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년 1월 29일(화) 출애굽기 19:16-25 찬송 422장
22절) 「여호와에게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에게 그 몸을 성결히 하게 하라
나 여호와가 그들을 칠까 하노라」
시내 산 언약 체결에 앞서 백성들의 전체적인 성결(聖潔)을 명하셨던
하나님은 마침내 영광과 위엄 찬 모습으로 시내 산에 임재 하신다.
시편 저자는 이런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산들은 숫양들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은 어린 양들 같이 뛰었도다”(시114:4)
하나님의 임재로 인해 나타난 현상은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16절)
- ‘우레’는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과 권위에 찬 임재의 청각적 측면이고
- ‘번개’는 시각적 측면을 강조해 주는 초자연적인 현상이다.
- ‘빽빽한 구름’은 앞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의 짙은 구름으로
지금껏 이스라엘을 인도한 구름기둥이요 하나님의 영광스러우신 현존을 상징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실체를 감추시기 위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조치이다.
하나님께서 이 짙은 구름 가운데 자신의 모습을 숨기신 채 그들 가운데 임재하신 이유는
죄 많은 인간은 거룩한 하나님을 가까이 해서도 보아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 ‘나팔 소리’는 하나님의 강림을 예고하는 신호이다.
천둥 번개가 치고 땅이 진동하는 가운데 거룩하고 엄위하신 주의 강림을 알리는
나팔 소리를 듣는 순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움 가운데 크게 떨었다.(16절)
접근을 금(禁)하며 죽음을 경고하신 하나님께서
오직 모세의 접근만을 허락하심으로 그를 유일한 중보자로 삼으셨음을 보여주신다.
하나님은 산에 오른 모세에게 다시 한번 백성에게 경고하라 하신다.
“백성이 밀고 들어와 나 여호와에게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21절)
시내 산을 오르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의 현현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시내 산을 오르려는
충동에 사로잡힌 이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역에 대한 지나친 호기심은 자칫하면
영원히 헤어나올 수 없는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된다.
사무엘 시대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치사 (오만)칠십 명이 죽었다.(삼상6:19)
또한 다윗 시대에 하나님의 궤를 옮기다가 웃사가 법궤를 만져 죽임을 당하였다.(삼하 6:7)
하나님의 반복적인 경고의 말씀에
모세는 이미 금지 명령이 전해졌기에 다시 반복할 필요가 없음을 역설한다.(23절)
순간적이나마 자신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보다 더 합리적일 것이라 생각하였다.
동일한 명령을 두 번씩 반복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모세의 제안을 정면에서 거절하신 하나님은
다시 거듭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산에 오르지 말도록 경고하라 명령하신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거룩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지 않으신다.
그분의 명령을 거부하고 살아남을 자는 없다.
성결한 자만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이 제시하신 경계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
경계선을 침범하는 행위는 죽음에 해당하는 형벌을 받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믿는 자의 다림줄이자 기준이다.
하나님 말씀을 자기 식대로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면 은혜의 자리에 머물 수 없다.
말씀의 경계를 온전히 수호해야 한다.
이같은 하나님의 영화로운 강림과 권위에 찬 명령은 그 율법을 제시하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앞으로 주어질 율법의 절대 권위를 시사(示唆)해 준다.
죄악 덩어리인 내(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은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는 길 밖에 없다.
보혈만이 나(우리)를 성결케 한다.
오늘도 말씀의 경계를 지킬수 있도록 성령이여 붙드소서.
보혈로 나의 생각과 마음을 정결케 하소서.
♬ 주의 보좌로 나아갈 때에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나를 구원한 주의 십자가 그것을 믿으며 가네
자격 없는 내 힘이 아닌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
자격 없는 내 힘이 아닌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
십자가의 보혈 완전하신 사랑 힘입어 나아갑니다.
십자가의 보혈 완전하신 사랑 힘입어 예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