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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 알렉시오(하느님의종) 자료 모아보기. 2
가. 황사영 알렉시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연재]
1. 황사영의 애오개 교회
손이 귀한 명문가의 유복자
황사영은 명문인 창원 황씨 판윤공파의 후예였다. 황사영의 7대조 만랑공(漫浪公) 황호(黃, 1604~1656)는 대사성을 지낸 인물이었고, 황사영의 증조부 황준(黃晙, 1694∼1782)은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판서를 지낸 뒤, 기로소(耆老所)에 든 국가 원로였다. 그의 아들 황재정(黃在正, 1717∼1740)은 24세의 젊은 나이에 후사 없이 세상을 떴다. 종가가 절손되자, 황준은 황재정이 죽은 지 7년 뒤에 태어난 7촌 조카 황석범(黃錫範, 1747∼1774)을 양자로 들여 후사를 이었다.
종가의 봉사손으로 들어간 황석범은 1771년 정시(庭試)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와 한림을 지냈으나, 출산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1774년 11월 22일에 28세로 일찍 세상을 떴다. 황사영은 이듬해 1775년 봄에 아버지 없이 유복자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집안에 남자라고는 82세의 증조부 혼자뿐이었다.
황사영은 8세까지 증조부 황준의 사랑을 받고 자랐던 듯하다. 아슬아슬 이어온 집안의 명운이 이 귀한 아이의 어깨에 달려 있었다. 그의 돌림자는 원래 ‘연(淵)’자였지만, 증조부는 아이가 집안의 대를 길게 이어가 주기를 바라 돌림자를 버리고 ‘사영(嗣永)’으로 지었다. 아이는 증조부가 세상을 떠난 뒤 16세의 최연소 합격자로 진사시에 당당히 합격함으로써 그 같은 기대에 완벽하게 부응했다.
황사영은 서울 서부의 아현(阿峴), 즉 애오개에서 나고 자랐고, 15세에 장가들었다. 어머니 이윤혜는 이승훈의 가까운 일가였다. 정약현의 딸이었던 아내 정명련은 이벽이 외삼촌이고, 정약종과 정약용이 친삼촌이었다. 당시 황사영을 둘러싼 환경은 천주교 핵심 세력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황사영이 16세로 진사시에 최연소 합격하기 한 해 전에 처삼촌 정약용이 대과에 급제했다. 정조는 이 영특한 소년이 다산의 조카사위임을 알았을 테고, 그마저 진사시에 급제하자 임금은 황사영에게 아주 특별한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이때 소년은 앞서 다산이 그랬던 것처럼 이미 서학에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추안급국안」의 1801년 10월 10일의 공초에서 황사영은 자신이 양학(洋學)을 한 것이 11년이 되었다고 했다. 이 말대로라면 그가 서학에 입문한 것은 1791년부터다. 그러다가 1795년 최인길의 집에서 주문모 신부를 만나면서 그는 과거 시험을 완전히 포기하고 신앙의 길에 온전히 투신하였다. 앞서 본 「눌암기략」의 말대로 정약종과 이승훈에게 이끌려 그는 오로지 사학만 익히며 밤낮으로 쉬지 않았다.
황사영의 아현동 본당
가족은 단출해서 자신과 어머니와 아내뿐이었다. 이웃에 삼촌 황석필이 살고 있었고 그도 천주교를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앙역노(仰役奴) 돌이(乭伊), 육손(六孫), 비 판례(判禮), 고음련(古音連), 복덕(福德), 비부 박삼취(朴三就) 등의 하인들이 한 집 또는 가까이에 살면서 황사영을 보필했다. 황사영의 집은 종가여서 사당을 모시고 있었지만, 그는 제사마저 폐기했다. 친척들과 벗들이 펄펄 뛰며 난리를 쳤지만 그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1797년에는 종갓집인데도 사당을 아예 허물어 버렸다.
「사학징의」를 통해 볼 때, 그의 집에서 함께 생활한 사람이 더 있었다. 필공(筆工) 남송로(南松老)와 충주 사람 이국승(李國昇)이 그들이다. 남송로는 황사영이 사당을 허문 자리에 집을 짓자 거기에 입주해서 살았다. 이국승은 1795년 충주에서 검거된 뒤 배교를 맹세하고 풀려나와 서울로 올라왔다. 이후 여러 해 동안 황사영의 집에서 지냈다. 그의 집이 당시 조선 천주교회의 아현동본당 구실을 감당하고 있었으므로, 측근에서 사람과 조직을 관리할 인원이 필요했다.
1800년 3월 강완숙이 대사동 집을 포기하고 충훈부 후동으로 이사했을 때, 홍필주의 공초에 따르면 황사영은 김계완, 이취안, 김이우 등과 함께 각각 100냥 씩을 헌금했다. 무엇보다 주문모 신부를 안전하게 모시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남송로의 공초에는 황사영이 빈궁한 경제 상황으로 인해 성화(聖)와 예수상을 제작해서 팔아, 이것으로 교회 유지에 필요한 경비를 마련했다고 나온다. 당시 전국적으로 성물에 대한 수요가 폭증하고 있었으므로, 벽동 정광수의 성물 공방과 함께 황사영의 성물 제작소도 꽤 큰 역할을 맡았던 듯하다.
두 사람 외에도 「사학징의」에 나오는 아현 거주 천주교 신자는 김의호(金義浩)와 그의 아들 김희달, 그리고 김치호(金致浩), 궁인(弓人) 한성호(韓聖浩), 최봉득(崔奉得), 고조이(高召史)의 언니, 목수 황태복(黃太福), 그리고 그 집 행랑채에 살았던 제관득(諸寬得), 그리고 이웃의 목수 한대익(韓大益) 등이 더 포착된다. 이들은 자주 황사영의 집에 물건을 만들어주러 갔다. 목수가 둘, 궁인이 둘인 것도 흥미를 끈다. 역시 성물 제작과 무관치 않으리란 짐작이다. 가깝게 왕래했던 송재기가 각수(刻手)였던 것도 그렇다. 이 밖에도 홍인, 권상문과 같이 비교적 왕래가 잦았던 인물들이 더 있다.
「사학징의」에 가장 많이 등장한 이름
또한 황사영의 둘레에는 당시 조선 교회의 수뇌부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교회의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진 자리에 황사영은 예외 없이 함께 했다. 유관검의 공초에 따르면, 1796년 겨울 주문모 신부는 조선 교우를 대신해 북경 주교에게 조선 교회가 처한 상황을 보고하고 대박(大舶), 즉 서양 선박을 청하는 글월을 보냈다. 이때 이 서찰에는 서울을 대표해서 최창현과 황사영이 이름을 적었고, 호남에서는 유항검, 유관검 형제가 이름을 올렸다. 1796년 말에 이미 황사영은 조선 교회를 대표하는 중심인물로 위상이 굳건했다. 한신애도 공초에서 남자 교우 중에 가장 높은 사람이 양반으로는 정광수와 황사영이고, 중인으로는 이용겸과 김계완이라고 진술했다. 홍필주는 황사영 등이 자기 집에서 모인 것이 6, 7년 되었다고 했으니, 황사영은 1795년경부터 본격적인 신앙생활에 투신한 것이 분명하다. 홍익만도 1794년에 황사영의 집 등을 왕래하며 공부한 사실을 적고 있다.
