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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수없는 미래
지은이:벌마로(김윤식)
창밖에 별똥별이 긴 꼬리를 달고 떨어지는 광경을 병휘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영우에게 고개를 돌렸다.
영우도 보고 있었다는 듯 웃으며 병휘의 눈을 바라보면서 넓은 어깨에 얼굴을 기대었다. 영우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병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영우 없는 지난날들 정말로 견디기 힘겨웠어,,,”
병휘는 영우가 떠나고 바로 다음날부터 외로움으로 밤을 지새운 수많은 날들을
떠올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영우를 못 보던 지난날들이 얼마나 그립고 힘들었는지 순간순간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고 숨 고르기를 여러 번,,, 그런 병휘의 심정을 달래려고 영우가 물을 떠다 주었다. 물을 한 모금 마신 병휘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전날까지만 해도 퇴근하면 반겨주던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안 보일 때 쓸쓸함은 견딜 수 없이 외로웠고, 영우의 부재를 인식하는 데까지 긴 시간이 필요 했었단다. 게다가 비교적 따뜻한 대구에서 나고 자란 병휘에게 강원도 횡계의 지난겨울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견디기 어려울 만큼 혹독했었다.
영우가 떠나고 얼마 지나서 않아서 발생한 국가비상사태는 모든 군인들에게 악몽이었다고 했다. 부대 내에서는 계속된 긴장 속에 비상대기가 일상이었고 걸핏하면 외출외박이 금지되었다. 게다가 처음으로 겪는 황병산의 겨울 찬바람이 온몸을 사정없이 파고들 때는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 매서웠는데, 체감온도가 영하 40도 밑으로 떨어지는 강추위는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웠으며, 허리까지 차오르는 눈은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고, 출퇴근용 뻐럭차가 다닐 수 없을 만큼 산길이 눈으로 덮힐 때는 제설차가 먼저 길을 터 주어야만 겨우 운행을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 했다. 강추위를 견디며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방문을 열면 서늘한 냉기가 온몸을 덮쳤는데, 이럴 때 영우의 존재가 간절히 그리워졌다. 그나마
영우가 손뜨개로 만든 목도리는 차가워진 몸과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어 주었고
위안이 되었다고 했다.
고통스런 날들이 지속될 때마다 지난가을 영우를 집에 보낸 자신을 원망하는 날들이 많았었다. 영우가 집에 가려 할 때 병휘의 속마음은 보내기 싫었었다. 한겨울만 지나면 오산부대로 다시 복귀하는데 그때까지 만이라도 이곳에서 함께 지내기를 바랬었다. 그것이 진심이었다. 가지 말라고 붙잡고 싶었지만, 현재 처한 상황이 입을 닫게 했다. 그래서 병휘가 먼저 집에 가라고 했던 거였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영우가 병휘를 가슴에 안았다. 그리고 같이 울었다. 그리고 긴 침묵이
흘렀다. 창밖에는 달빛과 별빛이 서로의 밝기를 경쟁이라도 하듯 반짝인다.
방안을 짓누르던 무거운 공기가 차츰 걷히고 병휘도 격한 감정이 조금씩 차분하게 가라앉자 영우가 궁금해서 물었다.
“그런데 오빠 이곳 사람들은 겨울에 그렇게 눈이 많이 오는데 불편해서 어떻게
살아?”
“오래 살다보면 적응을 하게 되나봐. 때로는 사람들이 슬기롭게 방법을 찾아서
해결도 하는데, 과거에는 눈이 많이 와서 길이 막히면 화장실도 못 가는 경우도
있었나봐. 그런데 요즘엔 지혜가 생겨서 날씨가 조금만 꾸물거려도 미리 화장실 문고리하고 부엌문 사이에 새끼줄을 연결해 놨다가 눈이 너무 많이 와서 화장실도 못 갈 정도가 되면 걸쳐놓은 새끼줄을 빙빙 돌려서 길을 터 다녔다고 해.
영우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감탄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쩌면 이렇게 기발한 방법을 누가 생각해 냈을까?”
