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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시편44편1~8절
제목 : 시련에서 호소함(1)
이스라엘의 행정수도 텔아비브에 있는 이스라엘 박물관에 가면 하얀 건물 안 벽에 세 줄의 글이 쓰여 있습니다.
그 세줄의 글은
“과거를 기억하라 (To remember the Past),
현재를 살라 (To live the Present),
미래를 확신하라 (To trust the future)”입니다.
이 세 마디의 말 속에서 시편 기자의 모습을 생각하게 됩니다.
시편 기자는 현재의 고통과 역경 가운데서 과거를 기억하며 뒤 돌아 보면서 미래의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확신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시편 44편의 표제에 고라 자손이라고는 하지만 정확한 저작자는 미상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편 기자도 과거를 기억하는 모습을 오늘 본문 시편 44편 1절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조상들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그들이 우리에게 일러주매 우리가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시편 기자는 과거의 하나님께서 자기 열조에게 행하신 일들을 자기의 귀로 들었다고 말씀하면서 주님께서 옛날에 행하신 일을 기억하였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그 “옛날”의 일은 바로 놀라운 구원이였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5장15절에서도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였던 것입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오늘 본문에서 시편 기자는 이 신명기 말씀처럼 옛날 그의 열조의 날에 있었던 출애굽 당시의 구원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구원의 역사는 애굽에서의 출애굽보다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건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시편 44편 1-8절 말씀 중심으로 고난의 날에 은혜 받던 때의 일을 회고함은 그때 어떻게 하여 은혜를 받았는가 하는 것을 찾아서 지금 이 고난에서 벗어나 은혜 받을 수 있는 길로 가려함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은혜를 받기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헛되이 동경하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 재난에 처한 백성이 조상들의 은혜 받은 초기의 일을 회상하는 것입니다.
“조상들의 날 곧 옛날”이란 출애굽 때와 가나안 땅 정복의 때를 지칭함입니다.
오래된 옛날이라 그때의 조상들도 다 죽고 없고,
출애굽한 지도 근 500년이 되었으니(왕상6:1)
어찌 그 자손들이 그때 일을 알 수 있을까마는,
그 일을 자손들이 잊지 않도록 가르치고 전하라고 하셨으므로
(출10:2, 12:26~27, 13:8~9, 14~16, 신6:20~25, 수4:6~7)
조상들은 이를 대대로 잘 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전하게 한 이유는
하나님 경외하는 길에서 떠나지 않고 잘 경외하도록 함인데,
백성들은 듣고도 하나님 경외를 바로 잘하지 못하였으므로 재난이 임한 것입니다.
이제라도 그 원인을 바로 찾아 청산하고 조상들이 은혜 입던 대로의 방법을 따라야 재난이 해제되고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첫째로 묵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어떻게 주님께서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는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심에 있어서 가나안 족속을 쫓으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에 심으시고 번성케 하시므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오늘 본문 2절 말씀을 보시길 바랍니다.
“주께서 주의 손으로 열방을 쫓으시고 열조를 심으시며 주께서 민족들은 괴롭게 하시고 열조는 번성케 하셨나이다”.
가나안 정복 역사를 말씀합니다.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께서 그 능력의 손으로 친히 이루심이지 인간의 힘으로 정복함이 아닌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주께서 주의 손으로”가 절 머리에 있어서 이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주의 손”은 “전능자의 손”이므로(창49:24),
무소불능하신(욥42:2, 롬4:17) 이의 손입니다.
"뭇 백성을 내쫓으시고".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의 인솔아래 가나안 족속들을 정복하게 된 사실을 가리킵니다.
