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 년 전 미국에서 라스베가스를 지나고 모하비 사막을 거쳐 나바호 지역을 지난 일이 있다. 길
가에 덩그러니 놓인 한 식품점에 들렀는데 물건도 별로 없어 보이고 점원들만 서성거리고 있었
다. 그들은 바로 우리가 인디언이라 부르는 원주민의 후예들이었다. 검고 퉁퉁한 얼굴에 활짝 웃
으면 누런 이가 보이는 것이 영락없이 1950년대나 60년대 분 바르지 않은 우리 시골의 당고모 같
은 이도 있었다.
이주민의 쇄도, 땅에 대한 욕심 그리고 충돌
실제로 북미원주민들은 빙하기가 끝날 무렵인 1만4천년 전 시베리아와 북아메리카가 붙어있을
때 지금의 베링 해협을 건너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미 대륙의 원주민들은 백인들이 그 땅에
발을 디디기 이전에 원시의 에덴 같은 땅에서 그들만의 고유하고 온전한 삶을 이어왔다. 어느 누
구의 손도 타지 않은 이런 무구한 상태는 15세기 후추와 황금을 얻기 위해 인도로 가는 길을 찾
아 나선 탐험가들의 발길이 미치면서 깨어졌다. 그 뒤를 이어 유럽인들은 ‘신대륙’을 향해 대
서양을 건너오기 시작했다. 이들이 신대륙으로 이주한 이유로 맨 먼저 내세우는 것이 종교의 자
유이지만 그것은 여러 동기 중의 하나일 뿐이다. 유럽 대륙에 정치적인 핍박, 사회적 동요, 기근
이 있을 때마다 이주의 행렬이 이어졌고 사기나 협잡, 살인 등의 중죄를 범한 죄인들과 일확천금
을 꿈꾸는 이들도 이 대열에 끼었다. 광활한 대륙은 삶의 터전이 뿌리째 뽑혀 밀려나게 된 사람
들에게는 최후의 도피처이자 신기루 같은 이상향으로 떠올랐다. 원주민들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무작정 달려든 이 창백한 얼굴의 이방인들을 적대하지 않고 우호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이주
민들에게 주거지와 먹을 것을 제공하고 땅도 떼어주었다. 그러나 이주민들은 끊임없이 밀려오고
땅에 대한 욕구가 근본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한 충돌과 갈등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여기저기서 간헐적으로 터진 충돌 가운데에서 포카노켓의 메타콤이 일으킨 전쟁은 가장 규모가
큰 본격적인 전쟁이었다. 메타콤은 오랫동안 내러갠싯 족을 비롯한 동부 부족들과 동맹을 맺고
1675년 오만무례한 백인들에 대항해 전쟁을 일으켰다. 여러 달 동안 결사적인 전투가 계속되었지
만 백인들의 엄청난 화력을 당할 수 없었다. 그는 전사들과 친척들을 잃고 아들과 아내까지 적에
게 포박되어 홀로 남았지만 삼림이나 늪을 뚫고 돌아다니며 배반한 부하의 총에 맞아 사살될 때
까지 무릎을 꿇지 않고 끝까지 싸웠다. 그에게 마지막 도피처를 제공한 내러갠싯 족의 대추장인
카노체트도 항복하지 않고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최후의 항전에서 포카세트의 웨타모 여왕도 강
을 건너다가 죽음을 당했다. 백인들은 여왕의 목을 잘라 포로가 된 부하들의 애가 끊어지도록 기
둥에 매달아 전시했다. ‘립 반 윙클’이라는 이야기로 유명한 작가 워싱턴 어빙이 「포카노켓
의 필립」이라는 제목으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이러한 정경은 백인들이 원주민을 다루는 일
반적인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휴지조각이 되기 일쑤인 평화조약
이주의 물결은 계속 이어졌다. 특히 1830년대 유럽에 7년여의 대기근이 들자 굶주린 세궁민들은
도제계약 노동자로 신대륙에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한편 1861년에 일어난 미국의 남북전쟁
에서 북군이 승리하자 미합중국의 헤게모니는 북부에 돌아갔다. 갈등을 봉합한 미합중국의 시선
이 이제 아직 미개척지로 남아 있는 서부로 돌려지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미국은 이미 프
랑스의 나폴레옹에게 루이지애나를 매입하고 멕시코와 싸워 플로리다와 캘리포니아 그리고 텍사
스를 미국의 영토로 편입한 뒤였다. 땅에 대한 미국인의 욕망이 광활한 서부를 내버려둘 리 없었
다. 게다가 1848년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되자 서부로의 이주는 도화선에 불을 당긴 격이 되
었다. 미대륙 분수계인 콜로라도 산맥에서도 금이 발견되자 골드러시는 중서부 전지역으로 확대
되었다.