어쨌거나 「사학징의」에서 검거된 인물들이 자신이 속한 혈당의 무리를 거론할 때 황사영은 빠지지 않고 이름이 나온다. 필자가 「사학징의」에 나오는 인명의 출현 빈도를 조사해 보니, 황사영의 이름이 무려 380차례나 나와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주문모 신부가 275번, 홍필주 189번, 강완숙이 128번이었다. 정약종은 102번, 이합규 101번, 최창현은 67번, 최필공이 58번, 최필제는 42번씩 각각 등장한다. 이 수치는 황사영의 당시 교회 내 비중을 단적으로 알려준다.
거점 조직의 관리와 확산
1795년 이후 천주교의 확산세가 가팔랐지만, 탄압도 만만치 않았다. 서울 지역의 경우, 저인망식으로 쫙 펼쳐진 천주교의 그물 조직은 대단히 촘촘했다. 당시 서대문과 남대문 및 중구 인근은 한양의 천주교 조직의 주 활동 무대였다. 각 지역별로 거점이 있었고, 거점별로 중심인물이 각각 포진하고 있었다.
강완숙과 홍문갑의 집은 주문모 신부를 모신 조선 교회의 헤드쿼터였다. 여기에 최창현, 최필공, 최필제, 손경윤, 손인원, 김계완, 정인혁 등 앞서 살핀 약국 주인들이 각각의 거점을 맡고 있었고, 황사영, 정광수, 이합규, 김이우, 최인길 등의 조직이 한 구역을 맡아 활발한 포교에 힘쏟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자연스레 조선 천주교회의 집행부를 구성하고 있었다.
이들 단위들은 1800년 이후로는 새로 설립된 명도회 조직을 통해 급속도로 그 세를 불려 나갔다. 주문모 신부는 매달 7일 명도회 집회 때마다 각 지부를 순방하면서 미사를 집전하고 성사를 주었다. 황사영의 집에도 주문모 신부가 여러 번 와서 미사를 드렸다. 미사는 황사영 집의 건넌방에서 진행되었다. 신자들은 관을 쓰고 무릎을 꿇고 앉아 예수의 화상에 절을 올리고, 경문을 외웠다. 말이 어눌한 신부를 대신해서 황사영이 교리를 설명했다.
황사영은 16세에 진사시에 급제한 천재의 아우라로 인해 주로 황진사로 불렸다. 여기에 임금이 손을 잡았다 하여 손목에 두르고 다녔던 명주천, 명문가 종손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신앙에 투신한 모범 등으로 특별한 주목을 받았다. 그는 학문도 높았고, 글도 잘 썼으며, 무엇보다 해박한 교리 지식으로 주문모의 핵심 심복이란 말을 들었다.
그는 사람이 겸손하고 해맑았다. 다른 사람들이 미처 마음이 닿지 않는 곳까지 세심하게 챙기는 따뜻한 마음씨의 소유자였다. 특별히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긴 구레나룻과 준수한 용모는 많은 여성 신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 같다.
1795년 주문모 실포 사건으로 의금부에 끌려가 윤유일, 최인길과 함께 당일로 죽은 지황의 아내 김염이는 입국 초기 주문모 신부의 의복을 지어 입혔던 여인이었다. 남편이 갑작스레 죽은 뒤 그녀는 강완숙의 홀대와, 남편 사후에 발길을 끊어버린 남편과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이들에 대한 서운함 때문에 신앙을 멀리하고 있었다. 황사영만이 사람을 보내 그녀를 살뜰히 챙겼다. 감격한 그녀는 사흘을 황사영의 집에 머물러 자며 딸의 옷을 지어주고 돌아온 일까지 있었다. 이로 보아 황사영에게는 아들 황경한 외에 딸도 있었던 듯하나 어려서 죽은 것으로 보인다.
1801년 2월 송재기의 집에서 도피 중이던 황사영을 처음 만난 최설애는 그 명성을 익히 들어온 터라 ‘상견이 늦었다’며 인사를 청했고, 그의 도피를 위해 상복을 지어주는 일을 거들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황사영에게 “지금의 행색이 비참하고 처량하니 어떻게 하면 다시 만나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녀는 황사영에게 마음이 끌렸던 듯하다.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2. 임금의 총애 받던 황사영, 10년 뒤 천주교 핵심 인물로 부상
보석처럼 빛났던 소년 황사영
무덤 속 백자합에서 나온 비단천
1980년 9월 2일,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속칭 ‘가마골’로 불리는 홍복산 자락에서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 1775~1801)의 묘소 발굴 작업이 진행되었다. 무덤 좌측을 일부 개봉하자 관 좌측 하부에 오석 7개가 십자가 모양으로 배열되어 놓여 있었다. 곧이어 십자가 좌측 끝에서 청화백자합 하나가 나왔다. 이 백자합은 뚜껑이 깨진 옹기 항아리 속에 들어있었다. 백자합의 뚜껑을 열자 바닥에 덩어리진 천 조각이 나왔다. 비단으로 보이는 이 천은 검게 변색되어 원래의 색채는 알 수 없었고, 남은 파편은 가로 7㎝, 세로 4.5㎝의 작은 조각이었다.
이 작은 천 조각은 무슨 의미로 청화백자합에 담겨 그의 무덤 속에 남겨졌을까? 그 의미를 알려면 그로부터 190년 전인 1790년 9월 12일로 잠시 돌아가야 한다. 이날은 증광시(增廣試)가 열려 합격자 발표가 있었다. 국왕 정조는 이문원(文院)에 직접 납시어 합격자를 소견하였다. 임금은 그들 중 70세 이상 고령 합격자 5명과 20세 이하 합격자 5인을 따로 불렀다.
그들은 임금이 지켜보는 앞에서 한 차례 더 시험을 치렀다. 노인은 ‘노인성(老人星)’을 제목 삼아 부(賦)를 짓고, 소년들은 ‘소년행(少年行)’을 제목으로 시를 지었다. 임금은 이들이 제출한 답안지를 직접 채점했다. 황사영은 이날 16세의 최연소 합격자로 이 자리에 참석했고, 임금이 손수 점수를 매긴 두 번째 답안지로 다시 1등의 영예를 안았다. 임금은 황사영을 앞으로 나오게 해, 본인이 지은 시와 노인 급제자들이 지은 부를 소리내어 읽게 했다. 「내각일력(內閣日曆)」 1790년 9월 12일 기사에 자세하다.
1811년 11월 3일, 조선 교회에서 북경 주교에게 보낸 이른바 「신미년 백서」에는 이때 임금이 황사영을 불러 보고는 손을 잡고 총애하시며 이렇게 말했다고 적었다. “네 나이가 스무 살이 넘으면 바로 벼슬길에 나와 나를 섬기도록 하라.” 반짝반짝 보석처럼 빛나는 명민한 소년을 임금은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다블뤼 주교는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에서 다시, “국왕은 그를 각별이 아껴 환대의 표시로 그의 손을 잡기까지 하였다. 그런 일은 이 나라에서는 이례적인 총애였다. 그 일이 있은 뒤 알렉시오는 항상 손목에 띠를 두르고 있어야 했고, 그때부터 사람들은 더이상 함부로 그의 손을 만질 수 없었다.”
