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벩송주의의 머뭇거림들 랑가주와 개체적인 것 장 빠리앙뜨 jean claude pariente 언어 베르그송.hwp
책
Titre
『Le Langage et l'individuel』
/ Jean-Claude Pariente
-「HESITATIONS BERGSONIENNES」
Éditeur
Paris : A. Colin , 1973
Description
226 p. ; 24 cm
Collection
Philosophies pour l'âge de la science
Philosophies pour l'âge de la science 1960-6141 10
Notes
Bibliogr. p. 295 à 300. Index
Sujets
Individualité
Philosophie du langage
번역자: ㅊㄷㅎ
11~29
P: 14~32
Jean-Claude Pariente (1930). Normalien, agrégé de philosophie, docteur ès lettres. Professeur à l'Université Blaise Pascal, Clermont-Ferrand. Il a collaboré à l"édition des Œuvres complètes d’Antoine Augustin Cournot (Tome 2, Vrin, 1975).
Bibliographie (extrait) :
* Essais sur le langage, éd. Jean-Claude Pariente (Minuit, 1969).
* Le Langage et l’individuel (Armand Colin, 1973).
* L’Analyse du langage à Port-Royal. Six études logico-grammaticales (Minuit, 1985).
* Langue naturelle et logique. La Sémantique intentionnelle de Richard Montague, en collaboration avec Michel Chambreuil (Peter Lang, 1990).
* Antoine Arnaud. Philosophie du langage et de la connaissance, éd. Jean-Claude Pariente (Vrin, 1995).
* Le Vocabulaire de Bachelard (Ellipses, 2001).
http://www.leseditionsdeminuit.fr/auteur-Jean_Claude_Pariente-1627-1-1-0-1.html
각주 원문:
『물질과 기억』, 박종원 번역
『창조적 진화』, 황수영 번역
『의식에 직접적인 것에 관한 시론』, 최화 번역
『정신적 에너지』, 엄태연 번역
논평
-언어와 자연
벩송의 기호계를 파악하려면 벩송의 이항론을 이해해야 한다. 아마 가장 유명한 벩송의 이항론은 당연히 지속과 공간일 것이다. 여기서는, 예컨대 의식의 흐름처럼, 정의될 수 없는 이질성을-생산하는-너비가-없는-거대한-흐름 그 자체가, 예컨대 우리가 랑가주라고 부를 의식 흐름의 발화체처럼, 정의될 수 있는 동일성을-보존하는-너비가-있는-질료적인것을 어떻게 요청하는지 벩송은 설명한다. 힘주어 말하기를 그 역은 가능하지 않다. 하나를 더 예로 들자면, 벩송의 철학은 구별되지 않는 질적 다수성의 항에서, 구별되는 양적 다수성의 항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설명한다. 역시 역은 가능하지 않다. 그리고 구별되는 양적 다수성의 항에서만 사고의 원리를 찾으려는 종래의 지성적, 특히나 관념연합론적 사고가 왜 착각인지, 질적 구별되지 않는 다수성의 항의 삭제가, 철학사에서, 과학사에서, 심리학사에서, 생물학사에서, 그리고 우리의 영혼의 역사에서, 유명하기로는 제논의 역설과 같은, 어떤 난점을 억지로 산출하는지 반복해서 지적한다.
그런데 장 빠리앙뜨(Jean-Claude Pariente)를 따르면, 이러한 한쪽 항에 대한 반감은 『시론』에서 가장 심했고, 『물질과 기억』의 기점으로는 완화되어 이러한 반대편 항의 요청을 인간의 내적 운동으로서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이어졌다. 『시론』에서는 랑가주를 특히 언급하며 말하기를, 벩송은 우리가 의미론적인 공간적 기교들에만 빠져있는 것은 마치 ‘유용성’에만 빠져서 심층의 존재성을 놓치는 것과 같다는 식으로 비판한다. 이러한 도저한 비판의식의 결과로 『시론』에서는 다른 책들보다 지속 항의 특징을 가장 뚜렷하게 알아볼 수 있는 장점을 지니게 되었다. 여기에서의 병치하고, 배치하고, 나열할 수 있는 언어의 공간적인 기질들이 ‘유용’한 것이 사실일지라도, 표면에 안착한 언어의 반(反)지속적 성질을 그 때문에 망각하면 안 된다는 경고는 후에 그 생각이 약화되었을망정 아예 사라지지는 않았다.
언어철학에서 벩송의 이 기호계는 기호계 자체를 재단해볼 수 있게 한다. 한국 번역어 기호계는 의미론sémantique, 기호론sémiologie, 기호학sémiotique 이 두루뭉술하게 합쳐진 말이다. 의미론sémantique은: 언어의 공간적인 점유들이 형성하는 연관들과 이것을 인간이 어떻게 이용하는 지를 해명하는 학문이다. 이때의 언어는 모국어 등등을 의미하는 langue라고 할 수 있다. 기호론sémiologie은: 언어의 공간적 점유들이 인간의 감성계와 맺는 관계들과 이 관계들의 기능을 규명하는 학문이다. 이때의 언어는 langue와 이 랑그의 화용론적 쓰임인 parole이라고 할 수 있다. 기호학sémiotique은: 언어의 공간적인 점유들이 인간 존재의 능력과 맺는 관계들과 이 관계들이 암시하는 존재의 자연을 설명하는 학문이다. 이때의 언어는 lague와 parole과 그리고 언어능력 일반을 뜻하는 langage이다.
두말할 필요 없이, 벩송의 기호계는, 기호학sémiotique을 요청한다. 실재로 벩송이 언어를 다룰 때는 거의 어김없이 langage를 쓴다. 이뿐만 아니라, 『시론』에서 『창조적 진화』까지 벩송의 의미심장한 언어철학의 진화는 의미론sémantique에 대한 회의에서 기호학sémiotique이 도출되기까지의 여정이었다. 기호학은 인간에게 있는 ‘지속’으로서의 기호학적 언어능력이 기호론적으로 복잡화하여 의미론적인 언어‘공간’으로 표현되는 전체를 복원하고자 한다. 그래서 벩송의 기호학은 인간이 언어계 표면에서의 원자적이고 분리적인 관념론에 빠져 지성의 공간적인 착각을 언어학의 전체로 보는 오도를 철저히 금지한다. 물론 두 예시를 세밀하게 비교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작업일 것인데, 특히『창조적 진화』와 『정신적 에너지』에 등장하는 글읽기에서 기호화에 빠지지 말고, 그 연속이 만들어내는 개념작용을 음미해보라는 충고는 이러한 기호학sémiotique적 역추적의 좋은 예이다.
그렇게 벩송은 인간의 구별되지 않는 질적 다수성의 의식이 복잡화되며 이산되어 있는 이 의미론적 표면을 형성하는 과정을 숙고하기를 강력히 요청한다. 들뢰즈가 『천개의 고원』에서 주로 쓰는 용어 기호론sémiologie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아마도 본인이 자처한 벩송주의자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등등에서의 기호론적 작업은, 미분화(différentiation)가 아닌, 이런 세분화(différenciation) 과정에 대한 가장 충실한 분석일 것이다. 옐름슬레우, 샤우미안 같은 학자들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벩송이 언어에 대한 철학이라고 할 영역은 아마도 이 모든 것들을 생성한 언어능력을 진화론적인 사실의 선을 통해 밝히고, 이것들이 암시(allusion)하는 언어능력을 존재론적 심층으로서 사유하는 지대일 것이다. 우리가 니체, 르화-그루앙, 앙리 레비브륄, 파스칼 피크 같은 인류학자들의 기호학적 추적들에서 벩송의 감각을 느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때 언어는 인간이 유용하게 이용하려, 지속적인 본질을 고정적인 공간에 포섭한 불가피한 폭력 정도의 취급을 벗어나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물질과 기억』에 그 유명한 고깔 도식을 굳이 삽입했던 벩송의 열망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밑변이 무한히 넓어지고, 첨단에서는 점으로 수렴되는, 이 도식 자체가 하나의 기호계를 그리고 있으며, 이 기호계는 벩송의 여러 철학적 개념들에서 반향하고 있는 것이다. 순수기억-추억-순수지각에서는 물론이고, 개념적인것-기호화작용(signification)-기호화(signifiance)-기호의 사유에서도 그러하며, 신비롭기로는 제일인 것은, 생명력-체화(se materialiser)-생명체에서도 그렇다. 이 기호계의 연원을 따진다면, 우리는 당연히 스토아주의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 아래에서 벩송의 플로티누스 강의를 또한 반드시 참조해야 한다. 들뢰즈의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도 있다.
벩송 기호계의 난점은 사실 표면에서의 개체화된 것들을 관찰하고 고발하는 데에 있지 않다. 언어적 표면인, 언어의 형태론, 어휘론 등등에서 언어가 어떠한 동질적인 ‘점유’ 즉 공간을 내비친다는 것은 일반언어학의 창시자 소쉬르가 언어의 가치는 배치에서 나온다고 말하였을 때부터 자명해진 것이었다. 이 공간은 장소와도 다르다. 이는 질을 가능한 배재하는 물리적이고 수학적인 공간이다.
벩송 기호계의 난제는 심층에서의 이 언어능력을 사실의 선을 통해서 밝히는 것에 있다. 고깔도식에서도 밑변이 무한히 생성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능력은 그 심층으로 가면 갈수록 기능보다는 기능작용(fonctionement)에 가까워지게 되고 더 깊게 사유하면 할수록 이 기능작용마저도 그 필연적인 생동감(anankê, ἀνάγκη) 속에서 스스로 허물어지는 장면을 보게 된다. 플라톤을 따르자면, 방황하는 원인(플라노메네 아이티아)라고 말하게 되는 것인데, 여기까지 와서는 스스로 사라지기로 작정하는 몇 안되는 개념으로만이 그저 표시할 수 있게 된다. 이 무한히 생성되어서, 어떠한 것으로도 표상할 수 없는 자연은, 무한히 엉켜있고, 얽혀있는 자연이라는 말로는 정확하지 않고, 무한히 엉켜가고 있고, 얽혀가고 있는 자연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내재성으로서 자연의 무한성을 그저 상정되는 것만으로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 사유하는 지성의 대단한 능력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연을 파악하려는 생물학사와 과학사 등등의 지성사의 진보들이 있었다. 이러한 학문들은 새로운 자료(data)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한 층위 식을 우리가 더 들여다 볼 수 있게 하였고, 앞으로도 진행될 진보와 더불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 깊이, 그러니까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언어학과 기호학에서도 이러한 일은 일어났고, 우리는 감지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내 과제는 내재성의 기호학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 생성되는 자연은 언어에 대한 표면적인 자료 수집과 독해만으로 감지할 수는 결코 없는 것이다. 예컨대 의미와 형태간의 어휘론적인 대칭성을 발견하고 만족하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눈가리개를 자처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성과 더불어 생겨난 생겨나고 있는 기호들을 긴 흐름을 암시하는 긴 호흡들로, 그러니까 프네우마로 진심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호흡이 살아있음을 증언하듯이, 우리는 일종의 폭발들인 기호에 대한 인류학적인 자료들에서 우리 안에 내재한 창발성 그 자체를 진심으로 체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자만이 기호학자가 될 자격이 있다.
이 폭발로서의 기호는 결코 지각으로서 수렴점을 가정하는 벩송의 기호계와 배리되지 않는다. 계속 강조하지만 벩송의 기호계 안에서 밑변은 내재성의 무한이다. 벩송이 『물질과 기억』에서 기억은 서랍 안에 있는 사물들처럼 저장되어 있다가 그대로 꺼내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우주속 성운 속에서 폭발과 함께 빛나는 별빛처럼 팽창하며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일견 이러한 서술이 그의 고깔 기호계를 부인한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이때의 별빛의 팽창은 단순히 우주 한켜에서 빛이 번쩍이며 커지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이렇게 기호가 되는 기억은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의 세계, 우주의 크기 자체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진정한 기호는 등장과 함께 고깔 자체를 팽창시키면서 압도적으로 존재자에게 닥쳐오고, 기존에 있던 무한을 넘어서는 무한을 그려 보인다. 아인슈타인의 정적인 우주론을 폐지하는 초신성 폭발의 목격이(1998) 있었고, 이는 팽창하는 우주관으로 우리를 덮쳤다. 기호의 팽창은 결국 한 켜 더 나아간 내재성 무한의 첨단으로서 존재한다.
벩송의 기호계에서 언어, 특히 철학적 언어는 이러한 심층의 지속과 접속하여 자신의 진정한 생동성을 체현할 수 있도록 독자를 방향 잡는 기호이다. 이 기호는 자신의 형태를 강조하지 않고, 자신의 리듬을 강조하며,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리듬을 강조하지 않고, 자신의 지속을 강조하며,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지속을 강조하지 않고, 세계의 지속을...... 자연의 지속을 강조한다. 마치 도화선처럼 사라지면서, 생성 그 자체를 암시하기 위해 부단히 스스로를 탈바꿈해가는 기호, 장 빠리앙뜨는 이를 ‘흐르는 개념’(concept fluide)이라고 칭하는데, 우리가 이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다면, 생명 그 자체를 재현하는 방향의 논리(들뢰즈, 『Logique du sens』)를 얻을 수 있겠다. 사실 생명체의 생 자체가 ‘흐르는 개념’ 아닌가. 이보다 언어와 기호가 진정으로 빛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특정한 사유의 습관들, 그리고 지각하는 습관들조차 포기한다는 것은 이미 쉽지 않은 일이다. 또한 그것은 바로 해야 할 작업의 부정적인 측면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것을 완수했을 때, 우리가 경험의 전환점이라고 불렀던 것에 위치했을 때, 직접적인 것[비매개적인 것]으로 부터 유용한 것으로 넘어가는 것을 조명하면서 우리 인간적 경험의 여명을 시작하는 어스름 빛을 이용했을 때, 남은 것은 우리가 실재의 곡선으로부터 그와 같이 포착하는 무한히 작은 요소들을 가지고 그것들 뒤의 어둠 속에서 펼쳐지는 곡선 자체의 형태를 재구성하는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이해하는 바와 같은 철학자의 임무는 미분으로부터 출발하면서 하나의 함수를 결정하는 수학자의 작업을 상당히 닮고 있다. 철학적 탐구의 궁극의 과정은 진정한 적분의 작업이다./”
물질과 기억. 309.
앙리 벩송(Henri Bergson, 1859~1941)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1889~1951)
*내게 코로나19는 이 논문에 대한 번역으로 남겠다. 사실 방학이 너무나 빠르게 끝나버려서, 방학 때 하리라 꼽아두었던 이 번역을 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 사건으로 여유가 생겨서 이 일을 완수하였다.
*랑가주와 개체성. 이라는 이 논문의 내용과 내가 전개한 내용이 크게 다르다는 것을 밝혀둔다. 제목부터도 다르잖습니까. 따라서 이 논문에 대한 내 졸문이 적합한 소개는 될 수 없다.
*과제: 벩송의 미분과 적분 개념을 빠리앙뜨는 심도 깊게 분석하는데, 사실 이 부분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했다. 기호계로서 벩송의 사상의 핵심이 될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과제: concept fluide 이 복잡계 과학의 용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막판에 하였는데, 검색에서는 잡히지 않았다.
*과제: Bergson et Wittgenstein 이란 논문을 빠리앙뜨가 썼다는데, 이 논문을 읽기 전까지는 둘의 언어철학의 어떤 점이 같고 다른지 제대로 판단하기가 힘들다. 읽어보고 싶은데, 유료였다.
*이글 말미에서 빠리앙뜨는 칸트와 벩송의 이항론을 근접시키는데, 나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마무리 짓기 위해 번역은 하였다. 그밖에도 이 논문 도처에 있는 이러한 시도들은 벩송의 생성론적 감성론을 크게 무시하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최화의 다음 견해에 동의한다.
최화는 “베르크손은 왜 지성의 종합하는 능동적 행위가 칸트의 선험적 형식과 닮았다고 했는가?”에 답하면서, 여기에는 이 논문을 둘러싼 외적 맥락이 있으리라 추정한다. 그리고는 이러한 아마도 이 책에서 가장 긴 번역자의 주해를 단다.
“일반적으로 베르크손은 칸트 철학에 대립되는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칸트와 자신의 입장이 상당히 비슷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즉 동질적 공간의 개념은 지성의 종합하는 능동적 행위가 있어야 가능하며 그것은 칸트의 선험적 형식과 비숫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 지나 비슷한 것이지 동일한 것은 아니다. 베르크손에게 공간은 선험적 직관 형식으로서 주관이 이 세계에 적용해야만. 있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간은 우리의 직관 형식과는 상관 없이 우리 기능을 넘어 뻗 어 있는〈실재〉이다. 그것은 우리 기능과 대립해 있는 유동flux의 어떤 측면이다. 단. 그러한 측면을 얼마나 동질적인 것으로 파악하느냐는 각 종의 기능에 종속한다. 곧이어 이야기되는 바와 같이 동물들은 공간을 모두 이질적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알지 못하는 장소에 놓아두어도 거의 직선으로 집을 찾아가지만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인간은 그 대신에〈지성의 종합하는 능동적 행위〉에 의해 동질적 공간을 개념화할 수 있다. 그 것은 동물들이 가지지 못하는 인간의 독특한 능력이다. 결국. 아예 아무 공간성도 없는 곳에 인간이 비로소 공간성을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공간적 측면과 질적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는 유동flux 속에서 인간이라는 종의 기능이 질적인 측면과 공간적인 측면을〈추출extraction〉해 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정도 동질적 공간을 추출해 내는가는 지성 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공간은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객관적이다. 외부에 있는 것을 빼낸 것이기 때문이다. 잠시 후에 베르크손 자신이 표현하는 바와 같이〈연장성의 지각〉과〈공간의 개념화>를 구별하는 것은(비록 섞여 있지만) 바로 그러한 이중성 때문이 다. 전자는 외부세계의 유동 속에 실재하는 공간을. 후자는 거기서부터 지성의 노력에 의한 동질성의 확보를 의미한다. 공간은 그 양자의 상호 작용으로부터 형성된다.” 시론. 122~123.
