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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풍성지와 순교자
최양업의 사목방문 발자취 남아있는 연풍성지
험준한 고개 넘고 넘어 산골 교우촌 신자들 만나
소백산맥 자락에 위치한 연풍은 전체가 산릉에 속한 험지다. 문경시와 접경지대에는 조령산과 백화산 등 소백산맥의 주봉들이 높이 솟아 있다. 그만큼 험난하기에 예로부터 경기도와 서울을 중심으로 일어난 박해를 피해 충청도와 경상도로 새로운 은신처를 찾아 나선 순교자들이 모여들어 일찍이 교우촌이 형성됐다.
연풍의 산간 지역은 신앙을 지키려는 선조들이 문경새재와 이화령을 넘어 경상도로 피신하는 길목이 됐다. 또한 산세가 험했기에 신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보금자리가 됐다. 연풍 골짜기에 숨어 살았던 신자들을 만나기 위해 문경새재를 수없이 많이 넘었을 최양업 신부. 충북 괴산군 연풍면에 위치한 연풍순교성지에서는 신자들에게 향했던 최양업 신부의 발자취를 찾을 수 있다.
1. 충청도 끝자락에 심어진 복음의 씨앗, 연풍에서 자라다.
연풍 지역에 첫 복음의 씨앗이 떨어져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1784년 말 조선교회가 창설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다. 신자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충청도 끝자락인 연풍에 모였다. 이곳의 역사는 1866년에 흥선대원군이 일으킨 병인박해로 인해 피의 순교사로 변하게 된다. 연풍에 신자들이 모여 산다는 것이 알려지자 교우촌에 포졸들이 들이닥쳤고, 신자들은 연풍 관아로 끌려가 모진 고문 끝에 죽음을 당하거나 도살장(연풍 옥터)이란 곳으로 끌려가 목숨을 잃었다. 병인박해 때 순교한 연풍 출신 신자는 13명이다.
연풍 병방골(괴산군 장연면 방곡리)은 황석두(루카) 성인의 고향으로도 알려져 있다. 부친이 천주학을 버리라며 작두날을 들이내자, 기꺼이 목을 내놓았다고 알려진 황석두는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 갈매못에서 순교했다.
이처럼 신앙선조들의 자취와 피의 순교 역사가 어려 있는 연풍을 기억하고자 충북 괴산군 연풍면에 연풍순교성지가 세워졌다.
청주교구는 1963년 연풍공소로 사용하기 위해 옛 향청 건물(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13호)을 매입했고, 이곳에서 박해 때 신자들을 죽이는 도구로 사용된 형구돌 3개를 발견했다. 이중 2개의 형구돌을 성지에 안치했다.
1968년 순교자 황석두의 시복식 이후 그의 고향이 연풍으로 드러나면서 성지 개발이 가시화됐다. 1979년 순교 현양비를 세우고 3년 뒤인 1982년 병방골 평해 황씨 문중 산에 묻혔던 황석두 성인의 유해를 연풍순교성지로 천묘했다.
이후 황석두 성인과 함께 갈매못에서 순교한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 장주기 회장 등 다섯 성인상과 반석(오성바위)을 재현해 1986년 축복식을 열었다. 또 최초의 한국인 주교인 고(故) 노기남(바오로) 대주교의 동상과 높이 8.5m의 대형 십자가도 마련했다.
2008년 청주교구는 교구 설정 50주년을 기념해 신자들의 영성생활과 순교영성의 함양을 위해 배티성지에서 연풍순교성지를 잇는 91.5㎞의 ‘신앙 선조들과 함께 걷는 도보 성지순례길’을 만들어 시행하고 있다.
2013년 3월 9일에는 성 황석두 루카 탄생 200주년 기념성당 기공식을 열고 2014년 9월 20일 봉헌했다. 대지 2256㎡에 건축연면적 1204㎡ 규모의 성당은 신앙선조들을 기억하고 기도하기 위해 모인 순례객들에게 거룩한 기도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2. 신자들 만나기 위해 문경새재를 수없이 넘었던 최양업
1849년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고 귀국한 최양업. 그는 조선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라도와 경상도 남북부 지역을 다니며 신자들과 만났다. 경상북도 문경시와 충청북도 괴산군 사이에 있는 문경새재는 그가 사목순방을 하기 위해 주로 지났던 고개다.
