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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숲에 들다
권상연
십 리 대밭을 거닌다. 일정한 간격의 마디가 켜켜이 쌓여 올라간다. 넘어질세라,구부러질세라 애써 잡은 마디 하나하나가 큰 나무로 섰다. 한결같은 모습이 한결같지 않음을 나는 대숲의 나무에서 읽는다.
마디 하나에도 결이 들었는가. 단번에 뻗어 올려 하늘과 땅에서 서로 다른 삶을 그렸다. 한날한시에 태어난 쌍둥이도 기질이 다르듯 대숲 마디들도 자신만의 독특한 문양을 타고났나 보다. 바람과 햇살과 눈비를 맞으며 하늘에선 땅으로, 땅에서는 하늘을 향해 각각의 무늬를 새겨간다. 빛의 방향과 바람의 속도에 맞춰 짙어지기도 옅어지기도 하리라, 그것만이 자신을 드러내는 길이었을 게다.
굵직한 맹종죽 옆에 선다. 나무들이 조금씩 각도를 비껴가며기울었다. 오래전에 선 나무와 최근에 올라온 나무의 키가 어찌 같을까만은 기울기만은 엇비슷하게 맞춰간다. 바르게 서는 것을 운명이라 여기는 나무의 속내가 답답한가. 바람이 대숲에 들어와 곧은 질서를 무너뜨린다. 햇살도 비도 바람의 말에 수긍하듯 마디마다 새로운 결을 보탠다.
내가 살았던 바닷가에는 조릿대가 많았다. 오죽하면 마을 이름이 ‘세죽(細竹) 마을’이었을까. 버스정류장을 내려서기만 하여도 길목을 따라 빽빽이 들어선 대나무 울타리를 볼 수 있었다. 어찌나 빽빽했던지 대숲을 드나드는 건 바람과 생쥐와 작은 곤충들뿐이었다.
마을의 세죽은 색이 없었다. 가을날 마른 풀처럼 사시사철을 희끄무레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응당 대나무라면 굵어야 하고 사철 푸르러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기에 희멀겋고 삐쩍 마른 조릿대는 성에 차지 않았다. 바닷바람 탓인 줄은 까맣게 모르고 푸르지 않다는 이유로 대숲이라 인정하지 않았다. 골목을 지날 때마다 대숲이 말을 걸어왔을 터인데도 어촌을 벗어나는 걸 소망했던 나는 바람이 전하는 댓잎 소리에 귀를 막았다. 가늘디가는 바소(所)의 잎이 그려간 바다의 마음을 모른척했다.
시댁으로 드는 길목에는 철길이 있다. 세죽 마을의 대숲처럼 마을을 에둘렀다. 철로가 뒤틀어지지 않고 평행하게 쭉 뻗어 가는 것은 일정하게 박혀 있는 침목 덕분이다. 침목은 철로의 가장 밑바닥에 박혀 궤간을 유지하며 하중을 견디는 철로의 마디이다. 열차가 안전하게 달릴 수 있는 것도 침목이 한결같이 버티고 있어서이리라. 철길의 침목은 세죽 마을에서 자란 내 삶이 뿌리를 내리는 과정이었음을 알려주는 마디였는지도 모른다.
대나무는 지탱할 만큼 새 가지를 치고 잎을 낸다. 마디 하나에 한 개 또는 두 개의 가지를 친다. 그 가지에서 또 다른 가지를 내고는 필요한 만큼의 잎을 피운다. 철로는 이파리 한 장 달지 않은 침목으로 시댁으로 드나드는 나를 마중 오고 배웅했다.
세상의 마디들은 세워지기도 하고 구부러들기도 한다. 기어가기 위해 대게의 마디는 다리를 구부리고 걷기 위한 노인의 지팡이는 몸 앞, 옆에서 펴지지 않는가. 허나, 레일 아래 침목과 대나무의 마디만은 오로지 세우는 것만을 숙명으로 여기는 듯하다.
시댁의 담장은 옹죽이다. 쭉쭉 뻗은 마디에 두 가지를 쳐서 잎을 피운 옹죽은 가지와 잎으로 서로를 부축하며 담장을 이룬다. 태풍이 불어와도 쓰러지는 법 없이 바람이 부는 방향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며 집안의 온기를 보듬는다. 나는 그 속에서 숨 쉬며 살아가는 여유를 부리곤 했다.
