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도행전 4:1-22
주제 : 부활의 신앙
들어가는 말 - 서두부터 당구이야기다.^^ 당구를 치다보면 차이가 많이 나는데도 불구하고 기권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역전시킬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그리고 짜릿한 역전승의 기억은 오래간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실패를 극복하고 승리한 얘기는 잔잔한 감동을 가져다준다.
인간은 날 때부터 본능적인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래서 모든 인류의 소망은 어떻게 하면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 할 수 있는가? 이다. 인간은 죽음에대한 공포나 두려움이 없어지면 참으로 자유 할 수 있다.
1. 부활의 신앙은 죽음을 넘어선 담대한 신앙이다.
사도행전 4장에는 이러한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방 받아 자유한 사람들의 얘기가 실려 있다.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5-20절) 담대한 증인 베드로의 신앙을 볼 수 있다.
전에 베드로는 연약한 여종과 하인들 앞에서 세 번씩이나 예수를 부인했었는데(요18:17,25,27) 그러한 베드로가 사도행전에서는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생명을 위험을 느낄 때 살고자 나타나는 공포와 두려움의 본능을 이기고 어떻게 그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인간의 생명은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서, 인간의 생명이 죽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사도행전은 전하고 있다. 인간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면 참으로 자유 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지구상의 모든 교회의 설립과 교회의 사명을 여러 가지로 얘기하지만 초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적 사실을 전하기 위해서 세워진 선교 공동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초대교인들은 그 부활의 생명과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하게 된, 이 사실 모든 사람들과 함께 누리기 위해 전하기 시작한 것이 선교의 출발점 곧 교회의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행4:10“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철학자 콩트(Auguste Comte)와 시인 토마스 칼라일이 어느날 만나서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콩트가 ‘나는 지금 기독교를 대신할 수 있는 완전한 종교를 창시하기 위해 구상하고 있는데 기독교가 내세우는 신비한 유치한 얘기들은 배제할 것일세, 때문에 역사상 가장 완벽한 종교가 될 걸세’듣고 있던 토마스 칼라일이 잠시 침묵하더니 ‘완벽하고 분명한 종교를 구상하고 있다니 축하 하네 그러나 콩트 자네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는 것 같네 그것은 꽁뜨 자네도 예수처럼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야 할 걸세’^^
기독교의 시작은 예수다. 그래서 기독교의 역사는 예수의 역사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종교다. 그 생명은 잠시 있다 없어지는 아침 안개와 같은 것이 아니라 죽어도 다시 사는, 영원히 영생하는, 영원한 생명의 종교다. 그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 때문에 2천년 동안 신앙의 선배들이 순교의 피를 흘리며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2천년의 역사와 순교자들의 피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다.
한강 마포의 절두산 순교지의 얘기는 이 사실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증거이다. 대원군이 자신의 쇄국 정책을 버티어 나가기 위해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함으로써 당시 절두산에서만 무려 1만여 명의 신자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추산되지만 그 수가 맞는지 틀리는 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선참후계(先斬後啓), 즉 ‘먼저 자르고 본다.’는 식으로 무명의 순교자들이 아무런 재판의 형식이나 절차도 없이 광기 어린 칼 아래 머리를 떨구었고 그래서 30여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원래 잠두봉 또는 용두봉은 예로부터 풍류객들이 산수를 즐기고 나룻손들이 그늘을 찾던 한가롭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도성에서 김포에 이르는 나루터 양화진(楊花津)을 끼고 있어 더욱 명승을 이루었던 곳으로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꼭 유람선을 띄웠다고 전해져 온다.
하지만 병인년인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입해 오자 대원군은 "양이(洋夷)로 더럽혀진 한강 물을 서학(西學)의 무리들의 피로 씻어야 한다."며 광기 어린 박해의 칼을 휘두른다. 당시 대원군은 일부러 천주교도들의 처형지를 이전의 서소문 밖 네거리와 새남터 등에서 프랑스 함대가 침입해 왔던 양화진 근처, 곧 절두산을 택함으로써 침입에 대한 보복이자 '서양 오랑캐'에 대한 배척을 표시했다. 1868년 남연군 무덤 도굴 사건, 1871년 미국 함대의 침입 등의 사건은 대원군의 서슬 퍼런 박해에 기름을 퍼붓는 꼴이 되어 살육은 6년간이나 계속됐고 병인박해는 가장 혹독한 박해로 기록된다. 이곳에는 417구의 의료봉사 선교 및 한국의 독립운동에 이바지한 145인의 외국인 선교사묘원도 있다.
부활의 신앙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담대하다. 또한 어떠한 상황에도 평안하다. 그 이유는 죽음을 넘어선 신앙이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고 300년이나 박해했다. 로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기독교를 박멸하려했다. 나병이 만연된 골짜기에 몰아 넣었고, 사자굴에 던지고, 산사람을 나무십자가에 매달아 기름칠하여 불을붙여 원형경기장을 밝히고 기독교인들이굶주린 맹수와 싸워 잡혀먹도록 하는 등, 사탄의 앞잡이가 되어 무수한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며 죽였다. 그러나 결국 로마는 기독교를 국교로 선언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 죽음을 넘어서는 사랑의 힘과 또한 영생을 가진 신자들의 두려움 없는 삶이, 십자가의 사랑과 부활의 생명 앞에 로마는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만일 기독교에 핍박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기독교 부흥은 쉽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해본다. 핍박은 오히려 더 큰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는 계기가 되었다.
2. 부활의 신앙은 새 생명의 신앙이다.
