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엽스님이 백성욱 박사에게 쓴 편지
원망스럽던 이가 선지식이었소.
인생의 전환점 된 옛 연인에게 보낸 자유인의 감사글
아아! 한 생각 돌리게 한 당신에게 나는 어떻게 보은(報恩)해야 하오리까.
무념(無念)에 들게 한 은혜는 사랑의 배신과 상쇄되고도
멀리 남는 진리를 몰랐던 지난날을 이 순간 남김없이 청산하였나이다.
이제 나는 보은할만한 완전한 인간이 되기 위하여,
남을 구제하기 위하여, 미래세가 다하고 남도록 정진과 노력의 쌍수적 길,
곧 인간의 정로(正路)로 정로로만 매진할 것이외다.
그리하여 구경(究竟)은 갈 길과 가는 사람이 하나로 화하고,
받고 주는 상(相)이 끊어져야 유위의 생활,
곧 현실에서 무위락을 얻은 대자유인이 될 것이 아니오이까.
일엽 스님으로 알려진 김원주(1896-1971)는 평남 용강군에서
목사 아버지의 맏딸로 태어났다.
14세 때 어머니가 결핵으로 별세하였고,
남동생도 생후 3일 만에 죽었다.
계모를 맞이한 아버지도 얼마 못 가 별세하였다.
살림살이는 어려웠으나, 형제들뿐만 아니라 계모와도 가족애가 두터웠다.
기독교 신자로 구세학교를 거쳐, 윤심덕과 같이 진남포 삼숭보통여학교에 다녔다.
1962년 5월 고희를 바라보던 일엽(一葉, 1896~1971)은
『청춘을 불사르고』라는 인생회고록을 세상에 내놓았다.
몸속에 활화산이라도 품고 있는 양
불꽃 같이 살았던 한 사람의 인생유전 앞에 대중들은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이화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동경 유학까지 다녀온 인텔리 여성.
화가 나혜석과 더불어 ‘자유연애론’과 ‘신정조론’을 외치며
개화기 신여성운동을 주도했던 선각자.
12세의 나이에 이미 육당 최남선보다도
1년 앞서 국문시 ‘동생의 죽음’을 발표함으로써
한국문학상 신시의 효시가 됐던 여류문인. 동거, 결혼, 이혼을 반복하다
33세의 나이에 홀연 불문(佛門)에 들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출가 수행자.
이렇듯 파란만장한 길을 걸어왔던
이력의 소유자가 들려준 인생론이었기에
그 울림이 더 크고 깊었는지 모른다.
불탄 송아지 같이 날뛰던 청춘을 불살라 버리고 영원한 청춘!
길이길이 싱싱하게 되어 시들지 않은 청춘을 증득하기 위해 입산했다던 일엽.
그는 이 책에서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옛 연인 백성욱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글을 통해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여류문사로 명성이 자자하던 일엽이
백성욱(1897~1981)을 만난 것은 1926년 무렵이었다.
당시 일엽은 사랑에 구원이 있다는 믿음으로 절대적인 사랑을 찾아 떠돌고 있었다.
그러나 사랑은 그를 끊임없이 절망케 했고 고통의 나락으로 밀어뜨리기를 반복했다.
이때 절망의 밑바닥에서 구세주처럼 나타난 게 훗날 내무부장관까지 역임하는 백성욱이었다.
독일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온 그는
이제껏 만났던 사람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해박한 지식과 고고한 인품.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그와의 만남을 통해 일엽은 비로소 불교를 알게 됐었고,
깨달음이 대자유인이 되는 길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일엽은 그가 좋았고 그가 들려주는 불교가 좋았다.
이제까지의 고난이 그를 만나기 위한 산고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얼마 뒤 백성욱은 ‘인연이 다 하여서 다시 뵙지 못하겠기에…’라는
편지 한 통을 남기고 금강산으로 훌쩍 떠나갔다.
그런 일을 예기치 못했던 건 아니었지만 일엽은 절망했다.
울다 지쳐 잃어버린 사랑을 달래려 또 다른 사랑을 찾았지만 백성욱 같은 사람은 다시없었다.
그는 마음을 바꿔 불교를 공부해볼 것을 결심했다.
