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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화왕산 억새꽃
태백산맥 줄기에 솟아 있는 화왕산(757m)은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과 고암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주위에는 관룡산(739m)과 구현산(524m) 등이 있다. 동쪽 사면을 제외한 대부분이 급경사를 이루며 남쪽 사면에서 발원하는 물은 옥천저수지로 흘러든다. 사방으로 뻗은 능선은 가을에는 잡나무 하나 없는 억새풀이 장관을 이루며 봄에는 진달래가 절경을 이룬다. 오늘은 억새꽃만이 아닌 등산이 목적이기에 옥천리에서 삼성암으로 오른다. 초입부터 시멘트 포장바닥이 너무 가팔라 땀을 흥건하게 흘리는데 스님은 승용차를 타고 느긋하게 나들이를 나선다. 20여분 만에 오른 산비탈에 자그마한 삼성암은 한참 확장 및 정지작업으로 여념이 없어 보인다. 일시 막힌 등산로를 찾아 다시 20여분을 오르니 비로소 능선에 올라선다.
누군가 소박하게 쌓아놓은 돌탑 한 기가 나온다. 탑은 그냥 쌓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늘에 별을 바라볼 때 아주 깨끗한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그 별이 더 빛이 나고 별 하나를 헤아리며 지나간 추억과 그리운 이를 떠올려보듯이 자신의 정갈한 마음을 돌멩이 하나하나에 담아 올려놓는 것이다. 그래야 탑이 무너지지를 않고 또 품새도 돋보이는 것이다. 그 사람의 정성만큼 이나 바라보는 마음도 어딘가 여유가 배어나오지 싶다. 이제 능선은 바위들이 불쑥불쑥 솟아 서로 뽐내고 있다. 허름한 헬기장을 지나며 왼쪽으로 석대산이 웅크리고 있다. 오른쪽 길을 따라간다. 창녕, 이곳에는 소나무가 많아 산이 온통 짙푸르고 지나는 바람결에 솔향기가 풍겨나는가 상큼하다. 또한 곳곳에 송이버섯 채취장으로 출입을 삼갈 것을 알리는 플래카드를 볼 수 있다. 구현산을 오르고 다시 오른쪽으로 꺾어 내려가다 보면 비틀재 임도를 만난다. 이미 한 시간이 훌쩍 흘렀다.
다시 산자락을 헐떡거리고 올라선다. 그런데 타고 오르며 길바닥 군데군데 수많은 사람들이 웅크리고 앉아 기도를 하고 있다. 물론 남자보다는 여자가 더 많지만 철야기도를 하는지 우의 같은 것을 뒤집어쓰고 웅얼거린다. 그만큼 이곳의 정기가 좋다는 것일까? 저들은 그들만의 독실한 믿음을 가지고 나름대로 사후세계를 열심히 준비하는 모양인데 우린 지금 한 발자국을 옮기는데도 몹시 힘겨워하고 있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오르고 또 올라야 한다. 전망이 좋은 봉우리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다시 수없이 암봉을 오르내린다. 막상 그곳을 지나칠 때는 그냥 험하기만 한 바위틈을 지나치지만 가다가 돌아보면 아름답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다. 우리의 삶도 그러하리라. 그냥 힘들게만 살아가는 것 같은데 어느 시점에서 그때가 좋았다고 되새기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산길뿐만 아니라 고달픈 삶도 가끔은 돌아보며 지금 부지런히 가고 있는 이 길이 허되지만은 않음을 상기해 볼 필요도 있지 않나 싶다.
마침내 산불감시초소가 나타나고 배바위에 도착한다. 6만평에 가까운 구릉지가 온통 억새밭이다. 대개 10월에 꽃이 피는데 올해는 9월말에 이미 피어 풋풋한 냄새를 풍긴다. 그런데 여기에 아직도 아물거나 가라앉지 않은 쓰라린 상처가 그대로 남아 마음 아프게 한다. 불과 7개월여 전인 지난 2월 9일 정월대보름날 달집태우기의 이벤트로 화왕산 억새태우기 행사과정에서 그만 큰불이 번져나면서 7명의 소중한 생명을 앗아가고 81명에게 잊지 못할 상처를 남긴 것이다. 볼거리에 몰려들었던 관광객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불길이 순식간에 번지면서 뿜어내는 독한 연기에 질식할 것 같아 밀리고 밀리다가 이곳 배바위 낭떠러지에서 그만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것이다. 그러나 그날의 아수라장 같은 악몽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듯 잊혀가고 있다. 야속한 것이 세월이라고 곳곳에 불탄 흔적에 타다만 소나무가 가까스로 억지웃음을 내보이듯 머리 부분만 가까스로 이파리가 피기도 하였고 오히려 억새는 더 길길이 자라 숲을 이루었다.