“누구 한사람의 아이디어라기보다 모든 사람들의 삶의 지혜겠지”
영우가 다시 고개를 병휘의 어깨에 기대며 밤하늘을 본다. 고요한 행복과 밀월의
감미로움 달콤한 게으름을 맛보며 그들은 이렇게 둘이서 손을 잡고 앞날을 계획하며 별을 바라본다. 그리고 알콩달콩 사랑을 속삭인다. 앞으로 일어날 견디기 어려운 시련을 두 사람은 전혀 예상치 못한 채, 마냥 달콤한 사랑을 즐길 뿐이다.
날이 밝자 병휘오빠 배웅을 하고 곧바로 선미 씨네 미용실로 달려갔다. 동료애로
맺어진 새댁언니들이 가장 먼저 보고 싶었고 그동안 안부가 궁금했었기 때문이다. 선미 씨는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정아 씨도 만났다. 반가움에 서로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영우가 집에 가 있는 동안 작은 변화가 있었다. 이중사가 오산비행장으로 전출명령이 나서 은정 씨네가 그곳으로 이사를 갔덴다. 은정 씨를
언니들이 은근히 부러워하는 눈치다.
영우가 이곳에 다시 온 이후로 아주머니는 그들의 이불 빨래를 자주 했다. 지난 번에 왔을 때는 콘돔을 사용했었는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어쩌다 임신이 되면 낳아서 예쁘게 기르기로 결정을 한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지만,,,
매사에 신중하고 완벽한 병휘오빠의 반대가 있었지만 영우의 생각은 달랐다. 병휘오빠와의 사이에서 아기가 생기면 예쁘게 낳아서 기르고 싶은 욕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 사이에 약간의 의견이 어긋났지만 영우가 고집을 부려서 그렇게 하기로 한거다. 거기에 사랑의 힘으로 얼마든지 가정을 이루고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도 한몫했다.
영우가 작년가을 이곳에서 병휘와 지내다 어쩔 수 없는 이유로 부천 집으로 갔었지만, 그동안 하릴없이 시간만 소비하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병휘를 향한 그리움을 달래며 지내던 지난 몇 달 사이에 차분히 미래의 설계도 해보며 정신적으로 몰라보게 성숙해 졌고, 어찌 보면 어른이 다 된냥 당당해 졌을 뿐만 아니라
무엇이든 닥치면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도 충만해져서 돌아온 거였다.
아주머니는 정말 사흘이 멀다 하고 새 이불로 갈아 주셨는데, 영우는 창피하기도
하고 죄송하기도 해서 어느 날 아주머니께 말씀드렸다.
“아주머니 힘드실 텐데 이불 이렇게 자주 빨지 않으셔도 되세요. 아니면 이불 빨래는 제가 할게요.”
이 말을 하는데 정말 얼굴이 화끈거리고 창피한 생각에 몇 번을 망설이다 큰 용기를 내서 드린 말씀이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태연하게 말씀하셨다.
“아니야 신경 쓰지 마, 내가 빨아줄게, 아직 날씨가 차가워서 창문을 열고 살기도 그러니까 자주 빨지 않으면 냄새가 나서 못써,”
“그래도 제가,,,”
아주머니는 영우의 의중은 아랑곳없이 혼잣말처럼 한마디 더 하시면서 이불을 걷어갔다.
“젊은 청춘 남녀가 쓰는 이불이니 그럴 만도 하지, 좋을 때지 좋을 때야, 새댁이 요렇게 예쁜데, 새댁을 닮은 아기를 하나 낳으면 얼마나 이쁠까”
아주머니의 자기 멋대로식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자신의 생각을 확정적으로 결론짓고 상대방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뱉어버리는 습성이 굳어 버린 모양이다. 호칭도 어떨때는 새댁이랬다, 어떨때는 색시랬다. 아주머니가 내키는 대로 기준 없이 불렀다. 그렇지만 영우도 그렇고 병휘도 그렇고 한 번도 아주머니의 말에 토를 달거나 기분상한 표정을 지어 본 적이 없다. 그저 난처하고 부끄러울 뿐이다.
