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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8)
최후 만찬 기념 성당
‘최후 만찬’ 나눈 장소서 사도들은 성령을 받고…
다양한 언어로 말씀 선포, 요엘의 ‘신탁’ 실현
현재 ‘최후 만찬 경당’ ‘성령 강림 경당’으로 나눠
성체 성사 세운 곳답게 펠리칸 문양 기둥 남아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 이후 수난 당하시기 전날 저녁에 당신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잡수셨다. 이 최후 만찬에서 예수님은 성체성사를 설정하셨다. 성체성사의 거행은 그리스도교 신앙과 교회의 삶에서 중심을 이루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전승은 그 시초에서부터 예수님의 최후 만찬이 거행된 장소를 찾고, 기억 · 기념하였다.
▲ 시온 산 전경.(사진 중간에 가장 높은 종탑이 있는 곳이다)
■ 위치와 지형
오늘날 시온 산(Mount Sion)은 예루살렘의 남서쪽 언덕을 가리킨다. 이곳은 해발 765m의 높이로 구시가(Old City)의 남쪽 성벽에 있는 시온의 문(Sion Gate) 밖에 위치하는데, 서쪽과 남쪽에는 힌놈 계곡(Hinnom Valley)이 있고 동쪽으로는 티로포에온 계곡(Tyropoeon Valley)이 있다. 그런데 구약 성경 시대에 시온이라고 불린 곳은 예루살렘의 동쪽 언덕이었다. “다윗은 시온 산성을 점령하였다. 그곳이 바로 다윗 성이다.”(2사무 5,7) 시온이라는 이름이 서쪽 언덕을 가리키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4세기인데, 미카 3,12의 본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너희 때문에 시온은 갈아엎어져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폐허 더미가 되며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수풀 언덕이 되리라.”(미카 3,12) 여기에서 미카 예언자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세 가지 방식으로 표현하는데, 보르도(Bordeaux)의 순례자들(기원후 333년)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본문을 예루살렘의 두 언덕을 묘사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즉 동쪽 언덕이 성전산(Temple Mount)이었다면, 서쪽 언덕은 시온 산이었다.
현재의 시온 산 지역이 처음으로 예루살렘 성벽 안에 포함된 것은 기원전 2세기였다. 기원후 70년에 로마 장군 티투스는 예루살렘의 성벽을 파괴하였는데, 현재의 남쪽 성벽은 기원후 135년의 아엘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에 주둔했던 로마 군대 주둔지의 남쪽 경계였다. 444년-460년 사이에 로마 황제의 부인인 에우도키아(Eudokia)는 시온 산 부근의 옛 성벽을 다시 세우도록 하였다. 이 성벽은 975년까지 존속했는데, 칼리프 엘-아지즈(el Aziz)는 그것을 무너뜨렸다. 살리딘(Saladin)은 다윗의 무덤을 포함하기 위하여 십자군의 성벽을 연장하였다. 기원후 16세기 술탄 슐레이만 2세에 의해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될 때 시온 산 지역은 성벽 바깥에 위치했다. 비잔틴 시대인 6세기의 마다바(Madaba) 지도에는 당시의 시온 산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오늘날 시온 산에는 최후 만찬 기념 경당, 다윗의 무덤, 최후 만찬 기념 성당, 성모 승천 기념 성당, 베드로 회개 기념 성당 등이 있다.
■ 신약 성경의 기록
오랜 그리스도교 전승에 따르면 예수님의 최후 만찬(마르 14,22-26)과 부활하신 주님의 발현(요한 20,19-23), 그리고 초대 교회의 사도들의 모임(사도 1,12-14)과 성령 강림(사도 2,1-13) 등의 사건들은 시온 산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마르 14,12-16; 마태 26,17-19; 루카 22,7-13에 따르면 예수님의 최후 만찬은 “이미 자리를 깔아 준비된 큰 이층 방”에 준비된다. 그리고 최후 만찬 이야기는 마르 14,22-26; 마태 26,26-30; 루카 22,14-20; 1코린 11,23-25에 기록되어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이야기는 요한 20,19-23에 소개된다. 사도 1,12-14에는 사도들이 모여 있던 성안의 위층 방이 언급되고 사도 2,1-3은 오순절에 사도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고 전한다.
