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으로 우는 남자 오랜만의 만남에 반가운 미소가 넘쳤다. 나누고 싶었던 이야기가 밀렸던가. 서로 말머리가 부딪쳤다. 상대편이 이야기하다가 잠시 쉬는 호흡 사이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이밀기 바쁘고
금세 또 다른 얘기할 준비 하느라 바빴다.
그러다 그분의 얘기 사이사이로 뭔지 알 수 없는 그늘이 느껴졌다.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가 한 번씩 튀어나오고 자꾸 번복되는 부분이 있었다. 왜 그럴까 하는 의구심이 생길 즈음 그분은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말을 해야 할 것 같아, 얼마 전 큰아들을 잃었어.” 갑자기 등줄기에 써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서로 부딪치던 말머리가 갑자기 침묵으로 이어졌다. ‘왜? 어쩌다?’ 하는 질문조차 할 수 없어서 그냥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뭐라고 해야 할까 손만 비비며 목이 탔다.
몇 초가 긴 시간으로 느껴졌다. 그 시간을 잘게 부스는 목소리가 들렸다. 담담하려고, 그러려고 애써 당신의 감정을 누르는 목소리가 침묵을 깼다. 그분은 계속 무슨 말인가를 하셨다. 입가에 가끔 미소를 띠며 이야기를 이어가는 얼굴을 바라보면서 내 얼굴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나 싶어 굳어졌다. 그러다 이게 아니지 싶어서 환하게 웃기도 했다. 위로랍시고 횡설수설 늘어놓는 내 마음이 그분의 마음보다 더 심하게 요동을 쳤다. 문득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오빠의 죽음을 전해 듣고 무척 참담해하셨던 아버지. 그런데 막상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애써 아무렇지 않다는 듯 행동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 의외였었다. 평소에는 별말이 없던 아버지가 그 상황에서 사람들과 계속 무슨 말씀인가를 하시며 웃기까지 하시다니. 너무 생소하고 다른 모습에 마음이 몹시 아팠던 기억이 난다.
화장실에 다니러 나가는 그분의 뒷모습이 흐느끼듯 움찔거렸다. 애써 삼키던 울음을 뱉으러 가시는 것이리라. 가슴으로 삼킨 울음이 등에서 흘렀다. 내 아버지께서도 그렇게 우셨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몰래몰래 눈물을 훔치셨다. 내 눈시울이 시큰해 온다. 그분의 슬픔인지 내 아버지의 슬픔이었던 것인지 모르는 아픔이 울컥 올라왔다. 어린 손자들을 돌봐줘야 하기에 이사해야 한단다. 삶의 터전을 버리고 떠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아쉽다고 말하지만 어쩌면 사람들을 피하려는 방편인지도 모르겠다.
떠난 자식을 위해 금강경이나 낭송하면서 조용히 지내려 한다는 말씀이 왜 그리 헛헛하게 들리던지 하마터면 왈칵 눈물을 쏟을 뻔했다. 며칠째, 그분의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아들의 사진 앞에 향을 피우고 금강경을 외우며 기도하리라. 손자들의 얼굴에서 가슴에 묻은 핏줄을 이어보려 눈을 떼지 못하리라.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지금 먼 곳에 와 있노라고 거짓말을 하리라. 손가락을 짚어가며 세월을 거꾸로 세어보고 있으리라.
빈방에서 홀로 꺼이꺼이 통곡을 하는 날도 있으리라.
내 아버지의 야위셨던 볼과 웅크린 등이 겹쳐 보인다. 축축이 젖은 등이 내 눈에 들어오는 날엔 종일 비가 내렸었다. 눈발이 날리는 날엔 얼룩이 지고 꽃잎이 날리는 날엔 헛웃음이 피던 등, 그렇게 등으로 우는 또 한 남자가 저만치 걸어간다.
매서운 바람이 그분의 옷자락을 들썩거린다. 앞섶을 꼭 잡아 올리는 손끝의 떨림이 공기의 흐름을 타고 전해온다. 언제쯤 저 떨림이 가라앉을지. 세월이 약이라던데 저 가슴속엔 언제쯤 따스한 바람이 스며들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