*잘은 몰라도―글쎄 이러한 앎에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벩송이 언어에 대해서 언급하는 구절은 빠짐없이 등록하고 있는 저술 같다. 이 점에서 매우 유익한 논문이다. 그리고 그 언급들을 한국어 번역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것에서, 선배 학자들에 대한 고마움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게다가 『사유와 운동』『웃음』을 제외하고는 원서의 쪽수까지 표시를 번역자들이 해두어서, 찾아보기가 아주 수월했다. 고맙습니다.
*이 책들을 다시 뒤져보면서, 한 때 지금 찾아보면서 읽었던 것보다 훨씬 더 이 책들을 열심히 읽었다는 것을 표시들을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 그때는 왜 벩송 사상의 이러한 함의들을 그냥 넘겼는지 의아했다. 지금 읽어보면 그 누구의 철학보다 전복적인 철학이다. 레비나스는 말할 필요도 없고, 하이데거만도 비교해보면 어떻게 이렇게 다른 계열의 개념들을 쓸까 생각이 드는데, 좁게는 기억론에 이유가 있고, 넓게는 철학적 이중분열과 관련이 있다.
벩송의 글은 거의 예외 없이, 관념적인 독선을 배제하고, 사실의 선을 따라가면서 자기주장을 묘파하기에 자칫 신경을 무디게 하면 실증들의 연속으로 넘겨버리기 쉽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생의 충동을 격려하는 정교한 은유들이 넘쳐나기에, 이 흥분 속에 빠지면 더 그의 본의에 무심하게 된다. 아니다. 어쩌면 이런 식의 흐름에 참가하는 독법이야 말로, 벩송 기호계에 어울리는 바이며, 내가 과거에 그런 독법을 시동하였기에, 관념들의 연합이 아니라, 벩송의 ‘흐르는 개념’이 가리키는 자연과 내 자연의 교통이 있었고, 그 자연은 우주와 함께 흘러가고 있기에, 마치 기억이 팽창하듯이, 지금까지도 이 자연의 무엇인가가 내내 호기심으로, 그리고 그 호기심의 기호로 폭발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참조: 비트겐슈타인의 기호와 상징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96254&cid=41908&categoryId=41937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해제)
기호와 상징
앞에서 지적되었듯이, 『논고』의 "명제", 즉 "Satz"는 표준적인 논리학 교과서나 전문적인 논리철학에서의 "명제"와 그 의미가 다르다. 오히려 그것은 문장(문장 사례, 문장 유형)과 명제와 진술의 성격을 부분적으로 모두 포함하고 있다. 즉 『논고』의 "Satz"는 문장과 같이 물리적인 측면과 문법적 측면을 지니고 있기도 하고, 표준적인 교과서의 "명제"와 같이 추상적인 측면을 지니기도 하며, "진술"과 같이 사용의 측면을 지니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비트겐슈타인은 명제를 한편으로는 "명제 기호"로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상징"으로서 파악한다. 전자를 우리는 "기호로서의 명제"라고 부를 수 있고, 후자를 "상징으로서의 명제"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은 명제뿐만 아니라 모든 언어적 표현에 대해서도 "기호"와 "상징"의 개념을 적용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기호와 상징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
3.31 명제의 뜻을 특징짓는 명제 각 부분을 나는 표현(상징)이라고 부른다.
(명제 자체도 하나의 표현이다.)
표현은 명제의 뜻을 위해 본질적인, 명제들이 서로 공유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표현은 어떤 하나의 형식과 내용을 특징짓는다.
3.32 기호라는 것은 상징에서 감각적으로 지각될 수 있는 것이다.
3.31에서 알 수 있듯이, 상징은 명제뿐만 아니라 명제를 이루는 것들로서 뜻을 지니는 것에 적용되는 개념이다. 따라서 "눈은 하얗다"라는 명제는 그것이 뜻을 지니는 한에서 하나의 상징이며, 마찬가지로 "눈"이나 "하얗다"도 뜻을 지니는 한에서 각각 하나의 상징이다. 기호는 "상징에서 감각적으로 지각될 수 있는 것"(3.32)이다. 따라서 "김구"라는 상징에서(즉, 그 말이 어떤 뜻을 지니는 것으로 사용될 때), 우리가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것, 즉 활자 모양이나 색깔 등을 지니고 있어서 우리가 지각 할 수 있는 것으로서 "김구"는 기호이다.
따라서 우리는 위의 인용문으로부터 상징은 뜻과 관련되는 개념이고, 기호는 물리적 또는 현상론적인(지각적인) 측면과 관련되는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논고』에 따르면, "두 개의 서로 다른 상징이 기호를 서로 공유할 수 있다."
3.321 따라서 두 개의 서로 다른 상징이 기호(문자 기호 또는 음성 기호 등)를 서로 공유할 수 있다. ― 그 경우 그것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가리킨다.
3.322a 우리가 두 대상을 동일한 기호를 가지고, 그러나 서로 다른 두 가리킴의 방식으로 가리킨다는 점은 그 두 대상의 공통적 징표를 결코 지적해 줄 수 없다. 왜냐하면 기호는 실로 자의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가리킴에 있어서 공통성을 지닌 두 개의 서로 다른 기호를 골라낼 수도 있을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예로서 "ist"[독일어의 be 동사]를 제시한다(3.322b). be 동사는 "계사"로도, "동일성 기호"로도, "존재의 표현"으로도 사용된다. 그래서 각각의 경우, 그것들은 동일한 기호이지만 서로 다른 상징이다. 또한 비트겐슈타인은 "이상은 이상하다"[원문은 "Grün ist grün"]라는 명제를 그 예로 제시하는데, 여기에서 앞의 낱말은 사람 이름이고, 뒤의 낱말은 형용사인데, "그 두 낱말은 단순히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지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상징이다."(3.323c)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기호의 특징은 그것이 "자의적"이라는 점에 있다(3.322a). 예컨대 "이상"이라는 낱말은 위의 두 경우가 아닌 다른 뜻으로도 얼마든지 사용될 수 있다. 그러한 사용에서는 그 낱말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가리키며", "서로 다른 상징"이 되는 것이다.1) 사실상 기호가 "자의적"인 것이며, 상징은 "사용"과 관련된 개념이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3.32는 우리가 상징으로부터 기호를 어떻게 알아낼 수 있느냐 하는 점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역으로, 우리는 기호로부터 상징을 어떻게 알아낼 수 있는가? 더 나아가 하나의 기호를 상징으로 만드는 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논리적·구문론적 사용"이다.
3.262 기호들 속에서 표현이 되지 않는 것은 기호의 적용이 보여 준다. 기호들이 삼키고 있는 것, 그것을 기호의 사용은 말해 준다.
3.326 기호에서 상징을 알아내려면, 우리는 뜻을 지닌 용법에 유의해야 한다.
3.327 기호는 기호의 논리적·구문론적 사용과 더불어서만 비로소 어떤 한 논리적 형식을 확정한다.
예컨대 "김구"라는 기호의 의미를 모르는 어떤 사람은 그 상징을 이해하려면, "김구"라는 기호의 유의미한 용법에 유의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논의로부터 상징이 기호와 다른 측면을 지닌다면, 바로 그 측면은 "논리적·구문론적 사용", 또는 "뜻을 지닌 용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기호라는 물리적이거나 현상론적 존재는 논리적·구문론적 사용과 결합 될 때 비로소 상징이 되며, 그리하여 "어떤 한 논리적 형식을 확정한다". 나중에 다시 논의되겠지만, 기호 자체는 하나의 사실일 수 있다. 특히 명제 기호는 하나의 사실이다. 따라서 명제 기호는 "사실의 형식"을 지니고 있고, 그리하여 어떤 "논리적 형식"을 포함하고 있다. 이 논리적 형식은 그 명제 기호가 그리고자 하는 사실이나 사태의 논리적 형식과는 전혀 다른 것일 수 있다. 이 후자의 논리적 형식은 기호 단독으로는 확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논리적·구문론적 사용과 결합될 때에만 기호는 어떤 형식을 확정할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상징은 어떤 하나의 형식과 내용을 특징짓는다"(3.31d)는 언급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기호는 그것에 대해서 그 형식과 내용(또는 의미)을 말할 수 있을지라도, 그것은 "자의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논의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비트겐슈타인의 중요한 생각을 이해할 수 있다. 즉, 논리적.구문론적 사용은 세계에 속하기보다는 우리 자신에게 속하는 것이다. 기호가 상징이 되기 위해서는 뭔가가 부가되어야만 한다. 뿐만 아니라 기호 자체는 하나의 사실일 수 있지만 그리고자 하는 사실의 논리적 형식을 확정할 수 없으며, 그리하여 세계를 그리는 우리의 여러 언어적 활동들을 묘사할 수 없다. 반대로 기호는 "실로 자의적"이며, 그리하여 어떤 체계적인 규제가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부가되어야 하는 논리적·구문론적 용법은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부터 도출된다기보다 우리 자신의 규범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3.328 어떤 한 기호가 쓰이지 않는다면, 그 기호는 의미를 상실해 있다. 이것이 오캄(Occam)의 격률이 지니는 뜻이다.
(만일 모든 사정이 어떤 한 기호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듯이 그렇게 되어 있다면, 그 기호는 의미를 가진다.)
만일 우리의 사용이 부가되지 않는다면, 기호는 의미를 상실한다. 즉 그것은 기호 자체일 뿐이며, 이 경우 한편으로는 물리적이거나 현상론적인 존재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수많은 사용이 부가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실로 자의적"이다.
"논리적·구문론적 용법"을 규제하는 문법이나 장치가 "논리적 문법", 또는 "논리적 구문론"이다. 즉 논리적 구문론은 기호의 사용을 규제하는 문법이나 장치이다. 이는 말하자면 우리가 기호를 사용하기 전에 미리 준비해 놓는 틀과 같은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적 구문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필요 조건을 제시한다.
3.325 이러한 오류를 피하려면, 우리는 같은 기호를 서로 다른 상징으로, 그리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가리키는 기호들을 외면상 같은 방식으로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그러한 오류들을 배제하는 어떤 기호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논리적 문법 ― 논리적 구문론 ― 에 따르는 기호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프레게와 러셀의 개념 표기법은 물론 모든 결함을 다 배제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러한 언어이다.)
즉 "논리적 문법", 또는 "논리적 구문론"에 따른다는 것은 "같은 기호를 서로 다른 상징으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며,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가리키는 기호들을 외면상 같은 방식으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프레게나 러셀의 기호 언어가 그러한 언어라는 것을 부분적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한 논리적 구문론에 대한 조건은 대단히 엄격한 것이었으며, 그리하여 그는 다음과 같은 특이한 생각에로 나아간다.
3.33 논리적 구문론에서 기호의 의미는 어떤 역할을 해서는 안 된다; 논리적 구문론은 기호의 의미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고서도 세워질 수 있어야 한다. 논리적 구문론은 오직 표현들의 기술들만을 전제할 수 있다.
3.334 논리적 구문론의 규칙들은 우리가 각각의 모든 기호가 어떻게 가리키는지를 알기만 한다면 저절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한 조건에 따르면, 같은 기호는 서로 다른 상징으로 사용되지 않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가리키는 기호들도 같은 방식으로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이 조건을 만족시키는 논리적 구문론에서는 기호의 의미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없고, 논리적 구문론은 기호의 의미에 관해 말하지 않고서도 제시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규칙들은 기호가 각각 어떻게 가리키는지를 알기만 하면 "저절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해서 러셀의 『수학 원리』를 비판한다.
3.331 이 점을 깨닫고서 러셀의 "유형 이론"을 살펴보자 : 러셀의 오류는 그가 기호 규칙을 세움에 있어서 기호들의 의미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과연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적 구문론에 대해서 부여한 조건이 얼마나 현실성 있느냐 하는 점에 따라 그 정당성이 평가될 것이다. 사실상 그 조건은 매우 엄격한 것일 뿐만 아니라 매우 "이상적"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2)
[네이버 지식백과] 기호와 상징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 (해제), 2004., 박정일)
본문
목차
TABLE DES MATIERES
Avant-propos 5
Première partie. PARLER
Chapitre 1. Hésitations bergsoniennes........................................... 11
I. La notion régionale de l'individuel : Le concept et l’espace, 11. — L'application du langage au réel, 14. — Hétérogénéité du concept et de l'individuel, 18.
II. Transrégionalité de l’individuel : Assouplissement des thèses primitives, 20. — Les concepts fluides, 24. — La transrégionalité, 27.
Chapitre 2. Du concept à l'individuel............................................ 30
I. Notion matérielle et notion formelle : Irreproductibilité et indivisibilité, 30. — Priorité de la notion formelle, 32. — Relativité de l'individuel au langage, 36.
II. Corrélation du concept et de l’individuel : Les niveaux de différenciation, 38. — Diversité et individualité, 41. — Dépendance de l’individualisation par rapport aux concepts, 42.
III. L'appréhension de l’individu, problème linguistique : Le concept comme classe, 48. — Classe, élément, individu, 53. — Les opérateurs d'individualisation, 56.
Chapitre 3. Les opérateurs d'individualisation. (1 ) Le nom propre. 59
I. Les termes singuliers : Leur élimination dans un langage formel, 59. — Raisons de cette élimination, 62. — Leur fonction dans le langage ordinaire, 66.
II. Le nom propre : Caractères de l’individualisation par le nom propre, 68. — Comment il Individualise, 71. — Quasi-insignifiance du nom propre, 81.
Chapitre 4. Les opérateurs d'individualisation. (2) Les indicateurs ........................................................................................... 85
I. L’individualisation par indicateurs : Classification des indicateurs, 85. — Fonctionnement des indicateurs, 87. — Le message comme événement, 90.
II. Les indicateurs et la logique : Singularités des indicateurs, 93. — Une tentative d'élimination, 95. — Discussion de cette tentative, 97.
III. Conditions génétiques de l'usage des indicateurs, 100.
IV. Contribution des indicateurs à l’individualisation : Détermination de leur référence, 104. — Classification et désignation, 108.
Chapitre 5. Décrire et repérer................................................................. 111
I. Individualité et extra-conceptualité : La discernabilité ultime, 111. — Aspects du repérage, 112.
II. La procédure d’individualisation dans les descriptions : Caractère prédicatif des descriptions, 116. — Unicité et individualité : le champ d'individualisation virtuelle, 119.
III. Caractères de l’individualisation dans les descriptions : Les deux formes de dénivellation, 127. — Description et repérage, 129. — De l’ineffabilité de l’individuel, 135.
Deuxième partie. CONNAITRE
Chapitre 6. Le problème........................................................................... 144
I. Hypothèses : Existence d’une deuxième forme de langage et d’individualité, 145. — Existence d’opérateurs d’individualisation conceptuels, 149.
II. Confirmation par les sciences exactes : Variables efficaces et opérateurs d’individualisation, 151. — Le concept scientifique, moyen de connaissance de l’individuel, 155. — Le concept scientifique, de l’individualisation à la structuration, 160.
III. Application aux sciences de l’homme : Une théorie sans opérateurs, 161. — Une théorie avec opérateurs mais isolés des concepts, 165. — L’intégration des opérateurs aux concepts, 170. — Les opérateurs et le progrès de la connaissance, 173.
IV. Caractéristiques du langage de connaissance, 176.
Chapitre 7. Systèmes et modèles. 180
I. Les deux types de connaissance de l’individuel, 180.
II. Une polémique liée à cette dualité, la critique de Freud par Les positions de
Jung: Les objections de Jung, 185. Freud, 187.
III. L’interprétation du rêve : moyen de classer ou moyen de singulariser, 190.
IV. La connaissance de l’individu selon Freud : Le cas de Léonard de Vinci, 196. — La tendance à l’investigation, 199. — Transformation de la singularité en classe, 204.
V. La connaissance de l’individu selon Jung : Conscience et inconscient, 206. — L’individualité comme écart, 209. — Structure du langage jungien, 214.
VI. Systèmes et modèles : Leur opposition, 219. — Fonctions de la théorie, 221.
Chapitre 8. Les modèles et leurs objets......................................... 224
I. La connaissance de l’individuel par système et par modèle, 224.
II. Unicité et différence, 227.
III. Le nom propre épistémique : Le nom propre, abréviation d’une description définie, 233. — Sa fonction dans la connaissance, 237.
IV. L'individualisation épistémique: Autonomie générale, 241. — Autonomie régionale, 242.
V. L’individualisation épistémique et l’histoire : Le découpage en périodes ; construction de l’objet, 246. — L’explication en histoire, 250.
VI. L’individualisation épistémique et la géographie : Le découpage en régions ; construction de l’objet, 254. — L'explication en géographie et la géographie théorique, 258. — Retour à l'histoire, 264.
VII. Individualité épistémique et individualité empirique : Trois niveaux de l’individualité, 266. — Double statut des individualités épistémiques, 269.
VIII. Le principe de pertinence : La notion de modèle, ses diverses acceptions, 273. — Partialité du modèle, 280. — Effets du principe de pertinence, 282. -— L’écart, forme d'émergence, 286. — Pluralisme de la connaissance, 290.
Bibliographie . 295
Index des matières . 301
Index des noms 303
1부. 말함
밤에 걸어오는 걸음의, 울음의, 수풀 속 바위의 무너짐에 대한 개념이 있는가? 비어있는 집의 인상에 대한 개념은?
— Y. Bonnefoy.
1장. 벩송주의의 머뭇거림들
HESITATIONS BERGSONIENNES
I. La notion régionale de l'individuel : Le concept et l’espace, 11.
아래의 주제들을 생각해보자:
1. 의미를 지닌 모든 명제는 실재성의 한 이미지이다 ;
2. 그 본질[성질]이 이미지의 대상이 존재하는 것을 막는 어떠한 사물 양태, 이를 발화하려는 모든 시도들은 무의미를 생산한다.
3. 보편적 진리값을 부여받은 모든 명제는 의미가 비어있다.
