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珍珠潭 진주담 김성운
珠潭先生文集 金聖運 (1673~1730) 大集(대집) 珠潭(주담) 蔚山(울산)
珠潭先生文集卷之三 雜錄 昭道洞還寓錄
丁酉臘月初出山館工程洞鄭巾家歲末還夢亭舊 居過歲
戊戌正月初友壻李哀送奴候焉厥奴得時瘟大痛 盡室寓楊川村愛先家念後又以疑疾還昭道洞別 業二月又還夢亭擇迎壻日則乃四月十九日也寓 鄭巾家行禮十八日午善山金龍壽率李郞善胤自 州衛來館於內洞吳三龍家牧使李奎年以前本道 都事以其待候驛騎馬及使令官人治送新行十九 日賓客早會南海縣令成德咸先來俄而李牧使繼 至兵使李奎成送大馬及嘉善章服李侯直來李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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下館處其新行後又來余家坐賓筵邑民之爲客者 皆去惟李侯及申國叟金重玉郭仁卿留宿書齋五 月初五日行麥薦于廟因與宗族飮歡午後州海貞 染痛時瘟出幕于德申村前此後工程洞有繼臥者 故二十五日盡室寓昭道洞逐日與張天授同話其草堂七月初張友之次子應鼎得一小冊子於崔致中處其中載
宋時烈文余觀其文章則有之而時有心術之可疑焉至己巳年流濟州時歷告金長生墓文詳其文意不覺駭慘遂書其後
十五日又以村患 寓大寺洞李泰望家二十五曰余八州邸得怪疾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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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初一日馱疾還十一日還昭道洞翌日鍼右臀腫 痛處濃汁出數椀而止病亦因有歇勢而左臀連黃 門成痔疾至今二三年苦歇無常二十四日還夢亭 洽送李壻之行九月二十一日送李壻還京中十月 初還昭道洞過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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珠潭先生文集卷之二 / 跋 / 題宋相 時烈 祭其先師墓文後
近世有德恩氏者聞人也方以聲名握重柄足浮沈 一世士而世之論者岐而二焉其一譽譽則逼洛閩 其一毁毁則邁跖蹻甲乙幷張權度互勝不此則彼 不彼則此矣吾生也後域且左其人與書俱未目焉 私自疑之曰洛閩跖蹻若是班乎二說皆病也云爾 日吾之寓昭道洞也張天授以是文示之乃來自三 山 報恩古號張友得此文於崔致中而報恩卽致中之外鄕云 者也余讀其書 想其人荊棘其腹貝錦其口文字之間自不得諱跖 蹻惟彼一番人洛閩之擬奚其慘矣黨論之飜昭壤 倒冠屨至此也其意以爲其學出自光山光山上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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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水德水實繼孔朱之緖云而斥已者謂之斥朱子 且以白湖美村二公自以厄斯文亂賊而肆然自擬 於春秋之征討其狂妄險拙有不可言其文曰苟使 吾道由吾而不至盡亡雖滅死萬萬無恨又曰此出 於血氣之私而或非義理之正則不但海神殛之其 得罪先生甚矣將欲質於墓中人苟非至狂妄至險 拙果如是乎嘗聞白湖公與此人竝生湖西道義相 友而一自已亥論禮後的見僞見不得不角肝膽化 仇杯盤成酖不論白湖公何如人而網不漏矣豈意 此人不恤其死而猶有死後之憾於垂死之日怨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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之意溢於楮墨間耶惟我晦菴先生棟梁乎宇宙曰 月乎今古自非病風喪心詬天罵日者亦知敬重況 白美二公實朱學中人寧有絲失毫爽而自取衆人 之鵠的哉言之不倫有若不出諸口其所以見誣者 固不足怒而爲其子者其可於心安乎宜乎尼山之 絶而乃反曰不思蓋愆宗國幾亡所謂宗國將以歸 重於德水也德水理氣之論旣反朱學而誤染釋毒 殆非一年則回頭轉腦爲世大儒者特其德水之高 處耳尙可與論於孔朱之統耶夫春秋天地之常經 而大一統也是以魯廟序僖於閔上春秋大書曰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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僖公蓋誅其敍兄弟而棄君臣也君臣大義昭如日 