여리고 함락을 위시하여, 가나안 정복은 온전히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증거는,
(1) 그 때에 그 땅의 민족들이 강했음에도 불구하고도
이스라엘에게 정복된 사실,
(2) 왕벌을 보내어 그 민족들을 쫓아낸 것(수 24:12)과
기타 특이한 섭리에 의하여 이스라엘이 승전하게 된 사실,
(3)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것이 필경 이루어진 사실 등이다(창 15:12-21).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루어진 내용 들]
-출애굽 때에도 그 손으로 애굽에 이적 기사를 베푸시어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셨고(신4:34, 26:8, 렘32:20~21),
-홍해도 육지로(출14:22,29)
-요단강도 마른 땅으로 건너게 하셨으며(수3:17, 4:22)
-광야 40년에 그들을 먹이시고 마시우셨을 뿐 아니라(출16:35, 17:6~7,민20:11),
-옷도 신도 헤어짐이 없게 하셨고(신8:4, 49:5, 느9:21),
-요단강 동편 시혼과 옥을 진멸하시고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를 심으시고(수13:15~33),
-요단을 건너서도 여리고 점령부터가 하나님의 지시하시는 방법대로 하여 그 능력으로 성을 무너트려,
-가나안 땅 정복을 위시하여(수6장) 7족속(수7:1)을 진멸하고,
-9지파를 거기 심는 일을(수16~19장)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의 손으로 하신 것을 출애굽기로부터 여호수아까지를 읽는다면 모를 자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 땅에 뿌리 박게하시며".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하신 사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세우신 것을 식목(植木)에 비유한 말씀입니다. 시편 기자는 주님을 식목자로,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심은 나무로 비유하면서 그 나무를 잘 가꾸어서 번성하게 함과 같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친히 양육하시고 왕성케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란 나무를 심기 위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좋은 땅에 자라나고 있었던 가나안 족속이라는 잡초(?)들을 뿌리채 뽑아버리시고
그 곳에 이스라엘이란 나무를 심으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그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나도록 가꾸시는 가운데 많은 열매, 즉 번성케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무엘하 7장10절 말씀의 성취인 것입니다: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저희를 심고 저희로 자기 곳에 거하여 다시 옮기지 않게 하며 악한 유로 전과 같이 저희를 해하지 못하게 하여”.
이 표현은 우리로 하여금 요한복음 15장 예수님의 포도나무 비유를 생각 나게합니다.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 하나님 아버지는 “그 농부”(1절),
가지인 우리들이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듯이(5절),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 또한 그들을 심으시고 번성케 하신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심에 있어서 우리를 뽑으시며
또한 심으시기도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특히 우리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쓴 뿌리를 뽑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히브리서 12장15절 말씀을 보시길 바랍니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우리 안에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 “독초”와 같은 쓴 뿌리(신29:18)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와 같은 죄를 범하게 만들므로 우리의 영혼을 멸망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5장 2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기대에 어긋나는 우리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혔도다”.
이 쓴 뿌리를 뽑으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뿌리를 박게 하시사 그 안에서 세움을 받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6-7절 말씀을 보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둘째로 묵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왜 주님께서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는가?’입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던 이유는 “… 주님께서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for You loved them)였습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보시길 바랍니다: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니이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가나안 땅을 정복케 하셨을 때 분명한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의 힘으로(“팔”)
그리고 무기, 군대 (“칼”)로 이긴 것이 절대 아니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병기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던 7족속보다 우수하지 못하였음은, 그들은 벌써 철병거를 소유하고 있었고(신20:1, 수11:6,17:16,18, 삿1:19,4:3)
또 병력으로 그들을 당할 수 없이 강하다고 하는 것을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돌아온 자들의 보고에서 드러나(민13:28, 31~33) 회중으로 낙망케 하였던 것입니다.(민14:1~3)
그렇다고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전연 전투를 아니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전쟁을 승리하게 한 것이 이스라엘의 병력이나 무기의 우수함에 의한 것이 아니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였던 것입니다.(신9:3,20:4,31:3).
“주의 오른손과 팔”은 권능 있는 능력의 손과 팔이니 무소불능하신 대권능으로 구원하시고 가나안도 정복하신 것을 뜻함이고,
“얼굴의 빛”은 은혜로 돌보심을 인하여 구원된 것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함에 있어서 그들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았던 것입니다
[(3절) “… 오직 주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
왜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대신 싸우시고
가나안 족속들을 멸망시키시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승리케 하시고
가나안 땅을 정복케 하신 이유는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뻐하신 이유라고 시편기자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5장 7절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켜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His delightful plant)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뻐하시는 고로 그들을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그처럼 특별한 은혜를 베푸신 것은,
이스라엘이 의로운 까닭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 기쁘신 뜻대로 이스라엘에게 무조건적 호의를 가지신 까닭이었다.” 라고 하였습니다.