이제 누가 이 주제들을 정형화했는지 묻는다면, 조금의 의심의 여지없이, 그리고 당연히, 그것은 비트겐슈타인이다. 그는 첫 대답을 제공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주제들은 랑가주에 대한 벩송식 분석 속에 있는 한 작품에서도 발견된다 ; 특히 이것은 처음 두 개의 물음과 관련되는데, 적어도 『의식에 대하여 비매개적으로 주어진 것에 대한 시론』에서, 랑가주와 개체성 사이 연관들에 대한 벩송의 숙고를 직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랑가주와 개체성은 이 작품에서는 『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에서보다 강조점이 덜 명료해서, 사람들은 이것들의 있음과 효력을 알아채지 못한다. 이 작품에 이것들을 부족하게 강조할 뿐만 아니라, 또 벩송의 용법과 [비트겐슈타인식] 어떠한 상징론<Symbolisme>의 바에 있는 친연성들을 이유로, 사람들은 [정작 벩송의 랑가주와 개체성이라는] 이 거침없이 독특한 숙고는 거리껴하기에 이르고, 랑가주에 대한 벩송식 이론을 열등한 생에 대한 옹호자의 시시한 충동들로 환원해버리기에 이르며, 열광도 우려도 랑가주와 개체성의 차이들을 표현하는 데에는 조금도 성공하지 못하기에 이른다. 벩송주의는 [랑가주와 개체성이라는] 영혼의 이러한 상태들을 조금도 혼동하지 않았다 ;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러한 운동은 갈수록 이 혼동과는 멀어지게 되었다. 랑가주와 이것과 개체성과의 관계에 대한 물음에 대하여 끊임없이 이 운동은 되물었다. 그리고 만약 이러한 중개가 랑가주와 개체성을 사유와 운동(1934)에서 사람들이 찾은 언어의 가능성에 대한 더 강한 뉘앙스와 더 강하게 선호하는 주장들로 1889년의 엄격한 입장을 대체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진화의 주요한 단계들을 표식하고, 이러한 동기들을 재인식하고, 임의의 주해들 속에서 이러한 정보들을 붙잡을 가치가 있다. 이 진화는 새롭게 문제 삼으려 애쓰는 사람에게 랑가주를 통해서 개체와 개체의 내포에 대한 문제를 제안할 것이다.
『시론』에서는 표현과 내포에 대한 언어학적 작동들의 메커니즘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이것에 대한 관심은 『물질과 기억』까지 기다려야 한다 ; 첫 번째 책에서, 벩송은 갑자기 랑가주가 어떻게 실재에 적용될 수 있는지 묻는데, 이 질문이 선험적<transcendantale>으로 암시되도록 제기하기를, 그리고 어떻게 랑가주가 일단은 개념인 “랑가주”라는 명사 아래에 이해되는 것으로 적용될 수 있는지 묻는다. 사물들에 적용되는 것, 세계를 점유하는 것만큼의 특질들에 대한 현전하는 개념은, 이 문제들을 늘 일어나게 한다. 결국 현전하는 개념은 내포<comprhension>과 외연<extension>을 갖는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바가 류들 내에서, 모든 재현들을 구성하는 특수성을 보장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외연의 현전은 개념이 독자적 재현이 아니라, 몇몇 대상들에 수행되는 재현이라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 사람들이 “초개체성”<transindividualité>이라고 칭하는, 이러한 성질<propriété>은, 벩송이 비인칭적이고, 진부하고, 속된 개념을 질책할 때, 그것이 가리키는 감성<la sensation>을 박살내고 위장하는 것을 비난할 때, 지시되었던 것이다. 한편, 모든개념은 어떤 내포를 현전하게 한다 ; 즉, 모든 개념은 상당수의 속성들<attributs>을 포함한다. 여기에서 통접<conjonction>은 이 속성들을 정의하고, 다른 개념들과 이 속성들을 구별한다. 벩송은 두 번째 측면을 사유할 때, 의식의 유동성을 고려해서 개념들의 안정성과 고정성, 그것들의 비자율도를 강조하고, 이것을 서로 나누어서, 그것들의 외재성을 상호적으로 증대시키는 구별점들의 명백함을 내세운다 : 이러한 점은 초개체성 때문이 아니라, 그 내포와 연결된 개념의 비변주성<invariance> 때문이다. 사람들은 [초개체성과 비변주성이라는] 두 성질 아래 벩송의 모든 강조들을 포괄하는데, 당연히, 두 성질은 엄격하게는 서로 고립되어 있지 않다 : 비변주성은 개체의 개념이 다른 개념으로 갈 수 있도록 하는 미끄러짐<glissement> 안에서만이 강조될 수 있다. 이 경로 안에서, 개체의 개념은 조형될 수 없다는, 개체의 개념은 초개체적으로만 간주될 수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외연과 내포를 따로 떨어뜨려 놓는 데에는 일종의 기교<artifice>가 있다. 왜냐하면, 즉 이 기교가 외연 갖기의 개념 자체와 같은 관념<la notion>의 내포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개념이 이렇게 외연을 갖는 것은, 오직 이 개념이 그 외연을 구성하는 각각의 규격에 맞게, 재생산되고, 그 자체로 정체를 갖기 때문에, 그래서 이 개념이 안정적인 내포를 갖기 때문이다.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위에서 했듯이, 벩송이 어떠한 개념을 그 내포와 묶으면서, 그리고 다른 개념들을 그 외연에 묶으면서, 개념에서 확인한 특질들인 두 그룹 안에서 재개하는 것이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 한다면, 랑가주 이론이 드러내는 어려움 중 하나가 있는 것이다. 이 랑가주 이론이, 이 차원 위에서 이 이론이 연쇄적으로 탐사되는 각각의 모든 차원들을 명료하게 하지 못하고, 이 구별점들의 역할 위에서 이 이론이 내세워지는 각각의 모든 구별점들을 명료하게 하지도 못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래서 벩송은 방금 언급했던 것과 같은, 개념에 대한 전통적 분석에서부터 떠난다. 두 번째 동기 속에서, 그는 개념들과 랑가주의 관계를, 공간과 중개하여, 제시하면서, 더 독특한 진보를 성취한다. 사람들은 오직 이러한 진보로 모든 벩송식 이론을 환원해버리는 습관이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러한 의미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었다. 다시, 자연 그리고 벩송이 “공간”이라고 칭하는 것, 그가 랑가주와 공간 사이에 내세운 연결에 대해서 잘 이해해 보아야만 한다.
사람들은 결국 『시론』에서 공간에 대한 고도로 형식화된 공간의 관념을 발견한다. 벩송은 공간을 너비[연장], 양화되고 구체적인 실재성으로부터 철저하게 분리한다. 공간은 개념작용의 대상이지만 [너비있는] 이것들은 지각의 대상이다. 너비는 생명체 일반에게서 제시되지만 ; 공간은 인간에게서만 제시된다. 바로 질의 부재를 통해서 우선 공간성은 특징지어진다 ; 그리고 『시론』의 비판론을 모두 관통하고 있는 이러한 관점에서, 벩송은 오른쪽과 왼쪽의 구별을 공간이 아니라 너비와 연관지으면서, 칸트의 가르침을 넘어선다. 이러한 바가 차이화의<différenciation> 질적이지 않은 원리로서, “동일하고<identique> 동시적인 어떠한 감성들을 이것과 저것으로 구별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서 제시된다. 동일하고 동시적인 것들은 그것들의 고유한 질을 통하거나, 시간 안에서의 사태를 통해서 먼저 구별되는 것을 막는다. 그래서 공간은 동질적 환경이다. 점들 중 두개는 그것들의 질들 때문에 서로 침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 이러한 동질성과의 관계는 벩송이 “모든 동질적이고 동일한 환경은 공간”이라고 확신할 수 있게 한 매우 본질적인 것이다. 그리고 특히, 물리학의 동질적인 시간은 우주의 모든 연속적인 상태들을 여기에서 정렬할 수 있도록 인간을 돕는 바로 공간이다 : 일반화작용의 차원에서 공간에 대한 벩송의 관념을 이해할 수 있도록 자리잡아야만 한다. 그 자체로 동질적인 것일지라도, 공간은 차이화의 원리로서 항상 적지 않게 작용한다. 그렇지만 동질적인 것 속에서도 차이화는 실재화될 수 있는데, 오직 구별을 위한 대상들 사이 상호적인 순수 외재성의 설립을 통해서이다. 왜냐하면 모든 차이화의 다른 양상들은,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질의 배치로서 불려나오기 때문이다 : 이러한 관점에서 공간은 외재성의 환경이다. 병치와 동시성의 환경이다. 그래서 공간의 내부적인 성질을 구성하는 질에는 공간은 무차별성<l’indifférence>이다 ; 공간은 동일적인 것에는 호의적으로 표현되는 무차별성이다 : 앞서의 고찰들을 요약하자면, 결국 공간은 무차별한 차이들의 환경으로서 정의되는 것이다.
L'application du langage au réel, 14.
랑가주와 공간의 관계들을 해명하려면 벩송의 공간성을 가장 추상적인 형식으로 다시 세울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가장 구체적인 재현작용을 세우는 데에 그치게 되는데, 박자에 맞추어 정확하게 이것들을 정의내리지 않기에 그렇다. 반대로 사람들이 공간성의 본질로 되돌아갈 때, 벩송이 랑가주, 소위, 『시론』에서, 개념들, 공간 사이 동종성<connaturalité>의 선을 확립할 수 있도록 이끈 근거들을 자각하게 된다. 이 선은 두 차원에서 자체로 존재한다. 하나는 개념들의 형식화의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들의 기능성<fonctionnement>의 차원이다. 추상화의 차원이고 실재로의 적용작용의 차원이다.
“...추상화는 분명하게 잘린 구별점들을 가정한다. 그리고 개념들의 외재성의 공간 혹은 그것의 기호들의 공간을 가정한다. 다른 것들에 비해 이것들은...” 추상성, 그것은 항상 벩송에게는 추출(抽出)이었다. 속성은 대상 안에 혹은 지각가능한 인상 안에 어떤 것들과 더불어 주어지는데, 모든 이 어떤 것들에서 속성을 추출하는 것이다 : 장미향에 대한 일반적 관념을 구성하려면, 장미에게서 맡았던 모든 추억들로부터 꽃의 향기를 나누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러한 분리작용을 구현하려면, 환경 속에서 모든 빛무리를 진열할 수 있어야 하는데, 여기서 이 환경은 구별작용들에 알맞고, 오직 공간일 수만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학적 작용의 다른 극단에서, 사람들이 개념들로부터 사물들까지 우회할 때, 공간성의 매개는 적잖이 불가피한 것이다.
결국, 벩송은, 어떻게 랑가주가 실재에 적용되는지 알고자 하는 물음에 대해서, 그 자체로 공간인 실재성에 작동하는지, 지속 속에 주어진 실재성에 작동하는지에 따라, 다른 두 가지 대답을 내놓는다. 본성상, 물질적인 대상은, 어느 정도, 극단적 존재에 속하는 것이다. 개념화작용<conceptualisation>의 공간적 측면들 속에는, 강제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이 측면들의 주요한 특질이 공간성을 자체로 제기하기 때문이다. 벩송이 누차 드러내고 있는 것이 이것이다. 그는 우선 대상성을 정의한다. 소위 콘텍스트와 물질성 속에서 성질[자연]의 변질 없는 가분가능함으로서 말이다 : 질료적 몸체는 정신이 부과하는 하위부분들을 우선 허용한다. 왜냐하면 질료적 몸체의 본질이, 우리가 그렇게 깨닫듯이, 실재적 재현을 재인하는 것보다 항상 더 많은 것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대상이 또한 하위부분에 알맞다면, 정확하게 하위부분들을 유도하는 구어적 표현은 대상을 부정하지 않게 될 것이다 : 사물들 속에서 랑가주는 표현 덕분에 공간적 형식을 발견한다. 이 표현은 랑가주가 기능하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다 : 만약 질료적인 대상들이 공간 속에서 주어진다면, 그것들 중 두 개는 모든 속성들을 공동으로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동일한 존재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들의 위치 때문에 언제나 달라질지라도 그렇다. 개념을 질료의 영역에 바르게 적용하기 위해서 과감해질 필요는 없다 : 개념이 동시에 비변주적이고, 초개체적이라는 점에서, 개념은 전체세계[우주]에 적합하다. 이 우주 한가운데에서 동일한 개념은 반복하기를 수용한다 : 공간적인 한에서, 질료적인 우주는 정확하게 이러한 조건에 응답한다. 모든 근거들을 위해서 랑가주는 외재적 실재성의 적합한 재현작용을 가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왜곡하지 않는 번역의 재현작용이기도 하다 : 구어적 표현의 가능성<possiblité>의 조건들은 여기에서 사물들 표현하기의 가능성의 조건들과 동일하다.
달리 말해, 사람들은 랑가주가 비매개적으로 질료적 세계를 표현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벩송식 비매개성은 두 가지 오해를 예고하게 된다 : 하나는 피상적인 것 혹은 알기 쉽게 편의적인 것과 이 비매개성을 혼동하는 데에 있다.『시론』의 주제에 의거하여, 마치 비매개성이 의식의 영역에 그렇게 마련되는 것처럼 생각한다. 상반되는 두 가지 오류는 사람들이 이렇게 칭하는 것이다. 한편, 비매개성은 심층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벩송은 비매개적으로 숫자의 적용을 질료적 대상들로 검증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비매개성의 관념은, 사람들이 그 진정한 차원에 『시론』을 다시 자리 잡을 때,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 선험적 분석<l'Analytique transcendantale>에 있는 모든 종합 판단들의 최고 주요 차원[척도].
게다가, 상징[symbole]을 반대하면서, 비매개성은 벩송이 적어도『시론』에서 제시했던 허용 속에서는 이미지와 연관된다. 결국, 여기에서 이미지는 적합한 재현작용처럼 정의된다. 그리고 벩송의 이 예시는, 재현성에 대한 재현작용의 적합작용에 있는 성격[자연]과 조건들에 대해서 조금의 의심도 남기지 않는다 : 지도 위에 그어진 선은 군대의 행진의 이미지이다. 왜냐하면 군대는 공간 속에 길을 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도는 마찬가지로 공간적인 지형<configuration>이다. 왜냐하면 재현성과 재현작용은 가능성의 조건자체들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앞서와 유사한 선은 의지의 진행은 적합하게 재현하지 않는다. 여기서 의지는 마지막 결정까지만 숙고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숙고함 중에 자아가 겪는 계속되는 변조들을 고려하면 의지는 실패만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바가 나아가 벩송의 분석과 비트겐슈타인의 분석 사이에서 추정되는 연관성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 연관성은 그들이 의미에 부여된 발화체의 성격[자연]을 규명하려, 이미지에 대한, 같은 용어를 양쪽에서 사용했다는 것만이 아니다. 또한 그들이 같은 용어를 유사하게 진실한 실재성들에 적용했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다른 경우처럼 이 경우에, 사물들의 상태와 함께 재현작용의 형식을 칭했었고, 여기에서 재현작용의 형식이 사물들 상태의 이미지였는데, 이렇게 이미지가 이에 참여하는 특권을 가진 것이 정녕 맞는다면 말이다.
실재성들의 성질은 “상상하기<imaginer>”를 저지하는 것인데, 이 실재성들을 향하는 무의미부터 발화체까지의 위상을 『논고』에서처럼 『시론』에서도 논의하고 있다. 그러나 벩송의 사유와 그 용법은 비트겐슈타인의 용법보다 더 유동적이다[흐릿하다]. 비트겐슈타인의 용법에서는 의미가 비어있는 명제들(sinnlos), 소위 존재론적인 것들과 모순어법들, 엄격하게 무의한 말들(unsinn)을 공들여서 구별하고 있다. 첫 번째 것은 의미가 빼앗겨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의 보편성이 이 명제들에서 실재인 바로서 무엇의 이미지인 것을 금지하기 때문이다 ; 두 번째 것은 다양한 이유로 이미지의 대상일 수 없는 것을 발화하려 마주한 모든 시도들 때문에 생성되는 것이다. 벩송도 두 가지 문제들을 마찬가지로 다루었다. 그러나 그는 두 가지 경우에 단 하나의 범주로서, 의미의 부재라는 범주만을 배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화체로서 의미를 빼앗을 수 있는 두 가지 방식들이 있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벩송은 각각의 경우에 차이가 있는 공식화들<formulation>에서 이용한 발화체의 존재성을 져버리지 않으면서도, 이러한 이중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보편적 진리성을 주장하는 발화체들은 의미가 비어있다. 왜냐하면 서술어의 파악은 그것의 외연이 확장되면서 약화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계에서는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시론』의 마지막 장에서 분석되는 자유<la liberté>와 관련된 발화체들은, 이것인 한에서는, 소거<évanouissement>가 진행되면서 기호화작용을 잃어버리지 않았었다 : 그것들은 전혀 기호화작용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길 MO를 통과했고 X로 결정한 자아가 Y를 선택할 수 있었는지 또는 없었는지를 나에게 묻지 말라. 나는 그 질문은 의미가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선 MO도 점, O도, 길OX도, 방향OY도 없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질문을 하는 것은 시간을 공간에 의해, 계기를 동시성에 의해 충분히 표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물음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이 물음은 지속 속에 새겨지는 과정들에 적합한 재현작용을 위해서 공간적 도식을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한편 연속적이고 한편 동시적이라는 것을 망각하면서 말이다; 혹은 또한, 이 물음은 오직 기호일 수만 있다는 점에서만 이미지를 가치 있게 수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역시, 앞서 보았듯이, 같은 자유의 문제를 환기하면서, 그가 드러내기를, 벩송은 일반적 해결책들을 모순적인 것이지, 기호화작용이 소멸된 것은 아닌 것으로 본다 : 두 검토 사이에서의 이러한 머뭇거림은 보편 진리값의 명제들의 경우와 자유와 관련된 명제들의 경우 사이의 차이에 함축되어 있는 재인식의 전개를 드러낸다. 그런데 『시론』은 결정론자들의 오류를 담고 있는 발화체를 진실한 발화체로 교체하자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는 특별히 자유의지<libre-arbitre>에 대한 실증적인 입증의 획득을 주장하지도 않았다. 그의 노력은, 이러한 관점에서, 매우 근본적이다 : 이것이 참이다. 그가 확립하기를, 자유를 향하는 모든 확신, 그것은 신봉자와 적대자로부터 해방된 것이며, 이 확신의 의미는 비어있고/혹은<et/ou> 모순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자유에 대한 모든 결정은 결정론을 근거로 삼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이 문제에 대해 발화되었던 측면들 중 두 번째 아래에 있는, 실재에 대한 랑가주의 적용 문제를 발견한다. 만약 랑가주가 질료적 자료들에 바르게 적용될 수 있다면, 이 자료들과 공간성의 형식들을 분유하면서, 이 자료들에 비매개적으로 동참할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의식, 특별하게는 자유의 자료들에 대해서 말하고자 할 때 오직 무의미만을 생성한다면, 한번에 사람들은 표현과 표현성<exprimé>에 대한 가능성의 조건들을 정체성[동일성]에 기초할 권리를 잃어버리게 된다. 표현은 공간적인 성질[자연]로 남는다 ; 하지만 표현성은 지금 시간 혹은 더 정확하게는 지속을 제기한다. 표현은 항상 동시성의 질서로서 나타난다. 하지만 표현성은 본질 상 연속성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이 표현을 나아가서 기수법의 접합된<connexe> 물음에 대하여 다시 떠올리는 것처럼, 표현은 더는 비매개적일 수 없고, 표현은 필연적으로 상징적[기호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 상징화작용[기호화작용]은 엄격한 의미에서 작동을 재현하는데, 이 작동을 통해서 우리는 언어를 통해 표현하기 적합하게 그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공간적인 도식 위에 그 연속성을 투사한다 ; 상징화작용은 『시론』에서 『순수이성비판』과 비교할만한 역할을 한다. 개념적인 것과 비개념적인 것 사이의 매개에 이바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그 자체가 기호인 랑가주이다. 랑가주는 의식에 적용될 때 상징적인 것[기호적인 것]이 된다. 랑가주가 질료에 적용될 때 랑가주는 의식이 아니다 : 만약 본질상 그러한 것이라면, 이 평<appération>들은『창조적 진화』혹은 『사유와 운동』이 담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실증적인데, 이는『시론』의 학설들과 엄밀하게 비교할 수 있는 것들일 터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를 말하거나 우리 지속의 순간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랑가주가 실재로 지속에 들어가는 것의 공간적인 문자화<transcription>를 향한다고 잘못 생각한다 : 이러한 성질[자연]은 우리가 연속적인 것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막는다. 자유와 관련된 모든 주장은 결국에는 기계론자들이 선호하는 바를 제기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가? 자아의 표현에 대한 모든 시론이 그 개체성에 맞부닥치게 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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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étérogénéité du concept et de l'individuel, 18.