星而當我孝廟喪爲昭顯降服之論出於此人自 處孔朱之統動引春秋之義者果安在哉所貴乎道 者所以當雲雷之時施經綸之策也此人則不然是 已非人噓同漂異務植私黨龍挐于淵釀千古無 限大禍吾道由是而大崩時事以之而大乖托影之 蟾蜍假骨之狐魅曷足置齒牙間耶生平動作專出 血氣故自不能無疑奉質其師而所謂師者其人與 骨皆已朽矣豈能明其是非而號嘯嚶吁知有一言 髣髴焉已乎倘所謂至狂妄至險拙者是耶非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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至如代祭人鄭洊者不知何狀人而以此人送此人 祭此人而於其文特張之曰松江之後孫松江云者 卽澈之號也誠可謂善繼述矣嗚呼北伐之論騰 於草野寢於朝廷則此非靜言庸違者乎傳法之 徒腹心乎草野羽翼乎朝廷則此非聚徒成群者乎 敏於趨赴巧於逢迎而不思義理專務氣勝此則秦 客卿之同歸而宋韓王之不如也朱天子論蘇東坡 曰工卯斯普合爲一身吾於此人亦云戊戌七月旬 日昭道病隱手記
附宋本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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維歲次己巳月日門人宋時烈得罪於朝遠謫耽 羅戞過高井文元公沙溪金先生之墓而竊嘗受 敎以爲朱子不滿于伊川請見叔母之事故不敢 登拜使松江後孫鄭洊操文以告曰竊惟集群聖 之大成者孔子也集群儒之大成者朱子也前後 聖賢其揆雖一然其博約兩至巧力俱到無一不 合於堯舜禹以來大成之道則未有若朱子之全 者也以故栗谷先生之學專出於此常曰幸生朱 子之後學問庶幾不差惟老先生實承其統緖矣 竊瞯講論之際雖於周程張子之說有所異同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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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無取舍焉常曰微朱子則孔子之道不明不明 則不傳矣惟玆小子壹耳熟服膺以爲雖聖人復 起不可易斯言也不幸有尹鐫者戾氣所鍾乃敢 攻斥朱子不有餘力小子不自量揣極力觝排爲 其所嫉曾爲巨濟之行先是尹宣擧以牛溪宅相 又爲私淑之人而顧乃黨鐫甚力而厄斯文小子 又以爲春秋之法亂臣賊子先治其黨與幷與宣 擧而攻之則其子拯不思反已蓋愆之道而反讐 視小子顯有抑揚使其勢焰潛熾宗國幾亡又敢 爲詆侮栗谷之說小子不勝驚愕攻擊之言或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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其中因以仇嫉謗讟海溢河湧彼之相與黨助者 又多昔時攻栗谷之人之子孫也今因朝家有事 小子遂有此行拯乃騫騰小子自以爲苟使吾道 由吾而不至盡亡則雖滅死萬萬無恨矣第自惟 念雖受指敎之恩而行之不力未能變化氣質不 自知此出於血氣之私而或非義理之正耶苟如 是則不但南海之神罰之殛之而其得罪於先生 甚矣姑以此奉質于先生尊靈以爲朝聞夕死之 地伏願先生鑿臨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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珠潭先生文集 金聖運 (1673~1730) 大集(대집) 珠潭(주담) 蔚山(울산)
珠潭先生文集卷之三 雜錄 普聞菴遊錄
二月初六日元奚孫有鵬來訪問其所從來則至自 三神洞也孫有鵬曰雙溪雪松大禪伯端肅率僧法 雲同涉重溟見李頤命於南陽栫棘中一言之間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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托知己許以死生而其還肅贈詩云云彼亦和之云 云適忘其全篇而只誦一二句其意可知也余不勝 膽激乃言曰此僧吾亦聞名久矣今見其所爲自是 貪功名忘義理之輩實非禪門圓寂中人其罪倍萬 於四臣極可痛也孫生曰敢問四臣所爲何如余曰 四臣卽今罪名實非遐遠窮蟄者所可知而第以 客年構殺趙重遇伸救尹志述事觀之則乃是孔夫 子朱文公之罪人也何但一世之凶臣已矣乎魯僖公 母成風卽閔公之庶母而莊公之妾也僖公嗣統後 