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임당 모델이 한국방송고전머리전문가협회 임수빈 회장?
파란하늘 ・ 2021. 2. 6. 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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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래 기사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2021년 2월 5일 오후 인터넷 매일경제 기사 제목이 "오만원 신권에 제 얼굴이 있어서 깜짝 놀랐죠" 였다.
나는 기사 제목을 보고 놀랐다. 신사임당이 환생했단 말인가?
"5만원 신권에 내가 있어서 깜짝 놀랐죠" [W인터뷰]
[Weekend Interview] 한국 전통 고전머리 디자인 최고 전문가 임수빈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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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고전머리전문가협회 임수빈 회장의 일방적인 생각이나 주장은 아닐까? 실제로 5만원권 도안용 신사임당 영정을 그린 일랑 이종상 화백(1938년생)은 임수빈 회장의 이 말에 동의할까?
왼쪽부터 순서대로 어진화가 이당 김은호(1892-1979)의 신사임당 표준영정, 일랑 이종상 화백의 신사임당 초상화, 5만원권의 신사임당 초상 (출처; Tweet) (화폐의 얼굴은 이당의 표준영정 그림도 아니고 일랑의 그림도 아닌 전혀 다른 인물로 보인다. 정말 임수빈 씨의 얼굴에 가까운 것인가?)
2.
현재의 신사임당 표준영정은 (고종 순종 황제를 직접 알현하며 어진을 그린 ) 이당 김은호 화백의 작품으로,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의 머리모양과 한복 차림을 그려 고증이 잘못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에 한국은행은 일랑 이종상 화백에게 의뢰하여 복식전문가 등의 도움으로 조선 전기의 가체(加髰)와 한복으로 표준영정의 고증 오류를 바로 잡은 5만원권 도안용 신사임당 영정을 별도로 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한편, 더불어민주당 조정식 의원실이 한국은행에서 제출받은 현황 자료에 따르면, 1972년 5천원권부터 2009년 5만원권까지 모든 선현의 초상은 '표준영정을 기초로' 제작된 것으로 나와 있다.
'표준영정 사용정도' 항목엔 율곡 이이와 세종대왕은 모두 "정면화인 표준영정을 기초로 측면화인 화폐용 영정을 제작"했다고도 명시돼 있다. 2009년 오만원권 영정은 "표준영정을 기초로 옷차림, 두발 모양을 변형하여 제작"했다고 명시하고 있다. (정혜경 기자 choice@sbs.co.kr 작성 2019.08.20 11:32 수정 2019.08.20 11:51/ 출처 : SBS 뉴스)
다만, 천원권의 퇴계 이황 초상은 한국은행이 소장한 ( 현초 이유태 화백에게 의뢰하여 그린) 화폐도안용 영정이 표준영정으로 지정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친일 화가 표준영정 기사를 쓰고 老 화백에게 전화가 왔다
유신 이듬해인 1973년 4월 충무공 탄신일을 맞아 충무공의 진영을 통일하라는 대통령 지시가 떨어졌다. 전통문화 개발을 통해 문예중흥을 이룩하기 위한 '5개년 계획'의 일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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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랑 이종상 화백의 입장은 한국은행과 다른 것 같다. 그는 당시 5만원권용 신사임당 초상을 그릴 때 김은호 화백이 그린 신사임당 표준영정을 조금도 참고하지 않았다고 일축한 바 있다. (또한 당시 신사임당은 현모양처의 행동을 보이지 않았기에 다른 분위기로 그렸다고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고증과는 거리가 있었다는 발언이다.)
그러면서 강원 강릉의 오죽헌에 보관하고 있는 이당 김은호 화백의 신사임당 영정은 대단히 고증이 잘못된 작품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일랑 이종상 화백이 그린 신사임당 얼굴은 오죽헌의 표준영정 얼굴을 닮게 그렸다.)
관례상 한국은행 화폐 도안 역시 표준영정을 기초로 하는 것 아니냐는 질의에는 "적은 수고비로 의뢰받은 작품이고, 어떤 심의도 거치지 않았다"라고 밝혔다. 표준영정과는 명백히 다른 독립된 작품이라는 것이다.(정혜경 기자 choice@sbs.co.kr 작성 2019.08.20 11:32 수정 2019.08.20 11:51/ 출처 : SBS 뉴스)
이 보도를 접하면서 내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일랑이 "적은 수고비" 등을 언급하며 당시의 영정 제작비에 불만을 표출하는 방식에서 자신이 제작한 화폐도안용 영정을 비하함으로써 대중의 신뢰를 훼손하고 누워 침을 뱉는 우를 범했다는 것이다. (그는 화폐의 얼굴이 표준영정과 다르다는 비판이 있을 때 자신은 이당 선생님께 영정 제작 기법을 배운 제자라고 말하여 그 당시 이당 선생 댁에 살면서 공부했던 이당 화백 제자들의 반박에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