분명히 구원은 롬9:16절 말씀처럼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하였고,
엡2:8절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에는 인간의 어떠한 조건도 용납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무조건으로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무조건적 선택입니다.
이스라엘로 승리하게 돌보아 주시며 능력 베풀어 주신 것이 이스라엘의 의로움이나 그 능력에 있지 않고 전연 하나님의 기뻐하심에서 베푸신 무조건적 은혜인 것입니다.
신명기 7장7-8절 말씀을 보시길 바랍니다:
“[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8]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신9:6절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공의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목이 곧은 백성임에도 무조건적인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로 묵상해 보고자 하는 것은 ‘과거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기억하는 자의 어떻게 행하는가?’입니다.
시편 기자처럼 과거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기억하는 자는 한 세 가지로 반응을 합니다:
첫째로, 주님께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 4절을 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 야곱에게 구원을 베푸소서”
시편 기자는 주님만이 자신의 왕이심을 고백하면서 주님께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시길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과거의 출애굽 당시에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시길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시편 기자처럼 과거의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구원해 주실 수 있다는 확신 가운데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의 은총을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주님을 의지합니다.
오늘 본문 5절을 보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려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시편 기자는 과거의 주님을 의지하여 구원 받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생각하면서 현재의 역경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유는
오직 주님 만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주실 줄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자신을 의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6절)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도 나를 구원치 못하 리이다” 이 얼마나 귀한 믿음입니까?
“활”과 “칼”은 무기를 이름이며 동시에 병력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의지하지 않는 이유가 하나님 의지하였기 때문인데,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 무기와 병력을 가지고는 구원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3절, 20:7,33:16)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 이 무기와 병력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니 참으로 가석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편20:7절에서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라고
다윗은 말하였는데 여기 시인도 그러한 것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시33:16~17절에 “[16]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 [17] 구원하는 데에 군마는 헛되며 군대가 많다 하여도 능히 구하지 못하는도다”라고 하였으며,
주님께서도 마26:52절에서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고 하셨는데 지극히 명심하여야 할 말씀입니다.
자기 자신을 의지하지 않는 신앙,
자기 자신의 활이나 칼도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음을 아는 신앙…
그는 자기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7절이 이 질문을 답을 주고 있습니다:
“오직 주께서 우리를 우리 대적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케 하셨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절 멀리에 “왜 그런고 하면”이란 이유 접속사가 빠져 있습니다.
곧 병기나 병력을 의지하지 않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무기나 병력에 의하여 구원을 얻었다면
또 그것을 의지할 수 있겠는데,
전연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주셨으니
하나님만 의지할 뿐 무기 따위는 전혀 의지할 필요조차 없는 것입니다.
과거에 그렇게 하신 하나님께서 현제에도 그렇게 하실 것이니,
그러므로 지금 무기나 병력 따위
인간의 힘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하며 또 그렇게 해야 구원될 것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수치를 당하게 하셨음”은 폐하게 하셨음을 나타냅니다.
우리를 구원하심은 원수를 패하게 하는 일이니 같은 사건을 말한 것입니다.
셋째로, 종일 주님을 자랑합니다.
8절 말씀을 보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종일 하나님으로 자랑하였나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영영히 감사하리이다”.
시편 기자는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는(6절) 겸손으로,
하나님 제일주의를 신앙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에게 감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박윤선).
시인의 확신입니다.
구원해 주실 것을 믿고 자랑하였고, 계속해서 감사 찬송하겠다는 것입니다.
“자랑하였다”는 말은 “찬양한다”는 말로서, “할렐루야”로도, “찬송하다”
“칭찬하다”로도 번역된 “할랄”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찬송으로 자랑했다는 뜻입니다.
“감사하리이다”도 “찬송하다”, “찬양하다”, “축사하다”, “자복하다”로도 번역된 말이니 고백과 찬송으로 감사함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구원해 주실 것을 확신하고 찬송하였고,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찬송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과거에 그의 은혜를 받았을 뿐 아니라(Spurgeon),
앞으로도 영영토록 그의 무한하신 은혜를 받겠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도 그를 찬송하고 또 영영토록 찬송해야 됩니다.
이 찬송은 구원받은 것을 자랑하는 찬송이요,
고백하는 찬송이며, 감사하는 찬송임이 용어에 함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진실로 귀한 신앙의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