이러한 서두들은 개념과 개체적인 사이의 연관들에 대한 이론을 규명하려면 불가피한 것일 터이다. 주어진 모든 조각들 : 벩송의 확신들의 의미와 『시론』에서 이 확신들이 드러나는 방식을 파악하기에는 서로들을 연관짓는 것으로 충분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재인식해야하기 때문이다. 자유에 대한 장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개체적인 것이 되는 개념들의 충동을 분석하려 배타적으로 내버려지는 문장들조차도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흩어져있고 잘려나간 어떠한 확신들만을 발견한다 : “...우리의 지각들, 감성들, 감동들<émotions>과 관념들은 두가지 측면에서 드러난다 : 하나는 명백하고, 정확하지만 비인칭적이다 ; 다른 하나는 혼동되고, 무한하게 동적이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랑가주는 공공영역에서 실패하지 않는 진부한 형식에 알맞은 것이기 때문이다”. 벩송이 어떤 종류의 명제들을 판단하려는 욕구를 조금도 확증해내지 않았기에, 이 명제들이 그에게 항상 먼저 판정된 것처럼 드러났기 때문에 모든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것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 개체적인 것의 말로표현할수없음<ineffabilité>의 이론은 랑가주와 실재 사이의 연관들을 분석한 부산물이다.
이렇게 드러내려면, 이것을 함축하면서까지 남아있는 주제를 도입해야만 한다. 개체적인 것에 대해서, 결국, 벩송은 사람들이 “영역적” 혹은 “질료적”이라고 불렀던 개념을 『시론』에서 실현한다. 존재 안에서 공간적인 것의 영역과 지속적인 것의 영역이라는 두 거대한 영역들을 절단해내면서, 그는 두 번째 안에서 첫 번째를 가두기 위하여 첫 번째로부터 개체적인 것을 단호하게 배척했다 : 모든 개체성은 지속에 들어간다. 지속인 모든 것은 개체적이다. 이러한 이중의 결정을 설명하려면, 동시에, 지속과 개체성 사이 설정된 상호성을 설명하려면, 사람들은 개체의 독특한 성질들로부터 이렇게나 떠나야만 한다. 일반적으로, 개체적인 것은 본질상, 그 본질이 다르거나 혹은, Claudel이 말한 것처럼, 모든 나머지가 모든 나머지를 저버리는, 상이한 것이다 ; 만약 벩송의 공간이 무차별성 차이들의 환경이라면, 개체성의 형식은 조금도 맞아들일 수 없다. 사람들은 조금더 정확하게 하면서, 이것을 더 잘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우선 명심할 것이다. 개체성은 다른 주위에서의, 동일한 것의 재생산 작용인 반복 작용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 개체적인 것은, 사람들이 두 번 볼 수 없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원리상, 정의된다. 그래서 지속은 특이한 요소이다. 이 요소 안에서 모든 반복의 중요성이 보증된다. 이러한 영속성은 결국 순간과 뒤따르는 순간에 대한 이 순간의 내용에 대한 통합적 이양을 보증한다 ; 그래서 이 영속성은 이 순간들의 두 가지 이질성을 필연적으로 생성한다. 왜냐하면 이와 같기 때문이다. “앞을 따르면서 그에게 남겨져있는 추억들을 항상 담고 있다” 지속은 그 연속성 자체 속에서 자아를 다르게 하는 것을 저지하지 않는 것이다 : 공간의 두 지점들이 동일한 내용을 허락할지라도, 지속에서 두 순간들을 묶는 관계는 그것들 내용의 교체를 끌어낸다. 왜냐하면 심층적으로 의식에 주어진 것들은 근본적으로 서로들이 이질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고유하게 개체적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생각건대, 두 번째 특질을 예측하면서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다. 어원적으로, 개체는 가분을 가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수단이 있다면, 가분이 그 성질을 바꾼다는 점을 개체가 재인식한다고 말하면서, 원자를 포함해서까지 어떻게든 나눌 수 있다. [하지만] 만약 개체가 나누어진다면, 개체가 그 성질을 바꾼다는 점에서, 개체는 가분을 허용하지 않는다 : 개체는 절대적으로 불가분인 것이며, 변질 없이 불가분인 것이다 ; 그래서 이러한 속성의 현전 혹은 부재는 벩송에게는 정확하게 주체적인 것의 질서와 대상적인 것의 질서를 맞세우는 것이다. 결국, 공간은 무규정하고 재량의 자유인<indéfinie et arbitraire> 가분성의 원리를 구성한다. 혼합의 다양성<Multiplicité>, 지속은, 반대로, 변질없는 가분에 속하지 않는다. 심리학적 상태, 꽤 정통한 심층의 상태는, 숫자, 선, 몸체가 존재일 수 있다는 의미에서 다양할<multiple> 수 없다 : 공간적 질서 안에서 다양성은 실재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병립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 지속의 질서 속에서, 다양성은 잠재적이다. 왜냐하면 상호적인 침투의 형식 아래에서 현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명백하게 이러한 요소들의 재고는 여기에서 기교적인 분석으로부터 산출된다. 이 기교적인 분석은 초기 상태와 연관되어 있으며, 이 시기를 유도하고, 단순한 것처럼 경험된 것을 복합적인 것으로 드러나 보이게 만들면서, 이 초기상태를 조정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지속하는 것을 나누려면, 그래서 지속을 조정해야만 한다 ; 여기에 구별점들을 도입하려면, 이 지속을 움직이지 하게 해야만하고, 움직이지 않게 하려면, 공간 안에 그것을 펼쳐야 한다. 소위 변질케 하여야 한다. 이러한 성질의 변질을 대가로 치루지 않는다면, 이산에 어울리지 않게도, 내밀한 자아에 주어진 것들은 오직 개체적이고 본원적<authentiquement>이다.
지속의 영역에서 말할수없음<l’ineffabilîté>을 맡는 것으로서 개체적인 것의 장소화가 분명하게 표명된다. 공간적인 것으로서 개념의 비매개적인 적용가능성을 보장하는 특질들 자체가 지금 상징적인 것이 아닌 적용의 불가능성을 끌어낸다 : 사람들은 개체성의 두 표지를 구어적 표현의 특별한 조건들과 마주하게 하면서 잘못 없이 이를 지각할 수 있을 것이다. 랑가주는 구별과 외재성의 계(界)처럼 밝혀졌다 : 이러한 관점에서, 구별 없는 연속의 계에 종속되는 심층 자아에 주어진 것들과는 비교불가능한 것이다. 지속은 동일자의 반복을 배척한다 : 이러한 관점에서 지속은 비변주적이고 초개체적인 한 개념의 강제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개념은 본질 상, 그 자체와 동일한 요소이고, 반복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지속과 개체성은 상호적인 선으로 묶이기 때문이고, 표현 가능성의 조건들이, 표현하기로서의 실재성에 대한 조건들과 충돌하면서, 여기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 조건들 서로가 질료적인 우주의 사태[un cas] 안에서 조화롭게 적용되는 대신에 말이다. 우주의 사태는 명제가 아닌데, 명제는 재현작용의 형식과 재현작용이 표현하기를 주장하는 개체성을 나눌 수 있는 것이다 : 우주의 사태는 이러한 개체성의 이미지일 수는 명제가 아니다. 개체를 향하는 모든 발화체는 무의미로 변한다. 처음부터, 벩송주의의 특이성은 언어와 적용작용의 조건들에 그가 가한 분석 속에 있기 보다는 존재의 두 영역들, 공간의 영역과 지속의 영역의 명시 속에 있다. 그리고 이렇게 전개하면서, 그 영역들 중 첫 번째에 랑가주가 할당되고, 두 번째에 개체적인 것이 할당된다는 것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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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Transrégionalité de l’individuel : Assouplissement des thèses primitives, 20.
『시론』에서는 이원론자의 장치가 완전하게 자리매김한다. 벩송은, 사람들이 검증받고 싶어 하는 청춘기의 대담함으로, 이 설정의 결론을 상정한다. 또한 이는 사실의 이원론을 문제 삼는다. 벩송은 이원론을 적용하는데, 왜냐하면 이원론은 그에게 어떤 문제들을 풀고 다른 문제들을 제기하는 내부적인 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이원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이 이원론 안에서 생각한다. 그가 『시론』에 담긴 모호성들과 부정확성들을 의식하면서, 이 사유의 심화가 이원론 그 자체를 물음 안에 놓도록 이끌어 왔던 것은 자연스럽다. 랑가주에 이른 것들에 대해서만 다시 붙잡으려면, 사람들은 여기에서 이 난점들 중 두 가지를 주시하게 된다. 『시론』의 모든 변증법은 현전에 대해 인간이 갖는 공간의 관념을 상호적인 외재성과 동질성이라는 두 구성체들로 제시한다. 칸트주의를 명백하게 참조하면서, 이 변증법은, 인식가능성의 특별한 형식으로서, 인간에게 고유한 장치처럼 밝힌다. 그래서 『시론』자체의 인류학은 이 변증법이 『비판』에서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모호하게 공간의 이러한 특수성을 드러낸다. 사람들이 지속을 통해 자아를 정의하고 지속을 공간과 맞세울 때, 사람들은, 어떻게 인간이 공간의 관념을 형성하는지 알고자하는, 이 물음에 편하게 대답할 입장일 수 없다. 다른 한편, 이 첫 번째 난점과 맞붙여서, 랑가주와 더 직접 관련된 두 번째 난점이 제기된다. 결국, 이 난점들의 모든 측면을 규명하려 랑가주의 자연을 확인한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 뿐만 아니라, 질료적 우주에 랑가주가 적용될 때 랑가주의 성립은, 긴급하게 새로운 문제의 해결책 없이, 표현과 표현성의 공통 공간성을 통해서 설명될 수 없다 : 이 성립은 랑가주가 질료만큼 공간적인 것인지, 공간과 심층적으로 묶여있는 것인지, 요컨대, 랑가주가 공간성에 다소 참여하는 것인지, 혹은 공간의 부분들인 것인지 묻도록 이끈다.
두 번째 지점을 통해 시작하려면, 우리는 『웃음』(1900)의 이러한 분석들에서, 『시론』에서는 바랄 것이 없었던, 랑가주와 공간 사이에 확립된 선의 밀접성<l’intimité>의 약화를 주목해야 한다. 거의 과장 없이, 사람들은 밀접한 성질 안에서 결국 랑가주는 공간일 뿐인 것 아닌지, 모든 파롤은 필히 웃음을 유발하지 않는지, 물을 수 있지 않을까? 만약 웃음이 개체적인 것이 모방할 수 있도록 제기될 때마다, 반복에 알맞을 때마다 솟는 것이라면, 웃음이 마치 웃음이 적용되는 실재성을 반복하는 일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나타난다니, 어떻게 개념의 사용이 항상 우스워<comique>지는 일을 모면하겠는가? 말은 권능상 정신의 말이다 : 웃는 것 만큼이나 인간이 명료하게 말하게 만드는 근거들이다. 그러나 인간은 말할 때마다 웃지는 않는다. 그리고 환경을 분석해야만 하는데, 이 환경 안에서 랑가주는 우습게 된다. 이러한 환경들은 랑가주가 “방기<lasser-aller>”에 굽혔을 때나, “방심<distraction>”을 저버렸을 때마다 구현된다. 그래서 이 경우는 발화체가 기호화작용을 드러낼 때마다 생산되는데, 반복 혹은 앞서한 발화의 전복l’inversion으로부터 산출되거나, 다른 두 발화들의 교착l'interférence으로부터 산출된다. 그러나 이 세가지 작동들은 명백하게 공간적인 자연[성질]이다. 이 작동들은 초기 발화체 혹은 발화체들이, 어느 정도, 내부적 조직화 속에 고정된다는 것을 가정한다. 게다가, 변조에 굴한다는 것을 가정하는데, 이 변조는 그것의 구성체의 배치를 조정하거나, 이 구성체를 다른 발화체의 배치와 묶는 것이다. 우스운 것은 기호화가 사물들 상태에 대한 발화의 적응으로부터 더는 산출되지 못하고, 발화체의 공간적 구조의 단순한 조물로부터 산출될 때 태어난다 : 이것이 벩송이 우스운 것을 랑가주의 방심처럼 고려한 것의 의미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시론』의 학설이 『웃음』안에서 중요한 반향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 1900년대 벩송은 랑가주가 순수하고 단순하게 공간적이라는 견지를 더는 갖지 않았다. 그는 실재성에 랑가주가 실재성에 다소 적용됨에 따라 랑가주가 아마도 다소 공간적이라는 견지를 갖는다 : 나아가서, 벩송은 지금 발화체의 차원<dimension>안에서 랑가주를 검토한다. 더는 『시론』의 경우에서처럼 개념의 차원에서만 검토하지 않는다.
『웃음』은 벩송주의 진화의 좋은 발표자처럼 역시 작동한다. 바로 『물질과 기억』(1896)안에서 의심의 여지없이 이러한 진화의 일반적 기호화작용을 찾을 수 있다. 벩송의 숙고들은 결국 위에서 인용했던 이원론을 사람들이 이원성 없는 이원주의라고 부르도록 한다. 이는『물질과 기억』이 공간과 지속을 두 원자론적 실체들로 실재화하는 것을 피하고, 공간과 지속을, 이 안에서 실재성들이 움직이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한계들<les limites>로 분석하기를 택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실재성들은 긴장이 멈추지 않고 변주되는 정도들을 통해서 서로 구별된다. 이러한 틀 안에서, 공간은 질료에 대한 우리 작동의 도식 혹은 상징이 되려는 인간적 장치의 형식이기를 멈춘다-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시론』이 무시했던 문제가 다시 나타난다 : 인간은 공간 관념을 형성하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이론이 있기에 앞서 살아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상호적인 외재성과 무한에 대한 가분성은 더는 질료적인 대상들에게 선천적으로 실재하는 속성들로 고려될 수 없다 : 이러한 대상들은 본성 상 공간에 드러나는데, 『물질과 기억』은 독창적으로 이 공간의 실천적 성질을 고발한다. 그러나 만약 외재성과 가분성이 오직 인간의 작용과 관계한다면, 사람들이 그 속성들을 귀속하는 대상들은 개체성의 영역을 배제하기를 멈출 것이다 : 결국 대상들은 이러할 수밖에 없을 것인데, 왜냐하면 『시론』이 이 두 속성들을 우리가 필연적으로, 어떤 전개들 속에서, 우주에 부여한 질들로서 해석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전개란, 우리가 우주를 알기 위해서 우주를 파악할 때 따르는 그것이다. 이 작용에 대한 공간의 참조는 그래서 두 영역들로 나뉘는 우주를 나뉘는 장벽을 흐릿하게 하기에 이른다 ; 이로서 이 참조는 순수 지속의 계 저편에서 적용되던 개체적인 것의 범주를 막던 장애들을 제거한다. 개체성은 형이상학적 근거로서, 영역적 개념이기를 멈춘다.
또한 이 참조는 심리학적 근거들로서 있기를 멈춘다. 벩송의 진화는 결국 이렇게 랑가주를 재평가하도록 한다. 여기서 랑가주는 일반적으로 공간의 바에 묶여있는 것이지만 랑가주의 심리학적 측면들에 대한 발견과 분석 속에서 고유한 동기들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시론』에서 벩송은 개념을 초점으로 하는 랑가주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 『물질과 기억』에서 그는 랑가주의 기능작용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다 : 왜냐하면 1896년에 가장 자주 인용된 용어는 개념에 대한 용어가 아니라, 말<mot>에 대한 용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은 동적 형식이면서 일반 관념의 역할을 하는 형식일 뿐이었다. 혹은 벩송이 말했듯이 이러한 형식 아래에서 형식은 분절적 전개들<un processus articulatoire> 로 집중화되고 결정화된다. 그러나 삶에 대한 일반적 학설에 부합하게 하면서, 꿈과 대립되는 역할에 부합하게 하면서, 이완에 집중하면서 그렇다. 일반 관념의 이론에 적용하자면, 이러한 반대작용은 말과 개체적인 것들의 이미지들에 대한 이론으로 해석된다 : 매번 일반 관념은 두 극 사이에서 진화하는데, 한 극을 이루는 것은 말의 동적인 단위성이고, 한 극을 이루는 것은 표상작용들의 불가사의<la myrade>이다. 이 표상작용들 안에서 관념은 가장 이완된 차원으로 흩어진다. 말과 개체적인 이미지들 사이에는, 원뿔의 높이가 항상 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말과 개체적인 이미지들을 나뉘어져 있다 : 그러나 이 거리는 『시론』에서처럼 더는 불가침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말은 첨단을 재현하고 개체적인 이미지들은 바닥을 재현하는 것과 동일한 모양의 원뿔이 이것이기 때문이다. 개념적인 것과 개체적인 것 사이에서 『물질과 기억』은 차이를 보존한다 ; 그러나 이 차이는 평면의 차이이다. 더는 영역의 차이가 아니다 : 개념적인 것과 개체적인 것은 근본적으로 서로서로 낯설게 있기를 멈춘다. 그리고 벩송은 개념적인 것과 개체적인 것이 재현작용의 동일한 형식을 분유하도록 하는 것을 고려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적어도 『시론』의 엄격함을 약화하는 것은 고려했다.
