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와 생명의 길
2024. 10. 6(주일낮예배) 요한복음 14:1-6
여러분은 월급이 얼마나 되는가? 그리고 여러분이 받는 월급의 수준이 어느 정도 된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받는 월급 수준을 아는 방법 중 하나가 중위소득이다. 우리나라 국민의 소득을 순서를 매겨서 제일 중간에 있는 소득이 중위소득인데, 2022년 기준 4인 가정의 경우 512만 1080원이 중위소득이다. 참고로 1인, 2인, 3인 중위소득은 대략 1인 194만원, 2인 326만원, 3인 419만원이다.
그러면 여러분의 월급은 상위소득인가? 중위소득인가? 하위소득인가? 우리가 말하는 중산층은 4인 가족을 기준으로 월 400만원-1000만원의 소득이 있는 가정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중산층 중에 45.6%가 자신은 하위층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왜 우리나라 중위소득의 사람이 자신을 하위층이라고 대답했겠는가? 저도 설교를 준비하면서 깜짝 놀란 사실이 있는데, 우리나라 2022년 연봉 10억이 넘는 사람이 4,480명이고, 5-10억의 연봉을 받는 사람이 12,980명이라고 한다. 이렇게 5억 이상의 초고액 연봉을 받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상대적 박탈감으로 중위소득의 사람들이 나는 하위소득이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중위소득의 사람이 하위소득자라고 말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그것이 SNS이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SNS를 통하여 해외여행을 가고, 또 멋진 식당에서 밥먹는 사진을 올린다. 그러면 그 SNS를 보는 나는 해외여행을 도 한 번 못가는데 하면서 자신을 하위소득자로 인식한다. 그리고 열심히 돈을 모아서 나도 동남아 여행을 가서 열심히 사진을 찍어 올려 다른 사람이 부러워하게 한다. 그런데 어떤 분이 SNS에 올라온 사진을 중심으로 소득을 계산해 보니 4-5배가 부풀려져 있다고 한다. 250만원을 버는 사람이 SNS에는 1000만원 버는 것처럼 사진을 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 사회는 진실된 삶이 아니라, 4-5배 과장된 삶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의 삶에 이러한 과장된 모습이 없는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둔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다. 그때 베드로는 절대 내 발을 씻길 수 없다고 할 때 예수님은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는 말에 베드로는 목욕을 시켜 달라고 요청한다. 그 말에 예수님은 요한복음 13장 10절로 말씀한다.
(요 13: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고 말씀하신다.
왜 예수님은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라는 말씀을 하였겠는가? 그리고 21절에서 예수님은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공적으로 제자 중 누군가가 나를 팔 것이다는 말씀을 하실 때 심령이 괴로웠다고 기록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과 만찬을 하는 가운데 떡 한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26절)고 말씀하시고 가룟 유다에게 떡 한 조각을 적셔 주었다.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에 유다는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었겠는가? 요한복음 13장 1-2절 말씀을 함께 읽기 바란다.
(요 13:1-2)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2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유다는 이미 예수님을 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는 예수님은 유다가 죄에서 떠날 수 있도록 여러 번 기회를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유다는 자신의 거짓된 모습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한 유다는 결국 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하였다는 인생이 되고 말았다.
