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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복수
Marx’s Revenge(2002)
메그나드 데사이 지음, 김종원 옮김, 아침이슬 2003.
자본주의의 미래Ⅰ: 종말은 얼마나 빨리 올 것인가?
들어가며
마르크스가 죽은 1883년에 자본주의는 장기 하강기에 놓여 있었다. 가격 하락 추세가 장기간 지속되었다. 이는 증기선과 수에즈 운하 등 빨라진 운송 시설과 전신 및 대서양 횡단 케이블 등 통신상의 새로운 혁신 덕분이었다. 유럽인에게 전에는 알려져 있지 않았던, 혹은 단지 변경에 인접한 변두리 정도로만 알려진 영토가 식량과 원료 공급원으로 약탈의 대상이 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인도, 남북 아메리카 등 모든 영토가 원료 공급원이 되었다. 철도가 유럽 각국으로 이어졌고, 북아메리카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인도에서는 1853년에 철도가 처음 부설되었다. 방적, 방직을 함께 하는 면직물 공장이 서유럽과 북아메리카 일대뿐만 아니라 인도에서도 뿌리를 내렸다.151
영국은 자유무역의 교의를 전도하였고 식량 수입 정책을 자유화하였는데, 이것이 1840년대에 전국을 뒤흔든 곡물법 논쟁의 핵심이었다. 모든 ‘신흥 공업’국이 자유무역이라는 준칙을 따른 것은 아니었다. 미국과 독일은 거부하였고, 프랑스는 언제나 마지못해 자유무역을 좇았다. 자유무역을 가장 먼저 산업화한 영국에 득이 되었는데, 그것은 자유무역이 영국 제조업을 위한 시장과 축적 자본의 투자 기회를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런던시는 부자들의 자금을 세계 곳곳의 수익성 있는 지역으로 방출시키는 출구가 되었다. 서유럽의 저축 자금이 아메리카 대륙과 중부 및 동부 유럽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서유럽은 곧 아시아 구석구석까지 뻗어나갔고, 25년 내로 아프리카 또한 식민지화할 참이었다.152
공업국 클럽에 들기를 갈망하는 나라는 모두 금본위제를 채택해야 했다. 러시아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1897년에 이 대열에 합류했다. ‘황금 십자가’는 미국 농민들에게는 저주의 대상이었다. 금본위제 때문에 곡물 가격이 하락하면서 농민들이 남북전쟁기의 인플레 연간에 큰 빚을 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금은 은을 하위 파트너로 동반하면서 보편적으로 선호되는 기축 통화가 되었다. 인도에서는 은제 루피화가 통용되었다. 은화는 미국 서부에서 유럽의 스텝 지방에까지 널리 퍼졌다.
또한 유럽 심장부에서 아메리카 대륙과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로 사람들이 대거 이동하였다. 인도인은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서인도 제도로 이주하였는데, 주로 도제 계약 노동자로 갔지만 상인이나 대금업자로 가는 경우도 있었다. 1891년 간디는 인도인 회사의 소송을 의뢰 받고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건너갔다. 중국 노동자는 미국 서부 해안과 오스트레일리아, 동남아시아로 이주했다. 하지만 노동의 이동이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유럽의 백인 과잉 인구는 아메리카 대륙과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로 이주하였다. 아시아의 갈색 및 황색 주민들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의 변방 및 주변부로 이동하였다. 이러한 패턴은 이후 백 년 동안 깨지지 않게 된다.152-153
그럼에도 이것은 글로벌화한 세계였다. 아프리카 쟁탈전은 마르크스 사후 얼마 안 되어 그 절정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자본 역시 노동처럼 지구를 가로질러 자유롭게−비록 균등하게는 절대로 아니지만−이동하였다. 기술 발전이 시간뿐만 아니라 거리도 줄이고 있었다. 찰스 네이피어 경은 1843년에 신드(파키스탄 남동부의 지명) 함락 소식을 화이트홀에 있는 수상에게 한 단어로 된 전문−Peccavi−로 타전할 수 있었다. 이제 지구의 지도를 거의 완전하게 그릴 수 있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중요한 지리상의 발견은 다 이루어진 셈이다.
