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16 주일설교
겸손의 이유와 방법과 결과
마태복음 21:1~5
시작하는 말
오늘 본문을 읽었을 때 여러분은 약간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본문은 주로 종려주일에 읽었는데 이 가을에 왜 이 본문을 읽었을까? 지금 우리는 마태복음에서 “이루려 하심이라”라는 마태의 설명을 따라가며 살펴보다가 이제 21장까지 왔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생애 가운데 예루살렘을 여러 번 방문했습니다. 아기 때 할례도 받았지만 그때는 자기 발로 간 것이 아니죠. 첫 번째 방문은 12살 때입니다. 그때 유월절 행사를 마치고 친척들이 돌아갈 때 혼자 남아서 율법학자들과 토론한 것은 유명한 사건입니다. 그 후로도 예수님은 해마다 유월절과 초막절에 성전에 올라왔고 공생애 기간에도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여러 번 올라왔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여행할 때 걸어 다녔습니다. 왕이나 장군은 말을 탔고 일부 귀족은 나귀를 탔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은 부자가 아니어서 늘 걸어 다녔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만일 예수님이 편하려고 나귀를 탔다면 여리고에서 감람산까지 25키로 거리를 타고 와야 도움이 됩니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은 계속해서 오르막길입니다. 하지만 벳바게에서 예루살렘은 내리막길이고 거리도 기껏 2~3키로 밖에 안 남았습니다. 우리 집에서 신갈오거리까지가 3키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짧은 거리를, 그것도 내리막길을 왜 굳이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을까요? 전에도 그런 일이 없었지만 종려주일 이후에도 월요일, 화요일, 목요일 세 번 더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서도 걸어가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날 예수님이 나귀를 타신 것은 무슨 이유가 있을까요?
힌트를 드리면, 마태는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하면서 그것이 바로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이런 표현은 마태복음에서 여러 번 나오는데 <마 21:4>에도 나옵니다. 그렇다면 나귀를 타신 이 행동은 어떤 선지서를 이루는 사건이며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예수님의 이 행동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5절에 마태가 인용한 선지서는 바로 스가랴 9:9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신 것이 스가랴의 예언을 이루신 것이라면 스가랴 9:9은 무슨 뜻인지 좀 알아봐야겠죠.
스가랴 선지자는 포로 귀환 시기에 활동했습니다. 스가랴 9장에서는 이방 나라의 심판과 이스라엘의 구원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은 이스라엘에 한 왕이 오시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크게 기뻐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여기서 시온의 딸이라는 말은 예루살렘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이어지는 10절에서는 그 왕은 온 세상을 완전히 평정하고 평화롭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왕은 특이한 왕입니다. 다른 왕은 모두 말을 탑니다. 특히 개선장군들은 백마 네 마리가 끄는 마차를 탑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내시는 이 왕은 특이하게도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시는데 그 이유는 그가 겸손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다른 대통령이 Mercedes Benz Maybach S650 Pullman Guard를 타고 올 때 혼자 소형차 스파크를 타고 오는 것과 같습니다.
나귀는 말보다 작고 값이 싸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상징성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곰은 미련하다, 늑대는 음흉하다 라고 생각하듯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말은 전쟁과 교만을 상징하고 나귀는 겸손과 순종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나귀를 탄 왕은 겸손함을 나타냅니다.
정리하자면 예수님이 나귀를 타신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예수님은 스가랴가 예언한 그 메시아가 맞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겸손한 왕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1)예수님은 왜 겸손한 왕으로 오셨을까요? 2)예수님은 어떻게 겸손을 나타냈을까요? 3)겸손하면 결과적으로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의 겸손은 믿는 신자에게도 직결되는데 오늘은 겸손의 이유와 방법과 그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겸손의 이유: 예수님이 겸손의 모범을 보이셨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심으로 그가 겸손한 왕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왕에게 필요한 것은 능력이지 겸손이 아닙니다. 백성을 다스리는 왕이 폭군이 되어도 문제지만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어서는 통치가 되지 않습니다. 왕은 적군을 잘 물리쳐서 백성을 보호하고 공의롭게 재판하고 공정하게 백성을 사랑하면 좋은 왕입니다.
하지만 왕이 백성에게는 겸손할 필요가 없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했던 대표적인 왕은 다윗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들을 평가할 때 다윗의 길로 행하였다는 말이 바른 왕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런 다윗은 바로 오실 메시아의 표상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께 겸손한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을 성부 하나님과 함께 만드신 하나님이십니다(요 1:3). 그런데 그 예수님은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여 이 땅에 오셨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빌 2:8).
왕 앞에서는 “내 생각에는”이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군대에서 장군이 지시하면 연대장, 대대장은 자기 의견을 말하지 말고 적시 순종해야 합니다. 비행기의 기장, 배의 선장을 캡틴이라고 부르죠. 캡틴이 이 명령하면 승조원은 무조건 복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도 성부 하나님께 복종하는 겸손한 왕이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신앙생활 하는 신자 여러분 역시 하나님께, 예수님께 무조건 복종하는 겸손한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그렇게 해서는 세상을 못 삽니다.”
우리가 말하면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세상을 누가 만들었니? 내가 만들었단다.”
우리가 “하나님 무조건 순종하겠습니다. 손해보더라도 망하더라도 복종하겠습니다.”라고 하면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인생 내가 책임지마. 이 땅에서부터 영원까지 책임지마.” 이 약속을 믿으시면 크게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2. 겸손의 방법: 현실적으로 안 맞아도 순종하셨다.