아주머니의 역할은 또 한 가지가 있는데, 연탄불을 관리해 주시는 거다. 매일 하루에 두 번씩 연탄을 갈아주시는데 연탄을 갈 때마다 가스냄새에 콜록이는 모습을 보면 그것도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덕분에 영우의 방은 항상 따뜻했고 가끔은 그 연탄불에 감자나 고구마를 구워 먹을 수 있어서 좋다. 물론 아주머니의 안방 부엌아궁이에서 참나무로 불을 땔 때 구우면 훨씬 맛있지만 부엌일 하시는 아주머니한테 불편을 드리는 것 같아서 처음 몇 번 그렇게 하다가 되도록 영우네 연탄에 구워 먹는데 그것도 맛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고가 나고 말았다. 아침에 일어날 시간이 돼도 인기척이 없는
영우네 방문을 열어본 아주머니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두 사람이 연탄가스에 중독이 돼서 사경을 헤매고 있었던 거다.
어젯밤 영우가 고구마를 구우면서 두꺼비집을 똑바로 덮어 놓지를 않아서 틈으로
새어 나온 연탄가스가 방문 틈으로 들어온 모양이다. 아주머니가 알몸의 두 사람을 이불과 함께 짐짝 끌듯이 마루로 끌어내서 김칫국물을 먹인다, 식초를 코에 갔다 댄다, 알고 있는 민간요법을 총동원하고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두 사람은
정신이 들었다. 어렴풋이 정신을 차린 두 사람은 냉기와 창피함을 느끼고 덮을
것을 찾았지만 아직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눈치로 알아차린 아주머니가 방안에서 이불을 끌고 와 덮어 줄 때까지 죽은 듯이 꼼짝을 못하고 있어야 하는 게 괴로웠다. 영우는 이불속에 폭 파묻힌 채 별의별 상상을 다했다. 가끔 뉴스에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하는 사람이 있다더니 그녀자신이 그 꼴이 날 뻔했다. (강원도 횡계 시골마을 어느 하숙집에서 한 쌍의 젊은 남녀가 알몸으로 부둥켜안은 채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 (공군중사와 동거녀, 연탄가스에 중독돼 안타까운 죽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영우는 죽음보다 이후에 벌어질 많은 일들을 생각하니 끔찍했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일이 더 아찔했다.
다행히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고, 걱정은 걱정으로 끝났으니 천만다행이다.
죽다 살아난 영우와 병휘는 그날 이후로는 옷을 꼭 챙겨 입고 잔다. 연탄가스 중독은 조심하고 있으니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질리 없겠지만 아주머니가 아침마다
문을 열어보고 생사확인을 하는 바람에 옷을 벗고 잘 수가 없다.
아침부터 해가 쨍쨍,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푸르렀다. 영우네가 쓰던 이불
빨래를 아주머니에게 맡기는 것이 아무래도 민망해서 오늘 영우가 빨래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이불 홑청을 벗겼다. 아직 찬 기온이 살갗을 스치지만 물은 뜨겁게 데워서 찬물과 섞으면 될 거 같았다. 주인집 아궁이에 불을 지펴서 물을 끓이고 빨래를 시작했다. 자신들이 덮고 자던 이불을 빨면서 영우는 스스로 병휘오빠와 부부가 된 듯, 기분이 이상했는지 괜스레 피식 웃었다. 햇볕도 따스하고 병휘오빠 퇴근 전에는 이불이 마를 듯 했다. 내일부터는 영우가 세탁한 이불을 두 사람이 덮고 자게 될 것이다.
빨래를 마친 영우가 눈길 한번주지 않던 메마른 텃밭에 눈길이 갔다. 지푸라기 틈으로 눈앞에 푸르름이 살랑거린다. 시금치다. 작년 가을 영우가 정성스레 씨를 뿌리고 가꾸었던 시금치가 겨우내 찬 기운을 견디고 살아남았다. ‘오늘 저녁엔 시금치나물을 무쳐 먹어야겠다’
영우가 이곳에 다시 돌아온지 보름쯤 지난 토요일 오후 병휘의 퇴근시간에 맞춰서 거리 구경도 할 겸 병휘오빠 마중을 하려고 혼자 거리로 나갔다. 시외버스 터미널에 휴가를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는 군인아저씨들 서너 명이 모여 있다.
그중에 어느 장병의 목에 두른 목도리가 낯익어 보였다. 분명 영우가 작년가을
손수 뜨개질로 만든 털목도리다. 반가운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서 얼굴을 보았다.
“악!”
