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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
2017. 9. 24(주일낮예배) 사도행전 26:1-8
맑고 화창한 날에 모세와 예수님과 하나님이 골프장를 찾았다. 그리고 제일 먼저 모세가 골프채를 잡고 티샷을 날렸다. 그런데 모세가 친 공이 오른쪽으로 날아가서 그만 호수에 빠지고 말았다. 원래 골프를 치면 이때는 벌점 1타를 받고 다시 처음부터 치면 된다. 그런데 모세는 공이 호수에 빠지자 골프채를 든 손을 호수를 향하여 펼쳤다. 그때 호수가 갈라져 모세는 호수로 들어가서 공을 쳐서 2번만에 홀인을 시켰다.
그 다음은 예수님이 순서였다. 예수님은 힘차게 공을 쳤는데, 예수님의 공도 오른쪽으로 휘어져 가서 호수에 빠졌다. 그때 예수님은 물위로 걸어가셔서 공을 쳐서 홀인을 시켰다. 그래서 예수님도 2타만에 공을 넣었다.
그 모습을 보며 웃고 계시던 하나님이 이제 골프채를 잡았다. 그리고 하나님이 티샷을 날리자 그 공도 오른쪽으로 날아가 호수에 빠지고 말았다. 그 순간 큰 물고기가 그 공을 입에 물었다. 그때 독수리가 날아와 큰 물고기를 발에 움켜쥐고 하늘을 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홀 위로 날아갈 때 큰 물고기가 물고 있던 공을 떨어뜨려 그대로 홀안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홀인원을 한 것이다. 이것을 지켜 본 예수님은 원망어린 목소리로 하나님께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제발 골프 좀 정상적으로 치세요!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 모세와 예수님과 하나님이 치는 골프가 재미있어 보이는가? 모세가 지팡이를 든 손을 펼쳐서 홍해를 가른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이 역사로 인하여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다. 이것은 예수님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께서 풍랑이는 바다를 걸어오신 것은 단순히 두려워 떠는 제자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이를 통하여 제자들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고 예수님을 향한 바른 신앙고백을 한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기적은 이렇게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이 골프치는 것과 같은 기적을 바라고 있다. 그래서 내 삶에 문제가 해결되고, 남들이 경험할 수 없는 신비를 경험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저와 여러분이 바라는 기적은 어떤 것인가? 교리공부를 하면 구원의 서정이라는 것을 배운다.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가 되어서 우리를 역사 안에서 부르시는 것이다. 이것을 소명(Calling)이라고 한다. 이렇게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도록 믿음을 더하여 주신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는 것이 회개(회심)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회심한 우리를 하나님은 칭의의 은혜를 주어서 법적으로 죄없다는 선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의롭다 함을 받은 우리를 하나님은 양자로 삼아주시고, 이제 아버지 된 하나님을 닮아가는 성화의 단계를 걷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연약한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여 주신다. 이것을 성도의 견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눈으로 보는 영화의 단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 구원의 서정을 고려신학대학원의 유해무교수님은 구원의 은덕이라고 표현한다. 왜냐하면 구원의 서정은 하나님의 부르심, 믿음, 회심, 칭의, 양자, 성화, 견인, 영광이라는 시간적 순서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은 이 순서를 바꾸어서 우리를 영광의 자리로 인도하실 수 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내 의지와 수고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하나님의 은덕으로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이제 내가 변화된 것이 가장 큰 기적이 되는 것이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믿는가? 누가복음 15장에는 잃은 양의 비유,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 그리고 잃은 아들의 비유가 나온다. 그 중에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잃은 아들의 비유를 우리는 탕자의 비유라고 한다. 아버지에게 2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어느날 둘째가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둘째는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서 먼나라로 떠나서 아버지의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다 탕진해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버지는 둘째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아직도 상거가 먼데 돌아오는 아들을 발견한 아버지는 달려가서 부둥켜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는 것이다.
지금 둘째의 아버지가 아들을 안는 모습을 상상해 보기 바란다. 아들은 아버지가 옷과 신을 입혀야 할 만큼 상거지가 되어져 있었다. 그러면 그 아들의 몰골이 얼마나 더럽고 추했겠는가? 그런데 아버지가 그 아들을 먼저 알아본 것도 놀라운데, 그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춘다는 것은 정말 상상하기가 힘들다.
