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
2026. 9. 20(주일오전예배) 고린도후서 1:3-6
오은영 박사가 강연자들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였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한다.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좌절과 고통과 어려움과 후회와 마음의 힘듦이 쉽게 극복이 될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극복하십시오. 이거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떡합니까? 피할 수 없고 극복이 어렵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냥 겪어야지요. 겪는 과정은 힘들어요. 끝이 날까요? 좋게 나기도 하고, 나쁘게 나기도 하겠지만, 끝은 납니다. 그래서 그냥 그 과정을 겪어가는 것입니다. 누구랑 나의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겪는 것입니다. 이들과 두 손을 맞잡고 이들과 어깨를 서로 내어주고 너덜너덜해진 나의 인생을 꿰매면서 그냥 그렇게 겪어가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은영 박사는 좌절과 고통 이길 수 없는 힘든 상황은 그냥 겪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혼자 겪는 것이 아니라, 소중한 사람과 어깨를 내어 주면서 함께 겪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어깨를 내어주는 것이 위로가 아니겠는가? 위로라는 말은 영어로 comfort이다. comfort는 함께 라는 의미의 com과 요새라는 의미를 가진 fort의 합성어로 외롭고 힘들 때 요새와 같이 든든하게 함께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여러분은 위로를 받고, 또 위로를 주는 삶을 살고 있는가? 리더쉽 강사가 강의 중에 청중들에게 위대한 일을 했을 때 칭찬이 필요한가요? 위로가 필요한가요? 하고 물었다. 그 질문에 모든 청중들은 칭찬이라고 대답을 했다. 그런데 실제로 위대한 일을 한 사람에게도 위로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한 예를 들었는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에게 사람들은 엄지척을 하면서 칭찬한다. 그런데 그 선수의 어머니는 아들을 부둥켜 안고 그 동안 얼마나 힘들었니! 정말 고생했다. 고 말한다. 그리고 금메달을 딴 선수는 눈물을 흘리며 감동한다. 사람들의 환호와 칭찬은 그 선수를 기쁘게 하지만, 위로는 금메달을 딴 선수의 그동안의 어려움을 씻어주는 힘이 되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위로는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렵고 힘들 때 어깨를 내밀어 주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그 사람은 어려움을 이기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저와 여러분이 이 위로를 간절히 구하고 있지 않는가? 요한계시록 19장을 보면 백마 탄 예수님이 깨끗한 세마포 입한 하늘의 군대를 이끌고 이 땅을 심판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백마 탄 예수님이 오셔서 라는 이름을 한 자가 깨끗한 세마포를 입은 하늘의 군대를 이끌고 전쟁을 한다. 그래서 이 땅을 심판하시는데, 그가 입은 옷과 다리에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16절)라 기록되어져 있다.
왜 백마 탄 예수님의 옷과 다리에 만왕의 왕, 만주의 주라고 기록되어져 있는가?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왕은 모든 나라의 왕들의 왕이었다. 그래서 페르시아 제국이 통치하는 나라의 왕들을 자기 나라에서는 왕이었지만, 페르시아 왕 앞에 나아가면 그들은 왕의 권위와 존중은 다 없어지고 백성이 되어서 페르시아 왕을 만나야 했다. 그런데 예수님의 다리와 옷에 왕중의 왕이라 기록되어져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왕들의 왕이 됨으로 그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백성이 되는 것이다. 세상의 군왕도 재림의 예수님 앞에서는 그의 백성이 되고,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산 사람도 똑같은 백성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심판의 주 앞에서 그의 행적에 따라 판단을 받는 것이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읽으면 깜짝 놀란다. 왜냐하면 백마를 타고 모든 대적을 물리쳐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유일한 위로가 된다고 하이델베르크 1문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이델베르크 1문을 함께 읽기 바란다.
제 1문 : 사나 죽으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답 : 사나 죽으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고 몸과 영혼이 모두 미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주께서 보배로운 피로 나의 모든 죄값을 치러주셨고 마귀의 권세로부터 나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는 나의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듯이 주는 나를 지켜주십니다. 실로,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룹니다. 내가 주의 것이기에 주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보증하시고 나의 온 마음을 다하여 기꺼이 주를 위하여 살게 하십니다. 이것이 나의 유일한 위로입니다.