■ 중요 순례 장소
(1) 최후 만찬 기념 경당
시온의 문을 통과해서 시온 산으로 좁은 골목길로 가면 하나의 첨탑과 작은 둥근 지붕을 가진 중세 시대의 건물을 만나는데, 아래층에는 다윗의 묘지가 있고 위층에는 최후 만찬 기념 경당(Coenaculum)이 있다. 이 경당은 전통적으로 예수님의 최후 만찬이 거행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객관적인 근거는 불확실하지만, 이 전통은 매우 오래된 것이다. 이미 5세기 초에 이 전통에 대한 기록이 있다. 403년에 죽은 성 에피파니우스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도시는 티투스가 파괴한 채로 남아있었는데 예외적으로 몇몇 건물들이 있었고 그중에는 사도들이 성령 강림을 기다렸던 장소에 세워진 작은 성당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에 따르면 최후 만찬의 장소는 사도들에게 성령이 강림하신 사건과 함께 시온 산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졌다. 그것은 사도들이 모여 있던 “위층 방”(사도 1,13; 2,1)을 최후 만찬이 거행된 “이층 방”(마르 14,15)과 동일시하였기 때문이다.
▲ 최후의 만찬 경당의 모습.
성령 강림 경당은 바로 옆에 있다. 사진 중간으로 보이는 조그만 창 안이 성령 강림을 기념하는 장소다. 오른쪽 끝의 초록색 문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이스라엘 정부에 의해 폐쇄되었다. 성목요일과 오순절에만 개방된다.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The Cenacle(다락방)
https://youtu.be/bckmyzRmpuk
그런데 보르도의 순례자들은 이 사건들과 시온 산 사이의 연관성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에제리아(Egeria)는 성령 강림과 관련 있는 건물이 있다고 기록하면서 “이 장소는 이제 성당으로 변화되었다.”라고 말하고 시온 산의 성당에서 주님의 발현과 성령 강림을 기념하는 전례를 거행하였다고 기억한다. 그 후 파괴된 성당은 예루살렘의 총대주교 요한 2세에 의해 다시 세워졌다. 614년에 페르시아인들은 이 성당을 파괴하였다. 십자군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성당은 성벽 바깥에서 파괴되어 있었다. 그래서 성당을 재건하였는데, 이 또한 그 후 파괴되었다. 마침내 1333년에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큰 성당과 수도원을 세웠다. 그런데 이 성당은 16세기에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었고, 그리스도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1948년 이후 이스라엘 정부는 최후 만찬 기념 경당에 출입을 허용하였으나 전례 거행은 금지하였다.
▲ 이스라엘 정부 귀속 후 어떠한 종교적 장식도 없는 최후 만찬 경당 내부 모습.
예루살렘 성 바깥으로 남서쪽에는 시온 산이 있다. 그 정상에는 ‘최후의 만찬’과 ‘성령 강림’을 기념하는 이층 방, ‘다윗 임금의 가묘’ 등이 있다. 고대에는 예루살렘 안에 포함된 곳이었으나(파스카 만찬을 준비하려고 제자들이 도성 안으로 가는 마르 14,13.15을 참조), 16세기 오스만 투르크의 슐레이만 대제가 예루살렘 성을 다시 지으면서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이스라엘 땅은 한때 오스만 투르크, 곧 예전 터키의 식민지였다). 시온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찌욘’이다. 정확한 어원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메마른’(이사 53,2) 뜻을 가진 ‘찌야’와 같은 어근으로 본다. 예루살렘은 고도가 높아 나무들이 좀 자라지만, 올리브 산만 넘어가도 광야다. 어쩌면 그래서 ‘메마르다’라는 어원을 얻지 않았을까 싶다. 또는 ‘방어하다’라는 의미의 ‘짜나’로도 추정한다. 시편의(125,2) 묘사처럼, 산으로 감싸인 고대 예루살렘은 천연 요새 같았기 때문이다. 다만, 현재 시온 산으로 불리는 곳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시온 산과 동일하지는 않다. 시온 산은 본디 다윗 성과(2사무 5,7 1열왕 8,1)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한 모리야 산을 가리켰다(시편 78,68-69). 곧, 본래 시온 산은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다윗 성 위치가 잊혀져, 비잔틴 로마 시대부터 잘못된 장소로 오인해왔다. 그러므로 역사적으로는 옳지 않은 이름이나, 지금도 여전히 시온 산이라 불린다. 