그의 무덤 속 청화백자합에 소중하게 담겼던 작은 천 조각은 그가 평생 손목에 감고 다녔던 그 비단의 조각이었을 것이다. 임금은 그를 아껴 사랑해 각별한 총애를 내렸고, 그는 감격해서 평생 어수(御手)가 닿았던 그 손목에 비단을 감았다. 하지만 그 일이 있고 몇 해 뒤 그는 임금 대신 천주의 길을 택했다.
대체 그동안 무엇을 한 게냐?
「신미년 백서」에는 황사영이 스무 살 되던 해인 1794년에 천주교에 입교했다고 썼다. 이후 그는 과거에 마음을 두지 않았고, 시험장에 들어가더라도 백지를 내고 나왔다고 했다. 「승정원일기」 1794년 3월 18일 자 기사에 성균관 밖 유생의 응제시 급제자 명단에 황사영이 나온다. 이틀 뒤인 3월 20일, 임금은 황사영을 접견한 자리에서 그 사이에 부(賦)와 표(表)를 몇 수나 지었느냐고 물었다. 황사영이 표가 50수, 부가 30수라고 대답하자, 임금이 말했다. “네가 진사시에 급제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비록 한 달에 한 수만 짓더라도 날짜가 더 남는다. 그동안 대체 무엇을 한 게냐? 책을 읽기는 했느냐?” 임금의 힐난에는 실망의 기색이 묻어 있었다. 황사영의 이때 나이가 앞서 임금과 출사를 다짐했던 스무 살이었다. 「승정원일기」 1794년 3월 20일 기사에 보인다.
황사영의 아내 정명련(丁命連)은 다산 정약용의 큰 형 정약현(丁若鉉)의 딸이었고, 정명련의 어머니는 바로 이벽의 누이였다. 당시 정약종은 그의 처삼촌이었다. 황사영의 어머니 이윤혜(李允惠)는 평창 이씨로 이승훈과 가까운 일족이었다. 이가환의 생질로, 신유옥사에 천주교 신자로 귀양 갔던 이학규(李學逵, 1770~1835)는 그녀의 사촌 동생이었다. 황사영은 천주교 가문의 이른바 성골 혈통이었다.
그는 15세에 혼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 그가 천주교 신앙을 접한 것은 1794년보다 훨씬 앞선 때부터였을 것이다. 1790년 16세로 진사시에 급제하고 난 뒤 1794년보다 앞선 어느 시점에 그는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후 그는 과거 시험을 끊었다. 임금 앞에 대답할 당시 황사영의 마음은 앞서 처삼촌 다산이 그랬던 것처럼 이미 천주에게로 온전히 향해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친척과 친구들은 침을 뱉고 꾸짖으며 그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듬해인 1795년 4월 18일, 성균관에서 전날 임금의 행차 때 나와 맞이하지 않은 유생 23명에게 과거 응시를 정지시키자는 요청을 올렸다. 이 23명 중에 황사영의 이름이 두 번째로 올라있다. 이때 그는 이미 과거 응시를 포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성록(日省錄)」에 자세하다.
황사영! 그는 조선 천주교회 차세대의 떠오르는 희망이었다. 신유박해 당시 검거령이 떨어지자, 주문모 신부와 강완숙은 어떻게든 그만은 살려내려고 모든 인맥과 조직을 총동원했다. 이 같은 노력 덕분에 그는 지도자급 인물들이 줄줄이 검거되어 형장의 이슬이 되어 사라진 뒤에도 근 8개월 동안 도피해있다가 9월 29일에 제천 배론 토굴에서 검거되어 끌려왔다.
「사학징의」에 실린 여러 기록들은 당시 의금부가 황사영을 잡기 위해 얼마나 혈안이 되어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교회 조직에서 황사영의 위상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당시 27세의 청년 황사영은 어떻게 이렇게 짧은 시간에 교회 중심부의 핵심 인물로 부상할 수 있었을까? 다른 사람이 모두 잡혀가도 그만은 지켜내야 할 어떠한 필연성이 있었던 걸까?
「송담유록」과 「눌암기략」의 진술
강세정의 「송담유록」 중 다음 기록에 그 대답이 있다. “죄인 황사영은 나이가 27세인데 아비는 황석범(黃錫範, 1747∼1774)이고, 조부는 황재정(黃在正, 1717~1740)이다. 아울러 세상을 뜬 외조부는 이동운(李東運)이다. 황사영은 정약종의 조카 사위이고, 최창현과는 죽음을 함께 하는 벗이며, 이가환, 이승훈, 홍낙민, 권철신의 혈당이었다. 일찍부터 간사한 자들에게 낚여 사술(邪述)을 몹시 믿어 제례를 폐기하고 천륜(天倫)을 멸절시켰다. 사당(邪黨)의 여러 사적(邪賊)들이 주문모를 맞이해온 이래로 스승으로 섬기고 신부라고 부르면서 세례를 받고 이름을 받아, 주문모의 도당이 된 자 가운데 으뜸가는 심복이었다.”
「추안급국안」 1801년 10월 10일 자 공초에서 황사영은 자신이 1795년 최인길의 집에서 주문모 신부와 처음 만났고, 이후 그는 그의 문하생 되기를 원해 잠시도 떨어져 있으려 하지 않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위 「송담유록」의 기록과 일치한다. 황사영은 입교 이후 당시 천주교회 핵심 인물들과 긴밀한 연계 아래, 주문모의 으뜸가는 심복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 교회 조직에서 신분이 높은 양반층은 대부분 이탈한 상태였다. 주문모 신부는 북경으로 보낼 편지의 작성을 비롯해 교리서의 번역과 보급 등에서 문장에 능하고 식견이 높은 양반층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최창현 등이 있었지만 중인들의 열심한 신앙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부분들이 존재했다.
「눌암기략」을 쓴 이재기의 언급은 더욱 자세하다. “황사영은 만랑(漫浪) 황호(黃㦿, 1604~1656) 집안의 종손이었다. 나이 16세에 진사가 되었다. 문장과 글씨가 모두 그 손에서 나와 명성과 영예가 대단히 성대하였다. 하지만 가까운 인척인 정약종과 가까운 친척인 이승훈에게 이끌려, 과거도 그만두고 오로지 사학의 방법만 익혀 밤낮없이 쉬지 않았다.”
이를 이어 이재기는 자신이 황사영의 친삼촌인 황석필(黃錫弼, 1758∼1811)에게 황사영이 서학을 하지 못하도록 말릴 것을 여러 차례 종용했다고 썼다. 그러면 황석필은 “전해 들은 말이 지나친 것이요. 어찌 그 정도까지 빠졌겠소”라고 했고, 또 “근래에는 잘못인 줄 깨닫는 듯하오”라며 괜찮아질 거라고 대답하곤 했다.
이재기는 이에 대해 다시 “황석필은 강도(江都)에서 밥벌이를 하느라 그 조카와 사는 집이 달라서 그 은밀한 일을 다 밝게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사람됨이 차분하고 담백한 데다 진국이어서 번번이 그 조카에게 속임을 당한지라 그 말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라고 그를 두둔해 주었다. 사실 이재기는 황석필과는 사돈 간이었다. 황석필의 딸, 즉 황사영의 사촌 여동생이 이재기의 아들 이낙수(李樂脩)에게 시집을 갔다.
