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는 고려왕조와 특별히 인연이 있는 고을이어서 천년전부터 남도고을에서 으뜸가는 고장으로 대접 받아왔다.
고려태조 왕건이 견훤과 금성산 전투를 벌렸던 911년 당시 버들잎을 띄워 물한잔을 건네주던 소녀를 만났는데
그 여인인 나중에 2대 혜종을 잉태한 장화왕후가 되었고 그이후 나주는 고려왕조에서 특별대접을 받게 된것이다.
고려 성종 때인 998년 나주는 지금 광역자치 단체에 해당하는 ‘목(牧)’이 되었고 ‘전라도’라는 고유명사는 전주
(全州)와 나주(羅州)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다. 뒤이어 병마절도사가 주둔했다. 이때부터 나주는 도시다운 도시로
하나하나 단장되기 시작했다. ‘목(牧)’의 지위는 1895년까지 누렸다. 거의 천년동안을 전라도의 중심도시 역할을
해 왔던 것이다.
금성관은 나주목의 객사이다. 객사란 고려~조선시대때 지방궁실로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 또는 궐패(闕牌)를
모셔두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고을의 관리와 선비들이 모여 망궐례(望闕禮)를 올리며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을
양쪽의 익사(翼舍)에서 유숙하게 하던 곳이다. 지방의 도읍지에 관아건물이 들어서면 일반적인 경우는 중심축선상에
동헌과 정문, 루문 등이 자리하고 주변에 육방관속의 건물과 내아 들이 위치한다. 현재 옛 나주읍성내에는 나주목사
내아(內衙), 관문(官門)인 정수루(正綏樓)와 서문밖에 나주향교 등이 있다.
금성관 정문은 망화루였는데 일제강점기에 없어졌던 것을 2003년 복원하였다.
금성관은 조선 성종 18~20년(1487.4.12~1489.7.20) 동안 이유인목사가 2년여 동안 재직하면서 김춘경목사가 건립한
객관의 동헌인 벽오헌 옆에 금성관과 벽오헌 남쪽에 망화루를 건축하여 궁실의 구조를 갖추었다. 이후 선조 36년(1603)에
크게 중수를 하고, 고종 21년(1884) 박규동 목사가 3창을 했다. 최근에 와서는 1963년 9월에 보수하였고, 다시 1976년에
완전 해체ㆍ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창호ㆍ마루등 내부를 개조하여 나주군청 청사로 사용되면서
유리창문을 달아 쓰기도 하였다.
금성관은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지붕이다. 그러나 칸넓이나 높이가 다른 건물보다 크게 되어 정청으로서의
위엄을 더한다. 금성관의 공포형식은 익공형을 하고 있다. 원래 익공집은 궁궐이나 정전 등의 부속건물과 누각, 정자 등에
많이 사용되었다. 조선중기 이후부터는 목조건물에 있어서는 다포계와 주심포계가 혼용되다가 새로운 형태로 익공계 양식이
대두되었다. 금성관은 고흥의 존심당과 함께 익공형식으로 관아건물의 유사한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내부는 모두 대청으로 꾸몄으며 우물마루를 깔았고, 대형의 막돌초석에 약간의 베흘림을 둔 두리기둥을 세웠다. 내부에는
10개의 내진고주(內陣高柱)를 세웠으며 기둥 위로는 주두(柱頭)를 얹고 창방을 걸었으며 주칸마다 소로 2개 화반 1구씩 배치
하였다. 공포는 주심포계 익공식으로 살미첨자와 끝은 쇠서로 되었고 행공점차를 두어 외목도리를 받게 하였다. 가구는 내진
고주 위로 대량을 걸고 그 위로 동자주를 높은 다음 종량을 얹힌 9량가(樑架)로 되어 있다. 창호이 구성은 중앙 세칸은 4개의
빗살문으로 되었고 양쪽 퇴칸에는 빗살문 2개를 달았다. 측면 역시 빗살 창문으로 중앙 2칸은 4짝, 양편, 2칸에는 두짝이다.
금성관 공포구조는 나주향교 대성전의 공포구조와 비슷하여 조선 중기 나주지역의 건축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금성관의 주건물 벽오헌
금성관 입구 망화루
궁궐처럼 삼도가 깔려있다.
벽오헌의 원명칭은 동익헌이다.
서익헌. 금성관 동쪽의 건물 벽오헌이 주로 정삼품 이상의 인물들이 묵던 곳이었던 반면 서쪽은 주로 수행원들이 묵던 건물이라고 한다.
역대 나주목사 선정비.
보기드문 철비도 있다.
수령 700년의 은행나무.
비석 옆에 있는것은 조금 더 젊은나무인듯.
보호수는 가가이서 보니 두그루다.
우물.
이제 관청을 보았으니 목사의 관사였던 금학헌으로 간다.
첫댓글 금성관의 모습은 엄숙해서 좋았어요...저곳에 있는 커다란 나무 두그루 멋지더라구요
금성관 제가 보아왔던 객사중 가장 아름다왔습니다^^
금성관 객사는 전주의 객사보다도 더 멋진거 같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