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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난 속을 지나며 / 출 12:29-39, 행 23:11-16
시드니 올림픽이 열리고 있다. 남북한 선수들이 함게 손을 잡고 입장하는 모습을 보고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이 환호와 축하를 해 주었다. 이번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들에게 대통령은 전화로 격려를 했다. 많은 사람들이 격려를 할 때는 과일, 금일봉 등을 전달한다. 그러므로 선수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주님께서 사도 바울을 격려하는 내용이 있는데, 우리들이 격려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법이다. 바울은 지금 옥에 갇혀 있고 결국 로마까지 가도록 되어 있다. 이때 주님께서 이렇게 격려를 한다. 11절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로마에까지 가서 복음을 증언하리라고 했는데, 지금 밖은 어떠한가?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고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동맹하고, 매복한 사람들이 40여명이나 된다. 여러분이 이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하겠나?
우리가 신앙생활알 하면서 가장 어려운 것이 뭐냐 하면, 세상적인 외부조건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이 사건을 통해 볼 수 있다. 언제나 우리의 최고의 소원과 목적이 뭐냐 하면 믿는 사람들까지도 대부분 고통을 면하는 것과 세상 일이 잘되는 것 등이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 이단과 사이비가 많이 생기고, 거기에 뜻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좇아다닌다. 이렇게 말씀드려서 죄송하지만 어떤 기도원에서 손톱으로 후벼서 병이 낫는다, 손바닥으로 때려서(안찰) 병이 나았다 하면 사람들이 많이 몰려간다. 왜 몰려가나? 기독교의 신앙의 핵심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한번도 편안한 것과 쉬운 인생을 약속한 적이 없다. 세상에서 출세하는데 기독교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내가 예수 믿으면 뭐든지 잘 될 것이라고 혼자 상상해 놓고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으니 무언가 결과를 달라고 한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이미 사도 바울은 이 예루살렘에 와서 잡힐 것을 각오하고 에베소 장로들을 청하여 거기 있는 여러 교회들을 주의 말씀으로 부탁한다. 그리고 떠나올 때에 그를 말리는 제자들에게 이런 약속을 한다. 행 14:22절을 보면 그가 예루살렘에서 당할 고통을 말리는 제자들애게 이렇게 말을 한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바울 쪽에서 보면 환난은 당연한 것이고, 당연한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필수과정인 것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이단과 사이비들은 언제나 무엇으로 유혹을 하느냐 하면 만사형통을 제시한다. 이것만 믿으면 뭐든지 잘 되고 이렇게만 되면 언제나 기쁨과 감격이 있을 것이라고 유혹을 한다. 그러나 예수를 믿으면 여러분의 마음이 편안해지고 뭐든지 잘되고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된다는 것거을 성경은 약속한 적이 없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이 있다고 약속을 한다. 왜 그럴가요?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 일까요? 아니다. 분명히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요, 홍해를 가르고 그의 백성들을 건져내신 분이며, 여리고 성을 활 하나 쏘지 않고 무너뜨린 분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킨 분이시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를 불러 하나님의 자녀를 만드시는 능력과 지혜와 긍휼이 무궁하신 분이다. 그런데 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환난이 필요할까?
롬 5장에 보면 이렇게 설명한다. 1-4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자, 이제 우리 에수 믿었습니다. 그의 부르심과 은혜와 복 주심 안에서 이제 우리 영광되게 살자’ 해놓고, 당장 무슨 말이 나오느냐 하면 ‘그래서 우리는 환난을 즐거워해야 된다’ 이거다. 환난에도 불구하고 즐거워하지 이런 뜻이 아니다. 환난 자체를 즐거워하자는 것이다. 자기 학대를 기뻐하자는 것이 아니라 환난이 적극적으로 성도들에게 하는 일이 있다는 것이다. 환난이 하는일, 행 14:22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된다. 그것 없이는 가지 못한다. 무슨 뜻이냐 하면 쉽게 얘기해서 훌륭해지려면 너 공부 열심히 하라는 것과 똑같은 말이다. 학교라고 다 같은 학교가 아니다. 좋은 학교를 가려면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좋은 학교란 가르치는 사람들이 좋고, 배우는 학생들이 좋다. 이런 학교에 가면 마냥 놀기만 하려는 학생들이 많은 학교보다 더 힘이 들고 고달프다. 공부하느라 제대로 잘 수 없고 나가서 전자오락 또는 춤이나 추고 술이나 먹는다면 언제 학교에서 요구하는 것을 다 배울 수 있겠나? 환난을 쉽게 얘기하면 이런 식이다.