이재기가 황석필을 위해 변명을 해준 것은 자기 집안이 천주교와 엮이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황석필 또한 천주교 신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학징의」 중 황사영과 관련해 유배 간 사람의 명단 첫머리에 그의 이름이 나온다. “그는 황사영의 숙부인데, 그 형이 출계(出系)한 까닭에 연좌죄는 면했지만, 황사영이 도망간 뒤에도 끝내 간 곳을 가리켜 고하지 않아 여러 달 붙잡지 못하는 정황을 가져왔으니 진실로 지극히 원통하고 해괴하다. 그래서 엄하게 한 차례 형벌을 가하고 정배하였다”고 나온다. 그는 함경도 경흥(慶興) 땅에 유배 갔다.
황석필은 황사영과 8촌 간인 윤종백(尹鍾百)에게 글을 가르친 스승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윤종백은 황사영에게 「천주실의」와 「칠극」을 빌려 배우고, 이희영에게 예수상을 받아, 이후 돈을 받고 예수상을 많이 그려준 죄목으로 1801년 7월 13일에 강릉으로 귀양 갔던 인물이다.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3. 배론의 토굴
[교우촌 토굴에서 기도와 강학·일기 쓰며 절망의 시간을 보내다]
배론 가는 길
달레는 「조선천주교회사」에서 황사영이 2월 15일쯤 서울을 떠나 경상도 예천에 머물다가 강원도 접경으로 옮겼고, 이후 제천 배론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사학징의」 중 장덕유(張德裕)의 공초 중에 비슷한 내용이 있다. 누각동에 사는 신자 김국빈(金國彬)이 3월 20일쯤 장덕유를 찾아왔는데, 자신이 2월 중순경 여주에서 김한빈과 우연히 만났더니, 그가 상복 입은 사람을 데리고 예천으로 내려간다고 했다는 전언이었다. 또 배론 옹기점 주인 김귀동(金貴同)이 자신의 공초에서, 2월 그믐께 김한빈이 이상인(李喪人)을 데리고 왔다고 진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2월 15일께 도성을 벗어난 황사영은 김한빈과 함께 예천 등지를 거치며 은신처를 찾다가 근 보름 후에 배론에 도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추안급국안」의 10월 9일 자 황사영의 공초는 이것과 조금 다르다. 평구에 도착해서 김한빈과 다시 만나니, 청양 사람 김귀동이 사학으로 제천 땅에 피해 들어갔으니 함께 그리로 가자고 해서, 제천 읍내에서 30리 거리의 근우면(近右面) 배론리(排論里)로 들어가게 되었노라고 했다. 예천 간 일에 대한 언급은 빠지고 없는 셈이다. 하지만 이 경우 서울서 배론까지 가는데 근 보름 가까이 걸린 것이어서 날짜가 잘 맞지 않는다.
「추안급국안」 10월 10일 자 공초에서 김한빈은 또 송재기의 집에서 황사영과 동행해 팔송정(八松亭) 도점촌(陶店村) 김귀동의 집에 도착했노라고 했다. 팔송정은 오늘날 배론 성지 인근 제천 10경 중 제9경으로 일컬어지는 탁사정(濯斯亭)의 옛 이름이다.
김귀동은 고산(高山) 백성인데, 그 또한 2월 초에 배론 산중으로 막 옮겨온 터였다. 그 이웃에 살던 청양 사람 김세귀(金世貴)와 김세봉(金世奉) 형제도 김귀동보다 고작 한 달 먼저 이곳에 들어왔다. 당시는 교회에 대한 극심한 탄압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터전을 모두 잃고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천주교 신자들이 신앙을 지키고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충청도와 강원도의 깊은 산골로 속속 숨어들거나, 장사를 하면서 이곳저곳을 떠돌고 있었다.
위 김국빈의 진술에는 내포에서 사학을 하다가 달아난 여러 남녀를 여주에서 만나 가평 읍내에서 동쪽으로 10리 남짓 되는 땅으로 데려다 주었다는 내용도 나온다. 당시 천주교도들이 산속에 숨어 들어갈 때도 천주교 조직 내에서 암묵적으로 정보를 공유하는 네트워크가 작동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김한빈 또한 그 같은 연락망을 타고 황사영을 배론에 갓 내려온 김귀동의 집으로 안내했고, 그곳은 김세귀ㆍ김세봉 형제 등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도착해, 그 앞서 정착한 사람들과 함께 작은 산골 마을을 이뤄가던 시점이었다.
교우촌에 마련한 토굴
배론은 교우촌으로, 치악산 동남편에 우뚝 솟은 구학산과 백운산의 연봉으로 둘러싸인 험준한 산악지대라 외부와 절연된 곳이었다. 집주인 김귀동은 김한빈과 함께 땅을 파서 토굴을 짓고 거기에 황사영을 숨겼다. 황사영은 토굴 속에 깊이 숨어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한마을 사람들조차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달레는 “일종의 지하실을 만들고, 그리로 통하는 길은 그 옹기점에서 만드는 큰 옹기그릇으로 덮어놓았다”고 썼다. 황사영의 존재는 김귀동과 그의 아내, 그리고 한(韓) 그레고리오의 어머니만 알고 있었고, 한 그레고리오의 모친이 자주 와서 수발을 들었다고 했다. 한 그레고리오는 다른 기록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불빛조차 새 나가지 않는 좁은 토굴은 어떤 크기였을까? 1929년 4월호 경향잡지에 정규량 신부가 배론 일대의 유적을 답사하면서 굴에 대해 쓴 최초의 글이 실려있다. 그는 배론 점촌(店村)의 지굴(地窟), 즉 땅굴이라고 이 공간을 설명했다. 일본인 학자 야마구찌(山口正之)는 자신의 저서 「황사영 백서의 연구(黃嗣永帛書の硏究)」(全國書房, 1941)와 「조선서교사(朝鮮西敎史)」(雄山閣, 1967)에 각각 1936년 8월 25일에 배론을 답사하고 나서 쓴 「주론토굴답사기(舟論土窟踏査記)」를 수록했다. 내용을 간추리면 이렇다. “제천에서 9㎞의 봉양면 주포(周浦)에 이르러 여기서 8㎞, 도보로 약 2시간의 거리에 있는데 배론 내를 건너 계곡으로 접어든다. 우뚝 솟은 구학산과 백운산 연봉의 가슴패기를 이루고 있다. 옛 기록에는 ‘토기점촌(土器店村)’이라고 적혀 있다. 계곡은 길이가 4㎞에 이르고, 지형이 배 모양이어서 배론이라 불리운다 한다. 문제의 토굴은 봉양면 구학리 644번지 최재현씨 댁 뒤란에 있다. 토굴의 지름은 약 1m 반, 양쪽을 돌로 쌓아 올리고 다시 큰 돌로 천정을 꾸몄다. 이날은 매몰되어 있는 까닭에 굴속에 들어갈 수는 없었으나 한눈에 옹기굴의 요적(窯跡)임을 추정할 수 있었다.”
이것이 황사영이 숨어지낸 배론 토굴에 대한 가장 이른 시기 답사 기록이다. 토굴은 입구가 직경 150㎝ 크기였다. 성인이 몸을 숙여야 들어갈 높이다. 깊이는 얼마쯤인지, 내부의 넓이는 어떤지 위 기록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 여러 기록을 종합할 때 이곳은 옹기를 굽는 옹기 가마는 아니고 가마에 넣기 전 옹기를 쌓아두던 토굴 형태의 움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입구가 매몰된 상태여서 그는 토굴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했다. 짐작건대 입구는 옹색하고 작아도 안으로 꽤 깊숙이 파 들어가 황사영이 불을 밝혀 글을 쓰고 두세 사람과 함께 공부하거나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크기였을 것이다. 입구는 옹기 등으로 막아 뒷공간을 은폐했다.