개체적인 것은 개념적인 것과 연관된다 ; 수렴적인 행보를 통해, 동시에 벩송은 엄격한 공간성으로부터 랑가주를 이격<détache>했다. 이 엄격한 공간성은 시론에서는 있는 것이다. 개념만이 아니라 발화체를 고려하면서 벩송은 공간성은 사람들이 적당하게 시그니앙의 연쇄<la chaîne signifiante>라고 불렀던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공간성은 병렬적인 말들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시그니피에인 한에서, 벩송 용어에서 사유는 움직임이었다. 이 움직임은 명제의 말들 모두를 관통한다.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다시 세워질 수는 없는 것이다. 궤적을 줄세운 지점들로부터 움직이는 것의 움직임을 만들 수 없는 것처럼 그렇다. 그러나 만약 마치 동작하는 공간이 움직임에 있는 것처럼 시그니피앙이 시그니피에에 있다면, 언어학적 작동은 수신으로도 발성으로도 설명될 수도 없고, 지시대상을 통해 공간으로 설명될 것이다. 사유는 말들 속에서 진열되는 것이고 분절되는 것일 터인데, 그러나 그것들 사이에서 해소되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숙고들로부터, 랑가주에 대한 벩송식 분석이, 『시론』에 있었던 것에 비해, “흔들림<bougé>”의 공간을 겪었다는 것을 파악한다: 1896년부터 개념의 차원은 더는 조금도 근본적인 차원이 아니겠다 ; 대조적으로, 그 후로부터 벩송은 개념의 이론 위로, 발화체들의 생산과 수용의 메카니즘들을 분석하면서 분리된 완화를 반향시킬 것이다.
Les concepts fluides, 24.
그래서『물질과 기억』은 랑가주와 개체적인 것 사이의 관계들 문제에 대해서 핵심적인 계단이다. 벩송은 여기에서 한편으로 개체적인 것이 개념이 구체적인 형식인 바의 이완적 형식이라고 가르치면서, 한편으로는 랑가주는 배타적으로 공간적인 성질은 아니라고 가르친다. 두 성취들에 대하여, 결론은, 『사유와 운동』의 개념의 이론 안에 있는 “흐르는 개념« concept fluide»”의 관념<notion>에 대한 흩어져있는 숙고들의 출현과 함께 알 수 있다. 이러한 관념은 『시론』에서부터 벩송의 사유가 겪는 진화를 제시한다. 과거 시론에서는, 공간에서 관념을 제하였기에, 그것이 무엇이든, 개념이 흐르는 것처럼 고려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잘 알려져있듯이, 이러한 등장은 벩송주의의 심층적 요청에 대응한다. 이는 마침내 철학적 담론일 수는 없는 것이고, 최고의 실재성을 지속과 개체성에 상응하게 하는 것이며, 1889년의 학설이 소묘한 요청된 틀 속에 그것이 포함되도록 하는 것이다 ; 그는 엄밀한 개념들을 간청하고, 반복의 장치처럼 개념을 고려할 수는 없었다. 흐르는 개념의 이론은 사람들이 “흐르는” 이론을 이해하기를 멈추자마자, 이러한 난점들의 극복을 유발하게 된다 ; 그래서 이 이론은 『물질과 기억』이 제거한 대지 위에서만 등장할 수 있었다.
왜 벩송은 이러한 이론을 완전하게 설명하지 못했는지, 그리고 『형이상학 입문』(1903)의 두 세 문장들에서 간단하게만 이 이론을 제시했는지를 물어야만 하겠다 ; 또한 위치를 탐색하면서 무엇이 그러한 개념들의 이론이지 찾아야만 할 것이다. 벩송은 이 이론을 흐름처럼 고려했을 것인데 왜냐하면 여기에 대해서 명료하게 주어진 유일한 예가 미적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 흐르는 개념을 구성하는 미분은 벩송을 그저 요약하여 과학적 인식의 적대자로 보는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미적분 개념들의 선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의미가 있다. 벩송은 결국 미분된 것의 관념<notion>을 형성하려고 정신이 그 작업의 익숙한 방향을 전도<invertir>한다고 간주한다. “모든 일<tout fait>”에 관심가지는 대신에, “이루어짐<se faisant>”에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 결과에 연연하는 대신에 생성<genèse>쪽으로 우회해야만 한다. 오성의 일반적 행보의 이러한 전도를 발행하는 개념들은 어떤 속성들 속에 그들의 기원을 반영하는데, 이 속성은 이러한 개념들을 일반적 개념들과 상반되게 하는 것이다 : 이러한 편에서는 굳어있고 고정되어 있다. 저러한 편에서는 “부드럽고, 자주 움직이고, 항상 직관으로부터 사라져버리는 형식들을 본뜨기에 알맞은 표상작용들”을 형성한다. 그의 용어들에까지 개념들의 두 유형들 사이에 있는 이러한 구별지점들을 연장해보자면, 사람들은 볼 것인데, 『시론』의 관련된 분석들을 다시 제시하지 않은 채, 이 구별지점은 용어들의 역량을 한계짓고 있다 : 1889년에 모든 개념은 공간적 자연의 불변체처럼, 동일하고 반복되는 구성요소처럼 제시되었다 ; 1903년부터, 벩송은 생각하기를, 이러한 분석이 적합하지 않은 개념들의 범주가 존재했다. 사람들은 미적분이 제공하는 예들로 되돌아가서, 직선으로 뻗어나가는 개념들과 흐르는 개념들 사이에 있는 구별지점을 명백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유율법들에 대한 뉴턴식 계산을 숙고하면서, 벩송은 여기에서 무한하게 미소한 양들로부터, 한계가 있는 양을 생성하도록 하는 절차를 본다. 탄젠트의 기울기의 값은 한 지점에서는 고정되고, 한정된 값이다. 다른 지점들에서 탄센트가 갖는 값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탄젠트의 값은 점멸하는 양들로부터, 그래서 본질적인 변항들의 양들로부터 측정될 수 있다. 여기에서 탄젠트의 값은 연관을 형성한다 : 미분계산은 고정된 것을 연속되는 과정의 결과처럼 제시한다. 미분계산은 움직임을 실재성의 본질인 것처럼 생각하고, 움직이지 않음을 피상적인 그 움직임의 표명처럼 생각한다. 그 결과로 미분계산은 벩송의 강연에 알맞게 된다. 흐르는 개념은, 그래서 개념이 차이를 전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개념은 변동가능한 실재성에, 개념에 알맞기 때문이다. 이 개념은 무한 안에서 차이가 나는 가치들을 주조<monnaye>한다. 마치 미분이, 그 공리가 변주되지 않는데도, 두 점들 안에 있는 곡선으로부터 차이가나는 값들을 받아들이듯이 그렇다. 사람들은 여기에서도 불변항을 확인한다 : 그러나 직선으로 뻗어나가는 개념의 경우, 불변성이 반복 속에서 동일한 것으로 표현되는데 비해, 불변성은 여전히 차이들의 적합한 기준에 부합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론』에서 개체적인 것의 말할수없음<l’ineffabilîté>은, 한 부분으로서 개념의 반복적인 자연을 간직한다 : 만약 어떠한 개념들이 다른 자연을 갖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들은 분명히 적어도 개체적인 것에는 부적합할 것이다. 『물질과 기억』에 있는 일반 관념의 이론은 개념과 개체성 사이의 관계들을 녹이기 시작했다. 흐르는 개념들이 그것들을 같은 방향으로 몰아넣는 것이 부각되기 때문이다.
『물질과 기억』과 더불어 『입문』으로부터 『형이상학』으로의 수렴은 사람들이 책들 안에서 철학자의 고유한 제일 개념들을 찾아갈수록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여기서 제일개념은 구조를 재현하는데, 어떤 기예가 이 구조를 흐르는 개념들로 재인하지만, 이 기예는 수학적 예시로서 명료해진다. 첫 번째 사실은, 그래서 『물질과 기억』에서 벩송이 토의의 큰 전개들 중 하나에 대한 인용을 처음으로 제시했다는 것이다. 벩송은 고려된 현상을 규명하지 못한다고 검토한 어떤 견해들을 종종 질책하면서 그렇게 하는데, 이 견해들은 왜 제일 개념이 결정적인 순간에 생산되는지 혹은 특이성의 양상을<une modalité singulière>을 따르는지 설명하는데 성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벩송에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고유한 견해들, 그것들이 마찬가지의 현상을 내보인다는 것이 벩송이 역설한 것이라면, 이러한 질책은 역량이 있다. 이 현상이 개체적인 것을 갖는다는 점에서, 예를 들어 왜 지각작용이 다른 순간이 아닌 그 순간에 감응<affection>으로 변조되는지, 왜 추억만이 “이것이 아닌 저것을” 의식에 등장하게 하는지 설명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래서『물질과 기억』은 전제하기를, 개체적인 것은 개념화작용의 대상일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 사실은, 벩송이 그의 사유에 대한 어떠한 중요한 반추로서, 개념들을 세공하는데, 이 개념들이, 이 검토에서, 제기하는 것이 그가 1903년 미적분 개념으로 재인식하였던 구조와 유사한 구조라는 것이다. 이 개념들이 차이들의 적합한 척도에 상응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순수지각의 이론은 정도의 단순한 차이가 감응에서 지각을 나누어 놓는다는 생각을 알아차리기를 요청한다 : 이렇지 않고, 지각이 내적 상태들의 투사이고 세계에 대한 인간의 비매개적인 현전은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지각과 감응 사이 자연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더는 단순하게 확신하지 않을 것이다 : 사람들은 이러한 가정 안에서, 흥분<excitant>의 강도가 증가할 때 어떠한 순간에 지각은 감응이 되기 때문에 더는 이 차이를 파악하지 못한다. 과도하게 고립되어있는 자연의 차이, 정도의 차이는 모든 사실들을 규명할 만큼 지각과 감응을 충분하게 구별하게는 못한다. 벩송은 여기에서 지각의 개념을 바라는데, 이를테면 이 지각의 개념은 정도의 차이와 어떠한 값을 위해 자연의 변화를 유발할 수 있는 차이를 한 번에 묶는다 : 또한, 무한소의 거리에 의해 A로부터 나뉜, B 지점에서 사람들은 항상 탄젠트의 기울기가 상쇄되는 것을 안다. 그래서 벩송을 따르면 지각은 순이론<la spéculation>의 질서를 제시하지 않는다. 지각은 작동<action>의 질서를 제시한다. 말하기를, 순이론의 질서는 오직 잠재적으로만 작동과 연관된다. 말하자면, 대상은 항상 우리 몸체의 어떠한 거리 안에 있다 : 만약 거리를 상쇄한다면, 만약 대상과 몸체를 접촉할만큼 진입하게 한다면, 단순하게 이 동작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로 동작하여야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실재 작동의 요구는 지각 안에서는 더는 표현되지 않는다. 이 요구는, 사물과 주체의 거리의 상쇄를 통해 정밀하게 촉발된, 감응에 상응한다. 이러한 학설은 벩송을 따르면 지각과 감응 사이 관계를 통해 제시된 이중의 문제를 해소한다 : 왜냐하면, 그것들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저것으로 변조되기 때문에, 그리고 왜냐하면 이 변조작용이 결정적 순간이라는 점 때문에, 그리고 어떠한 값의 무한소적인 변형이기에, 이 학설은 설명된다. 지각의 개념은 가능한 작동의 방식으로서 흐르는 개념들의 범주에 잘 들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분석의 다른 축으로, 벩송은 추억 이론을 세공하여 제시한다. 이 이론은 유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게 한다. 결국, 현재와 연관된 과거의 초월성<la transcendance>을 확보하려, 감성에서 추억을 떨어뜨려 놓으려는 것을 문제 삼게 된다 : 그 강도가 감소할 때 감성이 추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아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추억이 작동할 때마다 감성이 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무시하지 않아야 했다. 또한 여기에서 실재화<la réalisation>의 흐르는 개념만이 난점의 모든 측면들을 나타나게 한다. 만약 사람들이 추억의 실재화가 동적인 보조<adjuvants>와 묶인다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그 자체로 태어나는 감성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 실재화가 그 작동화의 끝에서 감성을 생성할 수 있다고 이해하게 된다 : “추억의 진전은 바로 ... 체화하기<se materialiser>에 있다” 순수 추억들에 대한 동적인 실재화의 관념은<notion> 마찬가지로 흐르는 개념이다.
『물질과 기억』으로부터 벩송은 개념들의 두 범주가 존재한다는 결론 내릴 당위성을 얻게 된다. 여기에서 다른 하나가 이 비판들을 모면하게는 될 지라도,『시론』에서 정식화한 비판들의 타격을 받으면서 이 중 하나가 떨어져나가게 된다. 다양한 대상들에 직선으로 뻗어나가는<raide> 개념이 적용되면서, 사람들은 이러한 대상들이 서로 동일하며 그들의 개체성이 달아나게 내버려 둔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대조적으로 사람들은 흐르는 개념을 이용하면서, 다른 두 대상조차도 그것들의 차이 속에서 알게 된다. 왜냐하면 흐르는 개념은 이 개념이 부여하는 대상들에 따라 그 자체로 변조하는 방법들을 전개하기 때문이다. 이를 따르면 개체적인 것은 항상 말할수없는것<ifeffable>인,『시론』의 경직된 결론에서, 이 숙고의 발화점이 치워지지 않았다면, 벩송은, 사람들이 제시하는 개념들의 성질에 따라 개체적인 것은 기능할 수 있을 수도 있고, 발화될 수 없을 수도 있다는 주장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정확하게, 벩송은 공간을 개념적인 것과 접근시키면서, 지속을 개체적인 것에 접근시키면서,『시론』이 첫 번째인 공간과 두 번째인 지속 사이에 확립한 분절된 대립을, 기피한 것이 아니라면 약화되게 만들었다. 그가 우선 개체로 만들었던 영역적 개념을 거부하지 않게 되었다 : 그는 여전히 모든 다른 영역들로 부터 명료하게 떨어뜨려놓으면서도, 한 영역이 아니라, 그가 주의를 기울였던 모든 영역들 속에 있는 개체성의 문제들을 발견한다. 흐르는 개념의 발견들과 마찬가지로 일반 관념의 이론이 그에게 가르쳐준 것은 개념과 개체를 나누어 취급할 수 있는 것만이 아니라, 개체와 개념이 보존되는 관계들에 대한 조명으로서 개체와 개념을 연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단락구분
La transrégio-nalité, 27.
말브랑슈가 확신했던 것처럼, 우리의 생각이 우리에게 저항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벩송주의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시론』이 존재의 두 영역들 속에 대상의 거주지를 할당하면서 그 대상에 과하게 부과하는 특질들에, 개체의 관념<notion>은 일종의 저항으로 맞선다는 것이다. 마치 이러한 관념이 통영역적<transrégio-nalité> 특질을 명확하게 다시 알아보자 요청하는 것처럼 모든 일이 일어난다 : 만약 그것이 제기된 영역이 어떤 영역이든, 이로 인해 모든 개념이 영구하게 종속되는 일에 이 [개체의] 관념이 적용된다면, 이 [개체의] 관념은 이 [통역역적] 성질을 드러내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최소한 일반적인 랑가주의 평면 위에서, 이는 개체가 개념이 대상을 위해 제시되는 것이라는 말이면서도 개체가 개념이 대상화에 전혀 성공하지 못한 것이라는 말과 같다. 그래서 만약 서로에게 외재적이지만 각각이 묶인, 적어도 개체가 항상 있다면, 벩송의 개체성의 작동작용에 오직 호의만을 갖는 영역을 경계지으려는 노력이 좌초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결론 내리기 위해, 이러한 종류의 좌초가 벩송주의에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고찰할 것이다 ; 이와 같은 것이다. 사람들이 개체적인 것으로 영역적인 개념을 형성할 때마다 이 좌초는 생산된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사람들이 『시론』의 학설과 동떨어진 세 번째 학설에서도, 합쳐져 있는 이 좌초의 조건들을 발견한다는 것은 강조할만 하다 : 왜냐하면 이 학설은 작동의 문제들로 향하지, 인식의 문제로 향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학설은 『시론』에서 개체적인 것에 영향을 미쳤던 긍정적인 계수un coefficient positif를 부정적인 계수un coefficient négatif로 대체하기 때문이다. 마침내 이 학설이 벩송을 통해서 가장 투사다운 철학자들로부터 창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질들에서, 사람들은 아마도 칸트주의자의 도덕을 다시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칸트주의자의 도덕은 개체적인 것, 그러니까 한편 병리학적이고 인식가능한 것과, 합리적인 것, 그러니까 다른 한편 윤리적이고 보편적인 사이에 건립된 것 아닌가? 사람들은 여기에서 그리하여 이 작품에서 한 생각을 제기하는 개체적인 것의 영역적 관념<notion>을 발견할 것인데, 이는 순수이성비판의 가르침과 부합하는 것이다. 이 생각은 개체적인 것은 아마도 오직 직관 소위 감각적인 것 안에서만이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이다. 도덕 의식은 심리학적 의식에 대한 반대항을 통해서 정의되고, 도덕성의 접속은 엄격하게 그것의 반대편으로서 의식에 대한 개체적인 내용의 거부로 가정된다. 속일 수 있는 권리에 대한 소논문<l’opuscule sur le droit de mentir>에서만큼 더 이러한 바가 분명한 곳은 없다 : 독자적인 개체들을 원인으로 하여 결정되고 놓이는 상황과 문제는 어떤 측면들을 통하여 연관 맺게 되는데, 이 측면들의 모든 것들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제시된 물음의 용어들을 만들면서만 칸트의 형식주의는 판단하는데에 성공한다. 사람들은 살인자를 쫓는 남자가 찾은 피난처에서, 살인자가 있는 장소를 조사해야 하는지 묻는다 ; 칸트는 이해한다. 그리고 다른 것들은 이해할 수 없다 : 이성적인 존재는 이성적인 존재에게 진실해야 하는가? 칸트주의의 존재들의 개체성과 상황들에 대한 무관심에 대하여, 그가 겪게 되는 문제인 이러한 변조들 안에서보다 어디에서 더 확실한 표현을 찾을 수 있는가?