1870~1913년에 경제 성장은 더욱 빨라졌는데, 이것이 근대적 세계화의 제1막이다. 이 초창기의 소득에 관한 데이터는 빈약할 뿐만 아니라 신뢰하기도 어렵다. 당시에는 국민소득이라는 개념조차 새로운 것이었고, 앞에서 본 것처럼 마르크스는 국민소득 계산을 계산하느라 애를 먹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앵거슨 매디슨의 선구적인 노력 덕분에 훌륭한 산정 결과를 가지고 있다. 매디슨의 데이터는 유럽의 좀더 ‘선진적인’ 자본주의 국가(오스트리아, 벨기에, 덴마크, 핀란드,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스위스, 영국)과 캐나다, 미국, 일본, 오스트레일리아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이들 16개국의 인구는 1820년에 약 1억 5천만 명이던 것이 1870년에 2억 9천 5백만 명, 1913년에는 근 4억 9천 5백만 명으로 늘어났다. 93년에 걸쳐 인구가 세 배로 늘어나는 동안 소득도 함께 늘었다. 처음 50년 동안(1820~70년)에는 일인당 연간 실질소득이 평균 0.9%의 성장률을 보였지만, 다음 시기(1870~1913년)에는 평균 1.4%의 상장률로 뛰어올랐다. 이러한 성장률이 너무 완만하다고 생각할는지 모르겠지만, 80년 동안 매년 0.9%의 성장률을 기록하면서 소득이 두 배가 되며, 매년 1.4%씩 성장한다면 소득은 50년 만에 두 배가 된다.153-154
그렇게 볼 때 일인당 소득은 대체로 세 배가 되었고, 인구도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전체 소득−이 16개국의 GDP−은 한 세기에 걸쳐 아홉 배가 증가하였다. 이것은 물론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이 전체적인 총합을 세부적으로 보면 일부 나라들−캐나다, 미국, 독일, 스웨덴−은 급속히 성장한 반면, 영국 같은 선발 공업국은 그에 비해 완만히 성장하였다. 물론 주기가 존재했다. 50년에 걸친 장기 파동(1920년대에 이에 관해 처음 글을 쓴 러시아 경제학자의 이름을 따서 ‘콘드라티에프 주기’라고 부르는)이 하강기와 상승기로 구분되어 그 주기가 확인되었는데, 1810~17년에서 1844~51년까지 하강기, 1844~51년에서 1870~75년까지 상승기, 그리고 다시 1870~75년에서 1890~96년까지 하강기, 이어 1890~96년에서 1914~20년까지 상승기가 그것이다. 이들 연대는 너무 포괄적이고 임시방편적이다. 콘트라티에프는 자신이 정의한 ‘파동들’에 현대의 연구가 인정하는 것보다 더 큰 규칙성을 부여했다. 그렇다 해도 이 연대는 마치 자본주의의 풍토병과도 같은 순환 성장의 그림을 제시해 준다. 마르크스는 이 점을 처음 지적한 경제학자였다. 물론 성장은 균등하지 않았다. 일국 내에서나 전지구적으로나 또는 시간상으로나 어느 모로든 균등한 성장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소득과 부의 불평등은 봉건 시대에 매우 첨예하였다. 자본주의가 이러한 불평등을 증대시키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도시화가 진행되고 새로 등장한 고가품을 입수할 가능성이 생겨난 덕분에 불평들은 눈에 확연히 드러나게 되었다. 도시 인구가 늘어나면서 주택지와 거리가 바글거리자 부유한 계급은 대중이 폭도로 급변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을 느꼈다. 사회 문제에 관심 있는 중간 계급 지식인과 급진적 개혁파는 너무도 확연히 눈에 보이는 빈곤을 낳은 산업화와 경제적 진보의 본질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당국에서 토마스 카알라일과 존 러스킨은 이 새로운 질서에 대한 비판의 선봉에 섰다. 이보다 훨씬 앞선 1813년에 로버트 오웬은 급진적 해결책을 내놓았다. 인간 역사상 처음으로, 빈곤이 철폐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런던의 찰스 부스와 요크의 시봄 로운트리의 연구는 빈민들의 낮은 생활수준을 부각시켰다. 소득과 부의 불평등은 애덤 스미스가 예언한 것처럼 자본주의의 확산과 함께 증대하였다. 그렇다면 사회의 최저 빈곤층이 이전 세기의 부유층보다도 더 나은 생활수준을 누리기는 했을까?154-155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이런 생각에 무관심했다. 유럽의 중간 계급과 지배 엘리트들이 무언가 두려워하는 게 있었다면 그것은 노동자의 소요였다. 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노동자를 대변한다고 자처하는 정당도 결성되었다. 참정권 확대를 위한 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유럽의 대다수 지역(프랑스와 네덜란드를 제외하고)에서 군림하고 있던 귀족은 노동자 대중은 관두더라도 벼락부자가 된 부르주아의 정치권력 요구에 적응하느라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이 시기(1870~1913년)에 다양한 방식으로 개혁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지배 엘리트의 범위가 귀족에서 부르주아지로 꾸준히 아래로 그리고 바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음을, 달리 말하면 부르주아지가 노동자 계급에게 권력을 용인해 주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자본주의가 안착할수록 정치권력과 경제적 개선을 위한 노동자 운동도 확고히 자리를 잡아갔다.155-156