환난이 사람들에게 주는 것 세가지를 말씀드리겠다.
첫째, 환난이 닥쳐야 비로소 사람은 주님의 필요성을 더 깊이 깨닫는다.
어떤 때 신앙이 나쁘냐 하면 만사형통할 때이다. 여러분, 자식들도 말썽 안부리고, 남편도 가정적인데다 돈도 잘 벌어다주고, 여러분들도 재미있고 그러는데 ‘주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하나? 아니다. 사람은 편안하고 자기 일이 잘 되면 주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기 힘이 힘을 발휘하고 자기의 능력이 통하는 동안은 주님을 찾지 않는다. 환난이 닥쳐야 주님을 찾는다. 환난은 우리가 지금까지 갖고 있었던 것으로, 지금까지 하던 식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한다. 내 힘과 내 능력, 세상의 방법으로 해결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비로소 주님을 진지하게 찾게 된다. 이것이 환난이 하는 일이다. 우리는 비로소 무릎을 꿇게 되고, 비로소 밤잠을 덜 자면서 기도하게 되고, 친척이 놀러오고, 친구가 놀러오고, 환갑, 결혼 등이 있다해도 빌길을 주님께 돌려 교회에 나와 고개를 숙이게 된다. 주님을 찾게 된다. 우리가 풀 수 없는 문제, 절박한 문제를 만나야 우리는 비로소 주님을 찾게 된다. 이것이 환난이 하는 일이다. 이 환난이 없으면 성도라 할지라도 죽음과 게으름의 밤을 자기 마련이다. 그래서 여러분이 받으셔야 할 첫 번째 복이 무엇이냐 하면 환난이다. 그 환난이 여러분을 쳐서 하나님 심판대 앞에 여러분이 끌려가기 전에 정신차려서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것을 복이라고 한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이 힘과 위로와 사랑을 주시고, 그리고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고 있음을 실제로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깊은 신앙으로 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환난은 얼마나 복된 것인가?
둘째, 환난은 우리 자신을 바로 보게 한다.
평안할 때는 우리가 실력이 있는 것 같고, 우리가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무슨 일도 상상으로 할 때는 매우 쉬어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일에 부닥쳐 보면 왜 이리 어렵고 힘든지 모르겠다. 우리는 얼마나 실력이 없는가? 우리가 가졌던 것이 평화롭고 그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았을 때는, 내가 대단한 실력을 갖고 있고 대단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을 내가 정작 써야할 때가 되면 우리가 얼마나 실력이 없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환난이 하는 일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싸울 때 보면 무슨 큰 문제가 생겨서 싸우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왜 싸우는가 하고 들여다보면 별거 아닌 것을 가지고 싸운다. 내가 나이가 많은데 인사를 안했다, 말을 하는데 눈을 똥그랗게 뜨고 했다, 반말 비슷하게 했다는 등 대개 이런 것을 가지고 싸운다. 옆에서 구경할 때는 ‘야, 반말 좀 하면 어떠냐? 네가 예수 믿는 사람인데 참아야지’ 한다. 그런데 자신이 직접 당하면 ‘네 다리를 작신 분질러 놓기 전에는 밥도 안먹겠다, 이빨을 몽땅 뽑아 버리겠다’고 한다. 이런 결심을 하는 자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그러고 보면 이건 신앙이 아니라 고집불통과 미련함과 편협과 성내기를 좋아하는 것과, 그리고 성을 내면 끝장을 보고야 마는 것 등, 이렇게 우리의 실체를 보게하는 것이 환난이다. 환난이 닥치지 않으면 모두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이만하면 됐지’ 한다. 우리는 이만하면 되는 게 아니다. 환난을 겪어야만 비로소 내가 아직도 얼마나 더 준비를 해야 되는가를 안다. 이러한 우리의 신앙의 실체를 보면서 비로소 뭘 발견하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비교되는 우리의 미련함, 우리의 불성실함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왜 하나님을 믿어야 되는가를 알게 된다. 내가 실력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의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갖고 있고, 기도라는 무기를 갖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종종 기도하면 복권이 당첨되어 돈이, 능력이, 세상 권세가 내 손 안에 쥐어지는 것으로 착각하며 산다. 이는 참으로 불안하고 불상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능력이 있으시고, 내가 기도하며 그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자랑인지를 비로소 환난이 가르쳐 준다.