또 불교 잡지에 지속적으로 글을 쓰는 동시에 수행에도 매진했다.
이때 수덕사 만공으로부터 한통의 서신이 날라들었다.
‘공부를 하자면 별 경계가 많사오니
그러한 경계를 대할 때에 좋은 생각도 내지 말고,
언짢은 생각도 내지 말고,
담연화로만 생각하면서 한 생각도 없는 중 자연 화두로 지리 계속하여
나가기 시작하면 공부가 순숙할 증조올시다’
<일엽스님>
만공의 편지를 받은 일엽은 얼마 후 출가의 길을 선택했다.
‘당신은 나에게 무엇이 되었삽기에 살아서 이 몸도 죽어서 이 혼까지도 그만 다 바치고 싶어질까요.…’ 출가하기 석 달 전에 쓴 그의 시에 나타나듯 일엽은 날이 갈수록
불교에 깊이 매료돼 갔기 때문이다.
1928년 7월, 연인 백성욱이 그랬던 것처럼 일엽은
금강산 마하연의 실림암(實林菴)에서 삼단 같이 고운 머리를 싹둑 잘랐다.
그해 9월 서울 선학원에서 만공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은 일엽의 삶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었다.
스승 만공의 당부대로 이후 30여 년간 붓을 꺾었으며 오직 화두참구에만 매진했다.
그리고 훗날 ‘고인(古人)의 속임수에 헤매고 고뇌한 이 예로부터 그 얼마인가.
큰 웃음 한소리에 설리(雪裏)에 도화(桃花)가 만발하여
산과 들이 붉었네.’라는 오도송을 부를 수 있었다.
팔만 사천 번뇌를 모두 털어버리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 일엽.
젊은 시절 그토록 원망했던 연인이
오늘날 자신이 있도록 해준 참다운 선지식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으면서
일엽은 백성욱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먼 훗날 백성욱도 일엽을 떠났던 이유가 세속적인 사랑이 아니라
대아적인 사랑에 있었음을 담담히 밝히고 있다.
‘외롭고 서글픈 때 정을 주셨던 스님에 대한 생각은
마치 조강지처를 그리는 것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스님을 여의고 출가한 후로는 여인의 접촉을 금하고
일심으로 수도하였습니다.
이미 20여 년 전부터, 세상에서는 본능이라하여 어쩔 수 없다는
남녀의 성문제에 대해 별도의 감각이 따로 가져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본능을 좌우할 수 있고 천성을 임의로 고칠 수 있는 그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내 사랑! 내 부모! 내 자식만 아는 상대적인
그 사랑은 장차 원수가 되는 날이 있게 됩니다.
그런 단계를 뛰어 넘은 지혜적 동지는 헤어져
얼굴을 대하거나 아니 대하거나 서로 지혜를 탁마하며 지혜를 길러가게 되고,
혹시나 타락하려 하면 천만 목숨도 아끼지 않고
서로 제도하더라도 조건을 붙이지 않게 됩니다.
그게 대아적 사랑이요, 평등적 자비인 것입니다.’
이러한 백성욱의 뒤늦은 고백이 아니더라도 일엽이 어찌 그것을 몰랐을까.
세수로 환갑을 넘긴 일엽은 이후 비구니 총림 건립 등
여성수행자의 위상 재고를 위해 혼신의 노력의 기울였다.
그리고 1971년 1월 28일 새벽 1시 “일년은 춘하추동 사계절이 있는 것처럼
생에는 생로병사의 사계절이 있는 법이다.
나는 그 맨 마지막 계절인 죽음의 계절을 당하였다.
이것이 되풀이 되풀이 될 뿐 나는 불법을 여의지 않을 것을 확정하며
생과 사가 둘 아님을 안다.
그러나 월송아, 누구나 한번 씩은 다 당해야 하는 일이니
방일하지 말고 부지런히 공부하여라.”란 말을 남기고 큰 '한 잎새'는 마침내 지고 말았다.
일엽과 백성욱, 한 시대를 풍미했던 두 사람의 사랑이
아름다운 건 욕망과 번뇌의 차원에서 머물지 않고
깨달음으로 승화시켰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