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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의 질 / 암 8:4-8, 눅 16:1-13
오늘 본문에는 충성의 문제가 나온다. 충성에 대해서 양적으로가 아니라 질적으로 묻고 계신다. 큰 충성, 작은 충성, 우리는 대체로 큰 충성을 충성으로 여기고 작은 충성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큰 것에 충성하는 것이나 작은 것에 충성하는 것이나, 충성으로는 똑같이 보시고 계신다. 다만 큰 것에 충성하건 작은 것에 충성하건 얼마나 참되게 충성하느냐를 문제삼으신다. 충성으로 번역된 헬라말 ‘피스티스’는 ‘충성’뿐만 아니라 ‘믿음, 신실’로도 번역한다. 하나님께 대한 사람의 자세는 곧 믿음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사람을 보실 때에는 그 자세가 곧 ‘충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믿으실 수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복주실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충성’의 문제는 구원의 문제는 아니다. ‘충성’의 문제는 은사의 문제요, 사명의 문제이다. 은혜의 문제라기보다 은사의 문제이다. 그러나까 우리는 충성이 없이도 구원받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주님과 나란히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는 그 언제 충성해 볼 시간이나 있었나? 그저 숨이 막 넘어가기 직전의 한 순간에 주님을 향하여 회개하고 신앙을 고백한 것뿐이다. 그 잠감동안에 그 강도는 전도하는 모습을 보인 셈이고 신앙간증하는 모습을 보인 셈이다. 비록 찰나의 시각이었지만 그는 예수를 믿었다. 그래서 구원받았던 것이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나? 그 강도, 사람으로서 맨처음으로 주님과 함께 천국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충성해 본 일도 없는데 말이다. 그 강도에게 이렇다하게 점수를 줄 만하 일이 맡겨진 적이 없다. 그에게 돈이 맡겨진 적도 없다. 시간이 주어진 적도 없다.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사명이 맡겨진 적도 없다. 충설할 기회가 주어진 적이 없다. 이렇듯 충성의 문제는 구원의 문제와는 별개이다.
문제는 사명의 문제이다. 우리는 은혜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 구원의 문제는 은혜의 문제이다. 은사의 문제는 별개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의 선물 곧 은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한다. 이를 가리켜 우리는 복이라고 한다. 복이란 은사요 사명이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은사로써 우리는 일을 하게 된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할 수 있도록 기회가 주어진다. 물론 일을 하면서 가쁨도 얻고 더 큰 축복도 받는 것이 사실이다. 이같은 의미에서 충성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구원의 문제와는 별개이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충성이 무엇인가? 좀더 깊이 생각해보면 충성은 은사로 주어진다는 것과 나와의 관계이다. 주어진 것에 대하여 내가 얼마나 실실한가, 얼마나 성실하게 충성을 다하는가, 이에 따라 더 큰 주어짐의 은사가 있다는 것이다. 이미 주어진 것을 신실하게, 충성되이 잘 감당하노라면 하나님께서 더욱 더 주신다. 무릇 있는 자에게 더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성서적 진리이다. 있는 자에게 더 주는 것이 충성에 대한 논리이다. 우리의 생각같아서는 있는 자에게서 빼앗아 없는 자에게 주어야 고를 것 같은데, 충성의 논리는 그렇지 않다. 있는 자에게는 더 주고, 없는 자에게서는 조금 남아 있는 것까지도 빼앗아서 있는 자에게 준다. 이것이 충성에 대한 논리이다. 이 점은 우리가 주님의 저 달란트 비유에서도 익히 알고 있는 말씀이다. 한 달란트를 그대로 가져온 사람에게서 그 한 달란트마저 빼앗아서 다섯 달란트로 다섯 달란트를 더 남기어 가져온 자에게 주지 않는가?