박해를 피해 연풍으로 모인 신자들은 새재라는 천혜의 도주로를 이용해 관문 성벽 밑의 수구문을 통해 문경 땅을 넘나들며 모진 박해를 피했다. 최양업도 이러한 장점을 활용해 문경새재를 넘나들며 신자들에게 은밀하게 복음을 전했다.
험난한 산길을 오가느라 몸은 힘들지언정, 골짜기마다 숨어서 간절히 자신을 기다리는 신자들과 만날 수 있기에 기쁨이 더 컸을 최양업. 특히 연풍이나 문경과 같이 비밀스럽게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신자들은 교리 실천에 열심이었을 뿐 아니라 신심이 깊었기에 이들과 만나러 가는 길이 고된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는 최양업의 서한에도 드러난다.
“교우들은 거의 모두 비신자들이 경작할 수 없는 험악한 산 속에서 비신자들과 아주 멀리 떨어져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교우들은 거의 다 교리에도 밝고, 천주교 법규도 열심히 잘 지키고 삽니다. 그래서 열심한 교우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죄악과 세속의 모든 관계를 끊고 조선의 알프스라고 할 수 있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담배와 조를 심으며 살아갑니다.”
[가톨릭신문, 2022년 7월 3일, 민경화 기자]
3. 새재와 연풍에 어린 복음의 발자취
새들도 쉬어 가며 넘는다는 문경 새재(鳥嶺). 서울에서 충주와 수안보 온천 지대를 지나 30여 리를 가면 만나는 곳이 충청도 연풍(延豊)이고, 이곳에서 다시 심하게 굽은 고개를 올라 조령, 조곡, 주흘 등 세 개의 관문을 지나면 경상도 문경이 나온다. 그러나 이제 터널이 개통되면서 어렵게 새재를 넘는 이들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연풍은 본래 산수가 좋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백화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와 조령 관문 아래의 수옥 폭포에서 내려오는 두 개의 물줄기가 합쳐지는 곳에 자리잡고 있으니, 풍수지리적으로는 최적의 거주지였던 셈이다. 그러나 연풍은 이제 지리적 위치보다는 천주교 성지로서 교우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면 이 지역에 교우들이 거주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이미 1790년대 후반, 교우들이 새재를 넘나들 무렵부터 한두 명의 교우들이 이곳에 자리잡았다. 그들은 이내 교우촌을 일구고 포졸들에게 쫓기는 교우들을 받아들여다. 또 훗날 최야업 신부나 프랑스 선교사들은 경상도의 비밀 교우촌을 찾아보기 위해 연풍을 거쳐 새재를 넘었으며, 그것도 포졸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으레 성벽 아래의 수구문(水口門)을 이용해야만 하였다.
이와 같이 문경 새재와 연풍은 복음의 연결 통로였지만, 한편으로는 박해자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던 곳이었다. 포졸들은 천주교 신자들을 찾아내는 데 혈안이 되어 새재를 넘나들었고, 그 아래의 연풍 주막에 묵으면서 신자들을 색출하여 공을 세우고자 하였다. 실제로 1866년에 박해를 피해 다니던 칼래 신부는 연풍 주막을 지나가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위험에 빠진 적도 있었다.
제가 연풍 주막 앞을 막 지나치려고 할 때 포졸들이 의심을 품고 '당신은 누구요?'라고 하면서 뒤따라와 이내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그때 앞장서서 걸어가던 유 토마스가 심하게 시비를 걸자 포졸들이 모두 거기에 신경을 쓰게 되었고, 저는 있는 힘을 다해서 도망을 쳤습니다. 그 와중에서 저의 전대가 떨어져 돈이 튀어나오자 포졸들은 저를 잊어 버리고 돈을 줍는 데만 정신이 팔렸습니다(칼래 신부의 1866년 6월 10일자 서한 중에서).
연풍과 관련하여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이곳이 바로 황석두(루가) 성인의 고향이요, 연풍 성지는 곧 그의 시신이 안장되어 있는 곳이라는 점이다.