그리고 그런데도 칸트주의는 이러한 위상을 유지하는 데에 성공하지 못한다. 그는 개체적인 것을 지각가능한 것으로 그래서 도덕성의 영역으로부터 바깥이며 반대편으로 한정해야 한다<cantonner>고 주장한다 : 개체적인 것의 통영역성<la transrégio-nalité>은 동일한 영역의 내부에 개체적인 것이 재출현<réappartion> 할 때 확인된다. 이러한 재출현이 생산되고, 칸트의 숙고는 실천 이성의 가정들 속에서 난점을 모면하지 못할 만큼 지나치게 엄격하다. 특히 영혼의 불멸성을 고려하자. 헤겔은 비판을 세계에 대한 도덕적 시계(視界)로 만들면서 이 문제를 제기했는데, 칸트는 도덕적 의식이 보편적인 요소들 속에 족히 현시된다는 것, 만약 이 의무가 순수 욕망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효력 있는 현실성의 대상이어야 한다면, 도덕적 의식은 그렇게 누군가의 덜한 도덕적 의식일 수는 없다는 것을 전했다. 도덕성은 개체성의 저편에 거한다. 그러나 개체성을 무한정하게 넘어서자마자 도덕적으로 작동하는 인간에게 이득 같은 것은 없다. 개체성은 도덕성에 무관심한 영역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이것의 반대항 속에서만, 그리고 개체성이 도덕성에 무관심한 것과 연관되어 자리 잡는다는 [개체성과 도덕성의] 차이 안에서만, 저것은 획득되고 증명된다. 이러한 모호성은 도덕적 의식부터 무한까지의 전개들에 대한 사유 속에서 숙고하여 발견된다 : 이러한 전개들은 유한한 존재에게 신이 지각할 수 있는 법으로의 전향을 스스로 작동할 수 있기를 바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재현한다. 이렇지만, 그러나 신은 지각가능하지 않은 성질 때문에 인간에게 숨겨져서 머문다. 이 전향이 단순한 합법성<légalité>의 전개에 있는 도덕성으로부터 이 차원을 분리하기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것이 될지라도 그렇다. 개체적인 것의 행위에 엄격하게 영역적인 자연의 실재성이 있다는 것, 작동의 질서 혹은 인식의 질서 속에 이것이 있다는 것, 이 난점도 한번에 이러한 모호성에서 유래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칸트주의의 강설은 이러한 관점에서 벩송주의 강설과 동일하다. 그들은 모두 두 가지씩을 가르쳐주는데, 이는 전유지<apanage> 안에서 개체적인 것의 영역으로서 정의된 권리가 돌아가는 실재적인 영역이 아니다. 개체적인 것은 탐색되기를, 단번에 우리 개념들의 각각에서이다. 단번에 그것들 중 어떠한 것에서가 아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처럼 개체 관념<notion>의 외연이 실재성을 절단한 영역들의 이것 혹은 저것에서 한계지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개체성은 이러한 영역들 각각 속에서 만날 수 있는 특질이라는 것을, 성과로 알게 된다. 이러한 속성들을 규명하려면 어떻게 이 영역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지금 풀어보려고 시도해야 하는 물음이 바로 이것이다. ●
긴 각주들
원주25. Ibid., p. 138-139; pour plus de précisions, voir I Energie spirituelle (1919),
p. 45~47. Bergson en vient même à présenter cette analyse comme le modèle sur lequel penser certains des grands doublets de sa philosophie.
[우리가 보기에는정신적 삶 가운데 이 특별한측면만이 유일하게 뇌의 활 동 속에 그려질 수 있다. 이 특별한 측면은 사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점점 더 정확하게 기술될 수 있을 것이다. 지각과 감각 능력은 어떠한가? 물질 세계 속에 삽입된 우리의 신체는 자극을 수용해, 그에 적합한 운동으로 응 답해야 한다. 뇌, 더 나아가 뇌-척수 체계 일반은 이 운동을 준비한다. 그 러나 지각은 이 운동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13> 의지 능력은 어떠한가? 신체는 신경계에 수립되어 시동 신호만을 기다리는 특정한 운동기제에 힘입어 의지적 운동을 행사한다. 뇌는 이 신호가, 심지어는 시동이 출발하는 지점이다. 사람들이 의지적 운동을 위치시켰던 롤란도 영역 은 사실 도착한 기차를 이러저러한 선로로 보내는 철도 신호소에 비유 할 수 있다. 혹은 그것은 주어진 외적 자극을 마음대로 선택된 운동 장치 와 소통할 수 있게 해주는 전환 스위치이다. 그러나 운동 기관과 선택 기 관 옆에는 이들과는 다른 것이 있다. 즉 선택 자체가 있다. 마지막으로 사 유는 어떠한가? 우리가사유할 때 혼잣말을 하지 않는 일은 드물다. 사유 를 표현하는 발음 운동을 실제로 행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 운동을 스케치하거나 준비한다. 그리고 그 운동의 일부는 이미 뇌 속에서 그려져야 한 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사유에서 뇌의 기작은 거기에 한정되지 않는다. 내적인 발음 운동이 필수불가결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내적인 발음 운동 뒤에는 더 섬세하고 본질적인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정신의 모든 연이은 방향읗을 상징적으로 지시하는 이 시동적 운동들이다. 심리학자들이 지 금껏 실재적이고 구체적이고 살아 있는 사유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았다 는 점에 주목하자. 사유를 내적으로 관찰하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사 람들이 사유라는 이름하에 일상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사유 자체라기보다 는 이미지들과 관념들을 함께 조합하여 만들어진 인위적 모방물이다. 그 러나 위치를 가지고 운동을 만들 수 없는 것처럼, 이미지를 가지고는, 관 념을 가지고서도 사유를 재구성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관념은 사유의 정지 이다. 관념은사유가 자신의 노정을 계속하는 대신 잠시 멈추거나 자기 자 신에로 되돌아올 때 생겨난다. 마치 장애물을 맞닥뜨린 포탄 속에서 열이 솟아나듯 말이다. 그러나 열이 포탄 속에 미리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관념도 사유의 구성요소가 아니다. 예컨대 내가 조금 전에 “열이 포탄 속 에서 생겨난다[열이 포탄 속에서 자신을 생산한다]”는 문장으로 표현했던 사유를 열, 생산,포탄이라는 관념을 죽 이어 놓고 “속”과 “자신” 이라는 단어 속에 함축된 내부성네énorité과 재귀성réflexi에의 관념을 삽입하여 재구성하도록 해보라. 당신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첼 것이다. 이 사유는 불가분적 운동이었고 각 단어에 상응하는 관념은 단순히 사유의 운동의 각순간에서 만일 사유가정지했더라면 정신 속에서 생겨났을지도 모르는 표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유는 정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유 의 인위적 재구성을 옆으로 밀어 놓고 사유자체를 고려하라. 당신은 거기 에서 상태보다는 방향을 발견할 것이며, 사유란 본질적으로 내적 방향의 끊임없는 연속적 변화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이 내적 방향의 변화는 외적 방향의 변화로,즉 정신의 움직임을 공간 속에 그려 내고 말하자면 은유적 으로 표현할 수 있는 행동이나 몸짓으로 끊임없이 번역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대개 이렇게 스케치된 운동을,혹은 단순히 준비된 운동을 지각하 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인식하는 데무런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 그 러나 우리가 우리의 사유 가까이 위치해 사유를 생생하게 포착하고 여전 히 생생하게 타인의 영혼 속으로 전달할 때에는 이러한 운동에 주목해야 한다. 필요한 만큼의 단어를 골라내더라도이 단어들이 우리가그를 통해 말하려는 바를 말하기 위해서는,리듬, 구두점,담화의 안무(chorégraphie) 전체 가 단어들을 도와서,일련의 시동적 운동에 인도된 독자가 우리 스스로 리는 것과 유사한 사유와 감정의 곡선을 그리도록 만#어야 한다. 글쓰기 의 기예 전체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음악가의 기예와 비슷한 것이다. 그 러나 혼히 오해되둣 이런 운율이 단순히 청각에 호소하는 것이라고 생각 하지 말라. 아무리 음악에 익숙하다 해도 외국인의 귀는 우리가 음악적이 라고 느끼는 프랑스어 산문과 그렇지 않은 산문사이의 차이,그리고 프랑 스어로 완벽히 쓰인 것과 단지 대략적으로만 그런 것 사이의 차이를 알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운율이 소리의 물질적 조화와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명백한 증거이다. 실로 문필가의 기예는 무엇보다도 그가 단어 를 사용하고 있음을 잊게 만드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가 추구하는 조화 는정신의 움직임과말의 움직임 사이의 특정한상응, 그의 사유의 파동이 문장을 통해 우리의 사유로 전달되어 개별적으로 취해진 각각의 단어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상응이다. 여기 존재하는 것은 단 지 단어를 가로질러 움직이는 의미일 뿐이고,매개 없이 서로 일치하여 직접적으로 공명하는 둣 보이는 두 정신일 뿐이다. 따라서 말의 리듬이 갖는 목적은 사유의 리듬을 재생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사유의 리듬은,사유에 수반되는 거의 무의식적인 시동적 운동의 리듬이 아니라면 무엇일 수 있 겠는가? 사유를 행동으로 외재화시키는 이 운동은 뇌 속에 준비되어, 말 하자면 미리 이루어져야한다. 우리가 작동 중인 뇌 속을 꿰뚫어볼 수 있다해도,우리가포착하는 것은사유자체가아니라사유의 이러 한 운동적 수반물일 것이다.]정신적 에너지. 54~57.
Ainsi :
1° Le rapport du sens aux lettres permet de se représenter le rapport entre
intuition du moi et concepts (la Pensée et le Mouvant, p. 191-194), entre mouvement et positions (ibid, p. 204), ou entre vital et géométrique (l'Evolution créatrice, p. 210-211);
[기하학적 질서. 물론 수학의 경탄할 만한 질서와 그것이 다루는 대상들의 완벽한 조화. 수와 도형들에 내재하는 논리. 동일한 주제에 대해 우리 의 추론이 아무리 다양하고 복잡하더라도 언제나 같은 결론에 도 달하는 확실성을 생각할 때. 사람들은 그처럼 긍정적인 외양을 가진 속성들 속에서 부정의 체계système de négations를 보는 것 그리고 진정한 실재성의 현존보다는 부재를 보는 것을 주저하 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질서를 확신하고 그것을 찬양하는 우리의 지성이 자신의 대상이 지닌 물질성과 공간성에 이르는 바 로 그 운동의 방향을 향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지성이 자 신의 대상을 분석하면서 그것을 복잡하게 하면 할수록 거기서 발 견되는 질서도 더욱 복잡해진다. 그리고 이러한 질서와 복잡•화는 지성과 같은 방향에 속하므로 지성에게는 필연적으로 긍정적 실재인 것처럼 보인다.
어느 시인이 내게 자신의 시를 읽어 줄 때 나는 그것에 충분히 관심을 가지고 그의 생각 속에 들어가서 그의 감정 속에 빠져들 고 그가 구절과 단어들로 흩뜨려 놓은 단순한 상태를 다시 체험 할 수 있다. 그 때 나는 그의 영감에 공감한다. 나는 그것을 영감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불가분의 행위인 연속적 운동에 의해 좇는 다. 이제 내가 주의를 늦추고 내 안에서 긴장된 것을 이완시키기 만 하면 그 때까지 의미 속에 잠겨 있던 소리들은 나에게 그 물철 성 속에서 하나하나 구별되어 나타난다. 나는 여기에 아무것도 덧붙일 것이 없다. 무언가를 삭제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내가 자 신을 그대로 내버려 둠에 따라 연속적인 소리들은 그만큼 더 개 별화될 것이다. 구절들이 단어들로 분해되둣이 단어들은 음절들 로 끊어져서 차궤로 지각될 것이다. 꿈의 방향으로 더 멀리 나가 보자22> [이번에는〕문자들이 서로 구분되고 상상의 종이 위에서 얽혀 열지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 때 나는〔문자들의〕정 확한 교착, 그 행렬의 놀라운 질서. 그리고 문자들이 음절에, 음절 들이 단어에. 단어들이 구절에 정확히 끼워 맞춰지는 것을 보고 감탄할 것이다. 그 이완이라는 부정적 방향으로 더 나아갈수록 나는 더 많은 연장과 복잡성을 창조할 것이다. 한편 복잡성이 증 가할수록. 그 요소들을 계속 확고하게 지배하는 질서는 나에게 더욱 놀랍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복잡성과 연장은 내게 아무런 적극적인 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것들은 의지의 결핍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복잡성과 더불어 질서가 증가함에 틀림없는데. 그것은 질서가 복잡성의 한 측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부분들을 불가분적 전체 속에서 상징적으 로 파악할수록 부분들 간의 관계들의 수는 필연적으로 증가한다. 왜냐하면 실재 전체의 그와 같은 불가분성은 다수의 요소들을 개 관하고 있는데. 그것은 주의가 산만해질수록 더욱더 상징적인 다 수의 요소들로 분해되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비교를 함으로써 우리는 적극적 실재의 동일한 억압과 어떤 근원적 운동의 동일한 역전이. 공간 내의 연장과 수학이 거기서 발견하는 놀라운 질서 를 동시에 만들어 낼 수 있음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아마도 두 경 우에 이런 차이는 있을 것이다. 즉, 단어들과 문자들은 인류의 적 극적 노력에 의해 발명된 것인 반면. 공간은 마치 두 항이 일단 주 어지면 뻘셈으로부터 그 나머지가 나오듯이. 자동으로 생겨난다 는 것이다.23》그러나 양자의 경우에서 부분들의 무한한 복잡화와 그것들 사이의 완벽한 조화는 사실상 하나의 중단interruption, 즉 적극적 실재의 감소diminution라고 할 수 있는 역전invereion에 의해 단번에 만들어진다.
우리 지성의 모든 조작은 기하학이 그러한 조작의 최종적 완성인 것처럼 기하학을 향하고 있다. 그러나 기하학은 지성의 조작 에 반드시 선행하기 때문에(지성의 조작은 공간을 재구성하는 데 이 료지는 않을 것이고. 그것을 주어진 것으로 전제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 지성의 커다란 탄력이자 그것을 작동하게 해주는 것은 명백 히 우리의 공간 표상에 내재하는 잠재적 기하학이다.] 창조적 진화. 314~318.
2° Le rapport du sens aux mots permet de se représenter la création philosophique (la Pensée et le Mouvant, p. 133-134) et le rapport de la Vie en général aux vivants (l'Evolution créatrice, p. 259). Le point culminant de cette réhabilitation du langage est sans doute atteint quand l'Energie spirituelle (p. 56-57)’ et la Pensée et le Mouvant (p. 80) décrivent la vie intérieure, la durée elle-même ! comme une phrase sans coupure. 26. La Pensée et le Mouvant, p. 188 et p. 212-215.
[따라서 생명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아주 다른 외적인 국면을 떨 수도 있었으며 그것과 아주 다른 형태를 그릴 수도 있었 다고 생각된다. 다른 화학물질을 가지고 있고 다른 물리적 조건에서라면〔생명의〕 충동은 같은 것으로 남아 있다고 해도 도중에 아주 다르게 분기되었을 것이며 전체로서 아주 다른 길을 밟았을 수도 있다. 〔생명은〕그 길을 어쩌면 더 적게 갔을 수도 있고 더 많이 갔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여하튼 생명의 전체 계열 중에서 그 어느 항도 지금의 그것과는 같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그 계 열과 항들이 반드시 있어야만 했을까? 어째서 단일한 약동과 무 한히 진화하는 단일한 신체에 새겨지지 않았을까?
이러한 의문은 아마도 생명을 하나의 약동과 비교할 때 제기될 것이다. 생명은 약동에 비교되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물리적 세 계에서 빌려올 경우 생명의 관념을 더 근사적으로 부여할 수 있 는 이미지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생명은 심리적 질서에 속하 며. 모호한 복수성을 상호침투하는 항들로 감싸는 것이 심적인 것의 본질이다. 명백한 복수성은 공간 속에서 그리고 오직 공간 속에서만 의문의 여지없이 가능하다. 거기서 한 점은 다른 점에 절대적으로 외적이다. 그러나 순수하고 비어 있는 단일성도 역시 공간 속에서만 나타난다. 그것은 수학적 점의 단일성이다. 단일 성과 추상적 복수성은 공간의 규정들 또는 지성의 범주들이라고 원하는 대로 부를 수 있다. 공간성과 지성성은 서로 모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리적 본성에 속하는 것은 공간에 정확하게 적 용될 수 없고 지성의 틀 속으로도 완벽하게 들어올 수 없다. 나의 인격은 주어진 한 순간에 하나인가. 다수인가? 내가 그것을 하나 라고 선언하면 나의 개별성을 공유하는 감각. 감정. 표상들의 내 적 목소리들이 들고 일어나서 항의한다. 그러나 내가 내 인격을 다수라고 선언하면 내 의식도 마찬가지로 강력하게 반발한다. 의 식은 내 감각. 감정. 사유는 내가 나 자신에 대해 행하는 추상들이 며 내 각각의 상태는 다른 모든 상태를 함축한다고 주장한다. 따 라서 나는—물론 지성의 언어를 채택해야 하는데 그것은 지성 만이 언어를 갖기 때문이다-----복수적 단일성 unité multiple이 자 단일한 복수성 multiplicité une이다.<44.우리는 이 점을「형이상학 입문」이라고 명명된 논문에서 전개시킨 바 있 다. 형이상학과 도덕 잡지 Revue de métaphysique et de morale, janvier 1903. pp.1-25(역주----이 논문은 후에『사유와 le mouvants 안에 수록되었다.> 그러나 단일성과 복수성은 지성이 자신의 범주들을 내게 고집하여 내 인격에 대해 취 하는 외관들vues에 불과하다. 나는 단일성에도 복수성에도 속하지 않고 둘 다에도 속하지 않는다. 비록 그 두 가지가 결합하면 내 가 나 자신의 심층에서 발견하는 이러한 상호침투와 연속성에 대 해 근사적인 모방을 제공할 수 있다고 해도 그러하다. 그러한 것 이 나의 내적 삶이며 또한 생명 일반이기도 하다. 생명은 물질과의 접촉에서 충동이나 약동에 비교되지만 그 자체로 고찰되었을 때는 막대한 잠재성virtualité이며 수천의 경향들의 상호 침투이다. 그러나〔물론〕그 경향들이〈수천으로〉되는 것은 일단 상호관계에 있어서 서로 외재화된 다음. 즉 공간화된 다음이다. 물질과의 접촉 은 이러한 분리를 결정한다. 물질은 단지 잠재적으로 다수였던 것 을 실제적으로 분할하며 이런 의미에서 개체화는 부분적으로는 물 질의 작품이고 부분적으로는 생명이 자신 안에 포함하는 것의 결 과이다. 그와 같이 시적 감정이 분명한 절들과 분명한 구로. 분명 한 단어들로 명시화될 때. 사람들은 그 감정이 이러한 개체화된 요 소들의 다수성을 포함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다수성을 만들어 내는 것은 언어의 물질성이다.