「사학징의」의 공초 기록을 믿을 경우, 김한빈은 김귀동의 집에 보름쯤 머문 뒤, 생활비 마련을 위해 제천 일대를 한 달 남짓 다니며 사냥을 했고, 황사영은 토굴에 혼자 남았다. 토굴에서도 황사영은 김세귀ㆍ김세봉 형제를 앉혀놓고 천주학을 부지런히 강론했다. 그들에게 십계를 가르쳤고, 그 밖의 교리를 정성을 쏟아 강습했다. 그 일마저 하지 않고는 그 절망적 시간을 감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낙담과 절망
교회와 가족의 소식이 궁금했던 황사영은 3월 말 김한빈을 서울로 보냈다. 이미 정약종과 최창현, 최필공, 홍교만, 홍낙민, 이승훈은 목이 잘려 죽었고, 이가환과 권철신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송재기의 집에 잠깐 들른 김한빈은 황사영 집안의 소식도 물었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주문모 신부는 3월 12일 의금부에 자수했고, 강완숙도 끌려갔다. 당시는 심문 중이었고, 외교 문제로 말썽이 날까 염려한 조정이 쉬쉬하여 외부로는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황사영은 이때 주 신부의 자수 사실까지는 확인했을 것이다.
절망적 상황 속에 기약 없는 시간이 토굴 속에서 흘러갔다. 기도와 강학, 그리고 일기를 쓰면서 황사영은 간절한 시간을 보냈다. 그는 기억을 더듬어 먼저 세상을 뜬 순교자들에 관한 기록을 하나하나 공책에 적어 나갔다. 자신 외에는 증언을 남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조선 교회가 실낱같은 빛을 회복하기 위한 행동을 멈출 수 없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6월 2일, 재차 소식을 탐문하기 위해 읍내 장터에 나갔던 김한빈이 그만 서울에서 내려온 포교에게 체포되었다. 다급해진 황사영이 이곳에서 다시 달아날 궁리를 하고 있는데, 이틀 만에 김한빈이 돌아왔다. 원주 안창까지 끌려갔다가 포교가 술에 취해 조는 틈에 몸을 빼서 도망온 길이었다.
8월 말에는 황심 토마스가 배론 토굴로 찾아왔다. 그는 내포 지방 덕산 용머리 출신으로 1796년과 1797년에 주문모 신부의 편지를 들고 두 차례나 북경에 다녀온 사람이었다. 그에게서 황사영은 비로소 주문모 신부의 순교 소식을 상세히 접했던 듯하다. 주 신부는 교인들의 참혹한 죽음을 대속하고자 자진 출두하여 4월 19일에 효수형에 처해져서 죽었다는 전언이었다. 황심은 주 신부가 세상을 뜰 때의 의연한 모습과 당시 일어났던 여러 이적들에 대해 전해주었고, 다른 순교자들의 죽음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알려 주었다.
절망스러웠다. 조선 교회는 이대로 주저앉고 마는 것인가? 신부의 성사와 세례를 그토록 목이 타게 기다리던 지방의 신자들은 이제 어찌하는가? 구원의 빛은 꺼졌다. 지도부는 완전히 와해되었다. 믿었던 강완숙마저도 지난 5월에 이미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뒤였다. 지도부 중 남은 것은 혈혈단신 자신 하나뿐이었다. 황심이 황사영을 찾아온 것도 앞이 보이지 않는 조선 교회의 현실 타개 방안을 묻고자 함이었다.
깜깜한 토굴 속처럼 길은 보이지 않았다. 빛은 없었다. 황사영은 토굴 속에서 평소 북경 주교에게 보내기 위해 작성해온 보고와 탄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행상에게서 구입한 반 자짜리 명주천을 꺼내 종이에 쓴 초고를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을 쏟아 옮겨적기 시작했다.
나중에 의금부에 백서와 함께 압수된 그의 일기장에는 토굴에서 끼적여 둔 시와 서울에 살아남은 교우를 생각하며 쓴 시가 남아 있었다. 제목만 남은 시작품에 ‘가을밤에 마암을 그리며(秋夜懷摩庵)’, ‘암로(巖老)에게 부치다(寄巖老)’, ‘중간(仲簡)에게 부치다(寄仲簡)’, ‘묵옹(翁)을 송별하며(送別翁)’, ‘과회(寡悔)가 죽는 꿈을 꾸고(夢寡悔死)’ 등이 더 있다. 「추안급국안」에 제목만 나온다. 마암은 이국승, 암로는 김경우, 중간은 인언민, 묵옹이 황심이었다. 과회는 이경도로 이윤하의 곱사등이 아들이었다. 화원(花園) 또는 근형(芹兄)으로 불린 외사촌 이학규의 이름도 글 속에서 자주 나왔다. 이국승은 1797년 이래 자기 집에 함께 살았던 사람이었고, 황사영이 붙잡혔을 때 그는 이미 사형을 당한 뒤였다. 이경도가 죽는 꿈을 꾸고 잠에서 깨어 쓴 시는 당시의 불안 심리를 잘 보여주는 슬픈 제목이다. 이렇듯 황사영은 배론에서도 여러 경로를 통해 교계의 소식을 탐문하고 있었다.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4. 황사영의 도피를 도운 사람들
[상복 입고 김한빈과 배론으로 피신하다]
한꺼번에 터진 제방
신유년으로 해가 바뀌면서 조정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11월에 국상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12월 17일에 최필공이 전격적으로 체포되었다. 12월 19일 새벽, 최필제의 약방에 모여 기도하던 사람들이 기찰 중이던 포졸들에게 적발되었다. 새해 1월 10일 정순왕후는 천주교인의 전면적 색출을 위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의 연좌제 실시를 윤음으로 선포했다.
급박한 상황에 정약종은 불안감을 느꼈다. 1월 19일, 자신의 집에 보관 중이던 교회 서적과 성물, 주문모 신부의 편지와 신자들 사이에 오간 글이 가득 담긴 상자를 안전한 곳에 옮기려다가 운반 도중 적발된 이른바 책롱 사건이 발생했다. 이 일은 가뜩이나 들끓던 여론에 불을 붙였다. 천주교 배척 상소가 조야(朝野)에서 일제히 빗발쳤다. 검거 선풍이 불고 삼엄한 체포령이 내리자, 천주교 수뇌부는 일체의 활동을 중지하고 지하로 들어가 숨을 죽였다.
정약종의 책 상자 속에서 조정이 그토록 찾던 주문모 신부의 편지뿐 아니라 다산과 황사영의 편지까지 나왔다. 정약종의 일기장도 있었다. 황사영은 책롱 사건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 당일 집을 떠났다. 1월 20일, 그는 집 근처 제자 김희달의 집에 가서 잤다. 혹시 있을지 모를 기습 검거에 대비해 인근에 은신하며 사태를 관망하려 한 것이다.