집안 청소를 하다가 먼지가 어디서 날아 들어와 이렇게 싸일까? 궁금했었다. 나는 밖에서 바람과 함께 먼지가 들어오거나 가족들이 밖에서 먼지를 뭍여오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집안 먼지의 70%(어떤 학자는 90%)가 사람의 각질이라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아주 정확한 값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60조개라고 한다. 인간의 몸을 이루는 세포의 종류는 다양하고 각각의 세포를 일일이 센다는 것은 기술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인체에서 가장 큰 기관은 피부라고 한다. 성인 남자의 경우 피부의 넓이는 1.9평방미터, 여자는 1.6평방미터로서 피부는 끊임없이 벗겨지고, 4주마다 완전히 새 피부로 바뀌는데 한 달에 한 번씩 갈아입는다. 한 사람이 일평생 벗어버리는 피부의 무게는 48kg으로 약 천 번이나 새로 갈아입는다고한다. 이러한 면에서 사람은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고 하겠다.
어제 부활절에 관한 자료를 검색하다가 대치동에서 목회할 때 매스컴을 통하여 접했던 감동적인 소식을 다시 보게 되었다. 천호동 제일교회 목사님이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어디서 이상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와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며 살피던 중 쓰레기차의 압축 직전에 있는 검은 비닐봉지 안에서 나는 울음소리 같았다. 미화원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소리 나는 비닐봉지를 뜯어보니 그 안에는 파랗게 질린 피투성의 신생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한 시간 쯤 지난 신생아였다. 추위와 세균 감염 때문에 매우 위독했다. 교회로 앉고 달려와서 난로를 피우고 물을 데워 따뜻한 물로 아이를 씻기고 생명을 살려냈다. 아이를 입양한 목사님 부부는 아이 이름을 금봉지로 지어주었다. 쓰레기 더미에서 쓰레기와 함께 죽어갈 수밖에 없었던 아이가 구원을 얻고 금 봉지가 되었다는 뜻이다.
비정한 윤리나 타락한 윤리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 때 본능적인 울음을 터트리지 않았더라면 쓰레기 더미와 함께 시체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2013년 부활 주일을 맞이하여 몇 가지 감사할 조건들을 생각해보고 싶다.
하나, 쓰레기 같은 인생, 쓰레기와 함께 죽어 마땅한 나 같은 죄인을 대속해주신 주님의 은혜가 감사하다.
하나, 새 생명, 예수의 생명을 내게 주신 것 감사하다.
하나, 늘 함께하시고 돌보시며 감화 감동 주시니 감사하다.
하나, 연약하며 부족하고, 또한 실 수 투성이 임에도 불구하고 부르짖어 기도할 수 있게 허락하시고 기도할 때마다 은혜 주시는 것 감사하다.
하나, 미션 주시고 기회주시는 것 감사하다.
하나, 여러분과(하나님이 사랑하는) 함께 신앙생활 할 수 있게 하신 것 감사하다.
하나, 우리 청년들과 및 교우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하시고 그 영광을 위해 살도록 하실 것에 감사하다.
3. 부활의 신앙은 말씀대로 이루는 것을 믿는 신앙이다.
예수는 말씀대로 살아나셨다. 안식일이 지나고 첫 날 새벽 미명에 마리아 두 자매가 무덤에 갔다. 그런데 무덤의 돌은 이미 굴려져 있고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그들을 맞이하는 것이 아닌가, 두 여인은 무서워 졸도한 사람처럼 벌벌 떨고 있는데 천사가 이렇게 말한다. 마28:1-6절“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기독교를 일컬어‘말씀의 종교다’라고 말한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천지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말씀으로 보존하시고 그 말씀대로 이루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죽으셨고 말씀대로 죽은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밑도 끝도 없는 종교가 아니라, 생각도 규모도 계획도 미래도 없이 흘러가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엄격하고 세밀하고 정확한 그 말씀대로 이루어가는 종교이다.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신앙을 믿은 증인들이 있다.
백부장 - 말씀만 하옵소서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마8:5-13 눅7:7).
마리아 -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 지이다(눅1:38).
바울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히4:12).
엘가나 - 그의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삼상1:23).
맺음말 - 이들은 인생의 어려운 문제나 역경이나 고난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 지는 것을 믿음으로 삶을 역적시켰을 뿐만 아니라 생명을 위협하는 극심한 두려움과 공포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과 및 부활을 경험함으로 말미암아 담대한 신앙의 삶을 살 수 있었다. 죽음을 극복한 이들이이야 말로 참 자유한 신앙인이었다. 그리고 그 부활의 신앙을 본받고 싶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다시 되새김질 하고 싶은 것은 부활의 신앙이란
첫째 - 담대한 신앙이다.
.생과사를 초월한 믿음을 소유한 신앙이다.
.부와 가난 앞에서 초연한 신앙이다.
.권세자나 연약한자 앞에서도 한결 같은 신앙이다.
둘째 - 새 생명의 신앙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는다는 주님의 말씀처럼
.날마다 은혜를 경험하는 신앙이다.
.날마다 성장하는 신앙이다.
셋째 -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믿는 신앙이다.
.예수님은 말씀대로 오셨고 말씀대로 십자가에 죽으셨고 말씀대로 죽으신지 사흘만에 살아나셨고 말씀대로 하늘에 올라가셨고 말씀대로 성령을 보내셨고 말씀대로 다시 오실 것이며 말씀대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 또한 말씀대로 믿는 자들에게 영생복락을 누리게 하실 것이다.
.또한 우리 모두는 말씀을 이루는 신앙의 삶을 살아야 한다.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새 생명을 가진 그리스도인 된 우리를 통하여 그 뜻을 이루시길 원하신다. 그러므로 그분의 뜻에 동의하고 또한 동의한 삶을 살아야 한다.
@행4장1-22 부활의 신앙.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