오늘도 보면 충성된 자에게 더 주고 더 주는 것을 볼 수 잇다. 여러가지를 더 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건강도 있도 재주도 있고 돈도 있고,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고, 너무 많이 가졌다 싶을만큼 여러모로 넉넉한데, 어떤 사람은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고 지지리도 없다. 이를 보고 흔히들 ‘세상 참 불공평하구나’ 한다. 그러나 충성의 질로 볼 때에는 이야말로 공평한 것이다. 공부 잘하는 학생이 우등생이 되고 공부 안하는 학생이 낙제하는 것, 이것이 공평아닌가? 공부 잘하는 학생에게 100점 주고, 공부 못하는 학생에게도 100점을 주어야 공평한 것인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사명이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거저 주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것을 주셔서 우리가 그것을 잘 감당하면 더 주셔서 더 감당하라고 하신다.
이런 분이 계셨다. 이 분은 매일 회사가 끝나면 꼭 교회에 들렀다가 기도하고 교회를 한바퀴씩 둘러보고 집에 가는 분이다. 예배당을 내 집같이, 내 집보다도 더 소중하게 여기는 분이다. 아무도 없는데 전등불이 켜있으면 끄고, 휴지가 떨어져 있으면 주어서 휴지통에 넣는다. 그야말로 충성이다. 이분은 사업을 하는 분인데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는 사람이다. 사업 하나를 시작하 때 천하없는 박사나 기술자가 확실하게 권해도 내 경험이 없는 것을 자신만만하게 바로 투자하는 법이 없다고 한다. 이건 틀림없이 확신이 서야 조그마하게 시험을 해보고, 필요하다 싶은 기간 동안 인내하고 기다려보아서, 과연 잘되면 그때에야 서서히 확장시킨다고 한다. 사람을 쓸 때에도 그렇다. 제아무리 확실한 사람이라 해도 곧바로 중요한 일을 맡기는 법이 없다. 밑바닥에서부터 일하는 모습을 살펴보면서 한걸음 한걸음 또박또박 거치게하여 비로소 제자리에 갖다 앉힌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작은 일부터 맡기신다. 그 작은 일에 내가 충성을 다하면 그 다음 단계의 일을 맡기신다. 그 일에도 충성에 합격하면 또다시 더 큰 일을 맡겨주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일을 하신다. 그런데 내가 맡은 일에 불평이나 하면서 풍성을 게을리 한다, 이런 일에는 충성하기 싫다, 이건 하찮은 일 아닌가, 큰일이면 충성하겠다라고 한다면 잘못된 태도이다. 이는 하나님의 논리가 아니다. 하나님의 방법에는 이러 태도가 용납되지 않는다. 분명히 알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다.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는데, 그 일이 틀어졌다. 하나님께서 빼앗으시는 것 같다. 그러면 이는 충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맨 밑바닥으로 내려가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충성의 계단을 한단 한단 다시금 확실히 밟아 올라가야 한다. 그래야 은사를 체험할 수 있다, 이 말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 시간이며 건강이며 지식이며 물질이며 지위가 다 주어지는 것들이다. 우리가 건강을 위해서 애를 쓴다. 음식도 조정한다. 절제도 한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에 앞서 우리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성실히 생각해야 할 문제가 하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내게 주신 건강을 통하여 내가 하나님께 얼마나 충성을 하였는가, 주신 이 건강을 가지고 내가 얼마나 충실하게, 꽉 차게 일을 했는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더욱 건강을 주실 만큼 충성을 하였는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으로 하여금 ‘너 건강 주었더니 시원하지 않구나, 네게서 건강을 빼앗느니만 못하구나’ 하시게 만들지는 않았는지 갚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시간에 충성하고 건강에 충성하고 지식에 충성하고 지혜에 충성하고, 특별히 물질에 대하여 깊이 충성해야 한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재물에 댜ㅐ하여 말씀하신다. 