夫子大書春秋曰葬我小君成風則其不敢以先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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之妾事時君之母而特以時君之母而小君書之垂 法萬世則其法嚴且明矣宋章獻臨朝隱李氏之誕 仁宗李氏放出外宮而呂夷簡爲相盡心王室曲爲 開悟致令太后陞爵一品而宸妃之號纔加長逝之 訃遽傳太后使竇宮墻出尸而呂又諫曰宸妃實誕 聖人當以后禮治喪而出正門太后大怒曰相公欲 忘吾母子耶呂曰陛下實忘劉氏臣不忘劉氏太后 大悟使之一如呂言洽喪而後有楚王之言仁宗大 哭直向宸妃墓發見然後待劉氏加厚而國家因以 無事鎭定不亂皆夷簡之力也朱文公依春秋例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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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臣錄而至於呂夷簡傳盛稱其事褒揚鎭社防奸 之功其意豈不昭昭乎聖賢成訓昭揭宇宙日月乎 照臨而此輩非不知此義而當初將心今難掩蓋如 水益深如火益熱不知有君而結黨自固無大聖之 法而蔑文公之訓也苟不好孔朱之道而自出於範 圍之外則卽觸嚙之惡獸也宜乎肉食而寢處其皮 矣天地貫盈之罪人人皆得以誅之而此僧周公誦 莽其罪曷有此極耶孫生悅之十九日往普聞菴 見普悅長老打話從容而語及此事又見肅之書法 於僧燕逸懇求其詩於僧本淨而讀之則尤令人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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豎其法專出於趙松雪而詩意又如此字上觀心而 詩中見志則眞趙之後身而自號雪松者卽松雪之 倒用也此無乃佛家所謂宿緣業所化生者乎遂作 小說以誅其將心曰
上之二年二月初孫有鵬至自神興謂余曰山中 雪松禪海外滄浪臣百年神交千里符合今與僧 法雲方涉海相從言志相酬而其曰之而余耳之 者忘未傳略擧一二句語詩雖未詳意可知也十 九日余訪普悅禪伯於普聞菴有一小釋名本淨 在坐叩其派乃松之經徒也余懇悅禪要見其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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於所謂淨者松之吟曰拱北丹心自匪躬流言可 笑誤周公居東二歲何爲病寵招他時必反風浪 之和曰雙錫飄然過海尋重溟帀地瘴烟深從師 細聽無生話叢棘渾忘怖死心彼固罪通于天而 較兩詩此甚於彼也彼有知罪怖死之意而此則 乃敢以周公流言居東反風事反覆稱誦噫嘻此 曷故焉凡居王土而戴佛日者是可忍耶釋氏 之禍天下甚矣未有甚於此髡者也周公負成王 朝諸侯東征二年罪人斯得爲萬世開太平基成 周八百之祚而彼乃挺身獨入甘心私對棟橈
:: 0067 ::
儲君謀危宗社國到于今受其殃不啻水火之 相反而霄壤之自判也此雖阿謏作詩周公誦莽 而莽之爲莽莽亦自知安能周公莽哉徒令未死 者骨寒魂冷而其視周公不已蔑蔑甚而無忌憚 乎嗚呼筵說甚嚴祕則彼野狐精雖或不知而 獨不聞吾嶺罷場封疏事乎鼎鐺尙有耳則彼 野狐精雖不脫通而獨無耳乎夫以元聖之聖事 業如天而賊髡有何讐恨而戮辱至此極耶然則 賊髡不但嶺南之罪人而實海東之罪人也不但 國家之罪人而實宗社之罪人也不但名敎之
:: 0068 ::
罪人而實釋敎之罪人也此之罪實浮於彼而萬 磔而餘怒何以洩神人之憤耶世無一善崔也翰 勢不普兩者亦能甚普兩於嶺中可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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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주담 김성운 江右儒脈 / 儒學/南冥學派
2016. 11. 10.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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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에서 하동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북천면 소재지 조금 못 미치는 지점에 오른쪽으로 옥종가는 길이 보인다. 이 길로 들어서 5분 정도 가다보면 ‘중촌마을’ 이란 조그마한 표지석이 보인다.