시댁에서의 첫날밤을 시어머니와 보냈다. 아들을 길러낸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릴 여유가 없는 낯설고도 어려운 밤이었다. 품 안의 자식을 내어주는 어미의 심장 소리를 멀찍이 떨어져 들으며 새벽닭 울기만을 기다렸다. 모로 누운 어머니의 등이. 소리 없는 흐느낌이 잠잠해질 즈음 기차 소리를 들었다.
레일 위 침목을 넘어갈 때마다 열차의 소리는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시어머니를 위로하듯 칙칙 - 칙칙 참으로 구성지게 읊었다. 나는 그런 기차 소리를 들으며 문창살에 일렁이는 댓잎의 그림자 수를 세고 있었다.
삶은 마디마디로 이어져 팽팽하다. 아이가 태어나고 걸음마를 하며 성장해 갈 때마다 내 삶은 희미해지고 싱거워지는 줄만 알았다. 붙어있지 않아 더 크게 벌어진 간격이 쭉쭉 뻗어 가기만 하는 마디라 여겼다. 반듯하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똑바로 섰다고 생각했다. 성인이 된 아들이 제 길을 떠나고 나서야 짧다고 여겼던 마디들이 나를 나로 존재하게 했음을 기억해 냈다.
나는 남들과 부딪치는 게 싫어 거리를 두었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마디의 수만 늘였다. 마음을 주지 않고 관계망만 구축하다 보니 진정으로 아픔을 나눌 이가 없다. 부딪치고 어루만지며 만들어가는 게 진득한 삶이라는 걸 몰랐다. 고비마다 홀로 버티다보니 속이 비었다. 비어서 허전하고 쓸쓸했다. 가까운 이들조차 나의 속사정을 모를 때가 많다. 당연히 지인들도 자신의 아픔을 털어놓지 않는다. 그래서 내 삶의 무늬가 이토록 밋밋하다고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요즘 시댁의 대나무는 일거리를 만든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지붕에 올라 댓잎을 쓸어내려야 하고 지반을 뚫고 들어온 뿌리를 캐내야 한다. 어찌나 번식력이 좋은지 조금만 게으르면 마당을 점령한다. 촘촘한 마디를 가진 고향의 세죽처럼 뿌리는 쉽게 뽑히지 않는다. 해를 걸렀다가 포크레인을 동원한 적도 있다. 나무가 땅속에서 키워낸 마디는 버린 잎과의 균형을 위한 몸부림이 아닐까.
대숲에 든다. 쭉쭉 뻗은 맹종죽의 기세가 하늘을 덮었다. 내 몸과 마음이 대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드에 푹 젖어 든다. 바람이 불 때마다 댓잎은 하늘에 길을 지우고 또 새길을 연다. 그 길에 얹힌 내 마음도 비우고 채우기를 되풀이한다.
쪽머리
권상연
솟을대문을 민다. 고풍스러운 대청마루가 눈앞에 펼쳐있다. 원목 탁자가 나무 본연의 향을 풍기고 은입사를 입은 좌식의자가 공손히 손님을 맞는다. 메뉴판 글씨도 옛 판본체다. 틈새마다 호롱불, 남포불, 곤로가 제자리에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뿐만 아니다. 뜰 곳곳에 삶을 일군 도구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붉은 녹을 입은 쟁기가 퇴역한 병사처럼 담장에 비스듬히 기대고 그 옆에는 싸리나무 발채를 업은 바지게가 누웠다. 대나무 키가 황토 담벼락에 걸려있는 한정식당, 외가집은 오래된 것들이 모여 있는 작은 박물관이다.
시어머니 등 뒤에 있는 갈대발을 내린다. 생활 한복을 입은 시어머니의 윤곽이 선명해진다. 새하얀 머리를 가른 가르마도 또렷해진다. 빈틈없이 꼭꼭 누른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이마를 드러냈다. 아기 주먹만 한 주머니를 뒷꼭지에 달았다. 쪽머리다. 어머님이 고개를 살짝 돌리니 옆 테이블에서 플래시가 터진다.
