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육바라밀의 적정처
진리는 ‘믿는다, 믿지 않는다.’는 것이 만들어내는 차이가 없고, ‘한다, 하지 않는다.’는 것에 의해 차이가 만들어지지도 않지만, 지금 여기에서 바로 나타나거나 나중에 나타나는 차이는 분명히 있다. 빠르고 느린 차이가 있다고 해서 지식이나 사량분별하는 마음에 따라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변함없기에 행위 없이 나타난다. 이때의 행위 없음은 동작에 있는 것도 아니고, 마음의 작용에 있는 것도 아니다. 오직 한 번의 돌아보는 앎에 있다. 이때 돌아본다는 것은 모든 것을 꿰뚫는 일이지만 특별함이 없는 아주 작고 소소한 것이다. 그것이 물질에서 일어나든, 느낌, 지각, 의도, 의식에서 일어나든 우리가 평상시에 무심히 항상 사용하는 것인데, 그때만큼은 그것이 ‘나’라고 알고 있는 것과 아주 별개의 일이 되어버린다. 우리는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인식하는 것에 항상 일부분만을 알고 있었다면(물론, 그 순간의 생각으로는 모두 안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때는 온전히 그것으로 보고 듣게 된다. 그러니 따로 분별하여 느낄 필요도, 생각할 필요도, 인식할 필요도 없이 온전히 아는 마음이 되어버린다. 그때는 원인도 결과도 없어서 무엇을 하였다는 인식도 없는 것이다. 자신이 어디에 머물러 있는 곳이 없으니 어디로 흐르는 것도 없다. 이때의 앎은 아름다운 동행이 된다. 진리와 행위가 동행하게 되면 번뇌는 생겨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로 ‘적정처’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금강경〉 제4, ‘묘행은 머물지 않는다[妙行無住分]’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면 아름다운 동행으로 일어나는 일이 얼마나 수승한지 바르게 말씀해 두셨다.“수보리야, 보살은 반드시 어떤 것에도 머물지 말고 보시(布施)를 해야 하나니, 이를테면, 사물에 머물지 말고 보시할 것이며, 소리와 향기와 맛과 감촉과 그 외의 온갖 것에 머물지 말고 보시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반드시 이와 같이 보시하여 형상에 머물지 말라. 왜냐하면 만약 보살이 형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가히 상상할 수 없느니라.”이때의 복덕은 일반적인 삶에서 나타나는 그런 복덕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보시를 할 때는 그를 불쌍히 여겨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혹여 나중에 나도 저런 처지가 될 수 있다는 전제가 된다. 그런 마음이 보시의 행위를 통해 성숙이 일어나면 ‘이러한 일을 내가 한다.’는 마음 없는 행위 그대로 나타날 수가 있다. 그때를 나와 너가 없는 ‘적정처’라고 말한다. 보시는 그런 적정처를 알게 해주는 것이다. 이것이 보시의 복덕이라 하는 것이다.
“수행자가 정수를 얻은 것은 다이아몬드나 부처의 사리와 같고 광음천의 궁전과 같아 세간의 눈으로 소멸되지 않는 일이로다. 정법을 얻어 거기에 머물고 여래의 지혜가 구족하며 비구가 평등성지를 얻으니 구름 사이에도 찰나를 보도다. 신기루나 환상 등은 찰나간에도 색상이 있지 않지만 실재하지 않는 색상임에도 마치 진실한 것처럼 보도다.”
바라밀을 실천하는데 처음부터 바른 적정처를 알면 참으로 다행한 일이지만 처음부터 바르게 실천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온전히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저축하는 개념으로만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진정한 바라밀의 뜻도 아니다.
바라밀은 자신을 바르게 인도하는 좋은 수행방법 중의 하나이다. 머리를 깎고 산에 들어가 살아갈 필요도 없고, 가르침을 알기 위해 많은 서적을 연구할 필요도 없다. 오직 바라밀의 실천에서 나와 너의 실체 없음을 알고, 많은 세월 동안 이렇게 서로 주고받는 인연 때문에 진실을 왜곡하였다는 것을 알아 무명의 안개를 걷어 낸다면 지혜로운 삶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생활하고 있는 모든 현상에서 발현하는 것이다. 인연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어디에도 있다거나 있을 것이라는 허망한 생각을 짓지 않으니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는 마음이 생겨날 수가 없다. 그 이전의 일로 속상할 것도 없고, 나중의 일이라는 것도 없고, 지금 일어나는 일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이 그저 만족하고 즐거울 따름이다. 하루를 따로 구분하여 정함도 없으니, 하고 있는 때가 그때일 뿐이다.
지휴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