당시 포도대장 이유경(李儒敬, 1747~?)은 사건의 파장이 클 것을 우려해 문제를 자기 선에서 덮으려 했다. 그 일로 그가 파직되고, 2월 5일 이후 박장설과 이서구, 최현중 등의 상소가 잇달아 올라가자, 2월 9일 사헌부는 마침내 이가환과 이승훈, 정약용 등의 체포와 국문을 주청했고, 이들은 2월 10일에 체포 수감되었다. 2월 11일에는 권철신과 정약종이 끌려왔다.
2월 10일, 국문장으로 끌려 온 정약용 앞에 당국은 불쑥 정약종의 책 상자에서 나온, 다산이 황사영에게 보낸 친필 편지를 내밀었다. 둘의 관계를 묻자 다산은 “저와는 5촌으로 이모의 외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더 가깝게 조카사위라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좀더 먼 쪽을 택했다. 황사영의 편지도 같이 내밀어, 서찰 속 내용으로 심문이 진행되었다.
잠행과 피신
2월 10일 국청(鞫廳)이 설치되자, 줄줄이 끌려온 신자들이 혹독한 고문 아래 내지르는 신음과 비명이 국청을 메웠다. 매를 못 견뎌 줄줄이 부는 진술 속에서 황사영의 이름은 빠지는 법이 없었다. 심문과 문초가 계속될수록, 교계에서 황사영의 위상은 점점 더 분명해졌다.
강완숙은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의 체포 직후인 2월 10일에, 체포령이 내린 황사영을 계동(桂洞) 용호영 인근의 사학 매파 김연이의 집으로 숨겼다. 중인 신분으로 교계의 지위가 가장 높았던 이합규와 김계완도 강완숙의 지시에 따라 이 집에 합류했다. 이합규는 이용겸(李用謙), 또는 이동화(李東華)란 별명으로 더 많이 불렸고, 김계완은 김백심(金百深)과 김심원(金深遠) 같은 여러 이름을 바꿔 쓰는 통에 당국을 혼란스럽게 했지만, 사실은 같은 사람이었다. 이들은 너무 다급해 멀리 달아날 시간조차 없어 관부의 턱밑으로 숨어든 것이었다. 세 사람은 강완숙이 뒷날 공초에서 정광수와 함께 남자 교우 중 가장 높다고 꼽았던 이들이었다. 이들은 당시 서울 지역 천주교계의 핵심 중 핵심이었다. 이들마저 체포되면 서울 교회 조직이 완전히 와해되어 재기불능 상태에 빠지고 만다는 위기감마저 감돌았다.
황사영은 이씨의 호패를 차고 이서방으로 행세하며, 때를 보아 지방으로 종적을 감출 계획을 강완숙과 미리 상의한 상태였다. 이날 밤 황사영은 집에 보낼 편지를 써서 강완숙에게 보냈고, 강완숙은 권철신 집 여종 구애(九愛)를 시켜 편지를 전달했다.
2월 11일, 포도청의 포교들이 계동까지 들이닥쳐 이들이 숨은 동네를 이 잡듯 뒤지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불안한 마음을 못 이겨 삼청동 산 위로 달아나 산속에서 하루를 보냈다. 날이 저물자 산에서 내려온 세 사람은 적선동 십자교 근처로 돌아 나와 김가 성을 가진 교우의 집으로 들어갔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주인은 세 사람을 나가 달라며 쫓아냈다. 몰려다니다가는 더 큰 의심을 사겠다 싶어 이들은 그곳에서 각자 헤어졌다. 여기까지는 이합규와 김계완, 그리고 황사영의 공초를 맞춰서 재구성한 내용인데, 기억의 착오로 세 사람의 진술에는 동선과 날짜가 얼마간 차이가 있다.
황사영은 상황을 알아보려 밤중에 석정동에 사는 권상술의 집으로 찾아가 하루를 묵고, 새벽에 그 집을 바로 나왔다. 황사영은 동대문 안쪽 훈련원 근처 황정동(黃井洞), 즉 노랑우물골에 살던 각수 송재기의 집으로 숨어들어 사흘을 더 머물렀다. 황정동은 위치가 불분명한데, 「추안급국안」 중 김한빈의 공초에 송재기의 집이 이교(二橋) 즉 동대문에서 종로 쪽으로 두 번째 다리가 놓인 인근에 있었다고 했으니, 황정동은 훈련원 자리인 지금의 국립의료원 서쪽 방산동 일원을 가리키는 지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동대문과 광희문이 지척의 거리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 근처로 나온 것은 도성 탈출을 용이하게 하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황사영의 탈출을 돕기 위해 아현의 김의호가 건너왔다. 정약종 집 행랑채에 살던 공주 포수 김한빈도 달아나 송재기의 집으로 왔다. 김한빈이 황사영을 보고는 “여태 여기에 이러고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했다. 상놈 행세로 잡물을 팔며 한양에 숨는 방안과, 사학하는 무리가 없는 강원도 산속에 숨는 것 중에 사정이 다급했으므로 바깥으로 달아나는 쪽에 중의가 모아졌다.
김의호는 황사영에게 머리를 깎아 중 행세를 하자고 제안했다. 황사영은 중은 우리의 도가 아니니 그럴 수는 없다고 대답했다. 상복을 입고 상주 행세를 하는 것은 어떠냐고 하자 그제서야 황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사영이 송재기의 집으로 숨은 시점은 전후 사정을 따져볼 때 2월 13일 경이었을 것이다.
극적인 탈출
김의호가 그 길로 바로 나가 자신의 돈과 송재기의 돈을 합쳐 베를 사왔다. 시간이 없었으므로 송재기의 처와 최설애, 김한빈의 딸이 힘을 합쳐 바로 상복을 지었다. 황사영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아름다운 수염은 족집게로 뽑아 눈에 띄는 특징을 가렸다. 이미 황사영에 대한 검거령이 내린 터여서 도성문마다 그의 용모파기가 나붙었을 것이었다.
황사영은 미리 준비해둔 이씨 성의 호패를 지닌 채 성묘 가는 행색을 꾸몄다. 김한빈의 18세 난 아들 김성분이 시종 행세로 술병을 들고 따랐다. 광희문 쪽의 경계가 삼엄했던지 황사영은 창의문을 통해 김한빈과 함께 도성을 극적으로 빠져나왔다.
황사영은 김한빈과 헤어져 경기도 양주 땅에 속한 평구(平丘: 오늘날 남양주시 삼패동)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정했다. 김한빈은 포수여서 산속 지리에 훤해 깊은 산 속으로 은신하려 할 경우 아무래도 그의 도움이 절실했다. 두 사람은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따로 떨어져서 평구까지 가서 그곳에서 다시 합류했다.
황사영이 김한빈과 함께 도성을 벗어난 것은 2월 15일 경이었을 것이다. 이후 제천 배론 땅 김귀동의 옹기점을 향하고 있던 2월 25일, 국청에 나갔던 대신들이 대왕대비를 뵙고 사학죄인의 국문 상황을 보고했다. 이때 대왕대비의 하교가 이랬다. “황사영을 여태 체포하지 못했다니, 어찌 매우 놀랍지 아니한가? 국가의 기강이 이럴 수가 있는가? 각별히 엄히 신칙하여 조속히 체포해 들이도록 하라. 또 만약 지체된다면 엄벌에 처하리라.”
