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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교현초64회 원문보기 글쓴이: 피안재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역엔 여행자의 발걸음을 잡아끄는 이름난 도시들이 많이 있다.
세비야나 그라나다의 명성에 어느정도 가려져 있는 느낌의 (론다)이지만, 론다에는 '누에보 다리'를 포함한 특유의 아름다운 풍경과 투우의 본고장이라는 명성과 절벽위의 도시가 가지고 있는 안락함과 여유로움과 넉넉함으로 알게모르게 여행 매니아들에게 꽤나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있는 몇 안되는 매혹적인 도시 중의 한곳이다. 론다를 건너 뛰는 여행자는 있지만, 론다에 다녀와서 감격해 하지않는 여행자를 나는 본적이 없다.
본래는 그라나다나 세비야에서 하루일정으로 당일치기로 다녀오려 했던 론다였다.
하지만 아프리카 모로코의 대부분의 일정을 포기하고 돌아 온 우리에겐 덕분에 남겨진 시간이 너무도 풍부해 졌다. 그래서 배낭을 메고 우리는 직접 론다를 찾아갔다. 그리고 온전하게 3일을 론다에 쏟아 부었다.
그것은 정말로 탁월한 선택이었고, 론다에서의 3일은 오랫동안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게되는 아주 멋진 추억의 시간들이었다. 론다는 아름답고 황홀했다.
굽이굽이 안달루시아의 험준한 산길을 숨가쁘게 겨우겨우 넘어가면 사방으로 드넓은 평원이 내려다 보이는 고원처럼 솟아있는 언덕이 모습을 드러낸다.
까마득한 100미터의 절벽 아래로 과달레빈 강이 흐르고, 그로인해 생겨난 타호 협곡 위로 하얀 집들이 그림처럼 들어서 있다. 한마디로 이 도시는 험준한 대자연과 인간의 노력과 창조가 하나의 문명으로 대단히 독특하고 멋진 하모니를 이루며 탄생했다고 하겠다. 협곡과 협곡 사이를 잇는, 이제는 신도시와 구도시를 가르고 있는 '누에보 다리(Puente Nuevo)'는 기히 스페인 최고의 비경이라 불릴만 하다. 이떻게 이런 지형을 이용해 사람들이 거주하는 도시를 만들었을까? 아주 작은 도시 론다이지만 이런 멋진 풍경이 여행자들의 발길을 끊이지 않게 잡아끄는 것만 같다.
안달루시아 남쪽 지중해 연안을 '코스타 델 솔(태양의 해변)'이라고 부른다.
수려한 해안선 뿐만이 아니라 사계절 내내 풍부한 햇쌀과 온화한 기후로 해변 휴양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곳들이다. 말라가와 토레몰리노스. 마르베야 등의 도시에 해변을 즐기려는 유럽의 관광객들이 몰려 온다. 카사레스. 네르하. 미하스 등 카사블랑카(하얀집) 마을이라 불리는 예쁜 작은 도시들이 지중해 연안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다.
알헤시라스 항구를 출발한 버스는 코발트 불루가 일렁이는 지중해 연안을 따라 끊임없이 올라가면 작은 마을과 도시들을 하나씩 하나씩 스쳐 지나간다. 절로 '이것이 지중해구나' '이것이 말로만 듣던 스페인 태양의 해변이구나' 하는 감탄사가 연실 터져 나온다.
오른쪽으로는 지중해 해변이 보이고 왼쪽으로는 포도밭과 올리브 농장이 스쳐 지나간다. 수확을 앞둔 황금색 밀밭이 펼쳐지는가 하면 이제 한참 피어나기 시작한 해바라기 밭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마도 한달쯤 뒤 6월 중순이 되면 저 해바라기 밭들이 장관을 이루겠구나 하는 아쉬움이 가슴을 스친다.
셀럽들이 즐겨찾는 천혜의 해양 휴양지라는 마르베야에서 버스를 갈아탄다.