기자는 하동군 북천면 중촌마을에 있는 함주재(緘珠齋)를 찾았다. 주담(珠潭) 김성운(金聖運)이란 선비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마을 뒤편에는 인천서원(仁川書院)이 있으니, 이 마을의 옛 이름이 ‘인천’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담은 1673년 진주 인천(仁川)에서 태어났다. 그러니까 약 400년전 이 마을에서 태어난 것이다.
주담의 본관은 울산(蔚山)인데, 이 마을에 울산 김씨가 살게 된 것은 주담의 부친인 삼함재 김명겸이 이 마을에 대대로 살아오던 전주 최씨인 죽당 최탁의 따님에게 장가를 들었기 때문이다. 삼함재가 죽당의 사위가 된 후, 그 이듬해 처가 곳인 인천 마을로 이주를 했는데, 주담이 태어나기 10여년 전의 일이다.
‘진양속지(晉陽續誌)’ 유행(儒行)조에 “김성운의 자는 대집(大集)이요, 호는 주담이다. 삼함재 김명겸의 아들로 재주와 기량이 출중하다. 경전(經典)에 밝아 문장이 뛰어나고 행동이 올바른 선비”라고 소개하고 있다.
기자가 찾은 함주재는 삼함재와 주담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건립한 것이다.
부친 삼함재(三緘齋) 김명겸(金命兼)은 남명의 학통을 이은 겸재 하홍도에게서 공부를 했다. 말보다는 행동이 앞선 선비로 남명학 계승에 심혈을 기울인 선비였다.
외조부인 죽당 최탁은 청나라에 볼모로 가는 소현세자와 대군을 호종하면서 신하의 도리를 다한 충신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죽당을 위해 세운 서원이 바로 인천서원이다.
주담은 지리산을 좋아했다. 일찍부터 남명의 기상이 깃들인 지리산의 산수를 좋아해 1712년 덕산동으로 들어가 ‘진주담(眞珠潭)’ 근처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자연을 완상하며 독서를 즐겼다. 진주담은 원래 천암(天巖)이라 불렸는데, 물이 흐르는 형세가 진주가 여기저기 흩어져 떨어지는 듯 하여 이름을 ‘진주’라고 고친 것이다.
주담은 진주같이 맑고 영롱한 못 근처에 집을 짓고 그 집에 ‘주담(珠潭)’이라고 부르며, 자신의 호로 삼은 것이다.
진주와 같이 맑고 영롱한 못처럼 자신의 마음 역시 한 점 티끌도 없이 깨끗하게 간직하고자 하는 의지가 엿보인다고 하겠다.
행장에 “일찍이 덕산의 진주담 위에 집을 짓고 주담정사(珠潭精舍)라 편액을 달았다. 거문고와 책을 곁에 두고 스스로 즐기니 학자들이 이를 높여 주담선생이라고 불렀다”라고 한 것을 볼 때, 주담의 사람됨이 얼마나 깨끗한 것을 추구했는 가를 알 수 있다.
또 주담은 중촌 마을에 학천당(學川堂)을 세우고 “두 정부자(程夫子)의 학문이 인간의 도리를 오래토록 유지하게 했으니,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천을 배우는 것이 소원이다”라고 했으니 공자의 학문을 계승한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의 학문 태도를 배우고자 한 의지도 엿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주자(朱子)의 학문은 더욱 높여 “우주의 동량이요, 고금의 일월이다”라고 까지 했다.
주담은 벗들과 덕천서원 근처에 살면서 남명의 학문과 정신을 본받고자 했다. 이는 주담의 고조부가 바로 남명의 제자인 백암 김대명으로, 백암 삼함재로 이어지는 가학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주담은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와 절친하게 지냈다. 식산은 조선 중기의 학자 허목(許穆)의 학문을 이어받고 정시한(丁時翰) 등과 교류하였으며, 실학자인 성호 이익(李瀷) 등의 후배의 학문 정진을 장려하였다. 그는 서울에서 성장하였으나 1697년(숙종 23)에 상주로 낙향한 뒤 영남의 이현일(李玄逸)·이형상(李衡祥) 등과 학문적 교류를 하며 한평생 재야학자로 지내면서 저술활동을 하였다. 그는 조선 후기 영남학파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영남학파의 학문적 발전에도 기여한 영남학파의 대표적 선비였다.
