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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심 무마용’ 유화정책용 헤롯 성전 - 제2성전 스룹바벨 성전 보수 = 헤롯 성전=예루살렘 성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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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전 160년대 유대지역에서 일어난 ‘마카비 혁명’은 순수한 종교적 동기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유대지역을 통치하던 희랍계 ‘안티오쿠스’ 왕은 예루살렘 성전 안에 희랍의 최고신 ‘제우스’ 신상과 제단을 세워 성전을 더럽히고 안식일과 할례를 금지하는 등 유대인들을 종교적으로 탄압했다. 이에 대항해서 분연히 일어선 것이 마카비 혁명이었다. ‘하스몬’ 가문에 속한 ‘유다 마카비’와 그의 형제들의 주도로 시작된 이 혁명은 3년간에 걸친 투쟁 끝에 승리했고 예루살렘 성전은 정화되었다. 또한 유대인들은 종교적 탄압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하스몬 가문의 형제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유대인들의 정치적 독립을 꿈꾸고 있었다. 하스몬 가문 제2세대에 와서 하스몬 가문 지도자는 예루살렘 성전의 대제사장직 뿐만 아니라 세속적 통치권까지 장악하고 실질적인 정치적 독립을 성취하게 되었다(주전 130년대). 하스몬 가문이 종교권과 정치권을 모두 장악하게 되자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반대파들은 하스몬 가문이 정치세력화되고 더구나 예루살렘 성전의 대제사장권까지 모두 움켜쥐는 것은 마카비 혁명 정신을 변질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이 ‘바리새’(Pharisees)파였다. 바리새파에 대항해서 하스몬 가문의 통치를 지지하고 옹호하는 세력들도 생겨났다. 그들은 ‘사두개’(Sadducees)파였다. 사두개파는 주로 예루살렘의 부유한 귀족, 상인,제사장 계층으로 기득권층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바리새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스몬 가문 통치 제3세대때 하스몬 왕가가 되었다.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 1세?주전 104년께)는 스스로 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유대인 공동체는 왕이 통치하는 ‘유대왕국’이 되었다. 한편 하스몬 왕가에 대한 바리새파의 반대는 더욱 격렬해졌고 반란의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다. 당시 통치자 ‘알렉산더 얀나이’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바리새파 대표를 불렀다. 그리고 문제 해결을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바리새파 대표들은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 “당신이 죽는 것이요.”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하스몬 왕가에서 내분이 일어난 것이다. 역사적으로 어느 권력이든 권력의 붕괴는 흔히 내분에서 시작되었다. 27년간의 통치를 마치고 ‘알렉산더 얀나이’가 죽었을 때(주전 78년) 그의 두 아들 사이에 치열한 왕위 쟁탈전이 벌어졌다. 승자는 동생 ‘아리스토불루스 2세’였다. 패배한 형 ‘힐카누스’는 나바트인들의 암벽도시 페트라(Petra)로 피신하고 나바트인들의 도움을 받아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두 형제가 왕의 자리를 놓고 피나는 싸움을 벌이고 있는 사이 로마제국의 폼페이(Pompey) 장군은 군대를 이끌고 시리아 지역에 진주했다. 왕의 자리에 눈이 먼 두 형제 ‘아리스토불루스’와 ‘힐카누스’는 어리석게도 다마스쿠스(다메섹)에 머무르고 있는 폼페이 장군에게 각각 사신을 보내어 도움을 요청하는 웃지 못할 일을 벌였다. 마침내 주전 63년 폼페이 장군이 이끄는 로마군단이 예루살렘에 입성했다. 예루살렘이 로마 군대에게 함락된 것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폼페이 장군은 ‘힐카누스’의 손을 들어주고 대제사장 자리를 주었다. 그러나 이제는 하스몬 왕가가 이끄는 ‘유다 왕국’은 사라진 뒤였다. 유대지역은 로마제국의 속주로 전락한 것이다. 마카비 혁명의 승리로 시작된 하스몬 가문의 통치는 이렇게 권력투쟁의 와중에서 100년 남짓 계속 된 후 막을 내리고 말았다. 광대한 영토를 정복한 로마제국은 정복지의 내부적 문제에 가급적 자치권을 허용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예루살렘을 정복한 후 로마제국은 유대지역 통치를 위해 ‘이두매’(에돔) 지역 출신 헤롯에게 왕권을 부여해주었다 (헤롯의 재위기간 주전 40∼4년). 헤롯의 부인은 하스몬 왕가에 속한 ‘마리암’이었다. 헤롯이 왕이 되자 그는 무자비하게 하스몬 가문을 제거하였다. 혹시 있을지 모를 하스몬 왕가 복권운동을 분쇄하기 위해서였다. 그 와중에서 헤롯왕은 하스몬 왕가 출신인 자기 부인까지 죽이는 잔인성을 보였다. 헤롯왕은 처음부터 유대인들에게 지지를 받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유다의 남부 ‘이두매’ 지역 출신이었고 특히 하스몬 왕가에 대한 그의 잔인한 처사는 유대인들의 등을 돌리게 했다. 아무리 고대사회라고 해도 힘만으로 통치할 수는 없었고 어느 정도 피통치자들의 지지가 필요했다. 헤롯왕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살 궁리를 했고 마침내 묘안이 떠올랐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예루살렘 성전을 크게 재건축하고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었다. 우선 헤롯 왕은 성전이 서 있는 성전산 구역을 크게 확장시켰다. 사방에 높이 20m에 달하는 축대를 쌓아 성전산 구역을 확장해서 4만평에 이르는 넓은 대지를 확보했다. 그리고 넓은 대지 위에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전을 건축했다. 헤롯은 폭군이었으나 세심한 면도 있었다. 성전을 재건축하는 과정에 인부와 석공들이 성전산의 성역을 훼손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1,000명에 달하는 제사장들을 석공으로 훈련시켜 제사장들을 성전 건축공사에 참여시키기도 했다. 성전공사가 끝났을 때 성전산 위에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성전이 세워졌다. 예수님께서도 “큰 건물들”이라고 말씀하실 정도의 대성전이었다. 사람들은 이를 ‘헤롯 성전’이라고 부른다. 헤롯 성전은 웅대하고 장엄한 성전이었으나 폭군 헤롯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세운 것은 아니었다. 결국 서기 70년 예수님의 말씀대로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모두 무너지고 말았다. |
첫댓글 헤롯 성전내 중요 사건:
1)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성전에서 드렸다(눅 2:22~38).
2) 구주께서 12살 때에 성전에서 가르치셨다(눅 2:41~46).
3) 구주께서 돈 바꾸는 자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셨다(마 21:12~13).
4) 구주께서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셨다(마 24:1~2).
5) 성전이 앞으로 예루살렘에 세워질 것이다(겔 40~48; 슥 8: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