이렇게 되자 그 지역을 점하고 있던 원주민의 생존과 존립이 핵심적인 문제로 떠올랐다. 이 당
시 미 중서부 지역에는 네브래스카의 원주민 성소인 ‘검은 언덕’을 중심으로 가장 수가 많고
강대했던 수우 족이 거주하고 있었고 아라파호 족과 샤이엔 족이 그들과 함께 하고 있었다. 록
키 산맥에는 산악부족인 유트 족이 살고 그 서쪽에 네즈페르세 족이 있었다. 아칸소 강 남쪽에
는 카이오와 족과 코만치 족 그리고 남부 샤이엔 족이 와서 거주했다. 남서부의 애리조나에는 아
파치 족이 자리 잡고 뉴멕시코 북쪽에는 나바호 족이 있었다.
어빙이 그려낸 비극적 일화는 1860∼1890년에는 일상적인 일이었다. 백인들은 원주민들과 수많
은 평화조약을 맺었지만 그런 조약들은 그들의 이득이나 편의에 따라 휴지조각처럼 폐기되기 일
쑤였다. 이주민들이 침범해 들어와 자신들을 몰아내려 했기 때문에 땅과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나선 싸움. 일방적으로 쫓기고 몰살당하는 것이었으니 전쟁이나 전투라 할 것도 없
었다. 그러니 이들이 당하는 참상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 중 악명 높았던 샌드 크리크의
학살 장면을 혼혈인 로버트 벤트는 이렇게 전한다. “…남자, 여자,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무차
별 살육이 눈앞에 벌어지고 있었다… 내가 본 죽은 사람은 모두 머리가죽이 벗겨져 있었으며 한
임신한 여자는 배가 갈라져 있었는데 태아가 끄집어내져 있었다. 흰영양의 시체는 성기가 잘려
져 있었다. 나는 한 미군이 그걸 가지고 담배쌈지를 만들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직접 전
투에 참가한 미군 제임스 코너 중위도 그 말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나는 한 녀석이 여자의
성기를 잘라 그것을 막대기에 걸어 전시하겠다고 떠벌리는 것을 들었다. 그 녀석은 인디언의 손
가락에 끼어 있는 반지를 빼내기 위해 손가락을 잘라냈다… 많은 병사들이 여자의 성기를 잘라
말안장에 걸치고 다니거나 모자 위에 꽂고 돌아다녔다.”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원주민들도 공격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백인들은 원주민들을 이간시키고
모반을 부추겼으며 그들을 용병으로 고용해 다른 부족을 공격하는 데 정찰대나 수색대로 이용했
다. 이런 식으로 학살을 당하고 삶의 터전이 파괴된 원주민들은 미 정책 담당자들의 주거지역정
책에 의해 고향에서 수천리 떨어진 유폐지역으로 끌려갔고, 혹은 국경을 넘어 캐나다와 멕시코
로 도피하기도 했지만 추격의 발길은 집요했다.