그러나 시 전체를 이루는 단순한 영감이 단어들과 구. 절들을 관통하면서 흐르고 있다. 생명은 그와 같이 분리된 개체들 사이 에서 여전히 순환하고 있다. 개체화되는 경향은 도처에서 그와 결합하려는 적대적이고 상보적인 경향에 의해 도전을 받는 동시 에 완성된다. 마치 생명의 복수적 multiple 단일성은 복수성 multiplicité 의 방향으로 끌려가면 그만큼 더 자신 위로 움츠러드는 노 력을 하는 것 같다. 부분은 분리되기만 하면 전체는 아니라 해도 자신과 가장 가까운 것과 결합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로부터 생 명의 전체 영역에서 개체화와 연합 사이에 동요가 일어난다. 개 체들은 사회 안에서 병렬되지만 갓 형성된 사회는 병렬된 개체들을 새로운 유기체 속에 용해시키려 한다. 그러면 사회는 그 자신 이 하나의 개체가 되고 이번에는 이 개체가 새로운 연합의 일부 가 될 수 있다. 유기체들의 가장 낮은 단계에서 우리는 이미 진정 한 연합들을 발견한다. 그것들은 세균취락 colonies microbiennes인데, 그 연합들 속에는 최근의 연구를 신뢰할 것 같으면 핵의 구성에 의한 개체화의 경향이 있다고 한다.45> 좀 더 상위 단 계에서도 같은 경향이 재발견된다. 원생식물들은 일단 분열에 의 해 모세포에서 나온 후에는 자신들의 표면을 둘러싸는 젤라틴 물 질에 의해 서로 결합된 채로 남아 있다. 마찬가지로 원생생물들 도 위족을 서로 혼합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결국 상호 접합하게 된다. 고등 유기체들의 기원에 관한 이른바〈취락 이론théories coloniales〉도 알려져 있다.46》〔그에 따르면〕단세포로 구성된 원생생물들이 병렬되어 집단을 형성하고 이 집단들이 이번에는 서 로 접근하면서 집단들의 집단을 만들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서 점점 복잡하고 또한 점점 분화된 유기체들이 갓 분화된 기본적인 유기체들의 연합으로부터 생겨날지도 모른다.47》이런 극단적인 형태 아래서 그 주장은 심한 반론을 불러일으켰다. 다생물polyzoime은 예외적이고 비정상적이라는 생각이 점점 더 유력해지는 것처럼 보인다거 그러나 사태가 진행되는 양상은 마치 고등 유기체가 일을 상호 분담하는 세포들의 연합으로부터 나온 것처럼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세포들이 연합association하여 개체를 만든 것이 아님은 거의 확실한 것 같다. 오히려 개체가 분 열 dissociation에 의해 세포들을 만든 것이다.49》 그러나 이 생각 자체가 우리에게 개체의 발생에 사회적 형식이라는 강박관념이 작용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마치 개체는 자신의 구성물질을 요소 들로 분리한다는 조건에서만 발생될 수 있는 것 같다. 이 요소들 은 자체로서 개체성의 외양을 지니며 사회성의 외양에 의해 상호 결합되어 있다. 자연이 이 두 형식 사이에서 주저하며 사회를 만 들 것인가. 개체를 만들 것인가 자문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는 많다. 그 때 양쪽의 균형을 한쪽으로 기울게 하기 위해서는 아주 가벼운 충동만으로도 족하다. 가령 나괄벌레와 같이 상당히 부피 가 큰 적충을 잡아 각각 핵을 포함하는 두 쪽으로 나누면 두 개의 반쪽 각각은 독립된 나팔벌레로 재생한다. 그러나 만약 그것을 불완전하게 나누어 두 개의 반쪽들 사이에서 원형질이 소통하도 록 두면 그것들이 양쪽에서 완전히 상호 협조적인 운동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여기서 생명이 사회적 형식을 띠는 가 개체적 형식을 띠는가는 한 가닥의 실이 연결되었는가 끊어졌 는가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처럼 단세포로 이루어진 초보적 유기체에서 우리는 이미 전체의 외관상의 개체성은 결정되지 않은 non défini 예 잠재적 개체성들이 잠재적으로 연합되어 구성된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러나 생물 계열의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까지 동일한 법칙이 나타난다. 우리가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 써 의미하는 바는 그것이다. 즉 단일성과 다수성은 무기물질의 범주들이며 생명의 약동은 순수한 단일성도 다수성도 아니라는 것. 그리고 생명의 약동이 물질에 전달되어 둘 중 하나를 선택하 도록 강요받게 되어도 그 선택은 결코 결정적인 것이 아니리라는 것이다. 약동은 전자에서 후자로 무한히 도약할 것이다. 그러므 로 개체성과 연합이라는 두 방향으로 진행되는 생명의 진화는 전 혀 우연적인 요인을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생명의 본질 자체에 기인하는 것이다.]창조적 진화. 383~388.
[기억은 어디에 보존되는가? 그런데 뇌가 기억을 축적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면,기억은 어디에 보존되 는가? 사실을 말하자면,나는 더 이상 물체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닐 때에 도 여전히 ‘어디에’라는 물음이 의미를 가질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 사진 필름은 통 속에 보존되고^ 축음기 음반은 칸막이 선반 속에 보존된다. 그 러나 기억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사물이 아닌데 왜 용기«틀 필요로 할 것인가? 기억이 어떻게 그런 용기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당 신이 이를 계속해서 고집한다면, 나는 기억을 담는 용기라는 관념을,그러 나 순전히 은유적인 의미에서,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기억은 그저 정신 속에 담겨 있다고 답할 것이다. 나는 가설을 세우는 것도 아니고,신 비스러운 실체를 거론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저 관찰에 그치는 것이다. 의식보다 더 직접적으로 주어지고 더 명백히 실재적인 것은 없으며,인간 적 정신이란 의식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식은 무엇보다도 기억을 의미한다. 지금 나는 당신과 이야기하고 있으며, “이야기”라는 단어를 발 음하고 있다. 내 의식이 단번에 이 단어를 표상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 렇지 않으면,의식은 이 단어를 단일한 단어로 여기지 않을 것이고 이 단어에 하나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 단어의 마지 막 음절을 발음할 때, 앞의 두 음절은 이미 발음되었다.•그 두 음절은 마지 막 음절에 대해 과거에 속하는 것이고, 마지막 음절은 현재에 속하는 것으 로불려야 할것이다. 그러나나는 이 마지막음절 “기”를순식간에 발음한 것이 아니다. 아무리 짧더라도 내가 그 소리를 내는 데 들인 시간은 부분 들로 나뉠 수 있고, 이 부분들은 그 부분들 가운데 마지막 부분과 관련하 여 과거에 속한다. 이 마지막 부분은 확정적인 현재에 속하는 것이었을지 도 모른다. 이 마지막 부분이 또다시 나뇔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더라면 말 이다. 따라서 당신은 아무리 노력해도과거와현재 사이의 경계선을그을 수도, 결과적으로 기억과 의식 사이의 경계선을 그을 수도 없을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내가 “이야기”라는 단어를 발음할 때 나의 정신에는 단 어의 시작과 중간,끝뿐 아니라,선행했던 단어들도,내가 이 문장에서 이 미 발음했던 모든 것들도 현전해 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내 연설의 흐 름을 놓쳐 버렸을 것이다. 이제 연설의 구두점P뙤1^이 달랐다고 해보 자. 그러면 내 문장은 더 일찍 시작할수 있었을 것이다. 예컨대 이 문장은 이전의 문장을 포괄했을 것이고 나의 ‘현재’는 과거 속으로 훨씬 더 팽창 되었을 것이다. 이 추론을 끝까지 밀고 나가 보자*. 나의 연설이 수년간,내 의식의 첫 각성 이래로 쭉 지속되고 있다고, 그것이 단일한 문장으로 계속 되고 있다고,나의 의식이 미래로부터 충분히 떨어지고 행동에 충분히 무 관심해서 문장의 의미를 포착하는 일에만 전념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나는 이 문장의 총괄적보존을설명하기 위해,내가단어 **이 야기”의 마지막 음절을 발음할 때 앞 두 음절이 존속한다는 사실에 대한 설명 이상을 찾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우리의 내적 삶 전체 가의식의 첫번째 각성 시점에서 개시된 단일한문장,쉼표들이 뿌려져 있음에도 어떤 부분도 마침표에 의해 단절되지 않는 문장과 같은 것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나는 우리의 과거 전체가 거기에 있다는 것도 믿는다. 과거 전체는 잠재의식적인…bœasdem_말하자면 우리의 의식이 그것을 밝혀내기 위해 자기 자신으로부터 떠날 필요도 없고,외부로부터 무엇도 덧 붙일 필요가 없는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현전하는—— 것이다. 의식 이 자신이 지닌 모든 것,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자기 자신의 모습 전체를 판명하게 지각하려면,의식은 단지 장애물로부터 멀어지고 베일을 벗기 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이것은 다행스런 장애물이자, 무한히 값진 베일이 다! 뇌는 삶&에 고정된 우리의 주의를 유지하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삶 은 전방을 바라본다. 삶은 과거가 미 래를 해명하고 준비하는 것을 돕는 한 에서만 뒤로 돌아선다. 정신에게 있어 산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수행해야 할 행위에 집중하는 것이다. 따라서 삶은 의식으로부터 행동에 유용한 모 든 것을 끌어내는 운동기제의 매개를 통해 사물들 속에 삽입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광대한 나머지 부분을 어둠 속에 남겨 둔다 해도 말이다. 이것 이 기억의 작업 속에서 뇌가수행하는 역할이다. 뇌는과거를보존하는데 소용되는 것이 아니라,우선은 과거를 은폐하고 그 후에 과거로부터 실천 적으로 유용한 것을 드러내 보이는 역 할을 한다. 그리고 이것이 또한 정신 일반에 대한 뇌의 역할이기도 하다. 뇌는 정신으로부터 운동으로 외재화 될 수 있는 것을 끌어 내고 정신을 이 운동적 틀 속에 삽입함으로써,대부 분의 경우 정신의 시야를 제한하지만또한 정신의 행동을 유효하게 만들 기도 한다. 이것은 정신이 모든 부분에서 뇌를 초과하며,뇌의 활동은 정 신적 활동의 아주 작은 부분에만 대응한다는 말이다.]정신적 에너지. 66~68
원주28. Matière et Mémoire, p. 52-58.//
[이미지와 정념적 감각. 세 번째 논증은 사람들이 공간을 점하는 표상적 상태에서 비 연장적인 것처럼 보이는 정념적 상태로 서서히 이행한다는 사실 로부터 도출된다. 거기서부터 사람들은 모든 감각이 자연적이고 필연적으로 비연장적이며, 감각이 연장에 덧붙여지고, 지각의 과정이 내적 상태들의 외재화로 이루어진다고 결론짓는다. 사실 상 심리학자는 자신의 신체로부터 출발하며,이 신체의 주변에 서 받은 인상들이 그에게는 물질적 우주 전체를 재구성하는 데 충분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그는 우주를 우선 자신의 신체로 환원한다. 그러나 이 첫번째 입장은 지탱하기 어렵다. 그의 신체 는 다른 모든 물체들보다 실재성을 더 갖거나 덜 갖는 것도 아니 고,그럴 수도 없다: 따라서 더 나아가 원리의 적용을 끝까지 추 적해야 한다. 그리고 우주를 생명체의 표면으로 축소시킨 후,이 신체 자체를 사람들이 결국 비연장적이라고 가정할 하나의 중심 으로 수축시켜야만 한다. 그 때 사람들은 이 중심으로부터 비연 장적인 감각들을 나오게 할 것이고,이 비연장적 감각들은, 말하자면 부풀어서 연장으로 가득차고,마침내 연장된 우리 신체를 먼저 낳고, 그 다음에는 다른 모든 물질적 대상들을 낳을 것이 다. 그러나 만일 연장적 이미지들과 비연장적 관념들 사이에 정 념적 상태들이라는 다소 혼란스럽게 위치한 일련의 매개적인 상태들이 있다면,이 이상한 가정은 불가능할지 모른다. 우리의 지 성은 자신의 습관적인 착각에 굴복하여,하나의 사물은 연장적 이거나 연장적이 아니라는 딜레마를 제기한다. 정념적 상태는 연장적 특성을 모호하게 띠고 있으며, 불완전하게 위치하고 있 기 때문에,거기서부터 우리 지성은 이 상태가 절대적으로 비연 장적이라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그 경우 연장의 잇따르는 단계 들과 연장 그 자체는 비연장적 상태로부터 획득된,내가 모르는 어떤 속성에 의해서 설명될 것이다. 외각의 역사는 내적이고 비 연장적인 상태들이 연장적이 되어 밖으로 투사되는 역사가 될 것이다. 이 논증을 다른 형태로 놓아보면 어떨까? 우리 신체 위 에서 대상의 작용을 증가시킴으로써 정념이 되고, 더욱 특별하 게는 고통이 될 수 없는 지각이란 별로 없다. 사람들이 바늘의 접촉으로부터 찔린 자국으로 보이지 않게 이행할 때가 그러하 다. 역으로 고통의 감소는 차츰 그 원인의 지각과 일치하고, 말 하자면 표상으로 외재화된다. 따라서 정념과 지각 사이에 본성 의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정 념은 나의 개인적인 실존과 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실상 그 것을 느끼는 주체로부터 분리된 고통이란 무엇이 되겠는가? 따 라서 지각에 대해서도 사정은 같아야 하고,외적 지각은 무해하 게 된 정념을 공간 속에 투사하는 것으로 구성되어야만 하는 것 처럼 보인다. 실재론자들과 관념론자들은 이런 방식으로 추론하는 데 동의한다. 관념론자들은 물월적 우주 속에서 주관적이고 비 연장적인 상태들의 종합 이외에 다른 것을 보지 않는다. 실재 론자들은 이 종합 뒤에 그것에 상응하는 독립적인 실재가 있다 고 덧붙인다. 그러나 실재론자들이건 관념론자들이건 정념에서 〔객관 세계의〕표상으로 점진적인 이행이 가능하다고 봄으로써, 물질적 우주의 표상이 상대적이고 주관적이라고,말하자면 우리 가 우주의 표상으로부터 먼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표상이 우리 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정확한 사실에 대한 이론의 여지가 많은 이 해석을 비판하기에 앞서,이 해석이 고통의 본성도 지각의 본성도 설명할수 없으며,심지어 그것들을 조명하는 일조차 성공할 수 없다는 것 을 보여주도록 하자. 나라는 개인에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내가 없어지면 사라져 버릴 정념적 상태들이,단지 강도의 감소라는 효과에 의해서 외연을 획득하게 되고 공간 속에 결정된 자리를 잡게 되며, 자기 자신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언제나 일 치하는 안정된 경험을 구성하게 된다는 것, 이런 사실들을 사람 들이 우리에게 이해시키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무엇을 하든 사람들은 감각들에 어떤 형태로든 우선 연장을 되돌려주고,다음에는 그것이 없이 지내기를 바라면서도 거기에 독립성 을 되돌려주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정념은 이 가설 속 에서 결코 표상보다 더 명백한 것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이 정념들이 어떻게 강도를 감소시킴으로써 표상이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면,처음에 지각으로 주어졌던 동일한 현상이 어떻게 강 도의 증가에 의해서 정념이 되는지는 더욱 이해할 수 없기 때문 이다. 고통 속에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어떤 것이 있는데,사람 들은 어떤 철학자들과 더불어 그것이 혼란된 표상으로 이루어진 다고 말함으로써,이를 잘못 설명하고 있다.17> 그러나 거기에 원 칙적인 어려움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자극요인의 점진적인 증가가 결국 지각을 고통으로 변형시킨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이 변형이 어떤 정확한 순간으로부 터 나타난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왜 다른 순간이 아니고 바로 이 순간인가? 그리고 나는 처음에는 이 현상에 단지 무관심한 관망자에 불과했는데,그것이 나로 하여금 갑자기 생생한 관심 을 갖게 한 특별한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도대체 이 가설에서 왜 현상 속의 강도의 감소가 어떤 특정한 순간에 그것에게 연장 과 명백한 독립성을 가질 권리를 부여하는지도 파악할 수 없고, 또한 어떻게 강도의 증가가 다른 순간이 아니라 이 순간에 사람 들이 고통이라고 부르는 적극적 작용의 근원인 이 새로운 속성 을 산출하는지도 파악할 수 없다.
정념적 감각의 본성. 이제 우리의 가설로 되돌아와서 어떻게 정념이 정해진 한순간에 이미지로부터 나타날 수밖에 없는지를surgir 보여주도록하자. 우리는 또한 사람들이 어떻게 연장을 점하고 있는 지각으 로부터 그들이 비연장적이라 생각하는 정념으로 이행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고통의 실제 의미에 관해 어느 정도 예 비적인 언급을 해 둘 필요가 있다.