부유한 평해 황씨 집안에서 태어난 황석두는 일찍부터 과거 공부에 노력해왔으나, 25세 무렵인 1837년경에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는 구름이 걷힌 하늘을 보는 듯한 기쁨에 넘쳐 세상의 모든 욕심을 버리게 되었다. 더욱이 부친을 개종시키기 위하여 2년 동안 벙어리 노릇까지 하였다. 그러나 올바른 신앙 생활을 지속하기는 쉽지 않았다. 부친이 사망한 뒤 가세가 기울면서 그는 투기 행위를 하였고, 이로써 10년 동안 교회 활동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일종의 추방 같은 것이었다. 이 추방 기간 동안 그는 더 열심한 신앙인이 되었으며, 그 결과 1858년에는 회장으로 임명되고, 다블뤼 주교의 복사요 제자가 되어 번역 사업에 동참하게 되었다.
8년 뒤 대박해가 전국을 휩쓸게 되었을 때 황석두도 체포되어 다블뤼 주교와 함께 있게 되었다. 이때 그는 끝까지 주교를 따라가겠다고 작정할 정도로 이미 순교할 원의가 충만하였다. 그러므로 서울로 압송된 뒤에도 신앙을 증언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학식과 교리를 바탕으로 박해자들을 이해시키려고 하였다.
충효는 대군 대부이신 하느님께 대한 것이 제일이요, 임금과 부모께 대한 것은 그 다음일 뿐입니다. 세속 일에서도 친구나 이웃에게 해가 되는 일을 고발하지 않는 법인데, 어찌 한 형제인 교우들을 고발하고 교회 일을 발설하겠습니까? 관장께서 이를 강요하는 것은 어찌된 도리입니까? 1866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생하시어 세상에 널리 편 것은 어느 성인도 가르칠 수 없는 진리이니, 어찌 그 가르침을 배반하겠습니까?([우포도청등록], 병인 2월 3일, 황석두 공초)
물처럼 흐르는 그의 호교론에 관장은 말문이 막힐 정도였고, 모두 어안이 벙벙하였다. 결국 그에게는 군문효수형이 언도되었으며, 임금의 재가가 떨어지자마자 포졸들은 선교사와 장주기와 함께 그를 옥에서 끌어내 닷새가 걸려서야 보령의 갈매못 형장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3월 30일(음력 2월 14일). 그곳 백사장에서 형을 집행하였으니, 당시 황석두의 나이는 54세였다.
순교자들의 시체는 나흘 동안 형장에 버려진 채로 있었다. 그중에서 황석두의 시신은 가장 먼저 가족들에 의해 고향 선산으로 옮겨졌고, 나머지 순교자들은 홍산으로 이장되었다가 1882년에 발굴되어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이로부터 1000여 년이 지난 1968년에 황석두가 복자품에 오르면서 연풍 성지 개발이 시작되었으며, 1979년에는 마침내 평해 황씨 선산에 안장되어 있던 그의 무덤이 발굴되어 성지로 이장되었다.
[사목, 1999년 7월, pp.129-131, 차기진]
연풍성지 해설. 2
경상북도 문경과 충청북도 괴산을 접하고 있는 문경새재를 넘어서면 괴산군 남동쪽 끝의 연풍면이 나온다. 해발 1,017m의 험준한 고갯길, 새재의 서쪽 기슭에 연풍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연풍은 갈매못에서 순교한 황석두 루카 성인의 고향이며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신부의 발자취가 서려 있는 곳으로 초대 교회부터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던 뿌리 깊은 교우촌이다. 연풍 마을과 문경 새재의 구석구석마다 선조들의 자취와 피의 순교 역사가 어려 있다.
구름도 쉬어 넘는다지만 산이 높은 까닭만은 아닐 것이다. 그 옛날 선인들이 새재로 불린 험한 길을 처음 내고 넘나들면서부터 고갯길 굽이굽이 서린 슬픈 내력들에 구름인들 차마 어찌 그냥 넘어설 수 있었으랴.
연풍은 전체가 소백산맥의 산릉에 속한 험지이고 문경시와 접경지대에 조령산과 백화산 등 소백산맥의 주봉들이 높이 솟아 있다. 그만큼 험난하기에 예로부터 경기도와 서울을 중심으로 일어난 박해를 피해 충청도와 경상도로 새로운 은신처를 찾아 나서는 순교자들의 피난의 요로로 일찍이 교우촌이 형성되었었다.
연풍과 새재가 기억하는 첫 인물은 최양업 토마스(崔良業, 1821-1861년) 신부이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함께 마카오에 유학해 13년간의 각고 끝에 1849년 4월 15일 사제품을 받은 그는 그로부터 12년간 새재를 넘나들며 이 지역에 신앙의 꽃을 피웠다.