대왕대비의 이 같은 질책이 있자 국청에서는 황사영을 잡기 위해 더욱 혈안이 되었다. 하지만 잡혀 온 신자들은 저마다 다른 진술로 황사영에 대한 추적을 교란시켰다. 대부분 실제로 황사영이 간 곳을 몰라 벌어진 일이기도 했다.
황사영의 행선지를 알았을 것이 분명한 송재기는 황사영이 가평 읍내에서 위로 20리 남짓 가면 있는 큰 산에 숨었을 것이라고 속여서 진술했다. 변득중은 장덕유와 함께 기찰포교를 대동하고 황사영이 숨을만한 곳을 몇 곳 지목하여 함께 다니면서 이들의 힘을 뺐다. 남제(南悌)는 황사영 어미의 말이라면서, 외사촌인 이학규의 집, 정동 윤종연의 집, 경영교 이청풍의 집 중 하나에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를 앞세워 이 세 집을 다 돌았지만 허탕이었다. 황사영 집 사당터에 부쳐 살던 남송로는 강화(江華)에 있는 삼촌 황석필의 집과 서산(西山)에 있는 그의 선영, 공주에 사는 그의 6촌 대부로 자를 사길(士吉)이라 하는 황생원(黃生員)의 집 등을 지목했고, 그때마다 포졸들은 멀리까지 헛걸음을 계속 해야 했다.
2월 26일 정약종, 최창현, 최필공, 홍교만, 홍낙민, 이승훈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이가환과 권철신은 참혹한 고문을 못 견뎌 같은 날 감옥에서 죽었다. 정약종의 문서 속에는 강완숙과 주고받은 언문 서찰도 들어있었다. 교회의 일을 긴밀하게 상의한 내용이었다. 「일성록」 1801년 2월 25일 자 기사에 그 내용이 나온다. 강완숙의 신변 또한 무사할 수 없어 마침내 그녀도 2월 26일에 붙잡혀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배론에 숨은 황사영은 이들의 죽음을 까맣게 몰랐다. 어떤 검거 노력에도 불구하고 황사영의 종적만 계속해서 묘연하자, 조정은 몸이 달았다. 신유년의 옥사는 황사영과 신부를 잡아야만 끝이 날 터였다. 의금부의 집요한 추적에도 불구하고 황사영은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어떤 단서조차 잡히지 않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5. 황사영은 역적인가?
[광적인 종교 탄압에 맞서 오로지 천주 섬기는 자유 청원]
황사영 백서. 가로 62㎝, 세로 38㎝의 명주천에 깨알 같이 적어나간 글은 글자 수만 1만 3384자에 달한다. 1㎝에 세 글자씩 쓴 1만 3384자
황심은 8월 23일 서울로 왔다가 이튿날 제천으로 떠났다. 그는 아마 8월 26일경에 배론에 도착했을 것이다. 황심의 제천행은 황사영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간의 교회 소식을 전했다.
황사영은 자신이 그간 토굴 속에서 준비한 종이에 쓴 백서의 초고를 황심에게 보여주었다. 10월에 떠나는 동지사 행차 편에 북경 주교에게 전달할 글이었다. 황심을 통해 신부의 최후에 대한 전언을 들은 황사영은 보완의 필요성을 느꼈고, 이에 황심이 말미를 두고 다시 오겠다며 길을 떠났다. 황사영은 내용을 추가해 초고를 완성한 뒤, 이를 명주천에 옮겨 적기 시작했다. 가로 62㎝, 세로 38㎝의 올이 가는 명주천에 한 글자의 오자 없이 깨알 같이 적어나간 글은 글자 수만 1만 3384자였다. 38㎝ 길이의 천에 한 줄에 96자에서 124자에 달하는 글자로 122행을 썼다. 말이 그렇지, 실제로는 1㎝ 안에 세 글자가량 써야 하는 크기다. 옷 속에 넣어 꿰매야 했기에 부피 때문에라도 글씨는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백서는 9월 22일에 완성되었다. 그런데 9월 25일에 황심이 돌연 체포되었고, 그가 황사영이 숨은 곳을 알리는 바람에 은신 8개월 만인 9월 29일에 제천 토굴에서 체포되었다. 백서가 그의 품속에서 나왔다. 백서를 본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앞쪽은 자신들이 조선 정부에 의해 어떤 탄압을 받았는지를 적었고, 이미 죽은 순교자들의 전기를 하나하나 기술하고 있었다. 문제는 글의 맨 끝쪽에 있었다. 황사영이 북경 주교에게 요청한 사항 중, 교황이 중국 황제에게 편지를 써서 조선 국왕을 협박하고, 청나라가 조선을 부마의 나라로 삼아 내정을 감호(監護), 즉 감독 보호해달라는 요청, 수천 척의 서양 선박에 수만 명의 군대를 끌고 와서 조선에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도록 강박해 달라는 내용이 문제가 되었다.
이 편지로 인해 천주교도는 이전 무부무군(無父無君)의 패륜멸상(悖倫滅常)의 무리에서 순식간에 나라를 전복시키려는 역모 집단으로 변했다. 그리고 이것은 두고두고 천주교 박해의 근거가 되었다.
가백서(假帛書)와 가짜 논란
조정은 황사영을 문초하는 중에 동지사가 북경으로 출발하게 되자, 10월 27일 대제학 이만수(1752~1820)를 시켜 황제께 올릴 「토사주문(討邪奏文)」을 작성케 했다. 중국인 주문모 신부의 처형 사실을 황사영의 검거에서 나온 백서와 맞물려 정면 돌파하려고 했다. 주문모를 조선 사람인 줄 알고 죽였는데, 뒤늦게 황사영의 백서로 인해 그가 중국 사람임을 알았다면서, 두루뭉수리로 얼버무렸다. 증거 자료로 황사영의 백서 중에 조선 정부에 유리한 내용만 발췌해서 1만 3384자를 고작 16행 923자로 축약해 흰 비단에 옮겨 적어 증거자료로 첨부했다. 이때 맥락 없이 입맛에 맞게 임의로 줄인 백서가 후대에 논란을 빚은 가백서(假帛書)다.
▲ 절두산순교성지 소장 <황사영백서입수전말의기록>. 황사영 백서는 1801년 압수된 이후 줄곧 의금부에 보관돼 오다가 1894년 뮈텔 주교가 입수했다. 이를 1925년 79위 순교자 시복식 때 교황청에 전달했다는 일련의 기록을 담고 있다.
본 백서는 의금부 비밀 창고에 들어가 봉인되었다가, 1894년 갑오경장 당시 대한제국 정부에서 의금부와 포도청에 산더미처럼 쌓인 문서를 소각 처리할 때 비로소 세상에 나왔다. 담당 관리가 폐기 직전 천주교 신자 친구인 이건영(李健榮)에게 원본을 건넸고, 이건영이 이를 당시 조선 교구장이던 뮈텔(Muttel, 1854~1933) 주교에게 바쳤다. 뮈텔 주교는 이를 다시 1925년 로마 바티칸에서 거행된 조선 천주교 순교자 79위 시복식 당시에 교황 비오 11세에게 봉정해, 현재 바티칸 민속박물관에 원본이 소장되었다.
