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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경덕 3시집『사물의 입』(2016. 시와미학 시인선)
후원:서울문화재단
극단적인 이미지의 충돌과 시적인 긴장
고봉준 (문학평론가)
1.
사물의 입. 이것은 사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사물의 이야기, 사물 자체에서 흘러나오는, 사물의 육성을 가리키는 제목이다. 사물의 ‘입’은 음식을 섭취하는 ‘먹는 입’이 아니라 ‘말하는 입’이며, 이때의 ‘말’이란 사물의 ‘존재(함)’을 증언하는 것이다. 그것은 동물의 ‘먹는 입’과 달리 자신의 존재를 가시화하는 ‘입’이며, 시인은 빈종이 위의 하얀 공간을 ‘사물’의 발화에 내어준다. 마경덕의 시는 오랫동안 사물에 대한 ‘관찰’에서 시작하여 그것을 삶의 맥락과 겹쳐놓는 이른바 관찰의 시학을 견지해왔다. ‘관찰’이란 그 행위의 주체와 대상 사이의 일정한 거리를 전제하며, 예술에서 그 ‘거리’의 존재는 시적 진술이나 정물화 등에 익숙하면서도 안정적인 구도를 가져다준다. 하지만 예술의 역사는 소위 주체와 대상 사이에 전제되는 이 거리, 그것에서 기원하는 안정적인 구도가 신체적인 지각의 진실을 배반하고 외부에서 주어진 관행/상식이라는 이름의 권력 효과였음을 비판해왔다. 그런 점에서 현대시가 관찰의 안정감보다는 그 거리를 폭력적으로 무화시키는 질감의 언어를 모색해온 과정은 주목을 요한다. 이 시집을 펼쳐든 독자로서 우리 또한 시인의 언어가 ‘관찰’에 머물고 있는지, 주체와 대상 사이의 거리를 횡단하여 사물을 질감의 차원으로 개방하는지 살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그 이전에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 도대체 ‘사물’이란 무엇인가? 일찍이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세계는 ‘사물’이 아니라 ‘도구’로 채워져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사물’과 ‘도구’가 다르다는 것을 뜻한다. 하이데거가 그 유명한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고흐의 구두 그림을 놓고 해명하려는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사물의 영어 표현인 thing에 해당하는 우리말 표현법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물’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하이데거는 그것을 ‘존재자’라고 명명했다. 그런데 서양철학사는 이 존재자를 그것의 소재와 형식, 그러니까 그것이 무엇으로, 어떤 모양으로 만들어졌는가에 초점을 두고 사유해왔다. 이 존재론의 전통에 반기를 든 것이 바로 하이데거의 존재 사유, 즉 존재론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구두라는 사물과 구두라는 사물의 ‘존재’는 전혀 다른 것이다. 사물로서의 구두는 특정한 재질로 만들어진 것이며, 따라서 그것이 제작되는 곳 - 주로 공장 - 에서 만들어지는 순간 태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 즉 인간 존재와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놓여 있는 어떤 것이다. 반면 하이데거에게 구두의 ‘존재’는 그것을 신고 활동할 때에 드러난다. 하이데거가 고흐의 그림에 등장하는 구두를 두고 세계의 침묵하는 부름에 대한 응답이라고 설명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때의 존재론적 물음은 구두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구두의 존재, 즉 있음에 대한 물음이라는 것이 하이데거의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을 통해 하이데거는 ‘세계’가 사물로서의 구두 같은 것으로 채워진 곳이 아니라 ‘존재=있음’이라는 구체적 상황으로 채워진 현실세계임을 드러내려 했다. 사물에 대한 이러한 차이는 종종 ‘눈앞에 있는 것’과 ‘손 안에 있는 것’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거니와, 후자가 강조하는 것은 사물의 존재는 독립적으로 이해될 수 없으며 오직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만 파악될 수 있다는 점이다. 하이데거는 이 후자를 ‘도구’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도구’는 인간의 삶 이전에 존재하거나 발생하는 것이 아니며, 세계란 단순한 사물의 합이 아니라 인간이 사물과 도구적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상황에 부여된 이름이다. 흔히 하이데거의 예술론을 이야기할 때 인용되는 그리스어 알레테이아(Aletheia)는 예술의 가치가 사물-대상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진정한 모습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하이데거 철학에서 사물과 도구의 거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불분명해지고, 실제로 만년의 하이데거가 펼친 사물의 철학은 도구론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사물’의 존재론이 언제나 분명하게 해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2.