그런데 우리가 당시 유대사회의 문화를 안다면 이 부분은 더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당시 유대사회는 아버지가 돌아가셔야 유산을 상속으로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둘째가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한 것은 아버지 돌아가시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둘째는 아버지에게 재산적인 손해만 입힌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가슴에 못을 박은 아들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가슴에 못을 박은 아들을 기다렸고, 아들이 돌아왔을 때 기쁨으로 달려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추는 것이다. 아니 아버지의 사랑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아들의 수치와 허물을 가리기 위하여 옷을 입히고, 신을 신기고, 그 손에 가락지를 끼워서 자랑스러운 아버지의 아들의 자리로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탕자가 아들의 자리를 차지하는 방법이다.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먼나라에 가서 더 많은 돈을 벌었기 때문에 아들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고 아들의 목을 안아주시는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이 탕자를 아들의 자리로 회복케 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저와 여러분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가? 죄인된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또 그 하나님 앞에 회개할 수도 없는 존재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끊임없는 기다리심과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가 점점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화되어져 가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점점 성화되어져 가고 있는가? 공유호장로님가정에서 종종 연락이 온다. 키르키즈스탄에 도착해서 오집사님이 몸이 아파서 힘들어 하는 시간도 보내었고, 그런 상황 가운데 공유호장로님 가정은 집을 구하였다. 그런데 그 집에 물이 새서 세탁기를 돌릴 수도 없고, 또 공사를 하기 위하여 배수관을 파헤쳐 놓았는데 우리나라와 달라서 언제 수리가 완공될 지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스도 들어오지 않아 부스타에 밥을 해서 먹고 있으며 와이파이는 연말이 되어야 사용할 수 있을 것같다는 것이다. 그 장문의 문자를 보는 순간 아내는 눈물이 글썽거리기 시작했다. 타국에 산다는 것도 두렵고 힘들텐데 집안은 정리가 되지 않고, 부스타에서 밥을 하고 있는 오집사를 생각하니 마음이 짠해 질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가정을 위하여 기도했다.
그런데 그때 생각한 난 것이 5년이나 10년 뒤의 모습이었다. 지금은 정말 두려움과 불편함으로 어수선하게 사역을 시작하고 있지만, 10년이 지났을 때 공유호장로님을 통하여 공부한 학생들이 키르키즈스탄의 곳곳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모습을 생각하니 가슴이 설레였다.
어떻게 공장로님집의 아픈 상황을 두고 기도하면서 가슴설레일 수 있었는가? 대학 강의시간에 교수가 학생들에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는가?하고 물었다. 그 말에 학생들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교수님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악도 존재하므로 하나님은 악도 창조하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하나님이 악을 창조하였다면 하나님은 악한 분이다고 이야기 하였다. 교수님은 이 논리를 펼친 후에 아주 만족해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때 한 학생이 교수님께 질문을 해도 되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그 학생은 교수님께 ➀추위가 존재하는지를 물었다. 그리고 학생은 물리학 법칙에 의하면 추위는 열의 부재이지, 추위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단지 우리가 춥다고 말하는 것은 사람이 자기가 느끼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지 추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학생은 교수님께 ➁어둠이 존재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때 교수님은 존재한다고 대답했다. 그 대답에 학생은 과학자들이 어둠을 독자적으로 연구하지 못하는 것은 어둠은 어둠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빛의 부재현상이다고 하였다. 그리고 학생은 교수님에게 세 번째 질문으로 ➂악이 존재합니까? 하고 물었다. 학생의 이 질문에 교수는 사회현상을 볼 때 악은 존재한다고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렇게 대답하는 교수님에게 학생은 악은 존재하지 않거나 만약 존재한다고 해도 스스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악은 하나님의 부재이며, 하나님 부재현상을 인간들이 표현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고 설명하였다.