한 민족의 꿈이 거기 죽어 있다
이주의 물결을 막을 수 없는 한 원주민들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
다. 그러나 대지는 무한하며 어느 누구의 소유도 아니라고 믿고 있던 이들이 그들의 땅을 나누
어 주었듯이, 전제적인 폭압이나 빈곤으로 미지의 대륙으로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주민들도 자
신들이 신봉하는 자유와 평등, 박애의 이상에 따라 원주민들과 최소한도의 공존의 길을 찾았더라
면 이런 무도하고 반인륜적인 행위는 범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이런 점은 근본적으로 백인들이 그들과 다른 인종들을 어떤 식으로 보고 있었던가와 관련이 깊
다. 신대륙에 맨 처음 당도한 콜럼버스는 원주민들을 ‘고상한 야만인’으로 보았다. 1862년에
나바호 족을 몰아냈던 북부군의 칼턴 장군에게 원주민은 ‘산 속을 달리는 늑대’이므로 사냥을
해 없애버려야 할 짐승이었다. 다코타의 한 지방신문은 인디언을 ‘여물통의 개’로 부르기도 했
다.
1877년 1월 퐁카 족의 추장 선곰이 500마일 떨어진 주거지역으로 강제로 이주당했다가 죽은 아들
을 고향에 묻기 위해 떠났다. 길을 가는 도중 관을 싣고 가던 그의 일행은 오마하에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 재판의 주요한 논지는 선곰이 ‘사람’이냐 아니냐였다. 그는 다행히 원
주민의 곤경에 공감하는 소수의 백인들의 도움으로 원주민도 사람이므로 이주의 권한이 있다는
판결을 받아 석방이 되었다.
이미 흑인들을 짐승같이 노예로 부리고 있던 오만하고 비인도적인 백인들에게 원주민이 사람인
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청교도적인 근면과 절제의 이상은 더 많은 부를 소유하려는 욕망
으로 바뀌었다. 자신의 이득만을 좇는 이런 배타적 야망은 소위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라는 주의로 극명히 호도되어 있다. 그것은 백인들이 신대륙을 다스리도록 운명 지
워져 있으며 지배민족으로서 원주민들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원주민과
평화조약을 맺는 미 정부대표단에 목사나 주교, 선교사들이 참여했고 그들이 다른 누구 못지 않
게 이들을 감언이설로 속이고 그들의 땅을 갈취하는 데 앞장섰다는 사실도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점에서 백인으로 당대의 대중적 인기를 한 몸에 모았던 영향력 있는 소설가인 어빙
이 인디언의 참경을 있는 그대로 절절하게 묘사한 것은 그 자체가 충격적일 뿐만 아니라 그런 적
나라한 언급은 어느 누구의 글에서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전무후무하다.
이러한 허울좋은 명분과 무자비한 강압을 앞세운 백인들의 진군 앞에서 원주민들은 그들이 사냥
하던 들소와 영양처럼 스러져갔다. 검은 사슴의 술회이다. “그 당시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이 끝
장났는가를 모르고 있었다. 이제 나이 들어 높은 언덕에 올라 돌아보니 학살당한 여인네들과 아
이들의 시체가 굽이도는 계곡을 따라 겹겹이 쌓이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게 보인다. 나는 또
한가지가 그 피묻은 진흙 속에 죽어서 눈보라 속에 묻혀 있는 것을 본다. 한 민족의 꿈이 거기
죽어 있다. 그건 아름다운 꿈이었다. 이젠 사람간의 연줄은 끊어지고 흩어져 버렸다. 중심이라
곤 없고 신선했던 수풀은 말라죽었다.”
백인들의 출현은 그야말로 그 자체가 원주민들에게는 저주이며 재앙이었다. 자신들의 땅에 복 받
고 살아온 만년 이상의 세월에 비한다면 한순간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부족이 멸족
을 당했고 살아남은 소수의 원주민들은 여전한 차별과 억압으로 미국인들 가운데 최저의 생활을
구차하게 감내하며 살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최준석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역자
*** 함께사는길(2002.12)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