은신처로서 새재의 장점을 십분 활용한 그는 김대건 신부가 1년 남짓 사목한 데 비해 오랫동안 은밀하게 복음을 전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새재 아랫마을인 문경시 진안리의 어느 주막에서 과로로 지친 상태에서 갑자기 병을 얻어 1861년 6월 15일 문경읍 또는 진천 배티 교우촌에서 선종한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생전에 쉴 새 없이 넘나들던 새재의 연봉인 배론 신학당 뒷산에 옮겨져 묻혔다.
성 황석두 루카 묘.
성인의 고향이 연풍으로 밝혀지면서 성지 개발이 가시화되었고, 1979년 문중 산에 묻힌 성인의 유해를 임시로 수안보 성당에 모셨다가 1982년 이곳으로 천묘하였다.연풍에서는 황석두 루카(黃錫斗, 1813-1866년) 성인의 발자취가 빛을 발한다. 부유한 양반집 자손으로 나이 스물에 과거 길에 나섰다가 ‘천국의 과거 시험에 급제’하고 돌아온 그는 가족들로부터 모진 반대를 받았다. 화가 난 부친은 작두를 마당 한 가운데 놓고 아들의 목을 걸게 하였지만 태연히 목을 내밀자 눈물을 흘리며 그만 두었다. 그로부터 2년 이상을 벙어리처럼 산 끝에 가족들을 모두 입교시켰다. 학식과 신앙이 깊었던 연유로 다블뤼 안 주교는 그를 회장으로 임명하고 성경 번역과 사전 편찬에 종사하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황석두 루카는 신앙에 눈뜬 뒤 줄곧 정결을 지키는 생활을 해, 페레올 고(高) 주교가 그를 사제로 서품하려 했으나 부인이 들어가 있을 정식 수녀원이 조선에 없다는 이유로 교황청의 허락을 얻지 못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다블뤼 안(安) 주교, 위앵 민(閔) 신부, 오메트르 오(吳) 신부, 장주기 요셉(張周基, 1803-1866년) 등과 함께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갈매못 해변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연풍에는 또 한 가지 웃지 못 할 일화가 전해진다. 병인박해로 한국 교회는 9명의 성직자를 잃었다. 천신만고로 3명의 선교사가 목숨을 건졌는데 그중 칼래 강(姜) 신부에 얽힌 이야기가 그것이다.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에 의하면 칼래 신부가 연풍을 지나다가 포졸들에게 발각되어 도망치다가 붙잡히려는 찰나에 그만 전대가 풀어져 돈이 떨어졌다. 그를 쫓던 포졸들은 돈을 줍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 틈에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치명터(사형장)에 설치된 세 번째 형구돌.
연풍에서 총 세 개의 형구돌이 발견되었는데, 첫 번째 것은 절두산 성지에 기증되었고 두 번째 것은 황석두 성인 묘소 앞에 있다.
연풍 성지가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63년 연풍 공소로 사용하기 위해 옛 향청 건물(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13호)을 사들이게 되면서부터라고 한다. 3백년이나 묵은 이 건물을 매입할 당시만 해도 이곳이 순교 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매입 후 논과 집 터 정리 작업 중에 박해 때 죄인들을 죽이는 도구로 사용된 형구돌이 1964년, 1972년, 1992년 각 1개씩 3개나 발견되었다. 그중 처음으로 발견된 형구돌은 1974년 절두산 성지로 이전되었다.
또 1968년 10월 6일 시복식 후 황석두 성인의 고향이 연풍으로 드러남에 따라 성지 개발이 가시화되었다. 1979년 순교 현양비를 세우고 그해 가을 병방골 평해 황씨 문중 산에 묻힌 황석두 성인의 유해를 확인한 후 다음 해 임시로 수안보 본당에 안치하였다가 1982년 8월 25일 연풍 성지로 천묘(遷墓)하여 노기남 대주교 주례로 축복식을 가졌다.
연풍 성지 조성과 관련하여 고 오기선 요셉(吳基先, 1907-1990년) 신부의 공로와 미국 부모로부터 사재를 가져다가 형방 건물과 성지 부지를 매입해 오늘의 연풍 성지의 주추를 놓고 30년간의 수안보 성당 주임에 이어 1992년 성지 초대 담임으로 부임하여 2004년 은퇴할 때까지 성지 조성에 평생을 바친 메리놀회 정안빈(Robert M. Lilly) 신부의 공로를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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