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장군과 弘農
이 흥 규
20세기 초까지도 전남 영광군 홍농읍은 섬이나 다름없는 반도였다. 고창군 상하면의 장자산 줄기가 덕림산 기슭에 도드라진 마래잔등으로 맥이 연결되어 겨우 섬을 면한 홍농읍은 봉대산 기슭의 황토언덕을 파 일군 밭과 대덕산 골짜기에 천수답들이 겨우 드문드문 자리하고 있을 뿐, 칠산 바다와 호수 같은 연안해에서 고기잡이로 생계를 잇고 갯바닥에서 조개류와 바다풀로 끼니를 연명하고 살던 곳이다. 논농사를 지을 수 있는 들이라고는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던 이곳의 지명이 어찌하여 넓을 홍(弘)자와 농사 농(農)자의 홍농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을까? 그에 얽힌 유래를 살펴보고자 한다.
선조 때 영광군 대마면에 입향(入鄕)한 이규빈의 셋째 아들 이란(李灤)은 선조 15년(1582년)에 태어나 풍채가 당당하고 민첩하며 총명한데다가 학문과 필법 또한 뛰어났다. 광해6년(1614년)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비변랑, 오위도총부 도사 등의 여러 무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함평 현감 재직 시에는 선정을 베풀어 통정대부에 올라 전라 우수사에 제수되었다. 정묘호란(丁卯胡亂 ; 1627년)으로 도성이 함락되니 인조대왕이 강화도로 피신할 때 어영중군으로 왕을 호위하였으며 난세에 임금을 잘 모신 공으로 가의대부(嘉義大夫) 경상좌도병마절도사를 제수 받았다.
그 후 무진년(1628년) 금나라로 사신봉명을 받은 춘신사(春信使) 행차에는 부사(副使) 박난영(朴蘭英)이 장군을 수행하였다. 사실 한성까지 빼앗겼던 적국에 사신의 임무수행은 지혜나 기지가 뛰어난 인물이 아니고서는 봉행하기 쉬운 일이 아니며 그들의 핍박 또한 심하였다. 공은 방약무도(傍若無道)한 적국 후금에 트집잡히지 않도록 수행원들을 엄중히 단속하여 왕명을 받들어 거행함에 법을 어기는 자를 조금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석통역관인 박경룡(朴景龍)은 본래 미천한 신분으로 밀수도 하고 국가 기밀도 팔며 후금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간사한 모리배로 적장과 결탁하여 갖은 악행을 자행하고 사리사욕 채우기만을 일삼아 장군이 여러 차례 타이르기도 하고 크게 꾸짖기도 하였다. 장군의 엄격한 제재로 사욕을 채우지 못한 박경룡은 마음속으로 장군을 꺼려하고 원망하였다.
이에 앞서 호족에게 포로로 잡혀간 우리 백성들이 고향을 찾아 계속 도망쳤는데 후금의 용호(龍胡 ; 용골대)가 사신 일행에게
“너의 임금에게 아뢰어 다시 그들을 잡아 보내라.”
강요 하였으나 장군과 박난영은 이를 거절하고 따르지 않으니 금나라의 공식 문서로 도망해온 자들의 명단을 적어주며
“너의 임금에게 아뢰어라. 이를 보고도 조정에서 다시 잡아 보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위협을 가하였다. 장군이 대답하기를
“포로가 도망쳐 본국으로 돌아오는지의 사실 여부는 나라에서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설사 도망하여 오는 자가 있다할지라도 양국 간에 금지조약이 지엄하기 때문에 저들이 몰래 숨어 다니는데 어찌 그 자취를 알아내어 잡아 보낼 수 있겠는가.”
라고 거절 하였다. 또한
“우리가 돌아가 너의 나라 국서를 조정에 바치고 아뢴다면 이에 합당한 회보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 이리 재촉이 심한가. 너희도 이 사정을 너의 임금에게 사실대로 알리라.”
고 하였다. 당시 장군의 숙소에는 포로로 잡혀간 많은 백성들이 밤마다 찾아와 통곡을 하였지만 조정에서는 국력이 쇠진한 명나라만을 사대(事大)하며 무모한 배금(排金)정책과 당쟁으로 해결할 의지나 능력이 없었다. 장군은 백성들의 참상이 애처로워 한 사람이라도 더 구출해주기 위해 노자를 아끼고 후금 왕 누르하치에게서 받은 물품과 말까지 팔아서 노예 값을 치루고 사정이 매우 딱한 이십 수명의 백성들을 구해 귀국하였다. 이때 통역관 박경룡이 귀국하지 않으려는 것을 알고 강제로 데리고 왔다.