내동 선비 눌암 박지서가 지은 그의 묘갈명 첫머리에 “식산 선생은 평생 고결하고 뜻이 높아 사람을 함부로 사귀지 않아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사람이 드물었다. 매양 남쪽으로 내려오면 공으로 더불어 놀았는데, 일찍이 잔을 대하고 시를 지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주담이 당시 영남학파의 대표적 선비라고 할 수 있는 식산과의 친분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주담의 부인은 현풍 곽씨로 무위자 곽세건의 손녀이다. 무위자는 당시 이 지역의 대표적인 남인계열 선비로, 당시 서인의 영수인 우암 송시열을 탄핵하다 많은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백암, 삼함재로 이어지는 남명의 학맥을 이은 주담은 남인계열의 대표적 선비였던 무위자의 손녀를 아내로 맞이했으니, 그의 가학이 남다름을 알 수 있다.
평생 자연을 벗삼아 학문에 정진하던 주담은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행장에 “삼함재가 하겸재 선생의 문하에서 배워 제일 뛰어난 제자라고 불렸고, 선생(주담)이 또 식산과 도의로써 친교를 맺었으니 연원의 올바름과 서로 배우는 이로움이 명확하여 일반 사람과 달랐다.”라고 했다.
주담의 가문과 학문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부분이다. 하지만 400여년이 지난 지금 주담의 학문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초라한 함주재를 둘러보고 나오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진설명]주담의 학덕을 기려 후손들이 건립한 함주재. 부친인 삼함재의 호 ‘함’과 주담의 ‘주’자를 따서 이름지었다.
[출처] 130. 주담 김성운|작성자 더불어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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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장암. | 지리산
1, 제목: 불장암, 보문암
2, 언제: 2,013. 3. 23.(토, 대체로 맑음)
3, 누구와: 답사팀과
4, 코스: 바같내원- 불장암 지, 동당- 관음사, 곡점_ 보문암 지
5, 소요시간: 6시간 16분.(점심, 이동 등으로 별 의미 없음)
6, 산행소묘
지난 달에 이어 지리산자락에 흩어졌던 폐사지 답사산행을 합니다.
(아래 굴림체 인용문은 가객 님의 글에서 따온 것입니다.)
" 지리산에서 유독 신라의 사찰들이 산재한 곳이 내원골이다.
이웃한 장당골의 석남사 지를 비롯하여 옛 이름이 덕산사이었던 내원사와 함께 불장암 역시 신라 때의 사찰이었다고 하는바 자세한
창건이력은 전해져 오는 기록이 없지만 조선조 중엽 무렵부터 개인의 문집 또는 스님들의 행적에 등장을 하는 사찰로서 절집의 풍광이 수려하며, 당시 수행하는 인근의 스님들은 물론 일반 대중들을 위한 불교강원을 열었던 대찰이었다고 전한다."
불장암 흔적의 이해를 위해 옛 문헌의 기록들을 일부 옮김.
★1719년 신명구 [유두류일록] 에서.
〃........암자의 승이 나를 만류하여 잠시 쉬었는데, 해가 이미 저물어 곧바로 나아가 불장암(佛藏庵)으로 향하였다. 북쪽으로 작은 고개를 넘어서 동쪽으로 갔다. 절벽 아래에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것과 같았다.
내원점(內院店)이 그 가운데 있었고, 산 나무들이 모두 붉은 빛이었다. 해가 저물어 불장암에 들어가니 가파른 벽과 도려낸 듯 한 봉우리들이 둘러 있어서 마치 병풍과 같았다.
높은 나무로 된 숲과 깊은 골짜기가 우거져 있고, 오래된 탑은 우뚝 서 있으며, 정원의 끝에 있는 사찰은 고요하고 뛰어난 경치가 있었다. 진실로 남대 다음 간다고 할 수 있다.
산사람인 광밀(廣密)이 고적에 대하여 말해주었으나, 허망한 소리여서 믿을 수 없었으며, 대개 이는 나묵선사(懶嘿禪師)의 유지(遺址)라고 하였다. 암자는 이미 허물어져 중수를 마쳤는데, 공들인 것이 쉽지 않은 듯하다.〃
【해제: 당시 신명구는 중산리의 동당쪽에서 천장암과 원통암을 보고서 현 천잠사거리 부근에서 내원골에 위치한 불장암으로 향한 것으로 보이며, 불장암의 주변 산세를 자세하게 기록을 한 것이 특징이다.】
★1720년 신명구(申命耈)의 『불장암(佛藏庵)과 덕산사(德山寺) 옛터에 다녀온 기록』.에서.
