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나아간다는 믿음 : UN 인권위원의 새로운 인권 이야기
서창록 지음, 2022
프롤로그
안과 밖: ‘우리’는 누구인가?
−“내가 새롭게 깨닫게 된 것은 남을 배려할 때 진정한 자유가 온다는 사실이다.”
2021년 출간한 나의 책《나는 감염되었다》의 마지막 문장이다.
무슨 뜻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었다. 선뜻 대답하기 어려웠다.
출간 후 북토크나 인터뷰를 하면서 이 문장에 대해 해석하는 책을 쓰고 싶다고 여러 차례 얘기했다. 깊은 생각 끝에 쓴 문장이라기보다는 마음에서 우러난 대로 글로 옮긴 것이었는데, 지나고 다시 보니 너무나 많은 뜻을 품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인권을 강조하는 이들은 ‘배려’라는 표현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인권은 말 그대로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이므로 누가 누구를 배려하고 말고 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왜 ‘배려’라는 말을 쓴 것일까?
이 질문이 이 책의 출발점이었다.
‘인권’하면 우리는 주로 ‘개인’을 떠올린다. 개별적인 한 사람의 권리라는 생각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나’는 ‘남’이 없을 때 의미가 흐려진다. 외딴 섬에서 혼자 살아가는 사람을 생각해보자. 그곳엔 그 사람의 인권을 침해할 누군가도, 침해당한 권리를 구제해줄 외부 방안도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나’의 권리는 무리를 이루고 살아가는 ‘우리’ 안에 포함될 때만 진정한 의미를 가진다. 인권은 ‘우리’ 안에 살아가는 무수한 ‘나’들이 모두 함께 행복하기 위해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자는 약속이다. 자유를 포함한 나의 모든 권리가 남을 배려할 때만 가능한 이유가 여기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일까?
‘우리’의 범주는 상황에 따라 변한다. ‘우리’는 가족을 의미할 수도 있고 때로 친구나 동네, 학교, 인종 등으로 경계를 더 넓힐 수도 있다. 지구라는 범주에서 보면 ‘우리’는 대한민국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요즘은 글로벌 시대라 하여 세계시민 교육을 강조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정체성은 대부분 국가 단위에 갇혀 있다.
물론 이보다 더 넓게 경계를 그릴 수도 있다. ‘우리’가 여성을 의미할 때 그 안엔 지구 인구의 절반이 포함되며, 기후위기 앞에서 ‘우리’라 칭할 땐 지구에 사는 모든 이들이 포함된다. 반면 낯선 ‘우리’의 범주도 많다. ‘비장애인’, ‘이성애자’라는 범주는 수많은 이들을 포함하지만 이런 의미로 ‘우리’를 인식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우리’의 범주를 더 크게 그리고 더 다양하게 인식하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유와 평등. 인권을 말할 때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세계인권선언문 1조에는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과 권리에 있어 평등하다”라고 적혀 있다. 대한민국 헌법에서도 자유와 평등을 여러 번 강조한다.
하지만 세상은 그다지 자유롭지도 평등하지도 않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는 충돌하는 경우가 많아 둘을 동시에 완벽하게 성취하기란 매우 어렵다. 이를 놓고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끼리 인류 역사 내내 다투어왔으나, 이기적이면서 동시에 이타적인 인간에게 자유에 더 방점을 두는 개인주의와 평등에 방점을 두는 공동체주의는 둘 다 양보할 수 없는 이념이었다.
수많은 이들이 노력했건만 자유와 평등의 완벽한 조화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변할 뿐이다. 무엇이 정의로운가에 대한 생각도, 인권의 해석도 그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 변화가 급격할수록 사람들 사이의 인식 차이는 커지고 갈등의 수위는 높아진다.
이 시대에 자유와 평등은 어떻게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내야 하는가. 그 사이에 ‘배려’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고민은 깊어만 간다.
자유와 평등의 논의가 활발해지는 와중에 잊힌 인권의 나머지 한 축이 있다. 바로 ‘우애’다. 인권의 기초를 제공한 프랑스 혁명의 3가지 이념은 ‘자유, 평등, 우애(박애, 형제애, 연대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한다)’다. 1948년 채택된 세계인권선언문도 연대의 중요성과 공동체에 대한 개인의 의무를 명확히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인권 관련 제도가 정교하게 발전하면서 연대의 중요성은 오히려 빛이 바래고 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개인의 권리 측면에서만 인권이 강조되는 형국이다.
서구식 근대적 국가를 세우며 우리는 서구식 자유의 개념도 함께 배웠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때로는 피를 흘렸다. 그 결과 정치적 민주화를 이루고 경제적 발전도 성공적으로 이끌어왔다. 우리는 너무나 훌륭한 학생이었다.
나 역시 그랬다. 자유가 최우선 가치라고 생각했다. 1980년대 미국에 유학을 가서 처음 맛본 자유가 너무 짜릿했다. 자유가 있어야 잘 살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유가 없으면 발전도 없고 평화도 없다고 믿었다. 자유를 얻고 인권을 지키는 일을 평생 업으로 삼겠다고 결심한 것도 이 무렵이다.
그러나 자유를 얻는 과정에서 우리는 많은 부작용을 겪어야 했다.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평등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 구성원 간의 평등이 어떻게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의견을 나누는 형태는 아니었다. 그 대신 생각이 다른 사람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며 치열하게 달려왔다.
그 과정에서 우리 사회의 선도적인 이념으로 자리 잡은 자유라는 가치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지 못했고, 다수가 지지할 수 있는 내용의 평등을 창조하지도 못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우애나 연대에 대해서는 생각도 못한 게 어쩌면 당연하다.
과연 주체성 없는 자유의 개념이 언제까지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
해방 이후 우리가 서구에서 받아들인 또 한 가지는 주권국가 체제다. 이 제도에 따르면 주권을 가진 각 국가는 자유로운 주체로서 다른 나라에 간섭받지 않게끔 되어 있다.
국가에 주어진 이 자유는 영원할 것인가. 큰 고민 없이 국가들에 주어진 이 자유가 인류에게 얼만큼의 평화와 번영을 제공할 것인가. 남을 배려하고 양보하면 내게도 자유가 오듯,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배려하며 자유를 얻는 것은 가능한가. 국가 안에서도 연대가 어려운데 과연 국가 간의 연대가 증진될 수 있을까. 서로 연대하지 않으면 결국 우리 모두 위험에 처하리라는 걸 사람들은 깨닫게 될까. 그렇게 되면 세상은 과연 달라질까.
이런 고민에 빠져들기에 앞서, 근대 주권국가 체제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17세기부터라 해도 400년 남짓에 불과하고, 전 세계가 진정한 주권국가 체제에 들어선 것이 2차 세계대전 이후라고 본다면 70여 년밖에 되지 않는다. 현재의 이 시스템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누구도 확답할 수 없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여기 있는 것들, 그 너머를 상상해야 한다.
디지털 기술을 바탕으로 한 4차 산업혁명,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 한 치 앞도 예상하기 어려운 기후위기 등 누가 뭐래도 지금은 대변혁의 시기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지금 일어나는 변화에 제대로 대처해야 한다. 아울러 그 변화의 한가운데에서 평범한 나와 이웃들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지, 다가올 미래에 인간의 존엄은 어떻게 지켜낼 것인지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이제 대한민국은 더 이상 남이 만들어놓은 것을 모방하고 수동적으로 배우는 처지가 아니다. 문제를 제대로 진단하고 이념과 제도를 선도하며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이런 숱한 고민과 질문을 가슴에 품은 채, 이야기를 시작한다. 내 이야기이자 우리의 이야기를.(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