그러면 우리는 끝까지 사랑하는 예수님의 사랑 앞에 진실된 모습으로 서 있는가? 목사님의 심방을 갔다. 목사님의 심방을 받기 위하여 준비한 집사님은 목사님이 들어오시자 아들에게 엄마가 늘 읽던 책을 가져오라고 말했다. 그 말에 아들은 잡지책을 가지고 왔다고 한다. 그냥 성경책 가져오라고 했으면 좋았을텐데, 괜히 늘 읽던 책이라 말해서 집사님은 창피만 당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삶에 이러한 모습이 너무 많이 않는가? 이렇게 과장되고 거짓된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고 말씀하신다. 아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롬 3:23)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죄를 범하여 헛되고 과장된 삶에 구원은 없겠는가? 먼저 오늘 본문을 보기 바란다. 오늘본문은 예수님께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라고 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우리가 있을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말씀하였다. 그때 예수님은 내가 가는 길을 너희가 안다고 하였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디로 가는지를 몰랐다. 그래서 도마가 주께서 어디로 가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습니까?(5절) 하고 묻는다. 그렇게 도마가 길을 어찌 알겠습니까? 하는 질문에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6절로 말씀하신다.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14장 6절을 함께 읽기 바란다.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은 범죄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진리이고,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말씀이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믿는가? 어떤 사람은 선행을 많이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죽은 자는 참된 선행을 할 수도 없고, 또 그러한 선행을 할 수 있다고 해도 그 선행으로 구원을 받을 수는 없다. 또 어떤 사람은 명상을 통하여 자기 마음과 생각을 통제함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람이 자기 마음과 생각을 통제할 수 있는가? 제가 늘 드리는 말씀이지만, 한 때 밤에 잠을 자지 못하여 힘들 때가 있었다. 새벽기도를 해야 하는데, 새벽 2시가 넘었는데도 잠이 들지 않으면 정말 고통스럽다. 그때 제가 가장 많이 한 것이 토끼 한마리, 토기 두마리였다. 저는 토끼 한마리, 토끼 두마리 하면서 숫자를 헤어리면 토끼 세마리째는 정신이 혼미해지기를 바랬다. 그런데 정말 기적같은 것은 토끼 백마리를 헤아렸는데, 그 다음이 백 한마리라는 생각이 너무 뚜렷하였다.
아니 저도 마음에 분노가 차오를 때가 있다. 그렇게 분노가 올라왔을 때 제가 입술을 벌리면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할렐루야 라는 말이 아니라, 누구는 성질이 없어서 참고 살았는 줄 아나? 하는 말이 튀어 나온다. 그래서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하여 노력을 하면 할수록 더 원망과 저주가 나온다.
여러분은 저와 다른가?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주장할 수 없다. 그런데 죄로 인하여 무너져 버린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우리 예수님이 길이 되어 인도하여 주신다는 것이다.
왜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악된 마음과 생각을 고칠 수 있는가? 명품백을 사용하다 스크레치가 날 때가 있다. 수백만원 주고 산 명품백에 스크레치가 나면 동네 수선집을 찾아가지 않는다. 비쌀수록 명품백만 전문적으로 수선하는 집을 찾아가서 수선을 한다. 왜냐하면 명품백 전문점을 가야 명품백으로 온전히 복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받은 명품인 저와 여러분을 다시 명품으로 회복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누구인가?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에 기록된 것처럼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고 말씀하였다. 쉽게 설명하면 우리가 알면 평안을 누리고, 자유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진리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시는 분이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는 생명이라고 하였다. 사람은 모두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싶어한다. 그래서 진나라의 진시왕은 영원히 살고 싶어서 불로초를 구하였다는 말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 BC 259에 태어나서 BC 210에 사망한다. 진시왕은 고작 49년 밖에 살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참된 생명을 가지고 있는 분이시다.
이렇게 그 누구도 가지지 못한 진리이고, 생명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셨다. 그리고 진리라서 절대적 자유를 가지고 있었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억압을 받으셨고, 또 절대적 생명을 가지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는 그 사랑을 다 나타내 보여 주신 것이다. 절대적 진리를 가져서 절대적 자유를 가지시고, 절대적 생명을 가지고 있어서 결코 죽을 수 없는 예수님이 나를 끝까지 사랑하여서 십자가에서 결박당하셨고, 또 그 절대적 생명을 버려 죽으신 것이다.
그러면 자기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가?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이런 말을 하였다.
인간과 하나님이 만나는 길은 2가지 밖에 없다. 한가지는 인간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오는 길이다. 인간이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길을 종교라 하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려오는 길을 복음이라고 한다.
진리이고 생명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 복음이다. 그 예수님 앞에 진실된 모습으로 설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의 길이 되어 구원으로 인도하는 그 백성의 복을 받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