아직은 갓 피어나 갈색의 앳된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였지만 활짝 피면 은빛 물결이 장관을 이루며 마음 설레게 할 것이다. 또한 들녘의 누런 벼들이 자취를 감추고 빈들이 될 때쯤이면 억새 대궁은 금빛으로 물들고 겨울바람에 으앙으앙 거리며 으악새로 변모될 것이다. 이곳 화왕산에 억새가 한창 무르익을 때는 진달래가 숨을 죽이고 진달래가 온통 벌겋게 수놓을 때는 억새가 잠잠하기에 봄과 가을을 번갈아가면서 진달래와 억새가 사랑을 받으며 축제를 벌려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을 끌어 모으고 있는 것이다. 서문 쪽으로 내려간다. 도성암에서 올라왔으면 불과 1시간여면 충분할 것을 삼성암에서 산줄기를 타다 보니 무려 4시간 가까이 시간이 흘렀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아이스케키 하나를 입에 물고 더위와 갈증을 해결해 본다. 억새와 갈대는 분명 다르다. 물가에서 자라는 갈대는 수수모가지 같은데다 좀은 색깔이 어두운데 산비탈 척박한 곳에 자라는 갈대는 밝은 빛에 강한 면모를 보여준다. 숲을 가로질러 산성 동문 쪽으로 간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홍의 곽재우 장군과 의병 천여 명이 분전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본래 화왕산은 오래 전에 화산이 폭발하여 형성된 산이라고 한다. 분화구였던 곳에는 3개의 연못이 남아있고 인근에는 창녕 조씨 시조가 여기에서 탄생했다는 득성비가 있기도 하다. 오른쪽으로 새롭게 정비해 놓은 연못이 있는데 저곳이 분화구의 하나라는 이야기다. 남문과 동문 쪽은 산성이 잘 복원되어 있다. 이제 문을 나서 허준 세트장으로 간다. 지난 7월31일 허준의 “동의보감”이 한국에서는 7번째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록되었다. 동의보감은 1596년 선조의 명에 따라 허준이 집필하기 시작하여 광해군 때까지 장장 17년에 걸쳐 진행된 국가적 프로젝트로 25권 25책으로 완성되었다. 백성의 건강관리를 위해 국가적 차원에서 추진을 한 일종의 치병(治病) 사업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중국은 명대(明代)에 이시진이 지은 52권의 본초강목이 있지만 허준은 중국의학에 대한 불신으로 동의(東醫)라는 용어를 처음 쓰기 시작하였으며 동의보감은 중세 동아시아 의학을 집대성한 뒤 현재까지 동양의학 발전에 영향을 미치며 이번에 유일하게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우리나라의 세계기록유산은 아시아에서 가장 많고 세계에서는 6번째로 많아 문화선진국으로서의 위상을 높이는데 일조할 것으로 기대된다. 국가별로는 독일이 가장 많은 11건을 보유했고 오스트리아 10건, 러시아와 폴란드가 각 9건, 멕시코 8건, 중국은 불과 5건이고 일본은 아예 한 건도 없다.
이제 400년 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가본다. 양반 상놈을 따지며 명분과 체면을 중시하던 때에 허준이 가장 밑바닥 인생인 천민들 중에서도 전염병에 섬뜩섬뜩 꺼리며 멀리하는 나병환자(한센병 Hansen病, 대풍창, 문둥병)들을 모아 움집을 짓고 너와집을 짓고 초가집을 지어 모여 살게 하며 치료하던 삼적사를 재현한 곳이다. 의사로서의 대담함과 함께 인간애를 실천하며 살신성인의 길을 가고 있는 의인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었다. 이제 한적하기만 한 도로를 따라 가다가 관룡산으로 접어든다. 추석도 며칠 남지 않아서인가 오고가는 길에 머리를 깎고 면도를 잘하여 깔끔하게 다듬어진 산소들이 보다 따스하게 들어온다. 자손들이 조상들을 잊지 않고 돌보고 있음에 보이지 않는 핏줄이 이어지고 있는가 보다. 감나무도 알알이 전구를 밝히듯이 발갛게 익어가면서 햇살을 받아 하나의 우주로 빛을 발할 것이다. 그렇게 보다 넉넉한 마음에 가을은 곱게 익어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