약 20분의 여유가 생겨서 터미널 노천카페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나자 갈아타고 론다로 향할 다른 버스가 들어 왔다. 이제 지중해 해안선 드라이브는 끝이나고, 본격적으로 스페인의 산악지형이 얼마나 험준한가를 제대로 보여줄 모양이다. 시시각각 전혀 다른 풍광들에 입이 떡 벌어진다. 험준한 산골짜기 하나를 달랑 넘어가는 것도 아니다. 가도가도 오르막이고 또 가도가도 오로지 산길뿐이다. 과연 이 산길이 끝나기는 하는 것일까?
현지 관광 팜플렛에 눈에 탁 띄는 부분이 있다.
스페인 원정에 나섰던 로마 군단이 바로 이 길을 걸어서 넘었다고 적혀있다. 돌로 만든 다리가 좁은 협곡에 세워졌고 바위 언덕 곳곳에 군대 막사와 우물 보관소의 흔적이 유적처럼 남아 있다. '로마 가도'의 일부라는 말이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이 산악지역을 중무장한 로마군대가 걸어서 넘었다는 말이다. 하루에 얼마나 이동했을까? 보급은 어떻게 했을까?
지중해 인근이나 소아시아 지역에까지 어느곳에서든 로마의 유적을 만나면 나는 가슴이 뛰고 어떤 진한 감동에 사로잡혀 짜릿한 전율을 느낀다.
로마군은 정말로 위대했다.
산비탈이 아래로 향하면서 비로소 거대한 평원이 나타난다.
그러면서 죄우로 동화속의 그림 같은 작은 마을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마침내 도로 표지판 위에 '론다'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론다는 한마디로 동화속 사랑의 도시'이다.
론다의 첫느낌은 여타 스페인의 다른 도시들과 별반 다를것이 없어보였다.
번화하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았다. 그저 고만고만해 보이는...... 왜냐면 론다는 아주 작은 도시에 속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론다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는데, 터미널은 론다 신도시의 도심 안에 있었다. 그리고 인근 300미터 정도에 기차역까지 가까이 접해있다. 참으로 교통은 스페인 전체를 통털어 론다가 최고였지 싶다.
우리는 쉐프샤우엔에서 부터 허겁지겁 서둘러 지중해를 건넜고 알헤시라스에서 쪽잠을 자고 아침 새벽에 나서 부랴부랴 론다까지 오게되느라, 애초의 계획했던 스케줄과는 전혀 다른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제 벌어지는 모든 상황들이 애시당초의 예정을 모두 벗어난 것들이었다.
당장 숙소가 급선무였다.
새벽에 깨자마자 와이파이를 이용해 인터넷으로 론다의 숙소 두세군데를 검색해서 메모를 해두었었다. 우선 제일 가까운 터미널 인근의 첫번째 검색해둔 숙소를 찾아 나섰다. 안달루시아 거리의 불과 5분 정도 거리에 마침내 첫번째 숙소 후보가 나타났다. 선대때부터이어져 내려온 가족끼리 운영하는 아주 작은 호텔이었다. 은퇴한 할아버지는 구석 테이블에서 신문을 읽으시다 우리를 환영해 주었고 오늘의 데스크 담당은 둘째 딸이었다. 환한 미소와 함께 어찌나 친절하고 상냥하던지...... 좀 좁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다른것은 그런대로....... 2층의 방 하나를 보자마자 우리는 이미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아프리카도 이미 격어보았는데 이 정도면 하늘이지........ 여긴 그래도 스페인이야.'
다시 1층으로 내려가 여권을 꺼내고 체크인을 마쳤다.
'오늘은 론다의 최대 명절인 투우 축제의 마지막 날이예요. 실질적인 대부분의 행사는 이미 모두 마쳤겠지만 축제 분위기는 오늘 밤까지 이어질거예요. 축제를 최대한 즐겨보세요. 일년 중에 가장 화려한 날이예요.'