독일 사회민주당
1875년 대중적 지지를 받는 노동 계급 정당이 독일에서 출현했다. 이 정당의 등장 자체가 하나의 역설이었는데, 왜냐하면 독일은 당시 자본주의적 생산으로 보나 정치 참여도로 보나 최선진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은 마르크스에 충성한다고 자처하는 한 분파와 페르디난트 라살레를 추종하는 다른 한 분파의 통합으로 결성되었다. 라살레는 대중적인 인기가 있는 낭만파 인사로서 임금 철칙(Iron Law of Wages)을 신봉하였는데, 임금은 오직 자본주의가 폐지될 때만 폐지될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마르크스는 라살레가 혼란스럽고 부정직하다고 생각했지만, 라살레의 이른 죽음으로 두 당파는 쉽게 통합할 수 있었다. 고타 대회에서 SAPD(독일 사회주의 노동자당)는 정식으로 창당했다. 이 당은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정당일 가능성을 지녔지만(당의 명칭은 나중에 독일 사회민주당(SPD)으로 개칭되었다), 그 강령은 마르크스를 기쁘게 하지 않았다. 그는 강령이 너무 라살레적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는 신당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빌헬름 브라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와 엥겔스가 “전술(前述)한 강령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절연하고 그 강령과 우리는 무관함을 밝힌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사람들이 그와 엥겔스가 당을 원격 통제한다고 생각하길 원치 않았지만, 그 강력은 “전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며 당을 타락시킬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이론 대신 라살레의 이론이 반영된 강령의 결함들을 지적해 냈다. “이 문단의 첫 부분인 ‘노동은 모든 부와 모든 문화의 원천이다’라는 말은 틀렸다. 노동은 모든 부의 원천이 아니다. 자연도 노동과 마찬가지로 사용가치의 원천이다.(그리고 물질적 부는 바로 이 사용가치로 이루어진다!)” 그는 또한 강령의 첫 문단처럼 ‘사회의 모든 성원은 사회의 온전한 노동 소득에 대해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말하는 것도 오류임을 지적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명제가 공동 사회가 취하는 분배의 청사진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이 <고타강령 비판>에서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156-157
“노동수단을 사회의 공유재산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라고! 이 말은 노동수단을 사회의 “공유재산으로 전화시키는 것”을 뜻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별 문제가 아니다.
“노동 소득”이란 무엇인가? 노동 생산물인가, 아니면 그 가치인가? 또 후자의 경우라면 생산물의 총 가치를 말하는가, 아니면 소비된 생산수단의 가치에 노동이 새로 첨가한 가치 부분만을 말하는가?
“노동 소득”이란 라살레가 명확한 경제학적 개념 대신에 사용한 쓸모없는 관념이다.
“공정한” 분배란 무엇인가?
부르주아는 오늘날의 분배가 “공정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단 말인가?
또 실제로 오늘날과 같은 생산양식의 토대 위에서는 그것이 유일하게 “공정하지” 않은가? 경제 관계가 법적인 개념에 의해 규제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법적인 관계가 경제 관계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 또 사회주의 내의 종파주의자도 “공정한” 분배에 관하여 각양각색의 관념을 갖고 있지 않은가?157-158
이런 경우에 “공정한 분배”라는 말을 보고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첫 문단과 이 문단“을 비교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문단은 ”노동수단이 사회의 공유 재산이며 노동 전체가 집단적으로 규제되는“ 사회를 염두에 두고 있는데, 첫째 문단에서는 ”노동의 소득이 온전히, 동등한 권리에 따라 사회의 모든 성원에게 속한다“고 되어 있다.
”사회의 모든 성원에게“라고?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그렇다면 ”온전한 노동 소득“은 어떻게 되는가? 노동하는 사회 성원에게만 속하는가? 또 그렇다면 모든 사회 성원의 ”동등한 권리“는 어떻게 되는가?
그러나 ”사회의 모든 성원“이나 ”동등한 권리“니 하는 것은 분명히 빈말에 불과하다. 문제의 핵심은 이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노동자가 라살레가 말하는 ”온전한 노동 소득“을 받아야 한다는 데 있다.
만일 우리가 ”노동 소득“이라는 말을 노동의 생산물이라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집단적 노동 소득은 사회의 총생산물이 될 것이다.