바로 이 후대의 시온 산에 예수님이 제자들과 파스카 만찬을 나누신 ‘큰 이층 방’(루카 22,12)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 전승이 맞다면, 이 시온 산에서 성찬의 전례가 유래한 셈이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세족례 장소도 된다(요한 13,1-15). 게다가 제자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에도 이 이층 방에 자주 모였던 것 같다. 제비를 뽑아 유다 이스카리옷을 대신할 사도 마티아를 선택한 곳도 이층 방이었다(사도 1,13.15-36). 그래서일까, 이층 방 아래 마당에는 ‘유다 이스카리옷’ 나무가 몇 그루 자란다. 전승적으로 유다가 목을 맸다고 알려진 동종의 나무다. 오순절에는 사도들이 이 이층 방에 모여 있을 때, 성령 강림이 있었다(사도 2,1-13). 오순(五旬)절은 구약성경에 주간절로 나오는 절기다. 파스카 축제부터 한 주가 일곱 번 지난 사십구 일 뒤, 곧 오십 일째에 지내므로(레위 23,15-16 신명 16,9 참조), 주간절 또는 오순절이라 불렸다. 구약성경에는 주간절을 역사적으로 풀이해 주는 설명이 따로 없지만(신명 16,12만 이스라엘이 이집트 종이었음을 기억하는 명절이라고 기록했다). 제2성전기 이후부터 모세가 토라, 곧 모세오경을 받아온 사건을 기념한다는 전승이 생겼다. 그러므로 주간절에 모세가 토라를 받은 것처럼, 신약 시대에는 사도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상징성을 띤다. 이때 사도들은 다양한 언어로 말씀을 선포하여, 요엘의 신탁을(3,1-2) 실현했다. 그래서 이 이층 방은 현재 두 개로 나뉘어, ‘최후의 만찬 경당’과 ‘성령 강림 경당’으로 각각 불린다. ▲ 메카의 방향을 표시해 주는 미흐랍 그러나 건물 자체로만 보면, 이 이층 방은 서기 14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아래 층은 다윗 임금의 가묘다. 다윗은 원래 다윗 성에 묻혔으나(1열왕 2,10), 장소를 오인해온 까닭에 이곳으로 가묘가 마련되었다. 모두 작은형제회 수도원에서 관리하던 성지였지만, 오스만 투르크 모슬렘들에게 빼앗긴 뒤 이층 방은 사원으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이곳에는 메카의 방향을 표시해 주는 미흐랍이 붙어 있다. 모슬렘들은, 벽화나 이콘 등 장식 없이 단순하게 지어진 성당의 경우 사원으로 개조해서 사용하곤 했다(주님 승천 경당도 같은 역사를 겪는다). 그럼에도 성체 성사가 세워진 장소답게, 이 방 기둥에는 펠리칸 문양이 남아 있다. 기근이 들면 자신의 살과 피로 새끼를 먹인다는 펠리칸은 스스로 희생 제물이 되신 예수님의 상징 가운데 하나다. 성가 ‘자애로운 예수’ 2절도 예수님을 펠리칸에 비유한다. 안타깝게도 1948년에는 이 경당이 이스라엘 정부로 넘어갔으며, 다윗 가묘를 중심으로 탈무드 학교가 조성되었다. 하지만, 성찬의 전례가 확립되고 성령께서 임하셨다는 이 이층 방은, 우리에게 구원을 마련해 준 진정한 시온일 것이다. ▲ 기둥머리에 새겨진 펠리칸 |
(2) 다윗의 무덤
최후 만찬 기념 경당의 아래층에는 다윗의 무덤이 있다. 유다인들에게 이 장소는 통곡의 벽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성소의 하나이다. 사실 성경에 따르면, 다윗은 그의 성 동쪽 언덕 위에 묻혔다. “다윗은 자기 조상들과 함께 잠들어 다윗 성에 묻혔다.”(1열왕 2,10) 비잔틴 시대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서쪽 언덕을 시온 산으로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기원후 10세기까지는 그 누구도 그곳에 다윗의 무덤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십자군 시대에는 시온 산의 다윗 무덤을 경배하였다. “형제 여러분, 나는 다윗 조상에 관하여 여러분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 2013년에 대대적인 보수 공사가 완료된 다윗 왕의 무덤
그는 죽어 묻혔고 그의 무덤은 오늘날까지 우리 가운데에 남아 있습니다.”(사도 2,29)라는 베드로 사도의 오순절 설교에서 시온 산과 다윗의 무덤 사이의 연관성을 생각하게 되었다. 유다인들도 12세기부터 이곳을 순례하였다. 15세기에는 다윗 임금과 함께 매장된 전설적인 보물(『유다 고대사』 16권 179-182)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14세기에 이곳을 재건한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추방되었다. 다윗의 무덤은 16세기에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었다가 1948년 이후에는 유다교 회당과 탈무드 학교가 되었다. 이와 같이 오늘날 다윗의 무덤은 역사적이고 고고학적인 근거가 있다기보다는 그리스도인, 유다인, 이슬람인의 신심에 의한 것이다.