충성이 척도로 재물을 들고 있다. 상징적이고 비유적이면서 대표적인 척도이다. 충성 가운데서 물질에 대한 충성이 가장 가시적이고 가장 정확하다. 무릇 사람의 사람됨을 알려면 그 사람에게 돈을 주어보면 안다는 말이 있다. 13절하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우리가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재물이 하나님 자리에까지 도전하기 때문이다. 재물의 위력이 대단하다. 그 옛날, 가난하고 돈없던 시절에는 부인네들이 고분고분했다고 한다. 그런데 요새, 돈이 넉넉해지니까 남편 말을 잘 안듣는다고 한다. 예전에는 일본 여자들이 남편들 앞에서 아주 꼼짝 못했다고 한다. 남편들은 아내들을 마구 무시한다. 아내보고 ‘자네, 너’라고 말하는 것이 예사라고 한다. 그런데 요즘에는 아주 딴판이다. 세상이 바뀌었나 할 정도이다. 여자들이 돈을 가지다보니 이제는 남편이 언성을 조금만 높여도 살림 팽개치고 나가버린다. 이렇게 가출해버리는 여인네가 1년에 3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아이들 다 두고 나가버리는 것이다. 여자는 어디가나 쉽게 취직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여자들이 답답할 게 없는지 몰라도 남편들은 아이들을 떠안고 고생한다.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남편들은 이제 아내가 한 지붕 밑에서 무사하게 살아주는 것만도 고맙게 여기게끔 되었다고 한다. 남편이 아내 앞에서 설설 기는 세상이 되고 만 것이다.
여러분, 남편이건 아내건 경제적으로 자립할 능력이 충분히 있으면서 사랑해야 그게 ‘진짜’ 사랑이다. 효도도 그렇다. 경제적으로 충분히 자립하여 스스로의 능력으로 가정을 이루면서 효도하는 것이라야 그게 진짜 효도지, ‘나는 부모님 재산을 물려받아야 부모님을 효성으로 모실 수 있다’ 하면서 유산받기 위한 수단으로 삼아 효도를 한다면 제아무리 깍듯이 모신다 해도 그런 효도는 효도라고 할 수가 없다. 요새는 참 심한 이야기도 많다. 이번 추석에도 마찬가지였지만 명절만 되면 민족대이동인가 싶을 정도로 고향을 찾는 사람이 넘쳐나 소동을 겪는다. 그런데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부모님의 재산을 한푼어치라도 놓칠까봐 귀향에 유난을 떠는 사람들이 그중에는 많다고 한다. 부모님이 가지고 있는 땅, 그것 좀 얻어내려고, ‘이 놈은 명절이 되어도 애비 에미 찾을 줄도 모르는구나’ 하고 부모에게 ‘찍혀버려’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해야 되겠다고 여겨, 그래서 왔다갔다 하며 부모님께 눈도장을 찍는다는 것이다. 재물이라는 것이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효도도 재물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한다는 세상이다. 그래서 ‘돈주머니를 꽉 쥐고 있어야 애비 대접받고 에미 대접받는다’는 말이 어른들 사이에는 널리 퍼져있다.
어느 아버지가 큼지막한 다이아반지를 끼고 있다. 출가한 땅이 와서 ‘아버지, 그거 돌아가신 다음에는 저 주세요’ 하고 부탁한다. 아버지는 ‘오냐, 그러마’ 대답한다. 이번에는 며느리가 시아버지 보고 ‘돌아가시게 되면 그 반지 저 주세요’ 하고 부탁한다. 역시 ‘오냐, 그러마’ 하고 약속해 주었다. 그런데 그 노인, 줄을 때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준다는 말없이 그 반지를 그대로 끼고 있다가 죽었다. 반지 덕분에 그동안 효도 잘 받고 말이다. 그 반지 하나 얻어 가지려고 딸과 며느리는 아버지(시아버지) 생전에 열심히 잘해드렸던 것이다. 죽은 다음에 확인해 보았더니 그 다이아반지는 가짜더란다. 돈이 하나님의 위치까지 올라가고 있다. 돈 가지고 인격시험 할 수 있고, 돈 가지고 신앙 가늠할 수 있다. 스스로 아무리 잘 믿는다 해도 돈에 대한 애착으로 제대로의 처신을 못했다면 헛믿는 것이다. 아직 멀고 멀었다. 돈에 노예가 되어 있는데 어떤게 바른 신앙이 되겠나? 제물과 나와의 관계는 참으로 중요하다. 돈을 어떻게 버느냐, 어떻게 간직하느냐, 어떻게 지키느냐, 어떻게 쓰느냐, 돈의 가치를 어떻게 인정하고 있느냐, 돈을 최고로 여기는가 아닌가, 나에게 최우선의 것은 무엇이냐를 확실히 해야 한다. 그러므로 돈에 대한 자세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가늠할 수 있는 잣대, 시금석이 되는 것이다.