이렇게 교수님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한 학생이 바로 아인슈타인이다. 아인슈타인은 하나님이 존재하는 곳에는 반드시 선한 역사가 일어나고, 하나님이 부재한 곳에는 반드시 악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근거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공유호장로님의 가정에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겠는가?
이제 오늘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에 올라간 사도바울이 유대인의 핍박으로 인하여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때 유대 분봉왕 아그립바가 찾아 온 것이다. 그 아그립바에게 바울이 한 말이다.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함께 읽어보기 바란다.
(행 26:6-7)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7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것이니이다
북이스라엘이 BC 721년에 앗시리아에 의하여 멸망하였고, 남유다는 BC 586년에 바벨론에 의하여 무너졌다. 그리고 바벨론이 무너진 후에 페르시아제국과 헬라제국과 로마제국의 시대가 되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 유대인들이 가진 소망은 오직 하나님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하나님께 소망을 둔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소망을 둔 바울을 죽이려 한다는 것이다.
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겠는가? 바벨론에 의하여 나라를 잃은 유대인들은 바벨론 제국에서 자신들을 구원할 하나님을 믿고 소망하였다. 그리고 바벨론이 무너지고 페르시아 제국이 섰을 때 그들은 이제 페르시아에게 구원할 하나님을 소망하였다. 그리고 지금은 로마에서 자신을 구원할 하나님을 믿고 소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나라를 잃은 유대인들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나라를 구원해 주실 것을 소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의 필요에 의한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천하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그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핍박과 고난을 당함에도 불구하고, 죄악 가운데 우리를 구원하신 성삼위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바울이 유대인과 다른 신앙을 가질 수 있었겠는가? 오늘 본문은 AD 60년 경에 일어날 사건이다. 그러므로 대제사장 중에 일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또 부활하신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여서 지금 예수님을 증거하는 바울을 고소하고, 죽이고자 하는 생각이 가득했던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바울이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창세전에 바울을 택하여 주시고, 때가 되어서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바울은 유대인과 다른 소망을 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어떻게 바울이 유대인과 다른 소망을 품고, 다른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는가?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동일한 은혜를 베풀어 주었다. 그래서 예수를 주시라 고백할 수 없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하고, 또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천국을 소망하며 이 세상과 싸우며 조금씩 변화되어져 가는 이 기적을 매일 경험하며 살게 해 주신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이 은혜가 저와 여러분의 삶에 충만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의 삶에 이 세상이 가질 수 없는 소망을 가지고,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복된 인생길을 걸어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이제 말씀을 맺는다.
김병만은 달인이라는 별명이 있다. 김병만씨는 개그콘서트에서 한 때 달인코너를 맡아서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드를 타기도 하고, 막대기 위에 서기도 하였던 김병만이 자신은 실패의 달인이었다고 소개하였다. 개그맨 시험에 7번 낙방했고, 백제대 방송연예과에 3번, 서울예전 연극과에 6번, 전주우석대도 떨어진 경험이 있다. 그래서 인생을 포기하려고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계속적인 실패를 할 때 김병만은 아버지에게 왜 나를 이렇게 작게 낳았느냐?고 원망했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실패를 경험한 김병만은 자신의 좌우명을 가늘게 길게 가자로 세웠다. 그리고 자신에게 어떤 단역이 들어와도 마다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감당하였다. 정말 어떤 때는 너무 힘들어서 못할 것만 같았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고 성실이라는 이름으로 최선을 다했더니 오늘날 김병만이 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김병만이 오늘날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조언해 준다.
자신의 인생은 온전히 자신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매 순간 자신의 꿈을 위해 묵묵히 걸어가세요. 그리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그러면 저 김병만이 됩니다>
김병만은 성실와 최선을 다하면 결국 최고의 자리에 설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김병만의 이 말에 동의하는가? 이 세상은 성실하게 살면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며 살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세상은 성실이 정답인 줄 알고 땀을 흘리며 일해야 한다고 말하고, 또 땀을 흘리며 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생의 정답은 성실이 아니다. 물론 심은대로 거두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처럼 성실하게 심은 자에게는 성실한 열매가 보상으로 올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가 참된 성도로 살아가는 그 길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 그 은혜로 인하여 날마다 새로워지는 복된 삶을 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