시댁에 인사하러 갔을 때였다. 노란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받쳐 입은 어머님의 풍채가 도드라졌다. 화사하면서도 정중한 자태, 내 생각과 거리감이 있어 선뜻 다가가지 못했다. 담벼락, 마당, 대문, 방안···. 특별한 게 없었다. 내 눈에 띈 것이 있었다. 어머님의 쪽머리였다. 드문드문 앉은 흰 머리카락을 숨기듯 드러내듯 하나로 묶어 틀어 올렸다.
어머님은 TV 드라마에 나오는 대갓집 마나님이었다. 친정엄마보다 서너 살 위라고 들었는데 열 살은 더 들어 보였다.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 소박한 은비녀로 장식한 머리에는 세월을 따라가지 않는 어머님의 자존심이 얹혀 있었다. 대문가에 피어있던 하얀색 접시꽃만큼이나 곱고 단아했다.
어릴 때, 나는 쪽머리를 한 친정엄마를 숨기고 싶었다. 곱슬곱슬한 친구 엄마의 파마머리를 볼 때마다 시대에 뒤떨어진 엄마가 참으로 못나 보였다. 엄마의 쪽머리는 촌스럽게 보일 뿐만 아니라 파마머리를 한 여느 여인들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우연히 마루에 앉아 머리를 빗는 엄마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어깨 뒤로 넘겨진 긴 머리는 매끄럽고 풍성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머리카락에 나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움칫 놀란 엄마가 나를 보고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재빨리 감아올리더니 단숨에 비녀를 꽂았다.
학창시절, 헤어 스타일은 자유로웠고 교복도 사라졌다. 같은 옷, 같은 머리에서 벗어나 남들과는 다른 개성을 찾으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짧은 쇼트커트는 여중생, 귀밑 단발머리는 여고생, 긴 생머리는 여대생, 그리고 아가씨의 전유물 같은 멋 내기 파마. 여자에게 머리칼은 개성인데, 내게 맞는 스타일은 무엇인지 늘 고민이었다.
서른 즈음에는 머리 모양에 좀 더 신경을 썼다. 조금만 소홀히 하면 금방 아줌마라는 호칭이 따랐기에 일부러 생머리를 길렀다. 아이가 태어나자 긴 머리는 육아에 거치적거렸다. 핀으로 고정하고 고무줄로 묶어도 보았지만, 결국 손질하기 편하다는 이유로 짧은 곱슬머리로 바꾸었다.
옆집 뒷집 아지매들이 비녀를 버리고 미용실에서 파마를 했다. 또래 아지매들이 곱슬머리로 십 년의 시간을 당겨쓰는 동안에도, 쪽머리가 할머니의 머리로 자리 잡아 가는 와중에도 어머님은 날짜 지난 신문지를 깔아 놓고 의식을 치르듯 머리카락을 손질했다. 현대 문명의 손을 빌리지 않고 그 긴 머리가 다 마를 때까지 빗고 또 빗었다.
오랜 시간을 무엇 하나는 한결같이 지키는 건 쉽지 않다. 변화는 나를 지키기도 하지만 나를 갉아먹기도 하지 않던가. 홀로 기존을 고집하다 보면 시대에 떨어지고 유행을 모르는 아낙이라고 비아냥을 듣기도 한다. 나이 들어 보이는 걸 알면서도 꿋꿋하게 버틴 어머님의 마음 바닥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어머님의 머리카락을 만져 본다. 혼자서 몸을 씻기에 벅찬 듯 목욕하는 걸 도와 달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침침해진 눈, 늘어진 피부 속에서도 현대 약품을 대하지 않은 어머님의 머릿결은 여전히 윤이 난다. 예전처럼 탄탄하진 않았지만 듬성듬성 들어 있는 검은 머리가 한결 멋스럽다. 정성스럽게 머리를 매만지는 어머님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어머님은 슬하에 아홉 자녀를 두었다. 가지가 많아 바람 잘 날 없는 삶에서 얼마나 많은 바람에 시달렸는지 짐작해 본다. 빗질로 가르마 타며 흐트러진 일상을 정리하고 머리카락을 다듬으면서 헝클어진 마음을 가다듬었을 것이다. 빗질로 쪽머리를 타는 행위는 어머니에게 세상을 대하는 나름의 경건한 의식었다.