본문에서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하고, 작은 것, 불의한 재물, 남의 것, 이렇게 세 갈래로 재물을 표현하고 있다. 재물에 대한 이 세 갈래의 시각에서 사람의 충성됨을 시험할 수가 있다.
1. 작은 것, 푼돈을 어떻게 쓰느냐 이다.
큰 돈이 아니라 작은 돈, 작은 것이 문제되는 것이다. 10절의 작은 것은 헬라어로 ‘엘라키스토스’인데 가장 작다는 것이다. 사람이 보기에 지극히 보잘 것 없는 것이다. 사람이 보기에 대수롭지 않은 것이다. 사람이 보기에는 관심둘만한 가치가 없는, 아주 작은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런 것에 충성해야 한다고 하신다. 사람의 인격부터가 작은 돈을 바로 쓰느냐 허투르게 쓰느냐로 가늠된다. 단돈 천원이라도 그냥 호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는 것이 아니라 소중하게 지갑에 넣어서 사용해야 한다. 돈을 휴지 조각처럼 아무렇게나 사용하면 나라 살림에도 지장이 온다. 작은 돈을 소중히 여길줄 알아야 큰 돈 가질 자격이 있다.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길줄 알 때에 충성된 자가 된다.
음식도 그렇다. 요즘 음식 쓰레기가 문제이다. 저는 음식을 먹고 남았다고 마구 버리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 음식을 먹을만큼 준비하고, 깨끗이 처리해야 한다. 음식 상을 요란하게 벌리는 것, 능사가 아니다. 말맞게 차려서 알맞게 먹어야 한다. 서양사람들은 꼭 숫자대로만 한다. 사람 수에 딱맞게 만들어 놓고, 모자라면 빵 하나 더 주면서 먹으라고 한다. 절대로 남기지 않는다. 우리들은 이게 안된다. 우리는 너무 많이 차리고 나무 쉽게 버린다. 돈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없어서 절약하라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소중하게 주신 것이니까 그렇다. 나라 살림이 안되니까 그러라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이니까 충성하는 것이다. 모자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낭비는 그대로 죄이다. 작은 것에 충성할 때 큰 것을 주신다. 그렇다고 해서 구두쇠, 자린고비가 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모든 일에서 작은 일에도 충성을 다하라는 것이다. 하찮은 일에도 정성을 다할 것이다. ‘큰 일이면 하겠다, 직은 일은 안한다’고 말한다. 이런 사람에게는 큰 일이 맡겨지지도 않을뿐더러 맡겨도 감당을 못한다. 작은 일에 충성한 사람이라야 큰 일도 한다.
