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증법 입문] 홍승용 소장님 강의 및 논의 내용 중에서 개인적으로 관심 있는 내용들 정리해서 올립니다. 한번 쯤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내용들이라고 여겨서 올립니다. 강의 일자에 상관없이 강의 내용 정리되는 대로 조금씩 올립니다.
변증법은 이중 전선을 설정합니다. 즉 한편으론 존재론에 맞서고, 다른 한편으로는 실증주의에 맞서는 것입니다.(번역본 189쪽)
아도르노는 변증법이 실증주의를 무시할 수 없다고 보지만 동시에 실증주의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사태를 따라가야 하는 입장에서는 실증주의적인 요소가 있다. 그렇지만 실증주의자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사실들, 자료들, 경험 자료들,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들 여기에 국한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칸트는 좀 복잡하다. 칸트는 그런 것을 얘기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인간의 이성이라는 게 특이해서 그것을 넘어서서까지 자꾸 생각하려고 든다. 그게 거의 필연이다. 생각하려고 드는 것. 신이 뭐 어쩌고 저쩌고. 세계가 무한하냐 안하냐.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냐. 아니냐.
도저히 답도 없는 건데, 생각하려는 것을 필연이라고 본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가 이성을 통해서 일정하게 규제해야 한다. 칸트는 이런 입장이었다. 형이상학을 비판도 하고, 형이상학을 어떻게 보면 불가피하다고 또 인정도 하고. 칸트는 이중적인 태도가 있다.
근데 실증주의는 그런 부분은 아예 싹 없애는 것이다. 그 이상에 대해서는 아예 논하는 것부터가 자기들 과제가 아니라고 본다. 예를 들면 잠재적인 것, 이른바 객관적으로 가능한 것, 눈에 잘 안 보인다. 이런 걸 따지기 시작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궁극적으로 풀려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이거는 눈에 보이는 게 아니다. 그런 건 논의하기 싫다는 거다. 그러다 보면 현재의 지배 질서에서 나타나는 것에 만족하려고 한다. 현실 변론적인 논리가 자꾸 나온다.
아도르노는 그런 변론적인 논리에 대해서 비판적이다. 실증주의의 과학성을 비판하는 것이라기보다 실증주의가 현재 있는 것들을 넘어서려고 하지 않는다는 부분, 그래서 현실을 옹호하려고 하는 부분을 비판하는 것이다. 심지어 실증주의에 그런 현실 옹호적인 본질이 있다고 본다면 형이상학적 실증주의도 있다는 것이다.
형이상학의 형태를 띠면서 현실을 옹호하고 눈앞에 보이는 것에 매달리는 그런 부류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굉장히 추상화되고, 본질적인 것처럼 얘기하고, 그게 불변이라고 보고, 이런 건 형이상학적인 건데 실증주의적 성격을 띤다고 보는 것이다. 변화 가능성 이런 것들을 전혀 안 보려고 하는 것이다.
칸트는 꼭 그런 건 아니다. 칸트에 대한 평가는 양면적이다. 인식론적인 인식 방법에 관해서는 비변증법적이라고 보는 면이 강하고, 변증법의 출발 원리는 몇 개 있다고 보고, 모순을 강조한 점, 시간을 인식의 핵심 요소를 끌어들인 점, 그렇지만 자기는 그걸 못한 것 그래서 양가적이다. 판만 깔아놓고 자기는 더 이상 하면 안 된다고 한 것이다.
아도르노가 그런 것들은 비판한 것이고 그렇지만 또 그런 단초를 가지고 있고 그 단초가 헤겔까지 가면서 칸트 이후에 변증법의 발전에 아주 핵심적으로 기여했다고 보는 점은 있다. 그래서 칸트를 부정만 하는 게 아니라 일정하게는 존중하는 부분이다.
그뿐만 아니라 칸트의 기본 정신이 있다. 그 핵심이 인간을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고 목적으로도 대한다. 그 자체 존재를 존중한다 이 부분이 있다. 그거는 아도르노 윤리학에 아주 기초가 돼 있다. 어떻게 보면 미학에서도 그게 중요시되고 있고. 그래서 ‘자연미’로 가는 것이다.
자연이라는 게 그것들의 원형이다. 그런 점에서 칸트보다도 헤겔이 더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런 부분에서는 전부 이념과 관련짓고 소재에 매달리고 이런 부분은 칸트가 더 현대 사회에는 필요한 부분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헤겔이 그렇게 가버린 것이고. 칸트에게는 그런 건 없다는 것이다. 최소한 즉자로 존재하는 것, 그 자체로 자연, 자연미 이것들을 칸트는 인정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칸트를 보는 양가적인 입장이 있는 것이다.
2024. 3.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