주일이었다. 한 달 후 동향 출신 정춘수 목사를 만나 개성으로 거처를 옮기고 선교사 리드(C.F. Reid)의 어학선생으로 일하면서 세례를 받았다. 1909년 7월 29일에 중생의 체험을 하였고 1917년 9월 24일에 남 감리회 매년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8년 11월 수표교교회를 담임하였을 때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다. 민족대표로 참여해 달라는 오화영 목사의 권유를 받았다. 바로 결정할 수 없어서 그는 하나님께 이 문제를 놓고 간절하게 기도했다. 마침내 1919년 2월 27일 새벽에 다음 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4천 년 전하여 내려오던 강토를 네 대에 와서 잃어버린 것이 죄인데 찾을 기회에 찾아오려고 힘쓰지 아니하면 더욱 죄가 아니냐?”
신석구 목사는 이 음성을 하나님의 응답으로 믿고 즉각 3․1운동의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날 신석구 목사는 체포되어 재판정에 섰다. 그는 한일합병에도 반대하였으니 독립이 될 때까지는 독립운동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결국 2년 6개월의 징역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고 1921년 11월에 만기 출옥하였다. 출옥하고 나서 신석구 목사는 중단되었던 학업도 계속하여 1922년 협성신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원산, 고성, 춘천, 가평, 서울, 철원, 한포, 천안에서 목회를 하였다.
사경회를 인도할 때의 일화다. 신학교 기숙사에서 학생들이 장기를 두고 있었다. 이들을 바라보던 신석구 목사는 성경 보고 기도하라는 권면을 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의 모습에 학생들이 감화받았다. 1934년의 감리교신학교 특별 부흥회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참 신앙 노선과 민족을 위한 사명자에 대해서 강조하기도 했다.
1925년 고성에서 목회할 때 신석구 목사는 가난했으므로 물질의 문제로 고민이 많았다. 1937년 천안에서 목회할 때 비로소 신석구 목사는 새벽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가난의 문제를 해결했다.
‘내가 네게 좋은 집을 주지 아니하고 내가 지던 십자가를 주었다.’
이 음성에 너무 감격하여 많이 울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당하던 가난의 아픔이 모두 사라졌다.
1939년 5월에 부임한 진남포지방 신유리(新柳里)교회를 담임하던 중 1941년 3월 11일 친일파 정춘수 통리자의 친일행위에 반대하여 서부연회에서 퇴회되고 1944년 4월에는 교단 본부로부터 면직처분 되었다. 일제말기 일본이 항복 직전 최대 발악하던 때 대동아전쟁 전승기원 예배 및 일장기 게양을 거부하여 1945년 5월에 수감되어 3개월간 재판 없이 구금되었다가 일본의 패망으로 용강경찰서에서 풀려났다.
해방 후 신석구 목사는 서부연회 재건을 위해 노력했다. 북한에 공산 정권이 세워지고 교회를 향한 대대적인 공산당의 박해가 심했다. 1946년 3․1일 기념 방송에서 공산당이 작성해 준 원고를 읽지 않고 자신의 소신과 생각을 자유롭게 말하여 정치보위부에 끌려가서 고생했다. 공산당이 주는 3․1절 공로상을 거부하고 북조선인민위원회 설립에 냉소적이었다. 공산당의 박해로 신변이 위험해지자 교인들은 남한으로 탈출을 계획했지만 북한 공산당에게 어린양들을 버려두고 갈 수 없다면서 그는 끝내 북한에 남았다.
1947년 4월부터 신석구 목사는 진남포지방 문애리(文艾里)교회를 담임하였다. 이때 ‘진남포 4․19 사건’에 연루되어 우익 인사 48명과 함께 10년 형을 선고받고 평양감옥에 수감되었다. 이 사건은 남한 정부의 지시에 의해 남한 민주 세력의 지원을 받아 5월 1일 May Day를 기해 진남포에서 대대적인 의거 봉기를 계획했다는 것으로 공산당이 조작하여 누명을 씌운 사건이다.
이때 신석구 목사는 모든 책임을 내가 질 테니 젊은이들은 모두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이때 6년 형을 선고받은 두 여학생을 측은히 여겨 모두 22년 형을 받겠다고 한 것이다. 옥중에서도 공산당의 협박과 회유는 계속되었지만 끝까지 굴하지 않았으며 신앙을 지켜 감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크게 감동시키고 위로하였다. 1950년에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 국군이 평양에 진군해 들어가기 전 10월 10일에 공산당의 총에 의해 순교 당하였다.
신석구 목사는 풍부한 동양 고전에 대한 지식으로 기독교를 해석하여 많은 한시를 남겼다. 일생 동안 무명옷으로 된 한복만을 입는 검소함을 몸소 실천하였고 청교도적인 청렴과 결백으로 목회하였다. 그는 입으로만 교훈하지 않고 몸으로 실천하였고 늘 자기의 잘못을 간증하며 눈물로 설교하던 목회자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반일 독립투쟁 업적과 공헌을 기려 1963년 1월 1일 지금의 건국훈장대통령장에 해당하는 건국공로훈장복장(複章)을 추서 하였다. 1968년 9월 14일에는 그의 영현(英顯)을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 1978년 3월 1일 감리교신학대학교에 건립된 ‘감신출신 민족 대표상’에 다른 다섯 분과 함께 그의 흉상이 새겨졌고 1980년 8월에는 청주시 3․1 공원에 충청도민의 성금으로 동상이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