「벽위편」을 증보할 때 이만채는 「사영백서(嗣永帛書)」를 실으면서 등출 경위를 적고 나서 이렇게 썼다. “조금 오래되자 사학하는 무리들이 ‘이것은 홍희운이 가짜로 지은 것’이라고 떠들어대어, 당시 재상 중에도 간혹 이 말을 듣고 믿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다가 기해년(1839)에 사학을 다스릴 때 그 글이 다시 드러나 윤음과 보감(寶鑑)에 올랐다. 이로부터 사학하는 무리가 마침내 감히 다시 이 같은 주장을 하지 못하였다.”
황사영의 청원 내용이 너무 충격적이었고, 특별히 중국에 보낸 가백서의 경우는 앞뒤 맥락이 다 빠진 상태에서 극단적 주장 내용만 도드라지게 편집한 것이어서, 천주교 신자들뿐 아니라, 조정 관료들까지도 의구심을 품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원본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이런 의심도 무리는 아니었다.
거기에다 원본을 베껴 쓰는 과정에서 악의적 왜곡도 끼어들었다. 예를 들어 백서 68행에서 강완숙에 대한 주문모 신부의 신뢰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신부가 총애하여 맡김이 몹시 대단해서 달리 견줄만한 사람이 없었다(神父寵任甚隆, 無人可擬)”라 한 것을 “신부가 총애하여 맡김이 몹시 대단해서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神父寵任甚隆, 無人不疑)”고 바꿔 놓아, 마치 두 사람 사이에 남녀 관계가 있었던 듯한 뉘앙스를 풍겨 놓은 것이 한 가지 예이다.
또 102행에서 “천주의 인자하심으로 오히려 완전히 버리지 아니하시고, 이같이 잔혹하게 부서진 가운데서도 다만 한 줄기 길을 남기셨으니, 분명 동국을 기꺼이 구원하시려는 드러난 증거와 닿아 있습니다(主之仁慈, 猶未全棄, 似此殘破之中, 特留一線之路, 明係肯救東國之表證)”라고 한 것을 왜곡하여 “분명 동국을 배교케 하려는 드러난 증거와 닿아있다(明係背敎東國之表證)”고 바꿔 놓는 등 군데군데 예민한 대목에서 말을 줄이거나 글자를 교체한 자취가 여러 곳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여진천 신부의 「황사영 백서 이본에 대한 비교 연구」에 상세한 분석이 있어 여기에 미룬다.)
「토역반교문」 속 3가지 흉계
12월 22일에 대비는 다시 「토역반교문(討逆頒敎文)」을 발표했다. 이글 또한 앞서 중국에 보낸 「토사주문」을 썼던 이만수가 지었다. 글 속에 황사영에 대한 내용이 짧지 않다. 글은 “이리의 심보에다 여우의 낯짝이라. 도성에서 사주 보며 부적으로 오래도록 이름이 있더니, 천진(天津) 저녁 볕에 감히 초개 같은 목숨 구해 달아났구나. 한 조각 흰 비단에 쓴 편지가 나오니, 세 조목의 흉악한 계책을 꾸몄다네. 차마 3백 개 고을, 명교(名敎)의 고장에다 문을 열어 도적을 받아들이고, 9만 리 큰 바다의 선박을 불러들여 날을 정해 지경을 범하려 했지. 배척하여 꾸짖어 욕함은 역적 정약종보다 1백 배나 더하고, 교통하여 서로 오간 것은 역적 황심과 한 통속이었다네.”
예의(禮義) 동방에 도적을 받아들이고, 서양 선박을 불러들여 우리나라를 치게 한 것을 이리의 심보에 여우의 낯짝이라 하고, 그 죄가 역적 정약종의 1백 배쯤 된다고 적은 것에서 그를 향한 조정의 분노가 느껴진다. 한편 글 속에서는 ‘삼조흉계(三條凶計)’가 유난히 눈에 걸린다. 그것은 첫째, 황제의 뜻으로 글을 내려 조선 정부가 서양인을 받아들이게 해달라는 것과 둘째 안주(安州)에 무안사(撫安司)를 열어 친왕(親王)이 조선을 감호(監護)케 하는 방안, 셋째, 서양국과 통하여 큰 배 수백 척에 정병 5, 6만을 태우고 대포 등의 병기를 싣고 와 종교의 자유를 허락게 하라는 세 가지를 꼽은 것이다. 「순조실록」 1801년 10월 6일 자 기사에 보인다.
이 부분에 대한 세밀한 검토와 평가는 이 짧은 글에서 자세하게 논의하기 어렵다. 다만 두고두고 문제가 되었던 대박청래(大舶請來)에 대한 논의는 사실 황사영이 처음 꺼낸 얘기가 아니다. 1796년 주문모 신부가 북경에 보낸 편지에서 최초로 나오고, 이는 유항검ㆍ유관검 형제의 공초에서 큰 이슈가 되었다. 또 그 바탕에는 조선 후기 미륵하생 신앙이 「정감록」 신앙과 결합되어 해도진인설(海島眞人說)로 확장되던 민간 신앙이 서학과 습합되는 별도의 긴 서사가 잠재되어 있다. 이 부분은 따로 떼어 살펴보겠다.
당시 유럽 교회는 1789년 발생한 프랑스 혁명 이후 교황의 권위는 추락했고, 국가 교회의 개념이 확산되어 국가가 교회권 위에 군림하던 시기였다. 당시 교황 비오 6세(재임 1775~1799)는 프랑스에 감금된 상태로 서거하였고, 나폴레옹의 권력이 확대되면서 교황권은 추락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를 이은 비오 7세 교황(재임 1800~1823)은 유럽 자체의 문제를 감당해나가기도 벅찬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유럽에서 9만 리를 항해하여 몇천 척의 배와 수만 명의 군대를 조선에 보내 조선 국왕을 겁박해 종교의 자유를 얻도록 해달라는 조선 교회의 거듭된 청원은 참으로 순진하고 천진난만한 희망 사항에 불과했다. 이를 두고 다블뤼 주교조차도 「조선순교자 역사비망기」에서 백서의 뒷부분이 다양하고 풍부한 정보를 바탕으로 작성하지 못한 결과 너무 경솔하게 앞서간 부분이 있었고, 말에 조심성이 너무 없어, 천주교 적대자들과 노론 세력에 대한 복수심에서 비롯된 표현이란 생각마저 든다고 지적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상황 판단에 적절치 못한 부분이 있었다 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국가의 위에 두었던 이들의 순진한 신심을 덮어놓고 폄훼할 일은 아니다. 황사영은 단지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된 종교에 대한 광적인 폭압에서 벗어나, 자신들이 오로지 자유로 천주를 섬기는 권리를 존중받게 해달라고 청원했던 것이었다. 당시 세계사의 현장적 전망을 갖지 못했던 조선의 지식인이 꿈꾼 천주와 교황의 권능은 9만 리의 거리가 문제 될 수 없었다.
황사영은 토사반교가 반포된 뒤인 11월 5일에 처형되었다. 유감스럽게도 그가 죽을 당시의 정황은 남은 기록이 없다. 당시는 모든 조직이 멸절되어 입회할 사람도 기록할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황사영의 처형으로 조선 정부는 신유년 옥사의 실제적 종결을 선언했다. 처벌받은 자들의 재심청구권도 금지했다. 새 왕은 보위에 오른 직후에 너무 많은 피를 보았다. 황사영을 마지막으로 주모자급이 모두 처형되었다는 판단이어서, 확실한 국면 전환이 필요했다.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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