이에 앙심을 품은 박경룡은 본국으로 돌아온 후, 자신의 사악한 비리로 처벌받을 것이 두려워 장군이 독단으로 포로를 잡아 보내도록 경솔히 허락하였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그 외에도 여러 근거 없는 사실들을 거짓으로 꾸며 모함 하였다. 조정에서는 ‘우리 백성을 잡아 보내는 것은 차마 있을 수 없는 일인데 혹 허락한 것이 아닌가?’ 하고 추정(推定)하여 사헌부에서 논죄(論罪)를 청하였으나 인조는 윤허하지 않고 오히려 춘신사(春信使) 이란과 부사 박난영이 진충갈력(盡忠竭力)하여 전란 수습에 공헌하였으니 논상(論償)하라 하교하니 장군을 시기하는 반대파 무리들이 제거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때맞추어 용호가 후금의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오게 되었는데 그때 경룡과 대질하여 다른 일은 모두 무고로 밝혀졌으나 포로를 잡아 보내겠다고 하는 사항에 대해서는 용호가 자기나라에 유리한 주장을 내세운 대다가 사대당파들의 농간으로 없었던 일이 있었던 것처럼 의혹을 사게 되었고 당시 판의금부사 이서(李曙)는 마침내 간사한 통역의 터무니없는 거짓 증언과 장군을 시기하는 반정중신들의 논죄를 수용하여 장군은 1628년 7월 47세의 일기로 옥사 당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후금의 칸은 조선의 뛰어난 장수의 죽음에 크게 기뻐하였다고 한다.
그 후 재상의 지위에 있는 신하들이 심양(沈陽)을 왕래하며 들은 바로는 장군이 사신 임무를 봉행함에 조금도 불의에 굴하지 않고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다고 칭송하는 자가 많았다 하며, 병자호란 때 심양에 끌려갔다 돌아온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은 크게 부르짖어 말하기를
“난세에 장군 같은 훌륭한 인물이 어찌 흉악한 무리들의 무고로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단 말인가?”
하고 개탄하였다.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를 모시고 심양에서 돌아온 유헌(儒軒) 박황(朴潢) 또한 분개하여
“이 절도사의 죽음은 저들(금나라 벼슬아치)도 원통한일이라고 말 하더라.”
하고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였다.
그 후 인조 17년(1639년)에 장군의 아들 한성판관 상연(尙淵)의 상소와 대신들의 논의로 돌아가신지 11년 후에 장군은 관작이 복작(復爵)되고 명예를 회복하였으며 왕의 특명으로 왕릉을 잡는 지관으로 하여금 묘 자리를 잡게 하였다. 능소지관 이석우(李錫祐)가 장군의 고향인 영광으로 내려와 묘 자리를 물색하던 중 법성포 뒷산인 인의산(仁義山)에 올라 지세를 살펴보니 동서로 긴 반도인 이곳의 남북 해변이 훗날 육지가 되어 큰 농사를 짓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여 명명한데서 홍농(弘農)이라는 지명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 뒤 270여년이 지난 후 일본인 삼기가 메물곶이(법성포 쪽의 곶과 홍농읍 쪽 곶 사이의 협소한 부분을 메운 곳)를 막아 바다가 황금물결 넘실대는 평야로 변해 큰 농사를 짓는 땅 홍농이 되었으니 풍수지리에 정통한 능소지관의 예견이 들어맞은 것이다.
능소지관 이석우는 홍농읍 성산리 죽동에 장군을 모실 자리를 정했다. 풍수설에 의하면 그 묘 자리를 황계포란(黃鷄抱卵) 즉 『누런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하는데, 우연히도 영광 원자력 발전소가 서게 되자 발전소 자리에 있던 홍농서초등학교가 장군의 묘소 앞으로 이전되어 묘소에서 보면 황토 빛깔 운동장에서 어린 새싹들이 자라는 모습을 품에 안고 있는 듯하다.
숙종31년(1710년)에 세운 묘비는 영의정을 여덟 번을 지낸 당대의 문장가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이 찬(撰)하고 역시 영의정을 지낸 당대의 명필이요 문장가인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이 서(書)한 비(碑)가 현존되어 전라남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그 한 구절을 소개한다.
皓天莫問 寃孰傷也 (호천막문 원숙상야)
밝은 하늘이여 더는 묻지마라
이 원통한 일을 뉘라서 슬퍼하지 않으랴!
有枉必伸 古之常也 (유왕필신 고지상야)
이 억울한 죽음 반드시 밝혀지게 되는 것은
고래의 떳떳한 이치이거늘
我銘以貞 天不芒也 (아명이정 천불망야)
나 이제 시 한 구절을 옥돌에 새기노니
하늘도 무심치 않으리라.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