어머님이 외출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카메라 셔터가 터진다. 얼마 전에 어머님께 파마를 권유한 적이 있다. 세련되어 보이지 않으냐며 구슬려도 보았다. 하지만 어머님이 거부했다. 오히려 보란 듯이 쪽머리를 당당하게 세상에 내놓는다. 쪽머리는 당신의 인내이고 용기이며 자존심이라고 말한다. 젊은 날 챙기지 못한 당신에게 미안해서, 몇 가닥 남지 않은 검은 머리카락마저 잃고 싶지 않다고.
어머님의 머리를 빗겨드린다. 약간은 뻗대는 머리카락이 어머님의 고집스러운 성정을 닮은 듯도 하다. 머리카락도 세월을 비켜 갈 수는 없었는지 숱이 줄고 흰 머리카락이 늘었다. 더는 비녀의 힘을 견디지 못하기에 가벼운 핀을 사용한다. 삐져나온 머리카락이 어머님의 얼굴 주변을 맴돈다.
외가집 풍경이 어머님에게로 다가온다. 한 고집으로 오랜 시간 가꿔 온 멋이다. 그 세상을 놓지 않으려는 듯 어머님의 손길이 쪽진 머리로 향한다. 흩어졌던 머리카락이 하나로 모아져 쪽 속에 든다.
향이 좋은 커피
비가 내린다. 막바지로 치닫는 가을이 발악을 하는지 찬비를 마구 퍼붓는다. 아이들의 양말이 얼룩덜룩한 걸로 보아 비가 온지는 제법 된 듯하다. 신발은 양말보다 훨씬 더 참담한 모습을 하고 있으리라.
아이 중 하나가 발 고린내 난다고 소란을 피운다. 열 댓 명의 아이들이 서로 자기 발이 아니라며 발뺌하기 바쁘다. 사춘기 남자 아이들의 냄새가 젓은 운동화 냄새와 겹쳐져 악취가 진동하는 모양이다. 남의 냄새가 아니라 본인들의 냄새라고 말했더니 절대 아니라고 손사래까지 친다.
어릴 때의 나는 냄새를 몰라 번번이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았다. 다 함께 놀다가도 한 아이가 방귀를 ‘뽕’ 뀌고는 제 코를 잡고 ‘아이, 냄새야’ 했다. 난 영문도 모르고 있다가 아이들이 나를 범인으로 지목한 다음에야 ’아차‘하기 일쑤였다.
좀 더 자란 후에는 나도 요령이 생겨서 한 아이가 냄새가 난다고 하면 코를 급하게 잡았다. 너무 빨리 잡는 바람에 한 친구에게서 ‘방귀는 저쪽부터 오는데 왜 이쪽에서 냄새가 나냐? 며 심한 모욕을 당하기도 했다. 그 덕분에 분위기 파악은 남들보다 재빨리 하게 되었지만 그 아픔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이다. 잎담배 농사를 짓고 누에를 치던 우리 집에는 털이 누런 암소가 있었다. 봄이면 담배를 심기 위해 밭을 갈았고 여름이면 아버지가 딴 담배 잎들을 실은 리어카를 끌었다. 누에가 자라 뽕잎의 양이 늘어나면 뽕나무도 날라야 했다. 힘든 일은 도맡아 하는 누렁이는 우리 집 최대의 재산이었다.
시멘트로 포장이 된 마구간은 바닥이 딱딱해서 볏짚을 깔았다. 마구간 옆에는 퇴비더미가 있고 바로 옆에는 누렁이가 햇볕을 쬐며 쉴 수 있는 말뚝이 있었다. 어머니는 날마다 쇠똥을 쇠스랑으로 떠서 퇴비더미에 던졌다. 누렁이가 오줌을 누면 마구간이 질퍽해지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물청소를 했다.