마경덕 시에서 ‘사물’은 하이데거적인 의미의 ‘도구’에 가깝다. 그것은 ‘사물의 입’이라는 사물-타자적 존재론의 외양을 띠고 있지만 실제 작품에서 드러나는 방식은 다분히 현상학적이어서 인간주의적인 맥락을 함축하고 있다. 굳이 말하자면 고흐의 구두에 관한 글에서 하이데거가 사물과 구분하여 설명한 ‘도구’ 개념이 마경덕의 시에 등장하는 ‘사물’에 근접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이데거가 ‘손 안에 있는 것’, 즉 ‘도구’라고 명명한 것을 시인은 ‘사물’이라고 부른다. 명명된 이름은 다르지만 그것들은 인간 존재의 삶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사물-대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동일하게 인간과의 도구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돌멩이를 던지는 순간
둥근 입 하나 떠올랐다
파문으로 드러난 물의 입
잔잔한 호수에 무엇이든 통째로 삼키는 거대한 식도(食道)가 있다
물밑에 숨은 물의 위장
찰나에 수면에 닫히고
가라앉은 것들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물가에서 몸부림치던 울음을 지우고 태연한 호수
계곡이며 개울을 핥으며 달리다가
폭포에서 찢어진 입술을 흔적 없이 봉합하고
물은 이곳에서 표정을 완성했다
물속에 감춰진 투명한 찰과상들, 알고 보면 물은 근육질이다
무조건 주변을 끌어안는
물의 체질
그 이중성으로 부들과 갈대가 번식하고 몇 사람은 사라졌다
물의 얼굴이 햇살에 반짝인다
가끔 허우적거림으로 깊이를 일러주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잔잔한 물의 표정을 믿고 있다
—「물의 입」전문
‘사물’을 중심에 놓고 보면 마경덕의 시세계는 사물에 대한 ‘관찰’에서 사물의 ‘존재’, 즉 ‘있음’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것은 시에 대한 시인의 지향, 즉 시와 언어에 대한 생각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하이데거의 ‘사물’이나 ‘도구’에 대한 현대적 해석이 주장하듯이 사물에 대한 도구적 관계에는 주체-대상의 관계와 정확히 일치한다고 말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예컨대 어떤 젊은 부부의 집 복도에 대한 묘사로 시작되는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의 도입부를 떠올려보자. 이 소설은 집을 구성하고 있는 공간과, 그 공간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다양한 사물들에 관한 묘사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우리가 늦은 저녁에 귀가하여 거실의 불을 켤 때 경험하듯이, 어떤 공간을 채우고 있는 사물과 인간의 관계가 주인과 소유물의 관계로만 경험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사물을 본다고 생각할 때, 사실은 그 사물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순간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마치 도구가 도구일 때조차 그것을 수월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의지만을 내세울 수 없듯이. 도구에 대한 올바른 사용은 그것을 나의 배타적인 소유물로만 간주하지 않고 그 특징을 충분히 익힘으로써 도구적 ‘관계’를 맺어야 가능하다. 이는 도구적 관계에 있을 때조차 ‘도구’에는 우리가 온전히 제압할 수 없는 사물로서의 타자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위 타자의 시학은 정확히 이 타자성에 기초하기에 사물 또는 도구를 주체적․인칭적으로 전유하지 않는다. 만일 도구에 대한 타자의 시학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도구가 인간의 의지를 배반하는 지점에서 시작될 것이다. 반면 마경덕의 시는 도구를 관찰할 때조차 주체적․인칭적인 전유를 염두에 두고 있다. 이것이 그녀의 시에서 사물, 대상, 도구 등이 결코 언캐니(Uncanny)한 형상으로 등장하지 않는 이유이다.
인용시의 시적 대상은 ‘물’이다. 화자에게 ‘물’은 수소와 산소 같은 원소로 이루어진 대상이 아니며 나아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대상으로서의 ‘물’도 아니다. 화자는 오랜 관찰을 통해 ‘물’에서 ‘입’이라는 동물적인 요소를 발견했는데, 이는 정확히 속성의 유사함에서 출발하는 사물에 대한 은유적 전유이다. 즉 우리는 ‘물’에도 ‘입’이 있다는 시적 진술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지만, 동시에 그것이 ‘물’의 특정한 형상이나 속성에서 유추된 것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마경덕의 시에서 이 짐작의 차원은 결코 숨겨야 할 어떤 것이 아니다. 예컨대 파문을 일으키는 물의 표면에 주목해 보자. 돌멩이가 닿는 순간 생기는 원형의 파문은 ‘입’을 연상시키고, 나아가 수면에 부딪히는 모든 것을 삼키는 ‘물’ 특유의 속성 역시 그것이 ‘입’과 같은 기능을 수행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상력의 문법이 수면 아래에 숨겨져 있는 “거대한 식도(食道)”까지 이어지는 것은 일견 당연해 보인다. 이것만이 아니다. 이 시에는 고여 있는 ‘물’에서 우리가 읽어낼 수 있는 속성들, 심지어 물에 몸을 던져 사라지는 죽음까지도 등장한다. 흥미로운 것은 화자의 상상력이 ‘물’에 생명만이 아니라 동물적인 난폭함을 부여한다는 사실이다.