이제 거기서 다음과 같은 것들이 공제되어야 한다.
첫째: 소비된 생산수단을 보전하는 데 필요한 부분.
둘째: 생산을 확장하기 위하여 추가될 부분.
셋째: 불의의 사고나 자연 재해 등에 대비한 예비금 또는 보험금.
”온전한 노동 소득“ 중에서 이런 부분을 공제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꼭 필요한 일이며, 그 크기는 현존하는 수단과 역량에 따라, 부분적으로는 확률 계산에 따라 결정될 것이지 결코 공정성에 따라 산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158-159
마르크스의 편지는 별반 효과를 미치지 못했다. 라살레 파는 당내 다수파였고, 그들의 견해는 마르크스에게 아무리 혼란에 찬 견해로 보일지라도 당내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점했다. 그러나 그때 비스마르크는 대규모 노동자 계급이 각종 중간 계급 개혁 정당과 결합하여 노동자의 이해와 민주주의의 이해를 들고 나오는 데 위험을 느끼고 있었다. 독일은 이 시기에 다른 선진국보다 성인 남성 참정권자의 수가 더 많았다. 유럽 12개국이 평균 17.8%(영국은 1868~73년에 단지 14.9%)였는 데 비해 독일은 그 비율이 33%였다. 프랑스(43%)와 스위스(38.7%)만이 독일보다 비율이 높았다. 따라서 비스마르크는 1878년에 사민당을 불법화 시켰다. 당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망명을 떠나야 했고, 189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당 활동에 대한 금지 조항이 철폐되었다. 그 동안 사민당은 계속해서 선거에 나갔으며, 지지도는 1881년에 31만 2천 표에서 1890년 142만 7천 표로 늘어갔다.
그러나 당의 불법화와 지도자의 국외 망명은 사민당을 급진화시키기도 했다. 당은 더욱 공공연하게 마르크스주의적으로 되었다. 당의 지적 지도자인 칼 카우츠키는 마르크스에 대한 유권 해석자로서 건재해 있는 엥겔스와 긴밀히 협력하였다. 《고타 강령 비판》은 1891년에 출간되었는데, 아직 살아 있는 일부 지도자의 체면 때문에 몇몇 구절이 삭제된 채 발간되었다. 그러나 이때 독일 사민당은 유럽의 모든 신생 사회주의 정당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존경받는 당이 되어 있었고, 그 교의는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개혁과 혁명을 융합하고 있었다. 1889년 7월 14일 프랑스 대혁명 1백주년 기념일을 맞아 유럽 각국의 사회주의 정당 지도자는 국제노동자대회(International Workingmen’s Congress)를 창설하기 위해 파리에 결집하였다. 이번 대회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64년에 최초로 창설했지만 1874년에 해산되고 만 대회의 부활이자 재창건인 셈이었는데, 마르크스 당시보다 더 많은 나라를 대표하였고 가맹 정당의 규모도 훨씬 더 컸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사회주의를 목표로 하였고, 권력 획득을 위한 민주적 방법을 공약하였다.159-160
사회주의(혹은 제2) 인터내셔널로 불리게 된 이 대회는 1889년 7월 14일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우리의 목표는 노동자의 해방과 임금 노동의 폐지이다. 또한 성과 국적에 관계없이 모든 남녀가 모든 노동자에 의해 생산된 부를 누리는 사회를 창조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마르크스가 비판했던 고타강령의 논조가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모든 노동자에 의해 생산된 부“) 그러나 사회주의의 역사를 연구해온 최근의 한 역사가가 지적한 것처럼, 운동의 장기적인 목표는 “자본주의의 파괴, 그리고 생산이 생산자들의 집단적 통제에 종속되는 사회의 확립”인 반면, 직접적이고 단기적인 목표는 많은 부분 개량주의적인 것, 즉 “자본주의 하의 노동 계급 생활을 견딜 만하고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살아 있었다면 그들에게 경고했을−그리고 자본주의의 경로에 관한 그의 다양한 분석에서 실제로 경고한−문제가 존재했다. “사회주의자가 더 성공적으로 되면 될수록 그들은 자신들이 자본주의의 번영에 더욱더 의존하게 되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역설은 독일 사민당에서 첨예하게 드러났다. 당의 설립과 성장은 독일 자본주의의 급속한 성장기와 시기적으로 일치했다. 일인당 소득은 연간 1.6%의 성장률을 보이고 있었고(1870~1913년 사이에 두 배로 늘었다). 인구도 70%나 증가했다. 새로운−마르크스주의적인−에어푸르트 강령을 채택한 1891년 당은 장기적으로는 혁명적 시각에 바탕을 두었지만, 그러나 단기적으로는 개량주의적 요구에 집중하고 있었다. 성인 보통선거, 비밀투표, 관리의 직접 선출, 누진 소득세, 여덟 시간 노동일, 14세 이하의 아동 노동 금지 등등이 그러한 요구였다.160-161
그럼에도 혁명적 요구와 개량주의적 요구 사이에의 긴장은 사라지지 않았다. 독일 사민당은 공황과 증대되는 자본 집중에도 불구하고 지속할 것으로 예상되는 체제와 대면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당은 직접적이고 단기적인 이득을 위해 싸워야 하는가? 아니면, 혁명 정당으로서 자본주의의 불가피한 종말을 앞당기기 위해 싸워야 하는가? 긴장은 우리가 5장에서 본 것처럼 마르크스 자신의 모호한 정식화에서 연유한다. 《공산당 선언》의 혁명적 전망은 《자본론》 1권의 한 장에서 반복 언급되고 있지만,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복잡한 분석적 이해는 마르크스를 훨씬 더 미묘한 해석을 내포한 이해로 인도하였다. 어느 쪽이 맞는 것인가?