순간 너무 놀래서 터져 나오는 비명소리를 손으로 가까스로 막았다. 영우는 너무
놀래 기절할 뻔했다. 눈앞에 서있는 장병은 어릴 적 이웃에 살던 친구 광희다. 광희도 영우를 보았다. 둘은 서로 눈이 마주쳤다. 영우는 너무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어떻게 변명을 해야 하나 고민을 했다. 놀라기는 광희도 마찬가지다.
“영우야”
“응! 광희야”
“네가 어떻게 여기에...”
“응 저 고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네 외갓집이 여기에...”
영우는 정신없이 둘러 댔다. 그때 퇴근하고 돌아오는 병휘와 서로 마주쳤다.
“광희가 먼저인사를 했다.”
“필승!”
“필승! 광희일병 첫 휴가 나가는구나”
“예 그렇습니다”
“그래 휴가 잘 다녀오고 귀대 날짜 잊지 말고...”
“예 알겠습니다”
광희와 인사를 나눈 병휘가 굳어 있는 영우에게 고개를 돌렸다.
“집에 있지 않고 왜 여기까지 나와 있어, 영우 많이 심심했었나 보구나, 표정이
왜 그래, 심통 났나 보네,”
병휘는 영우의 손을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얼른 집에 가자. 작년에 우리가 심었던 시금치가 제법 자랐던데, 얼른 집에 가서
우리 시금치나물 해먹자. 맛있을 거야”
영우의 곤란한 상황을 모르는 병휘는 영우의 심정은 아랑곳없이 꿀 떨어지는 말만 하면서 영우의 손을 끌었다. 영우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난처한 얼굴로 광희
를 한번 돌아보고 병휘의 손에 이끌려 따라갔다. 병휘의 집은 버스터미널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기 때문에 큰길에서 코너 만 돌아서면 바로 보이는 집이라서
광희도 잘 알고 있었다. 광희가 그들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갔다. 두 사람의 모습이 대문 안으로 사라져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광희는 그들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광희와는 어릴 적 소꿉친구였다. 둘 사이에는 비밀스러운 추억도 있었고 재미난
일화도 수없이 많았다. 영우네 집하고는 담하나 사이로 영우네가 앞집 광희네가
뒷집에 살았고 지금도 변함없이 이웃사촌으로 살고 있다. 어른들끼리 가장 왕래가 많은 이웃이며 광희네 형제들과 영우네 형제들도 친형제처럼 지내는 사이다.
그렇게 영우와 광희도 오누이 같은 친구로 지냈었다.
영우가 서울로 전학을 가는 바람에 자주 볼 수 없게 되면서 어색한 청소년기를
보냈었지만, 얼마 전 까지도 가장 자주보고 가장 많은 대화를 하고 있는 친구다.
광희와는 그렇게 어린 시절 함께 지냈었다. 이처럼 영우에게 광희는 소중한 친구이자 아련한 추억의 주인공임이 틀림없다.
방안에 들어서고 나서야 영우의 걱정스러운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챈 병휘가
물었다.
“왜 그래 영우야, 아까부터 말도 없고 광희일병 하고 무슨 말을 하는 것 같던데,
혹시 아는 사이야?”
“,,,,,,,,,,,,,,,,”
“아는 사이인가 보네, 그럼 혹시 내가 실수한 거 아니야?”
“오빠 아까 걔 우리 뒷집 사는 초등학교 동창이야”
“그래? 그럼 우리 사이 알아차린 거 아닐까?”
“당연히 알았겠지, 아까 보니까 뒤따라오는 거 같던데 우리가 집으로 들어오는
것도 다 봤을 테고,,, 이제 나 어떻게? 엄마한테 친구 외할머니네 놀러 왔다고 했는데,,, 그런데 오빠!”
“응”
“광희도 이제 스물한 살 밖에 안 됐는데, 어떻게 벌써 군대를 왔지?”
“내가 알기론 지원해서 왔을 거야, 공군은 대부분 지원해서 입대하는데, 간혹 또래보다 한두 살 먼저 입대하는 경우가 있더라고,,,”
“그렇구나 그런데 하필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아무 일 없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병휘는 영우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무슨 말이라도 해줘야 할 것 같은데,
마땅히 위안의 말이 떠오르지를 않는다. 영우 또한 어떤 위로의 말도 소용없이
머릿속은 터질 듯이 복잡했다.