둥근 접시에
선홍색 꽃잎이 활짝 피었다
되새김질로
등에 꽃을 심고 쓰러진 소여,
피처럼 붉은 저 꽃은
죽어야 피는 꽃이었구나
—「꽃등심」전문
마경덕의 시는 동물(성)과 식물(성)이라는 극단적인 이미지의 충돌을 통해 시적인 긴장을 만든다. 동물과 식물 이미지가 전부는 아니다. 그녀는 사물에 대한 관찰을 통해 대상에서 새롭고 낯선 이미지를 찾아내고, 그렇게 발견된 이미지를 사물에 대한 상식적인 이미지와 충돌시킴으로써 시를 생산한다. 동물성과 식물성, 즉 동물에서 식물성을, 식물에서 동물성을 이끌어내는 것은 이러한 충돌의 대표적인 경우이다. 짐작하듯이 ‘꽃등심’과 ‘꽃’의 관계는 일종의 말장난(pun)이라고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시에서 그것의 효과는 말장난보다는 그것이 동물성과 식물성이라는 이질적인 관계를 횡단한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둥근 접시에/선홍색 꽃잎이 활짝 피었다”라는 진술에 언어유희가 개입되지 않은 아니지만, 그것은 언어유희 이전에 시각적인 관찰과 이미지에 의해 견인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심지어 “죽어야 피는 꽃”이라는 마지막 진술은 삶(생명)과 죽음이라는 또 다른 극단적 가치를 횡단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도장」에 등장하는 신체에 각인된 다양한 상처의 흔적도,「톱밥」에서 나무가 톱질을 당하여 ‘톱밥’을 뱉어내는 장면을 “산낙지처럼 꿈틀거리는 생목들”이라고 비유적으로 표현한 장면도,「볶은 콩」에서 ‘날콩’을 요리하는 과정을 날콩, 즉 생(生)에서 “오늘 내 손에 죽었다”, 즉 사(死)로의 변화로 형상화한 것도 모두 이러한 이미지 충돌의 또 다른 사례라고 말할 수 있다.
3.
노점상 여자가 와르르 얼음포대를 쏟는다
갈치 고등어 상자에 수북한 얼음의 각이 날카롭다
아가미가 싱싱한 얼음들, 하지만 파장까지 버틸 수 있을까
사라지는 얼음의 몸, 한낮의 열기에 조금씩 각이 뭉툭해진다
질척해진 물의 눈동자들
길바닥으로 쏟아지는 땡볕에 고등어 눈동자도 함께 풀린다
얼음은 얼음끼리 뭉쳐야 사는 법
얼음공장에서 냉기로 꽁꽁 다진 물의 결심이 풀리는 시간,
한 몸으로 들러붙자는 약속마저 몽롱하다
서서히 조직이 와해되고 체념이 늘어난다
핏물처럼 고이는 물의 사체들
달려드는 파리 떼에 모기향이 향불처럼 타오르고
노점상은 파리채를 휘두른다
떨이로 남은 고등어, 갈치 곁에 누워버린
비리고 탁한 물
이곳에서 살아나간 얼음은 아직 없었다
노점상은 죽은 생선에 자꾸 죽은 물을 끼얹는다
—「얼음의 죽음」전문
마경덕의 시에서 ‘사물’은 항상 특정한 맥락 속의 사물, 그러니까 맥락과 함께 발견된다. 이것이 ‘사물’ 자체에 집중적인 관심을 표시한 시인들, ‘사물’에 대한 정물화의 시선 등과 그녀의 시가 구별되는 지점이다. 일찍이 하이데거가 고흐의 구두 그림에서 발견한 ‘존재(있음)’의 문제도, 비스와바 쉼보르스카가 “세상에 자기라고 내어 놓는 자기의,/구두 사이즈는 말하되, 간 곳은 감추고.”(「자기소개 이력서 쓰기」)라는 짧은 진술로 세계의 물신화를 비판한 것도 ‘삶’이라는 맥락의 중요성을 환기하기 위함이었다. 마경덕의 등단작 「신발론」은 정확히 삶이라는 맥락 속에서 ‘신발’이, 그것의 ‘존재(있음)’ 의미가 발견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런데 마경덕의 시에서 이러한 사물의 존재 발견 과정은 동시에 일상적 삶에 대한 시인-화자의 성찰과 중첩된다. 이것을 윤리적 태도라고 이야기한다면, 마경덕의 시는 사물의 존재 발견과 사물에 대한 윤리를 경유하여 삶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는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신발론」이 “어쩌면 나를 싣고 파도를 넘어 온 한 척의 배. 과적(過積)으로 선체가 기울어버린. 