셋째, 환난은 우리의 믿음 속에 있는 불순물을 제거하는 작업을 한다.
해마다 물난리가 난다. 올해도 어김없이 태풍으로 인해 물난리가 났다. 여러분 집에 물이 들어오면 사람 목숨, 귀금속이나 현찰을 제외하고 가재도구 중 맨 먼저 뭘 꺼내겠는가? 한번 생각해 보라. TV를 보니까 뭘꺼내던가요? 맨 먼저 제일 많이 꺼내는 게 무언가? 수해가 나면 무엇이 필요하고 필요하지 않은지를 알게 된다. 분명히 구별이 된다. 그런데 우리가 편안할 때는 별 쓸데없는 것 다 사게 된다. 여러분, 오늘 집에 가서 여러분 집에 있는 가재도구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라. 장롱이 얼마 짜리네, 바닥 카펫이 무슨 색깔이네 하면서 그렇게 중요하지 않는 것들에 많은 돈들을 투자하고 있지는 않았나? 그러나 환난을 당하면 결국 무얼 배우느냐 하면 소파가 큰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장롱이 비싼 게 중요한 것이 아니며, 손가락에 낀 반지가 큰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배운다. 뭐가 중요하다는 것을 비로소 아는 것, 이것이 환난에서 배우는 것이다. 환난을 당하기 전에 판단하고 분별해서 인생을 사는 것을 믿음이 좋다, 지혜롭다 하고, 환난을 당해서 깨닫는 것을 그나마 다행이다라고 하며, 환난을 당하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희망이 없다고 한다.
벧전 1:6-7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이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기 위하여 무엇을 하느냐면 믿음의 시련이 필요하다고 한다. 믿음이 순금같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불로 태워야 불순물이 제거되고 순금이 남기 때문이다. 이 싸움에 우리가 게을러서는 안된다. 우리는 언제나 환난을 당한 셈치고 살아야 한다. 이것이 성도이다. 고3 학생들에게 흔히 이렇게 말한다. ‘이번 1년만 고생해라. 그럼 네가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왜? 이때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가 목숨 걸고 할 일은 신앙을 정상화하는 것, 우리의 신앙이 순금화 되는 것이다. 욥기가 바로 그런 이야기이다. 멀쩡히 살고 있던 욥에게 하나님께서 시련을 준다. 욥이 죄가 있어서 그런가? 아니다. 여러분이 욥기를 읽어봐서 알겠지만, 욥은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다. 자기 자녀들이 무슨 일을 했을 때 혹시 부지불식간에 죄를 범하지 않았나 해서 꼭 제사를 드리던 사람이다. 이런 욥에게 하나님의 요구는 이것이다. ‘너는 잘못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잘못을 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신앙이 더욱 깊어지고 순금이 되라.’ 욥은 순금이 되는 싸움을 하지 않았다. 여러분도 어쩌면 잘못을 하지 않는 정도의 수준은 넘어선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신앙은 그 정도를 요구하지 않는다. 순금처럼 되기를 원한다.
바울은 주의 나라를 확장하며 복음을 전하기 위한 열심히 가득 차 있다. 그런데도 그는 많은 환난을 겪고 있다. 바울의 걱정은 ‘내가 여기서 죽어버리면 로마에 있는 저 불쌍한 영혼들에게 누가 복을음 전할 것이냐, 저들을 어떻게 내버려 둘 것인가?’ 였다. 그러자 주님께서 ‘너는 죽지 않고 로마까가지 간다. 걱정하지 마라’고 한다. 그런데 거기 가는 동안에도 바울이 전해야 하고, 해야 하는 일에 다른 것이 끼지 않게 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어냐? 이때 그에게 환난을 겪게 하여 로마로 보내야만 순금만 전달이 된다 이거다. 그래서 바울을 편하게 로마로 보낼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바울을 통해서 전달하려는 내용이 꼭 순금만 전파되게 하기 위해서 환난을 주셨다. 그를 편하게 하면 순금에 다른 것이 섞여서 들어간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나는 죄를 짓지 않았다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여러분 안에 불로 연단한 금은 없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우리들이 가진 최대의 약점이다. 언제나 편안한가? 편안하면 우리는 죽음의 잠에 떨어진다. 여러분 한번 점검해 보세요. 편안한가? 아니면 환난 속에 있는가? 환난 속에 있다면 기뻐하라. 여러분은 이제 순금처럼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한난 속에서도 순금 같은 신앙을 가진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2000-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