어머니와 나는 작두로 소여물을 썰었다. 어머니가 볏짚을 메기면 나는 작두칼 손잡이를 힘껏 눌렀다. 그날은 나와 어머니의 손발이 맞지 않았는가 보다. 갑자기 ‘아야!’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행히 작두칼이 완전히 내려가지 않았는지 어머니의 손가락은 절단 나지는 않았다. 다만 손가락 마디가 간신히 붙어 있을 뿐이었다. 어머니는 피범벅이 된 손가락을 움켜잡고 급히 읍내 병원으로 갔다.
뒤에 남은 나는 멍하니 있다가 마구간 청소를 시작했다. 한 번도 해 보지 않았지만 어머니한테 죄송하기도 하고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 절박함이 나를 마구간으로 이끌었다.
마구간에는 누렁이만 사는 게 아니었다. 암탉과 병아리와 수탉이 함께 살고 있었다. 누렁이의 똥은 서너 개인데 닭똥이 누렁이의 오줌과 범벅이 되어 아주 지저분했다. 난 과감하게 쇠스랑을 꽂고 누렁이똥부터 하나씩 떴다. 힘은 들었지만 기뻐할 어머니의 모습만 생각했다. 이왕 하는 김에 누렁이를 말뚝에 내다 묶고 마구간에 있는 짚들을 다 퍼서 날랐다. 내가 발 디딜 때마다 병아리들이 파닥거리며 달아났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왔다. 내 키의 절반이나 되는 양철양동이에 물이 철철 넘치도록 담았다. 비록 옷이 물에 다 젖었지만 깨끗해진 마구간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맨발로 첨벙거리며 마구간을 돌아다니고 있는데 마침 방아 찧으러 온 뒷집 아줌마가 내 모습을 봤다. 냄새가 온 몸에 배어 있다며 나를 데리고 우물가로 갔다. 두레박에 물을 가득 퍼서 그대로 나에게 쏟아 부었다. 냄새가 지독하다며 타박을 하는데도 나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땀 흘리고 일한 노동의 대가는 아주 컸다. 그날부터 누렁이 대신 경운기를 살 때까지 우리 집 마구간 청소는 내 차지가 됐다.
시아버님이 중풍으로 쓰러져 누워 계실 때였다. 주말이면 시댁에 들러 청소를 하고 아버님의 세수를 도와주며 놀아 주곤 했다. 한 번은 시댁에 일이 있어 평일에 들렀다. 마침 목욕차가 와서 아버님을 씻기고 있었다. 하얀 마스크를 쓰고 있으면서도 냄새가 난다고 궁시렁 거리는 이가 있는가 하면 비위가 약해 마당 한 모퉁이서 구역질하는 이도 있었다. 방청소를 제대로 못 한 것처럼 비칠까봐 노심초사 하시는 시어른들을 뵈니 여간 민망하지 않았다.
아버님은 어머님이 집을 비울 때마다 나만 찾았다. 내가 냄새 때문에 인상을 찌푸리지 않아 다른 이들보다 편하다는 게 이유였다. 어머니도 내게 많이 의지하는 것 같았다.
철이 들면서 내가 냄새에 둔한 게 아니라 냄새를 모른다는 걸 알았다. 어린 아들이 귀저기에 똥을 쌌을 때도, 행주가 새까맣게 타서 연기가 온 집안을 다 덮었을 때도 그저 내가 둔한 줄만 알았다. 사람들이 장미향이 그윽하다고, 백합꽃 향기가 진하다고 말하면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모른다는 게 흉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살아오면서 사람들이 말하는 느낌과 책을 통하여 쌓은 이미지, 거기에 내가 직접 경험한 맛으로 내 나름의 향기를 만들었다. 예전에는 냄새를 못 맡는 걸 남들이 알까봐 전전 긍긍했지만 요즘은 솔직하게 털어 놓는다. 아이들에게 말했다.
“나는 냄새를 모른다.”
모자라는 건 절대 약점이 아니다. 때로는 장점이 되기도 한다. 아이들이 비를 쫄딱 맞고 와도 냄새를 모르니 인상 쓸 일이 없다. 하지만 솔직히 궁금하긴 하다. 교실에 떠돌아다니는 냄새가 이렇게 소란을 떨 정도로 무시무시한지. 사랑스러운 십대들에게서 그런 고약한 냄새가 난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향이 끝내 주는 커피를 공수해 왔다고 마시러 오라고 한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