정당은 이념적 명료성을 바탕으로 건설될 수는 없다. 특히, 일단 그 당이 일정 규모에 도달하고, 선거 참여와 함께 대중적인 당원을 기반으로 한다면 더욱 그렇다. 독일 사민당은 마르크스 사상의 어떤 한 가닥을 선택하는 대신에 마르크스를 선택했다. 마르크스의 말은 유권적인 지위를 가졌지만, 그의 말이 자체 모순을 보일 때는 또 한 사람의 권위 있는 인사−대부분의 경우 칼 카우츠키−가 그 차이를 해석하고 화해시켜야만 했다. 한 사람의 사상을 그 같은 무비판적 위치로까지 격상시키는 이러한 관행은 나중에 어려움과 마찰만을 가져다 주게 된다. 그러나 독일 사민당은 진지한 방식으로 마르크스의 저작과 맺어져 있었다. 그 당은 이념 정당이었다. 이후 당의 전투는 단지 독일 지배계급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그 자신의 대열 내에서도 펼쳐졌다. 노동조합주의자와 이론가 사이에, 그리고 이론가들끼리, 혁명적 길을 주창한 좌파와 개량주의적 길을 찬성한 우파 사이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던 것이다. 분쟁의 근원은 물론 자본주의 동학(動學)에 관한 것이었다.161-162
독일 사민당의 우익을 형성한 노동조합 임원⋅간부들은 노조원을 위한 임금 인상과 고용 안정 및 확대를 이루어 내는 데 관심이 있었다. 이러한 요구는 불황보다는 호황의 시기에 쉽게 충족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들은 파업이라는 무기를 정치적이라기보다는 도구적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정치가들’−당내 좌파에 속한 지식인, 그리고 심지어는 우파에 속한 일부 지식인−은 자본주의 질서의 해체와 마비에 관심이 있었다. 라살레는 노동조합은 임금 철칙에 도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필요한 것은 민주적 수단으로 자본주의를 완전히 타도하는 것이었다. 만일 자본주의의 연속적인 위기가 점점 더 심각해진다면, 좌파는 체제를 파괴하기 위해 투쟁하는 그 전략에서 옳음이 입증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지속하면서 위기는 사장이 아니라 노동자를 곤궁에 빠뜨렸다.
그러나 좌파 진영에서도 자본주의의 급속한 성장을 주장할 수 있는 한 지류가 존재했다. 마르크스의 정식화에서 보면 노동자는 대규모 산업체−크면 클수록 더 좋다−에서 일함으로써 규율 있는 군대가 될 수 있다. 노동자의 혁명적 조직이 강해지려면 자본주의는 성장해야만 했다. 자본주의가 여전히 그 초기 단계에 있는 동안−즉 부르주아지가 여전히 반동적 봉건 세력과 싸우고 있는 동안−자본주의의 성장에 반대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투쟁을 발 밑에서 무너뜨리는 것이다. 사회주의로의 속성 이행을 꿈꾼다고 해서 어떠한 마일리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같은 꿈은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가 품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나중에 보겠지만, 사회주의는 오직 자본주의의 완전한 발전 이후에야 비로소 올 수 있음을 ‘입증’한 마르크스의 이론을 사용함으로써 이들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을 패퇴시킨 것은 바로 레닌이었다. 이것은 물론 레닌이 권력에 오르기 거의 25년 전 일이었다.162-163
(계속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