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천변에서 가까운 오목대 서쪽 기슭 전주 향교 일대는 전주시가 새롭게 조성하고 있는 문화의 공간입니다.
바로 이곳에 전주시와 인접하고 있는 시,군에서 동헌과 고택을 옮겨와 지금의 문화적 공간을 조성할 수 있었다 합니다.
전주 향교 앞에서 출발해 한옥마을 , 오목대, 전동성당, 경기전 등을 둘러 보는 문화탐방을 전주 효자 시니어 클럽에서
문화 해설사로 활동하고 계시는 신 형규, 주세택, 최석호 어르신들의 상세한 설명과 더불어 너무나 유익한 역사를 배우고
돌아 왔습니다.
향교와 동헌인 풍락헌을 둘러 보고 장현식 선생님의 고택을 둘러 보았습니다.
끝없는 지평선이 보이는 전라도 김제에서 전 재산을 독립운동과 교육, 문화 사업에 바친 만석꾼이었고,
일찍이부터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후하게 베풀기로 유명했던 김제군 금구면 서도리 인동 장씨 가문의 장손으로
2대 전북도지사 를 역임했던 일송 장 현식 선생의 고택을 둘러 봅니다.
강직한 성품으로 자신의 재산이 이롭게 쓰이는 것을 원해 독립운동 비밀 결사 대동단에 군영자금을 지원하다
일제에 발각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고 이후 나라를 구할 인재양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각종 문화 , 교육관련 사업에
전 재산을 바치기도 했다. 고대 설립당시 본관 2층 8칸 교실을 도맡아서 짓기도했으며, 동아일보 창간때는
인쇄기 구입비를 기부하기도 했다 합니다.
민족어 보존 사업의 조선어 편찬 사건에도 당시의 거금 3000원을 제공하여 정인승,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선생등과 함께
옥고를 치렀는데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이 그것이다.
많은 독립운동가가 해방 직전에 애매한 입장을 취하기도 했지만 , 장현식 선생은 끝까지 지조를 지켰다.
하지만 1950년 6.25 발발 직후 서울 명륜동 자택에서 납북되어 같은해 10월 평양에서 사망하여 당시 연좌제에
시달려야만 했다고 합니다.
90년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기 까지 힘겨웠지만 한번도 나라를 원망해 본 적이 없다고,
생전 선친은 죄지은게 없는게 무엇이 두렵나며 당당하셨지요
독립이후가 문제라며 인재양성에 주력하셨다고 회고 합니다.
뒤늦게 라도 유공자로 인정이 되어 다행이며 독립운동가의 후예로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장현식 선생님의 장남 장홍씨는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내용출처- 문화해설사님의 설명 참조와 다음 지식 검색 일부 인용함
대대로 덕을 쌓아온 김제의 만석꾼 장현식 선생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전 재산을 바친 인물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고향에 있는 고택마저 관리할 수없을만큼 생활이 어려워져 전주시에 기증한 상태이지요 동헌 풍락헌 옆으로
옮겨온 장현식 고택은 고난의 시기에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꺼이희생한 한 가문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장현식 고택 앞에 있는 돌확 (돌절구) 소가 매일 매일을 돌려서 절구 주변이 마모 되어 있을 정도로 만석꾼 이었다 합니다.
안채로 들어 가 봅니다.
해설사님께서 매우 과학적이고 안채에 생활하는 여인네들의 편리한 동선을 유지하도록 설계되었다는
설명을 덧붙여 주셨답니다.
바깥쪽과 조금 높은 턱을 유지하는 것은 소위 머름이라고 하는 것으로 옛날 아낙네들이 실내에서 속옷차림으로
하인들을 부르거나 바깥을 잠시 내다 볼때 사생활을 보호해주기 위한 배려 라고 합니다.
미닫이와 여닫이가 혼합되어 참으로 편리한 구조로 설계가 되었네요
아래의 사진이 바로 " 머름" 이라는 문턱 입니다.
안쪽에서 걸어 잠그던 걸쇠들이
아낙들의 안전을 보호 하는 지혜가 옅보입니다.
안방으로 가볼까요~~
방창이 높게 설치되어 있어서
여러개가 겹쳐서 빛의 양을 조절하는 역할을 했답니다.
도포나 옷 등의 의복을 걸어 두던 횟대 입니다.
주로 피나무로 제작되어 옻칠을 하여 자수로 만들어진 천으로 멋을 살렸답니다.
전주시는 영빈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내부에 화장실도 설치하고 현대식 온돌장치도 설치 했다지요.
장현식 고택 앞에 위치한 사랑채 ~
전북 임실군 성가리에 살던 진 참봉댁 고택을 옮겨온 것으로 안채는 용인 민속촌 조성시 매각되어 이축 되었고,
이 사랑채는 김봉순씨가 매수하여생활해 오던중 임실군 도시계획에 의해서 철거 예정이던 건물을 전주시가 매수하여
온전히 옮겨 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에도 아무리 재산이 많은 부자여도 대들보 기둥은 사각형을 유지하고 주춧돌 또한 둥근형태를 띠울수 없었다고 합니다.
둥근 단청은 오로지 왕들이 사는 곳 외에는 허가가 불허 했다고 하지요.
대문을 들어서면 일자형 안채와 ㄴ 자형 안채로 구성이 되어 잇습니다.
터가 넉넉치 못해 대청을 축소해 옮겨 지은 장현식 고택은 고택의 표석에는 " 고택" 이라고만 새겨져 있는데..
진정한 독립운동가로 뒤늦게 발굴한 애국지사로서 당연히 " 장현식 고택"으로 불리는 것이 옳다고들 말한다.
전재산을 독립과 후학 양성에 쏟아 부은 지조있는 독립운동가로 고택앞에 흉상을 세워
후대에 널리 알리는 것도 좋다는 의견들이 있다 합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던 당시의 걸출한 인물 ~ 장현식 선생~
문화해설사님으로부터 구구절절 전해 듣는 일대기에 온 몸에서 소름이 끼치는 전율을 느끼는 시간 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