하이델베르크 1문은 우리의 유일한 위로가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그리고 그 답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이룰 수 있는 힘이나 능력이 나의 위로가 아니라, 내가 예수님의 것이 되었다는 것이 참된 위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죄를 용서하여서 참된 자유를 주시고,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지켜 주심으로 이제 내가 선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내 삶의 유일한 위로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여러분도 하이델베르크 1문의 신앙고백에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겠는가? 2026년 3월 TvN STORY 남겨서 뭐하게 라는 프로그램에 개그우먼 정선희 씨가 출연하여서 자기 인생을 바꾼 일화를 이야기 한다. 정선희 씨는 남편 안재환 씨의 사업실패와 자살이라는 사건으로 큰 고통을 받아야 했다. 당시 정선희 씨는 근거없는 루머와 유가족의 억측주장, 그리고 악성 댓글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정선희 씨는 남편의 장례식장에서 상복을 입고 오열하며 울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정선희 씨는 결국 방송활동 중단까지 했다. 악성댓글과 여러가지 억측주장으로 정선희는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빠진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정선희 씨는 남편의 장례식장에서 오열하며 우는 사진이 Naver 포털사이트에 올라간 것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모습이 너무 싫어서 사이트에서 사진을 지워달라고 요청하였는데, 돌아온 대답은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때 정선희 씨는 너무 화가 나서 내가 당사자인데 나는 평생 그럼 그 얼굴로 살아야 돼요? 하고 고함을 쳤다. 그때 정선희 씨의 귀에 들린 말은 대신 웃는 얼굴로 덮으시면 됩니다 였다. 이 말을 들은 정선희 씨는 오열하는 사진을 덮기 위하여 늘 웃고 살았다. 정선희의 행동에 악플을 다는 사람들이 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웃는 얼굴로 그 사진을 덮기 위하여 또 웃고 사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선희 씨는 다시 방송에 출연할 정도로 회복될 수 있었다.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이와 같아야 하지 않는가? 우리는 이렇게 회복될 수 있다. 왜냐하면 죄와 사망의 법 아래에서 있던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나와 함께하심으로 진리의 길로 인도하고 있음으로 그 예수님을 의지하여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에게는 구원하시고 함께하시는 예수님의 위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참된 위로 안에 있는가?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이다.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에 1년 반동안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여 세워진 고린도교회는 우상숭배와 음행, 그리고 거짓교사로 인하여 교회가 무너져 가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하여 2차 방문을 하였지만, 그 방문은 고통스러운 방문(고후 2:1)이 되었다. 왜냐하면 고린도교회는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의 사역과 인격을 비난하였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사도였다면 왜 저렇게 고난이 많은가? 그리고 왜 바울은 하나님이 인도한다고 하면서 우리를 방문하겠다는 그 계획은 변경되었는가? 그리고 그에게는 왜 사도들의 추천장이 없는가? 하는 문제로 바울을 공격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고린도교회에 바울은 펜을 들었다. 그리고 제일 먼저 하는 고백이 찬송하리로다이다.
어떻게 바울은 자신을 거절하는 성도들에게 찬송하리로다 라는 고백을 할 수 있었는가? 이제 오늘 본문인 고린도후서 1장 3절-4절을 읽기 바란다.
(고후 1:3-4)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3절의 위로의 하나님은 사도 바울이 어떠한 상황과 역경 가운데 있을지라도 늘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말한다. 그리고 4절에서 우리를 위로하사는 간헐적이나 돌발적으로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어제나 오늘이나 변치 않는 위로를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나의 위로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늘 받으며 살았던 바울은 억울하고 힘든 상황에도 찬송하리로다 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형통할 때와 고통할 때로 구분한다. 그런데 성도는 이럴 때는 이렇게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고, 저럴 때는 저렇게 함께하는 하나님이 계시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의 삶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가? 하지 않는가? 하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의 삶에는 위로의 하나님이 언제나 함께하고 있는가? 그런데 늘 위로의 하나님이 함께하는 바울의 삶에는 고난이 가득하였다. 바울의 삶에 이렇게 고난이 많은 이유는 고린도후서 1장 5절-6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후 1:5-6)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심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게 된 것처럼 이제 바울이 고난을 당함으로 고린도교회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고난을 당하는 것도 너희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 위함이고, 또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 위함이라 말하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사람은 그 위로를 받는 자리에 멈추어 서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 누군가를 하나님의 위로를 받도록 하기 위하여 고난도 당하고, 또 위로도 받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위로받은 자의 마땅한 삶을 살고 있는가? 이번 76회기 총회의 주제는 위로였다. 그리고 총회를 하는 예배당에 들어가면 양쪽에 이렇게 큰 현수막이 있었는데, 위로 글자가 왼쪽과 오른쪽이 달랐다. 그래서 옆에 앉은 목사님이 글자가 다르다 라고 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내용도 다르다고 내가 설명해 주었다. 왼쪽에 있는 위로는 up이라는 뜻의 위로이고, 오른쪽에 있는 위로는 comfort라는 의미의 위로라고 말했다. 농담으로 한 말이지만, 그 말이 정답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위로는 하늘에서부터 온다. 그리고 우리는 위를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외로울수록, 힘들수록 더욱 위를 바라볼 때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위로를 받은 자는 세상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도록 고난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땅에 위로의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가게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가 가진 위로이다. 세상은 위로는 공감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참된 위로는 오직 우리 하나님 안에 있음을 믿기 바란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내가 하나님의 위로 안에 들어간 것처럼 이제 우리의 고난으로 인하여 내 형제와 이웃이 하나님의 위로자 되심을 이루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참된 위로를 이 땅에 증거하는 복된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