선주(船主)인 나는 짐이었으므로,”(「신발론」)처럼 ‘신발’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나’에 관한 이야기, 나아가 ‘신발’과 ‘나’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인 것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시인이 ‘사물’을 관찰하거나 묘사할 때, 그러니까 시에 사물이 등장할 때, 진술의 초점이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놓인 맥락에 맞춰지는 특유의 시적 원근법이 강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이것은 ‘사물’을 인간의 삶과 떨어져 존재하는 독립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 태도, 그것을 시인 자신을 포함한 우리의 일상 속에서 재발견하려는 소위 맥락화의 의지가 개입한 것이다. 또한 그것은 시인 자신은 물론 독자에게도 익숙한 맥락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사실주의 회화에서의 원근법과 유사한 효과를 가져다준다. 가령 인용시를 보자. 이 시에서 초점의 대상은 ‘얼음’이다. 시인은 한낮의 열기로 인해 얼음이 녹아 물이 되는 과정을 ‘얼음의 죽음’이라고 인식한다. 그런데 시에서 ‘얼음’은 그 자체로 시적 대상으로 다뤄지지 않는다. 이 시에서 얼음은 노점에서 생선을 파는 생선가게 좌판이라는 생활 세계적 맥락을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다. 물론 ‘얼음’ 그 자체가 목적이라면 그것이 만들어지고 녹는 과정에 생선가게, 그것도 한 여성이 노점에서 생선을 파는 가게라는 맥락이 필수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경덕의 시는 절대 이런 생활세계의 맥락을 포기하는 법이 없다.
접시꽃 담벼락 아래 튀밥장수 영감 지루한 하품이 손풍로를 돌린다 강냉이 마른떡국 콩, 손때 절은 깡통 일렬로 줄 맞추고 압력계기판 눈금이 달아오르면 담장 위 키다리 접시꽃이 아슬하다 고소한 냄새에 목을 뽑은 접시꽃 한 입만, 한 입만 빈 접시를 내밀고
뻥!
튀밥이 날고
쨍그랑!
접시가 깨지고
얄팍한 소갈머리에 뭐 담을 게 있어 쯧쯧 혀를 차는 영감 평생 뻥만 치다 늙은 장돌뱅이 영감 속 깊은 자루에 튀밥을 담는 동안 귀가 먹먹한 접시꽃 재빨리 깨진 접시를 주워 모은다 층층 다시 접시가 쌓이고 더 튀밥 언제 한 입 먹어보나 쩍 입을 벌린 접시꽃 뜨거운 햇살이 뱅글뱅글 풍로에 감기고 담장 위 접시꽃 얼른 새 접시를 꺼낸다
—「접시꽃 핀다」전문
‘사물’을 그 자체로 초점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맥락 속에서 발견하는 것, 또는 맥락 속에 위치시킴으로써 재발견하는 시적 시선은 마경덕의 시 어디에서든 쉽게 발견되는 특징적인 면모이다. 이 시에서의 ‘사물’인 ‘접시꽃’ 역시 “담벼락 아래 튀밥장수 영감”이라는 이야기 요소가 강한 맥락을 배경으로 등장한다. 이 때문에 ‘접시꽃’은 튀밥장수의 ‘접시’와 중첩되면서 새로운 시적 의미를 부여받는다. 이러한 사물의 맥락화는 사물을 맥락에서 분리시켜 조명하려는 태도와 분명한 대조를 이루거니와, 이것은 시선의 선택 문제이다. 그것은 카메라로 사물을 촬영할 때 초점을 사물 자체에 두면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배경이 흐릿해지는 것과 유사한 이치이다. 이때 카메라의 시선은 사물을 배경으로부터 분리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반대로 배경과 사물의 자연스러운 관계를 강조할 경우 사물은 결코 맥락을 벗어나는 물신적 대상이 되지 않는다. 전자의 시선이 세계를 조각들의 합으로 이해한다면 후자는 세계를 유기적인 관계의 총체로 이해한다. 그리고 마경덕의 시는 후자의 계보에 속한다. 그래서 그녀의 시에서 ‘눈물’은 그 자체가 아니라 이미-항상 “밤새 눈물을 분석하던 어리석은 밤”(「눈물의 성분」) 같은 맥락과 함께 등장하고, 나아가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을 우리는 짐승이라고 부른다”(「눈물의 성분」) 같은 새로운 맥락과 중첩됨으로써 이야기로 증폭된다. 만일 그녀의 시를 가리켜 전통적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사물’과 ‘맥락’으로 구성된 시적 태도를 가리키는 것일 뿐 소재나 내용과는 무관하며, 같은 맥락에서 마경덕에게 ‘서정’은 이러한 생활 세계라는 강력한 일상적 배경과 결코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4.