낯선 물체가 아메바의 위족들 중 하나에 닿을 때,이 위족은 수축된다. 따라서 원형질 덩어리의 각 부분은 자극을 받고 동시 에 자극에 반작용할 수 있다. 여기서 지각과 운동은 수축성contractilité 이라는 유일한 속성 안에서 뒤섞인다. 그러나 유기체가 복잡해짐에 따라 작업은 분할되고,기능들은 분화되며,이렇게 구성된 해부학적 요소들은 자신들의 독립성을 잃게 된다. 우리 와 같은 유기체에서 이른바 감각 섬유들은 오로지 자극을 하나 의 중심 지역에 전달하는 일을 맡고 있으며,이 중심 지역으로부 터 진동은 운동적 요소들로 퍼져나갈 것이다. 따라서 감각 섬유 들은 신체 전체의 이동에 전진 파수병 sentinelle avancée의 자격으로 협조하기 위하여 개별적인 작용을 포기했던 것처럼 보인 다. 그러나 그래도 역시 그것들은 고립된 채로,유기체를 전체적 으로 위협하는 동일한 파괴의 원인들에 노출되어 있다. 이 유기체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또는 그것와 상해들을 복구하기 위 해서 움직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감각적 요소는 작 업의 분할로 인해 자신의 운명이 된 상대적 부동성을 보존한다. 고통은 이렇게 생겨나는데,그것은 상해당한 요소들이 사태를 제자리로 되돌려놓기 위한 노력,즉 감각 신경 위에서、일어나는 일종의 운동적 경향과 다른 것이 아니다. 따라서 모든 고통은 노 력으로 이루어지며, 더욱이 무익한노력으로 이루어지기 마련이 다. 모든 고통은 국부적/0어/노력이며,바로 이 노력의 고립 자 체가 그것의 무능력의 원인이다. 왜냐하면 유기체는 자신을 이 루는 부분들의 연대성으로 인해,전체의 효과에만 적합하게 되 어 있기 때문이다. 고통이 생명체에 노출된 위험에 절대적으로 불균형적인 것도 역시 노력이 국부적이기 때문이다. 위험은 치 명적이지만, 고통은 가벼울 수 있다. 고통은 견딜 수 없지만(치 통처럼),위험은 대수롭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고통이 개입하는 정확한 순간이 있으며, 그것이 있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유기체 의 손상된 부분이,자극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자극을 거부하는 때이다. 그리고 지각을 정념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은 단지 정 도의 차이가 아니라, 본성의 차이다.
이 사실을 전제하고,우리는 생명체를 그것에 행사된 주변 대상들의 작용이 그 대상들로〔다시〕반사되는 일종의 중심으로 고려하였다. 외적 지각이란 이와 같은 반사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중심은 수학적 점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의 모든 물체들처 럼 자신을 해체하려고 위협하는 외적 원인들의 작용에 노출된 하나의 물체이다. 우리는 방금 그것이 이 원인들의 영향에 저항 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밖으로부터의 작용을 반사하는 데 그 치지는 않는다. 그것은 투쟁하며,그럼으로써 이 작용에서 어떤 것을 흡수한다. 정념의 근원은 거기 있을지 모른다. 따라서 은유 적으로 말해 만일 지각이 신체의 반사하는 능력을 측정한다면, 정념은 신체의 흡수하는 능력을 측정하는 것이라고、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은유에 불과하다. 사태를 더 자세히 검토하여, 정념의 필요성이 지각 자체의 존재로부터 홀러나온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지각은 우리가 이해하는 것처럼 이해된 다면,사물들에 대한 우리의 가능적 행동을 측정하며,따라서 역 으로 우리에 대한 ᅪ물들의 가능적 작용을 측정한다. 신체의 행 동 능력(신경계의 고등한 복잡성에 의해 상징화된)이 크면 클수록, 지각이 포괄하는 장은 더 넓어진다. 따라서 우리의 신체를 지각 된 대상과 분리시키는 거리는 위험이 다소간에 임박했음을,그 리고 약속의 지불기한이 다소간 근접했음을 알려주는 척도이다. 따라서 우리 신체와 구별되는, 어떤 간격에 의해 우리 신체로부 터 분리된,한 대상에 대한 우리의 지각은 가능적 행동 이외에는 결코 표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대상과 우리 신체 사이의 거리 가 감소함에 따라, 달리 말해 위험이 더욱더 긴박해지고,약속은 더욱더 직접적이 됨에 따라,가능적 행동은 더욱더 실제적 행동 으로 변형되려고 한다. 이제 극한으로 가서,거리가0이 된다고, 즉 지각할 대상이 우리 신체와 일치한다고,다시 말해 결국 우리 신체가 지각 대상이 된다고 가정해 보라, 그 때는 이러한 매우 특수한 지각이 표현하게 될 것은 더 이상 잠재적 행동이 아니라 실제적 행동이다. 정념은 바로 이 사실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우 리의 감각과 지각의 관계는 우리 신체의 실제적 작용과 가능적 또는 잠재적 작용의 관계와 같다. 그것의 잠재적 작용은 다른 대상들에 관련되고, 따라서 이 대상들 안에서 그려진다. 우리 신체의 실제적 작용은 신체 자체에 관련되고,따라서 신체에서 그려진다. 그러므로 결국 모든 일이 진행되는 양상은 마치 실제 적이고 잠재적인 작용들이 자신들의 적용점들 또늘 기원점들로 실제로 회귀함으로써,외적 이미지들은 우리 신체에 의해 신체 를 둘러싸고 있는 공간 속에 반사되는 것처럼 보이고, 실제적 작용들은 우리 신체에 의해 그것의 물질성의 내부에 포획된 것 처럼 보인다. 이런 이유로 외적인 것과새적인 것의 공통의 한 계인, 신체의 표면은 지각되는 동시에 감각되는 유일한 연장적 부분이다.] 물질과 기억. 94~102.
원주29. Ibid., p. 150 ; cf. p. 142-145.//
[상상하는 것은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1》아마도 하나의 기억은, 그것이 현실화됨에 따라, 이미지 속에서 살아가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역은 사실이 아니다. 순수하고 단순한 이미지 는,단지 내가 그것을 어둠으로부터 빛으로 이르게 한 연속적 과 정을 따르면서 그것을 과거 속으로 찾으러 갈 때에만,나에게 과 거를 떠올려 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심리학자들이 너무도 자주 잊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상기된 감각은 그것에 무게를 둘수록 더욱 현실적이 된다는 사실로부터, 감각의 기억이 이런 시발적 naissante 감각이었다고 결론짓는다.2》그들이 내세우는 사실은 아마도 정확할 것이다. 내가 지나간 고통을 떠올리려고 노력하 면 할수록, 나는 그것을 더욱 실제적으로 느끼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은 어려움 없이 설명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말한 바 있듯이,기억의 진행과정은 바로 구체화하는se matérialiser것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문제는 고통에 대한 기억이 진실 로 본래 있었던 고통인가를 아는 일이다. 최면에 빠진 사람은, 사람들이 그에게 덤다고 끈질기게 반복하면, 마침내 덥다고 느 낀다. 거기서부터〔최면 상태에서〕암시된 말들이 진정으로 덥 다는 것을 나타낸다고는 할 수 없다. 한 감각의 기억이 연장되어 이 감각 자체가 된다는 사실로부터 그만큼 기억도 하나의 시발적인 감각이었다고 결론지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이 기억은 아 마도, 곧 생겨날〔시발적〕감각과 관련하여,암시를 주는 최면술 사의 역할을 함에 틀림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비판하는 논 중은,이런 형태로는 이미 별로 설득력이 없게 된다. 그것은 아 직은 해로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억은 현실화됨에 따라 변형된다는 의심의 여지없는 사실에 힘입고 있기 때문이 다. 그러나—그들이 위치한 가설에서는 마찬가지로 합법적이 됨에 틀림없을_반대의 길을 따라서 추론할 때,즉 순수 기억 의 강도를 증가시키는 대신에 감각의 강도를 감소시켰을 때 모 순은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 때는 실로 만일 두 상태들이 단지 정도에 의해서만 다르다면, 순간에. 감각이 기억으로 변형 되는 일이 발생해야만 할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커다란 고통의 기억이 단지 미약한 고통에 불과하다면,거꾸로 내가느끼는 강렬한 고통이 약화되면 결국 커다란 고통의 상기가 될 것이다. 그 런데 내가 느끼는 것이 내가 체험하는 미약한 감각인지 아니면 내가 상상하는 미약한 감각인지를 말하는 것이 불가능한 순간이 분명히 도래한다(그리고 이 사실은 자연적인 것이다. 왜니하면 이미 지-기억은 이미 감각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미약한 상태는 결코 나에게 어떤 강렬한 상태의 기억처럼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기억이란 그와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물질과 기억. 233~235.
[사태가 이와 다르게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도 또한 사람들은 판명한 지각과 이미지-기억을 정적인 상태로 고찰한다. 즉 하나가 다른 것이 되는 역동적 진보가 아니라 하나가 다른 것 없 이도 이미 완결될 수 있을 사물처럼 생각한다.
사실상 한편으로 완결된 지각은 단지 우리가 그것 앞으로 던지는 이미지-기억과의 유착에 의해서만 정의되고 구별된다. 주의작용은 바로 이런 대가로 가능한 것이다. 주의작용이 없다면 기계적인 반작용을 동반하는 감각들의 수동적 병렬만이 있게 된 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가 좀더 나중에 보여주겠지만,이미 지-기억 자체는 순수 기억 souvenir pur의 상태로 환원되면 무용한 상태로 머무를 것이다. 이〔순수〕기억은 잠재적virtuel이기 때문에 그것을 끌어당기는 지각에 의해서만 현실화될 수 있다. 또한 무력하기 때문에 자신의 생기와 힘을 자신이 그 안에 서 구체화되는 현재적 감각에서 빌려 온다. 그 사실은 결국 판명한 지각은 대립된 방향의 두 흐름, 즉 외적 대상으로부터 오는 구심적 흐름과 우리가〈순수 기억〉이라고 부르는 것을 출발점으 로 취하는 원심적 흐름에 의해 야기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 닌가? 첫번째 흐름은 그것만을 놓고 볼 때 단지 기계적 반작용을 동반하는 수동적 지각만을 낳을 것이다. 그 자체로 내버려두 면,두 번째 흐름은 현실화된 기억을,즉 이 흐름이 가속화됨에 따라 더욱 현실적이 되는 기억을 낳는 경향이 있다. 이 두 흐름 이 결합하여 만나는 지점에서 그것들은 판명하고 식별된 지각이 된다.
내적인 관찰이 말해 주는 것은 이와 같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서 멈출 권리가 없다. 확실히 충분한 해명을 하지 않으면 기억들 이 뇌에 국재화하고 있다는 모호한 문제들 가운데서 무릅쓰게 될 위험은 커진다. 그러나 우리는 완결된 지각과 이미지-기억을 분리할 경우 병리학적 관찰이 심리학적 분석과 대립하게 되고, 그 결과로 기억들의 국재화 교설에 있어서 심각한 이율배반이 나올지 모른다고 말한 바 있다. 우리는 뇌를 기 억들의 저장소로 간주하지 않을 경우, 기지의 사실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탐구 할 책임이 있다.
잠시 동안,설명을 단순화하기 위해,밖으로부터 오는 자극들이 뇌피질 속에든 아니면 다른 중추들 속에든 요소적인 감각들 을 생저나게 한다는 것을 받아들여 보자. 우리는 거기서 언제나 요소적인 감각들만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사실상 지각들 각각 은 이러한 상당수의 감각들, 즉 모두 함께 공존하거나 특정한 질 서로 놓여진 감각들을 포괄한다. 이 질서는 어디서 비롯되는 것 인가? 그리고 이 공존을 보장하는 것은 무앗인가? 현재적인 물 질적 대상의 경우 그 대답은 의심스럽지 않다. 질서와 공존은 외 적 대상으로부터 인상을 받은 감각 기관들로부터 온다. 이 기관 이 구성된 정확한 목적은 많은 동시적 자극들이 그 기관 표면의 선택된 부분들 위에 동시에 분배되면서 어떤 방식으로 그리고 어떤 질서로 거기에 인상을 새기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거대한 건반에 비유할 수 있는데,그 위에서 외적 대상은 감각 중추 위의 모든 관련된 점들에 상응하는 막대한 수의 요소 적 감각들을 특정한 질서로 단 한 순간에 야기하면서 자신의 화 음을 수천의 음들로 단번에 작동시킨다. 이제 외적 대상이나 감 각 기관,또는 이 둘 모두를 제거해 보라.〔그래도 역시〕동일한 요소적 감각들이 자극될 수 있다. 왜냐하면 [건반의〕동일한 현 (정)들이 같은 방식으로 울릴 준비를 한 채로 거기에 있기 때문 이다. 그러나 현들을 동시에 수천 번을 치게 하고, 그 많은 단순한 음들을 같은 화음으로 통일하게 할 건반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보기에,〈이미지들의 영역〉은 만일 그것이 존재한다면, 이런 종류의 건반과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확실히 순수하게 심 리적인 원인이 관련된 모든 현들을 직접 작동시킨다고 하는 것 도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ᅳ—우리의 관 심을 끌고 있는 유일한 경우인_정신적 청취의 경우 기능의 국 재화는 확실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측두엽의 특정한 상해 가 이 기능을 폐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한편 우리는 이미지들의 잔재가 뇌수질의 어떤 영역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인 정할 수도,심지어 생각할 수조차 없게 만드는 아유들을 제시한 바 있다. 따리서 유일한 가설만이 그럴 듯한 것으로 남는데,그 것은 이 영역이 청각 중추 자체와 관련하여 감각 기관에, 즉 여 기서는 귀에 대칭적인 위치를 점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 정 신적인 귀 oreille mentale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우리가 지적한 모순은 사라진다,한편으로는 상기된 청각적 이미지가 최초의 지각과 동일한 신경 요소들을 진동시킨 다는 것,그리고 기억은 이렇게 해서 점진적으로 지각으로 변형 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 단어와 같은 복합적인 소리를 상기하는 기능은 지각 기능과는 다른 신경 물 질의 부분들과 관련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정신적 난청에서 실제적인 청취기능은 정신적 청취 옆에 살아 남아 있다. 현들은 아직도 거기에 있으며,외부 소리의 영향 아 래 여전히 진동한다. 결핍된 것은 바로 내적인 건반이다.
결국 다시 말하면 요소적 감각들이 생겨나는 중추들은,말하자면 앞에서 그리고 뒤에서 진행되는 두 상이한 측면들에 의해 작동될 수 있디ᅡ 앞에서 중추들은 감각 기관들로부터,따라서 실 제적 대상으로부터 인상들을 받는다. 뒤에서의 중추들은 중개와 중개를 거쳐. 잠재적 대상의 영향을 받는다. 이미지들의 중추들은 만일 그것들이 존재한다면, 이 이 각각-중추들과의-관계에서 단지 감각 기관들의-대칭적-가관이 될 수 있다. 감각 기관이 실제적 대상들의 저장소가 아니듯이,이미지들의 중추들은 더 이상 순수 기억들,즉 잠재적 대상들의 저장소가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한 무한히 축약된 표현이라는 것을 덧붙이도록 하자. 다양한 감각적 실어증들은 한 청 각적 이미지의 상기가 단순한 작용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입중한다. 우리가 순수 기억이라고 부르는 것이 될지도 모를 의도. intention와 이른바 청각적 이미지-기억 사이에 자주 매개적인146기억들이 개입해 들어오는데, 이 기억들은 우선 다소간 멀리 떨 어진 중추들에서 이미지-기억들로 실현되어야만 한다. 그 때 관 념은 잇따르는 단계들을 통해 언어적 이미지라는 이 특별한 이 미지 속에서 구체화된다. 그렇게 해서 정신적 청취는 다양한 중 추들과 그것들로 인도되는 길들 전체에 종속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복잡성들은 사태의 근본에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는다. 개입S 항들의 수와 본성이 어떠하든 간에,우리는 지각에서 관, 념으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관념에서 지각으로 이행한다. 그 리고 식별의 특징적인 과정은 구심적이 아니라 원심적이다.
물론 밖으로부터 오는 자극들이 뇌피질 또는 다른 중추들에 작용함으로써 어떻게 감각들을 생겨나게 하는지를 알아야 할 일 이 남아 있다. 그리고 거기에 편의상의 표현 방식만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순수 기억은 그것이 현실화됨에 따라, 신체 속에 상응 하는 모든 감각들을 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잠재적인 감각들 자체는 실제적이 되기 위해 신체로 하여금 행동하게 하 는 경향이 있고, 자신들이 습관적으로 선행자 역할을 했던 운동 들과 태도들을 신체에 새기는 경향이 있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이른바 감각 중추들의 진동들은,즉 보통은 신체에 의해서 완성 되거나 소묘된 운동들을 선행하는 그리고 이 운동들을 준비하고 시작하는 것을 정상적인 역할로 취하는 진동들은 감각의 진정한 원인이라기보다는 감각의 잠재력의 표식이며 그것의 효율성의 조건이다. 잠재적 이미지가 실현되는 과정은 이 이미지가 신체 로부터 유용한 행동방식들을 얻는 데 이르는 일련의 단계들과 다른 것이 아니다. 이른바 감각 중추들의 자극은 이 단계들의 마 지막 단계이다. 즉 그것은 운동적 반응의 서막이며,공간 속에서 한 행위의 시작이다. 다시 말해서 잠재적 이미지는 잠재적 감각 으로 발전하고,잠재적 감각은 실제적 운동으로 발전한다. 이 운 동은 실현되면서, 그것이 자연적으로 연징:할 감각과 감각과 한 몸이 되려 했던 이미지를 동시에 실현한다. 우리는 이 잠재적 상 태들을 더 깊이 연구할 것이곳,심리적 작용들과 심리-물리적인 작용들의 내적 작동방식 속으로 더 깊이 파고 들어가 어떤 연속 된 과정에 의해서 과거가 현실화되면서 그것의 상실된 영향력을 되찾게 되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물질과 기억. 22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