옛날 이야기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동네에서 유명하게 소문난 부자인데 지독히도 인색한 영감이 있었다. 이분이 환갑이 됐다. 그때로서는 이제 다 살았다고 여기던 나이, 환갑이 되고 보니까, 이 영감이 모처럼 크게 마음을 써서 자기 집에 부리는 머슴들을 수고했다면서 이제는 내보내려고 생각했다. 머슴들에게 자유를 주겠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미리 선언을 했다. 머슴들은 아주 기분이 좋았다. 주인 환갑날만 되면 이젠 자유의 몸이 된다고 저마다 잔뜩 기대에 부풀었다. 환갑 며칠 전부터 음식을 만드느라고 지지고 볶고 야단났다. 마침내 환갑 전날이 되자 영감은 밤중에 머슴들읖 다 불러놓고 ‘자네들 안됐네만은 급하게 쓸데가 있어 그러니 오늘밤에 새끼를 좀 꼬게’ 하고 짚을 갖다 주면서 ‘꼬되 될 수 있는대로 가늘게 꼬게들’ 이렇게 일렀다. 그래서 머슴들이 새끼를 꼬기 시작하는데, 저마다 한마디씩 투덜거린다. ‘영감쟁이가 본전 생각이 나나? 밤새도록 새끼를 꼬라니, 그 무슨 심술인고?’ 그러면서 대충대충 굵직굵직하게 되는대로 꼬았다. 그런데 그 중의 한 마슴만은 ‘쓸 데가 있으니 그러시겠지’ 하고 밤새껏 정성을 다해서 가늘게가늘게 꼬았다. 이윽고 아침이 되었다. ‘다들 꼬았나?’ 하고 주인 영감이 나타나 마슴들을 광으로 데려간다. 광에는 엽전이 가득하게 쌓여 있었다. 영감은 머슴들을 보고 말한다. 각자 자기가 꼰 새끼줄에다가 엽전을 꿸 수 있는 데까지 꿰어서 가져라.‘ 이래서 정성들여 가늘게 꼰 머슴이 제일 많은 엽전을 꿰어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여러분, 충성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이런 말씀이든 저런 말씀이든, 작은 일에 신실한 것이 충성이다. 특별히 물질에 대하여 소중히 여겨야 한다. 작은 물질에 충성하면 큰 물질을 맡긴다. 작은 일에 충성하지 않는다면 큰 일에 충성하지 않을 것으로 아신다. 충성의 질량은 큰 것이나 작은 것이나 같다. 작은 일, 큰 일이 따로가 아니다. 충성의 잣대로서는 같은 것이다. 큰 일에 불충했다고 벌이 많고, 작은 일에 불충했다고 봐주는 법이 없다. 도둑질이 그렇지 않은가? 큰 돈 도둑질하나 작은 돈 도둑질하나 도둑놈은 같은 도둑놈이지 차이가 있겠느냐 그것이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은 큰 일에도 충설할 것으로 알겠다, 작은 일에 불충한 것을 보면 큰 일에도 불충할 것으로 알겠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이다.
2. 불의한 재물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불의한 재물’이란 헬라어로 ‘아디코스 마모나’인데 이 말은 도덕적으로 불의한 재물이라기 보다는 ‘곧 없어질 재물’이란 뜻이다. 적당하지 않는 재물이요, 쓰이지 않는 재대물이요, 곧 없어질 재물이다. 내 것이 아니다. 조금 있으면 없어질 것이다. 잠간만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재물을 가리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을 보면 충성하려 하다가도 ‘에이, 이제 살면 얼마나 산다고 남은 시간 되는대로 살고 말지 뭐’ 한다. 그러나 이것은 불충성이다. 본문 1절부터 보면 ‘지혜로운 청지기’가 비록 과거의 행동은 나빴지만 주인이 ‘네 권리를 셈하라, 오늘 네 권리를 빼앗겠노라’ 했을 때에 남아있는 그 짧은 시간, 자투리 시간을 지헤롭게 이용한다. 그 마지막 권리, 마지막 시간을 잘 이용한다. 그래서 주인에게 지혜롭다고 칭찬을 듣는다. 우리에게 주어진 재물, 이것은 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곧 떠날 것이다. 시간도 잠깐이다. 능력도 이젠 한계가 보인다. 그 남은 시간에 어떻게 할 것이냐 이것이다. 그 시간을 충성되이 써야 한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것도 그렇다. 대개 공부 못하는 아이들은 무드만 찾는다. 책상이 안좋네, 스탠드가 없네, 시끄럽네 등 그러다가 만다. 그러나 공부 잘하는 학생들은 자투리 시간을 잘 이용한다. 가면서 오면서,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서까지도 잠깐잠깐의 시간들을 잘 이용한다. 그래서 공부를 잘하는 것이다. 충성도 마찬가지이다. 너무 거창하게 생각할 것 없다. 지금 내게 맡겨지는 것은 무슨 일이든지 좋아야 한다. 예배시간 지키는 것도 그렇다. 이것이 충성이니까 지켜야 한다. 불의한 재물, 없어질 것이다. 잠깐 남아 있는 것일 뿐이다. 잠깐의 시간을 잘 써야 한다.