다시 ‘사물의 입’에 관해 생각한다. 이것은 ‘사물’ 스스로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말하기일까, 아니면 시인-화자가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사물’에 투사해 얻어내는 복화술의 일종일까. 한 편의 완성된 작품을 놓고 그것을 확증하기는 어렵지만 두 가능성에 함축되어 있는 사유의 방향은 전혀 다르다. 예컨대 「두부의 공식」에서 아버지의 출소를 기다리고 있는 화자에게 구치소를 걸어 나오는 아들의 모습이 “저기 물렁한 두부 한 모 걸어 나온다”라고 감각될 때 이것은 ‘두부’의 말인가 화자의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을 찾자는 말이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영원히 대답될 수 없는 질문, 그리하여 대답을 종결짓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다시 물어야 하는, 질문을 위한 질문인지도 모른다. 혹은 그 질문 자체가 시의 처음이자 끝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문학적 체험 안에서 ‘인간’과 ‘사물’의 관계는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일방적으로 규정하지 못하는, 시인이 「포스트잇」에서 “하나이면서 각각”인,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물고’와 ‘놓고’의 중간”이라고 표현한 것과 비슷하게 모호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시인이 ‘사물’을 관찰하고 그것에 시선을 둘 때, 그것이 늘 인간에 의한 사물-대상의 전유인 것만은 아니다. 어떤 측면에서 시는 ‘사물’이 인간을 압도하는 순간 언어에 대한 권리를 ‘사물’에게 넘기고 그것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존재만이 들을 수 있는 사물의 내밀한 목소리인지도 모른다. 마경덕의 시에서 시인-화자와 사물의 관계는 이러한 두 가지 가능성 모두를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화자들은 사물을 한낱 인간의 소유물, 인간이 마음대로 처분해도 좋은 수단적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물을 닦달(Ge-stell)하지 않는다. 바로 그때에만 사물은 말하며, 바로 그때에만 사물에게 ‘말하는 입’이 생긴다. 우리는 종종 ‘말하는 입’과 ‘듣는 귀’의 관계를 인과적인 시간의 순서로 착각한다. ‘입’이 먼저 말해야 ‘귀’가 들을 수 있다는 논리가 그것이다. 하지만 사물과 인간의 관계에서는 이 순서는 전도된다. 즉 ‘듣는 귀/들을 수 있는 귀’가 먼저 존재해야 비로소 ‘말하는 입’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말하는 존재 이전에 듣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자신을 듣는 존재로서 간주함으로써 사물에게 ‘말하는 입’을 주는 존재,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사물의 그 미약한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존재,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섬세한 청각의 소유자. ‘사물’에 대한 마경덕의 시는 이러한 시인의 존재론을 보여준다.
고봉준 (문학평론가)
1970년 부산에서 출생. 부산외국어대학교 및 동대학원 석사과정 수료. 경희대학교 국문과 대학원 박사과정 마침. 2000년 《대한매일》 신춘문예에 평론 〈혁명적 담론에서 생성적 담론으로의 넘어가기 - 백무산론〉이 당선되어 평론 활동을 시작. 2007년 현재 『작가와비평』, 민예총 웹진 『컬쳐 뉴스』의 편집위원으로 활동 中. 저서로 『모더니티의 이면』, 『반대자의 윤리』, 『들뢰즈와 문학 기계』(공저), 『이것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다』(공저), 『한국 문학권력의 계보』(공저), 『비평, 90년대 문학을 묻다』(공저)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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