〃....이 암자는 덕산(德山)에서 수 리 위에 있었는데, 그 처한 지세가 매우 높아서 허공에 있는 듯하였으며, 층층의 봉우리와 겹겹의 가파른 산들이 푸르고 아득하게 둘러싸고, 구름 덮인 숲은 선명하게 푸르러, 세속을 떠난 깨끗한 경계로서 이른바 산에서 으뜸가는 절이 바로 이것이었다.
암자는 언제 지었는지 알지 못하였는데, 승려가 말하기를, 뇌묵(懶黙)대사가 지었으며, 그가 남긴 탑이 아직도 우뚝하니 남아 있다고 하였다.
그 사이에 무너졌다 다시 중건된 것이 한 두번이 아닌데, 지난봄에 요혜(了慧)라는 승려가 옛날 규모보다 더 늘려서 웅장하게 중건하였다.
암자의 오른쪽 산기슭에는 ‘불창대(佛唱臺)’가 있는데, 그곳에 관해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자못 억지스러워서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
내가 이미 덕산의 수석을 사랑한데다가, 또 불장암의 그윽하고 뛰어난 경치까지 즐기느라 7-8일 동안이나 암자에 머물면서 떠나지를 못하다가, 길을 나서려 하며 애오라지 느낀 바를 기억하여 글로 써서 암자의 승려에게 주었다.〃
【해제...신명구의 남계집에 수록된 기록으로 1년 전 지리산 산행도중 들른 불장암을 다시 들러서 남긴 글로서 당시 덕산사(현 내원사)는 폐허의 상태이며 ,불장암 중수의 역사와 “불창대라”는 새로운 지명이 흥미를 끈다. 한편 신명구 이후의 기록 들은 불창대를 창불대라고 했으며, 각자가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어 탐구의 가치를 돋우고 있다.】
그 외 신명구 이후 1818년 까지 명암 정식등 당대의 진주 인근 선비들이 남긴 시들이 여러 편 있기도 하며, 스님의 불장암 상량문이 있기도 하다.
★ 불장암의 위치추정을 할 수 있는 기록의 정황들.
1.불장암은 덕산사 (현 내원사)에서 약 10리 거리에 있다.
2.불장암 주변에 깎아지른 벼랑이 있으며, 이름을 불창대 혹은 창불대라고 했다.
3.낙포대 혹은 비폭대라고 불리운 아름다운 폭포가 있다.
4.절터 경내에는 반드시 탑의 기단석이라도 있어야한다.(불과 150여 년전 까지 건재했던 절집이기에 기단석 외 다른 불적들도 확인하기가 용이하리라 봅니다.)
이번에는 보문암 지입니다.
곡점에서 바로 위, 법화사 팻말을 보고 들어갑니다.
13: 40. 실제로는 법화사 이름은 없고 해탈선원 간판이 붙었습니다.
주지 스님은 출타 중이시고 비구니 스님만 보입니다.
바로 위에 도성암이 있습니다.
위 지도에는 미륵암이군요.
" 조선시대 선비들의 지리산 유람록에 자주 등장하는 보문암은 시천면 신천리 절골에 위치한 사찰이다.
신천리 절골은 구곡산의 중산리 방향의 골짝으로서 현지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골짝 전체가 절집의 흔적이 남아있어 보문암의 규모가 대찰이었던 듯 하며, 스님들의 부도 수 기가 남아있다고 전한다.
절집의 정확한 흥폐 사적은 알 수가 없지만 유생들의 기록의 정황을 보면 신라대에 창건이 되어 조선조 중세까지 존재한 절집으로 추정이 가며, 절집의 이름이 보암사(普庵寺)에서 임진왜란 이후 보문암(普聞庵)으로 바뀌어 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지리산을 등산한 선비들은 대개가 보문암으로 부터, 산길 안내는 물론 숙식의 편의를 받은 흔적들이 기록에 보인다."