▲ 다윗 왕의 무덤에서 기념비를 덮고 있는 천에 있는 다윗의 별
(3) 최후 만찬 기념 성당
최후 만찬 기념 경당에서 나와 약 100m 가량 걸으면 프란치스코 수도원에 의해 세워진 최후 만찬 기념 성당이 있다. 이 성당은 1936년에 건립되었는데, 예루살렘의 총대주교 요한 2세에 의해 세워졌던 옛 성당의 한 부분 위에 세워졌다. 성당은 최후 만찬 기념 경당(Coenaculum)을 향하여 있어 Ad Coenaculum이라고 불렸다.
(4) 동정 마리아 영면 성당
▲ 예루살렘 남서쪽 성 밖에 자리하고 있는 시온산은 예수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셨고, 성령강림을 통해 교회가 탄생한 거룩한 성지다.
사진은 마리아의 승천을 기념해 지은 시온산에서 가장 큰 성당인 동정 마리아 영면 성당.
작은 형제회 수도원 바로 옆 골목길 어귀에 '동정 마리아 영면 성당'(Dormitio Beatae Mariae Virginis)이 자리하고 있다. 초세기 사도들의 교회 터 위에 세워진 이 성당은 성모 마리아가 예수님 부활 후 제자들과 함께 여생을 보내셨던 장소라고 한다(사도 1,13-14).
대부분의 책자가 이곳을 성모 마리아가 죽은 장소라 소개한다. 이는 가톨릭 교리상 매우 잘못된 표현이다. 가톨릭교회는 동방교회와 달리 성모 마리아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 이시기에 원죄의 결과인 죽음을 극복하고 영혼과 육신이 함께 승천해 천상 영광을 받으셨다고 신앙 고백을 한다.
성당 이름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 라틴 말 '도르미시오 베아테'(Dormitio Beatae)는 우리말로 '복된 잠' 이란 뜻이다.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382년 비잔틴 양식의 대성당을 건립했으나 614년 페르시아군과 1009년 이슬람군에 의해 파괴됐다. 이후 1100년에 십자군이 폐허 위에 다시 큰 성당을 지어 '시온 산의 성모 마리아 성당' 이라 불렀다. 이 성당은 다시 1219년 이슬람군에 의해 파괴된 후 600여 년간 폐허로 방치됐다.
그러다 1898년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술탄 압둘 하미드가 빌헬름 2세에게 선물로 이 성당 터를 기증했다. 빌헬름 2세는 쾰른 대교구장에게 이 성당 터를 이양했고, 가톨릭 성지개발 독일재단이 1910년에 오늘날의 성당을 완공해 봉헌했다.
현재 독일 베네딕도회가 관할하고 있는 이 성당은 원형 지붕(돔)과 종탑이 어우러진 로마네스크 양식의 화려한 성당으로 시온산에서 가장 큰 성당이다. 성당 내부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12사도 모자이크가 장식돼 있다. 또 지하 성당 한 가운데에는 복된 잠에 빠져 있는 동정 마리아 상이 있다.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Here Virgin Mary, Mother of Jesus died - Abbey of the Dormition, Mount Zion
https://youtu.be/ECjDgNEY8tQ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천주교 광주대교구
남동 5.18 기념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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