<마 21:2>에 보면 나귀와 나귀 새끼가 나옵니다. 이 가운데 제자들이 끌고 온 것은 어미일까요? 새끼나귀일까요? 아니면 둘 다일까요? 2절만 봐서는 잘 모르지만 5절과 7절을 보면 새끼나귀입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보면 더 확실합니다.
마가복음 11:2을 보면 그 나귀는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새끼나귀입니다. 여러분이 시골 출신이라면 다 알 것입니다. 한 번도 타 보지 않은 생나귀를 사람이 탔다가는 분명히 사고가 납니다. 생나귀는 껑충껑충 뛰고 자기 위에 탄 사람을 떨어뜨려 버립니다.
생나귀를 사람이 타려면 연습과 훈련 기간이 필요합니다. 처음에는 가벼운 천을 올려놓습니다. 그다음에는 가벼운 짐을 올립니다. 그 뒤로 무거운 짐을 올리고 나중에는 사람이 타 보고 말을 잘 들으면 타고 다닙니다.
그런데 이 새끼 나귀는 훈련도 없이 예수님이 바로 타셨는데 가만히 순종했습니다. 이것은 기적입니다. 아무도 타 보지 않은 생나귀 위에 예수님이 갑자기 탔으니 그 나귀는 얼마나 이상하고 얼마나 불편했을까요? 얼마나 껑충 뛰어 예수님을 던져버리고 싶었을까요? 그런데도 순종했습니다. 생나귀의 순종은 예수님의 순종을 반영해줍니다.
지금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5일 후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못 박힐 것입니다. 생나귀가 예수님을 태운 것도 이상한 일이지만 그것은 예수님이 고난과 십자가가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스스로 들어가는 것과 비교되지 않습니다. 말이 안 되는 순종을 보이시는 예수님을 태웠기에 그 생나귀는 난생처음으로 자기 등에 타신 예수님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유대인과 로마인의 박해와 핍박을 다 받는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순종하는 것은 현실과 너무나 맞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박힐 줄 알면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실 때, 아무도 타 보지 않은 생나귀가 그 예수님을 태우고 묵묵히 걸어간 이 이야기를 듣고 그들도 예수님을 등에 태운 생나귀처럼 순종하기로 굳게 결심했습니다.
우리도 생나귀입니다. 순종하기 싫습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사명을 집어 던져버리고 싶습니다. 돈도 안되고 명예도 안되는 사명을 거부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분명히 선한 일이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지만 현실적으로 상황과는 안 맞고 시기적으로도 안 맞고 어색하고 불편합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고민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신자 역시 현실에서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기가 많이 어렵지만 겸손한 왕 예수님처럼 순종하면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당장 주일마다 예배드리는 예배 성공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전해서 영혼을 구원하기도 어렵지만 전도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매 순간 주님의 음성에 민감하고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3. 겸손의 결과: 예수님이 받는 영화를 같이 누린다
사람을 태워보지 않은 생나귀는 얼떨결에 예수님을 태우고 예루살렘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는 유월절을 지키려고 전국에서 모여온 사람들이 가득했습니다. 사람들은 나귀를 타신 예수님을 위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아 주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열렬히 흔들면서 호시안나, 호시안나 외치더니 그 종려나무 가지를 길바닥에 깔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있었기에 사람들이 깔아 준 옷이나 종려나무 가지를 나귀가 대신 밟고 지나갔습니다. 평소 같으면 짐승이 자기 옷을 밝으면 화를 내었을 사람들이지만 등에 예수님을 태운 나귀가 밟고 지나가자 기뻐하며 감격스러워했습니다.
미물에 불과한 나귀가 예수님을 태우자 사람들이 입는 옷을 레드카펫처럼 밟고 지나갔고 열렬히 노래하며 환영하는 군중 사이로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 환영은 예수님을 환호하는 것이었지만 예수님을 태우고 있는 한 나귀도 그 영화를 같이 누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태운 생나귀는 여러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여러분이 등에 예수님을 모시면 불편하고 시간과 물질과 에너지가 손해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섬기면 예전에는 상상하지 못한 예수님의 영화를 같이 누리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왕이 앉은 의자는 모든 신하와 백성의 절을 받게 되듯이 예수님을 모신 신자 역시 예수님의 모든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
마치는 말
오늘 우리는 평소에는 걸어 다니신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바로 스갸랴가 예언한 그 메시아임을 증명하는 사건입니다. 또 예수님은 세상 왕과는 달리 겸손한 왕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오늘 우리에게 같은 겸손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겸손하게 하나님께 순종하려면 항상 상황이 맞지 않습니다. 시간도 들고, 돈도 들고, 힘도 듭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우리에게 체질이 아닙니다. 경험도 없고 할 줄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사명을 주실 때는 하나님이 능력도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등에 예수님을 태우고 묵묵히 걸어갈 때 예수님이 받으시는 모든 영화를 우리가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내가 십자가를 지고 가지만 결국에는 오히려 십자가가 나를 지고 갔다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내가 지고 주를 따라 갑니다.
이제부터 에수로만 나의 보배 삼겠네.
세상에서 부귀 영화 모두 잃어버려도
주의 평안 내가 받고 영생 복을 받겠네 (찬송가 3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