해탈선원 오른쪽 작은 지계곡으로 올라갑니다.
묵은 계단식 논밭이 계속 이어집니다.
" 최초의 지리산 유산기인 1463년 이륙의 “지리산기”에는 보암사라고 칭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을 하고있다.
『 살천 마을에서 20여 리를 가면 보암사(普庵寺)가 있는데, 그 살천 마을 이내는 내산(內
山)이라 이르고, 이외는 외산(外山)이라고 한다. 보암사(普庵寺)에서 곧장 올라 빨리 가면
하루 반에 천왕봉에 당도할 수 있다.』고했다.
지금의 남사 부근에서 살았던 진주선비 남효온은 1487년에 덕산사(현 내원사)에서 구곡산을
거쳐 천왕봉 가는 길에 들른 보문암을 보암사라고 기록을 하면서,
『산길 40리를 걸어 보암(普庵)에 닿았다. 암자는 감나무∙대나무에 둘러싸여 있었다. 주지승
도순(道淳)이 감을 따서 나에게 권하였다. 도순은 문자를 배우지 않고 도를 닦아 불법을 깨
친 것이 정밀하지 못하였다.』고 당시의 보문암 정경을 전하고 있다."
5분 남짓 걸으니 바로 부도가 나타납니다.
"이후 1700년경에 절골 아래 지금의 곡점에서 진주담(眞珠潭)이라는 정사(精祠)를 짓고 살았던 옥종의 김성운(金聖運)이라는 유생의 문집에 “普聞菴遊錄”이라고 기록되어진 것을 비롯하여, 1719년 신명구, 1746년 명암 정식, 1775년 유문용 등 진주 인근의 유생들의 기록인 두류록 들이 보문암의 당시 정황들을 세세하게 전하고 있는 가운데 구곡산의 옛 이름이 허중산이라는 사실을 일러준 신명구의 “유두류일록”에서 보문암 기록을 옮겨서 보문암 폐사지탐구에 효율을 기대해 본다."
보문당
백미당
유지당
마모가 심해 판독이 어렵죠?
청련당
위 인용문에서 수 기의 부도가 있다고 했는데 다섯 기의 부도가 이렇게 폐사지에 방치되어 있어 놀랍습니다.
스님의 당호를 찾아 내력을 알면 절의 역사도 어느정도 추정이 가능할 터인데.......
가객 님의 고뇌가 깊습니다.
마른 체구가 더 마를까 걱정입니다.
" 『오후에 보문암에 머물렀다.
암자는 허중산(虛中山)의 산허리에 있고, 중수한 지 오래 되지 않아서, 요사(寮舍), 횡루(橫樓)는 나뉘어 뛰어오름을 다투고 있으니, 구부러진 난간에 기대어 있어서, 마치 속세를 벗어날 생각이 있는 듯했다. 사방의 산들을 묶어 세워 하늘에 꽂아 놓은 듯해서 멀리서 살필 수 없었다. 오직 묵계(墨溪) 뒤에 일지산(一支山)이 남쪽의 구름에 은은히 비칠 뿐이었다. 저녁에는 취일노사(就逸老師)의 조그마한 요사에서 머물렀다. 밤중에 갑자기 깨닫고 창문을 열고 보니, 하늘이 맑고 달이 비치어 빛을 내고 있고, 수많은 골짜기와 봉우리들이 대낮처럼 밝았다. 문득 영대(靈臺) 가운데에 한 점의 티끌도 없었음을 깨달았고, 야간까지도 정신이 상쾌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내 마음 속에서 중얼거리면서, 어제 하늘에 구름이 진 윤곽이 형산(衡山)에 구름이 걷힌 것과 같았다고 하였다. 오늘밤 맑게 갠 후의 오르는 모습은 하늘기둥에서 달을 즐기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혹은 하느님이 나를 시켜 경치를 맑게 하고, 십 년의 때가 묻은 가슴을 씻으로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인하여 늙은 스님(老師)과 더불어 산을 유람하면서 뛰어난 경치를 이야기하였고, 4운 1수를 짓기에 이르렀다. "
한 시간 정도의 확실한 보문암 지 탐구를 마치고 다시 오대사 지로 가려다가 컨디션 악화로 더 이상의 일정을 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