두 사람은 밤이 깊도록 잠에 들지 못했고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조차
할 수없는 현실이 답답하기만 했다. 밤을 뜬눈으로 보낸 병휘는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출근을 했다. 병휘의 뒷모습이 안쓰럽게 보였다. 하필이면 오늘따라 병휘가 당직을 맡은 날이라 일요일인데도 출근을 한 거였다. 방안에 혼자 남은 영우는 고민에 빠졌다. 어쩌면 이곳의 생활도 오늘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다. 어쩌면 병휘오빠와의 인연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심장이 타들어 갈 것처럼 막막하고 답답했다.
‘어찌하면 좋을까 틀림없이 광희가 부모님한테 전부 말을 할 텐데, 그러면 내가
무슨 변명을 해야 하지, 그냥 병휘오빠 하고 같이 집에 가서 인사를 드릴까? 모두 말씀드리고 병휘오빠 하고 연애를 허락받고 몇 년 뒤에 결혼하게 해달라고 승낙을 받을까, 그럼 허락을 해주실까?,,, 내 나이 스물한 살에 예고도 없이 불쑥?,,, 그건 아니야 그건 안 되겠지, 아니 어쩌면 광희가 나를 보호해 주려고 우리 집에는 비밀로 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 수 도 있잖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지도 몰라’ 영우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을 너무 앞서서 걱정하는
것 같아서 최악의 그림은 그리지 말고, 생각을 더 이상 깊이 끌고 가지는 않기로 했다. 그래야만 지금의 답답함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을 거 같았다.
지난여름 심심하거나 무료함을 달래려고 자주 가던 냇가로 향했다. 냇물이 아직은 살얼음으로 덮여 있는 곳이 있기도 한데, 대부분 녹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한참을 얼음 속 흐르는 냇물을 바라보다가 자연의 이치를 깨달았다. 겨우내 꽁꽁 얼었던 얼음도 때가 되면 녹아서 물이 되고 그물이 냇가의 지형을 따라서 굽이굽이 흘러서 바다로 가고,,, ‘그런 걸 보면 세상에 가만히 멈춰 있는 것은 하나도
없나 보다’ 세상의 이치가 새롭고 신기했다. 영우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세상이
흘러가지 않고 굽이굽이 부딪치며 흐른다는 것을, 예상 밖의 일이 얼마든지 일어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다. ‘이번 겨울 병휘오빠와 보름 동안의 시간이
누군가 쏘아 올린 화살이 빠르게 지나간 것처럼 앞으로 벌어질 불길한 예감도 그렇게 지나갔으면 좋겠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퇴근을 한 병휘오빠가 영우의 짐을 챙겨 주었다. 그런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영우가 왈칵 눈물을 쏟으며 병휘를 뒤에서 안았다.
감정도 잠시 마음이 급했다. 영우가 가방에서 손수건을 하나 꺼내서 병휘에게 건네주었다. 병휘가 손수건을 펼쳐 보았다. 영우와 병휘 이름이 새겨 있었다. 지난겨울 그녀가 집에서 한가할 때 바느질로 수놓은 거다.
두 사람은 용산 가는 버스에 함께 올랐다. 영우 혼자 보내기 걱정돼서 용산까지만 병휘가 동행하기로 한 것이다. 영우가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자신은 다 자란
성인이고 자신의 사랑과 인생은 스스로 알아서 할 나이가 됐다고 스스로 인정하고 그래서 자신의 행동은 당당하고 떳떳하다고 그렇게 자부했는데, 광희와 마주치는 순간 생각이 달라졌다.
막상 집에서 알아버리게 되면 어찌해야 할지 막막하고 머리가 터질 듯이 혼란스러웠다. 영우는 이제 갓 21살 밖에 안 된 어린 나이라는 것을 새삼 깨우치게 될 것이고, 영우 혼자 할 수 있는 게 그리 많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아직은 어른들의 보호와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도 차츰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영우의 머릿속은 온통 병휘오빠와의 사이에 무슨 상상조차 하기 싫은 사건이 벌어질까 봐 그것이 가장 두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