3. ‘남의 것’이라고 하신다.
재물은 내 것이 아니다. 남의 것이다. 우리는 청지기이다. 어디까지나 위탁받은 것이다. 한 인색한 아버지가 아들보고 ‘얘야, 옆 집에 가서 망치 빌려오너라’ 하고 심부름을 시켰는데 그 아들녀석이 갔다오더니 ‘망치 안빌려주던데요’ 한다. ‘있기는 있든?’ ‘있는데 안빌려 줍디다. 망치 닳는다고 안빌려 줍니다.’ 그러니까 아버지 왈 ‘그래? 그렇다면 닳아도 우리 것 쓰고 말자’ 하더란다. 여러분, 내 것이 있고 빌린 것이 있다. 어느 것이 더 소중한가? 여기서 인간을 알아보는 것이다, 성실한 사람은 남의 것이 소중하다. 남의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쓸 수가 없다. 그런데 못된 사람은 내 것은 소중하고 남의 것은 아무렇게나 쓴다. 내가 좀 불편하더라도 저 사람 좀 편하게 해주자, 이것이 충성이다. 남의 것에 대하여 충성하는 것, 남의 인격 소중히 여기는 것, 남의 물건 소중히 여기는 것, 이것이 충성이다. 빌린 물건은 짐이 된다. 좋거나 나쁘거나 이건 어찌할 수 없다. 깊이 생각해야 한다. 돈을 꾸었나? 그 꾼돈을 갚을 때까지 나는 죄인이다. 돈을 꾸어가지고 그것으로 사치할 수 없다. 내가 빚을 지고 있는 처지에서는 갚기 전에는 결코 자유인이 아니다. 그런데 빚진 돈 가지고 사치하고 흥청거리는 사람들이 많아서 탈이다. 우리나라는 1천억불 이상이 빚져있는데도 사치하고 호화롭게 살려고 한다. 정신없는 사람들이다. 충성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 절대로 잘 살 수 없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남의 것에 대하여 충성하라 하신다. 남의 것에 대하여 성실하라 하신다. 그리하면 ‘너희 것을 너희에게 주리라’ 하신다. 영원한 것을 주리라 하신다. 정말로 네 것을 만들어 주리라 하신다. 남의 것에 대하여 네가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 중요한 문제이다. 충성은 질이 문제이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할 때에 큰 것을 주신다. 참된 것을 소중히 여길 때에 가치있는 것을 주신다. 남의 것에 대하여 충성을 다할 때에 이제는 정말로 내 것을 주신다. 모세는 40년 동안이나 장인집 양떼를 쳤다. 그리고 마침내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지도자가 되었다. 하나님 아버지의 양들을 충성되이 지켰다. 아버지의 양떼를 몰던 다윗이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의 목자가 된 것이다. 충성은 주님께서 평가하신다. 내가 이러고저러고 할 수 없다. 주님께서 평가하신다. 평가대로 주신다. 충성된 자에게 더 주시고, 충성이 없는 자의 것은 낮추신다. 이것이 주님이 하시는 일의 원리이다. 딤전 1:12절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하나님께서 재산도 물질도 지혜도 건강도 주실 것입니다만은 내가 주님께 내놓아야 할 것은 오직 하나 충성이다. 충성에는 인정을 받아야 한다.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작은 일에 충성할 때 큰 일을 밑기시리라. 이것이 축복의 길이다. 작은 일에 충성하므로 큰 일까지도 맡을 수 있는 축복받는 성도들이 되자. (1996-0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