숙박비용을 유로화로 지불하고 있는데 카운터 아가씨가 살짝 귀뜸을 해준다.
5월의 스페인은 어디를 가나 축제다. 근대 투우의 발상지라는 자부심을 간직하고 있는 론다의 투우 축제라니........ 그런데 대부분의 행사가 끝난 마지막 날이란다. 오호라. 통제로다. 알았으면 하루라도 일찍 와 보았을것을..........
그때 호텔의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 세 명의 아가씨들....... 첫 눈에 봐도 영락없는 해맑은 한국 아가씨들이다. 내 배낭의 태극기를 알아보고는.......
'안녕하세요. 한국분이시네요?'
해외에서 한국 여행객을 만나면 그리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다. 떼로 몰려다니면서 소란스럽기도 하고, 여행의 관점이나 방법들이 우리랑은 상당히 거리가 있고, 한국 여행자들의 여행태도가 점점 중국사람들 여행 습관을 닮아가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중국 사람들의 여행 문화는 최악으로 세계 여러나라의 공적이 되어가고 있는 모양새다. 예전에는 확연히 차별을 느낄 수 있었는데...... 요즘 보자면 한국인의 여행 스타일이나 중국인의 여행 스타일이나 별반 크게 달라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장거리 버스 안에서 큰소리로 장시간 전화 통화를 하면 중국인이다. 그런데 전화를 하고 끊었다 또 하고 온통 버스 이동시간 내내 전화기를 죽자사자 붙잡고 노닥거리면 한국인이다.(물론 이게 다는 아니라는 전제 하에) 거기다가 여자 동창들 여행이거나 시누 올케 가족 여행이면........ 뭔 눔의 흉 볼 상황이 그리도 많은지, 그리고 서로서로 자랑을 내세울 쇼핑꺼리가 그렇게도 많은지........ 비행기가 다 흔들릴 지경이다.
대충 어림잡아서 한국이나 중국 여행자의 여행 소양은 완전히 꽝 이다. 여행 소양은 단연코 일본인이 세계 제일이다.(나의 소견과 판단임)
취업을 준비하는 아가씨. 연휴에 월차 연차 휴가를 모두 쏟아 부었다는 아가씨. 이제 공부를 마친 아가씨를 축하하기 위하여 의기 투합해 첫 해외여행으로 스페인을 찾았다는 자랑스럽고 예쁘고 생기 발랄한 대한민국의 미녀 삼총사였다. 바르셀로나로 들어와서 그라나다를 보고나서 여기 론다에 왔단다. 다음 세비야을 거쳐 코르도바. 톨레도. 세고비아를 거쳐 마드리드에서 귀국 한단다. 우리와는 약간 반대의 코스를 택하고 있었다.
진심으로 이 아가씨들의 여행이 즐겁고 유익하기를 기원했다. 즐겁고 유쾌한 만남의 시간이었다.
해외에서 만난 한국인 여행자로는 태국의 수상시장에서 만났던 아가씨들과 함께 이 세사람이 가장 즐거운 만남이었다. 미얀마의 바간에서 일출을 보면서 만났던 일산에서 온 가족과 데이비드 가레자 트래킹에서 만났던 청주에서 온 여행자도 반가운 인연들이었다.
앞으로는 좀 반가운 모습의 한국인 여행자들을 편하게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짐 정리를 마치고 서둘러 호텔을 나섰다.
론다에 왔다면....... 우선 가장 먼저 '누에보 다리'를 보아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터미널 인근의 호텔에서 누에보 다리까지는 걸어서 약 10분 정도가 소요된다.
주로 하얀색을 칠한 벽들이 주류를 이루고 간간히 샛노란 색들이 수놓아져 있는 깔끔한 거리를 거닐다 보면 이곳이 화려하지는 않아도 론다의 번화가 임을 쉽사리 눈채 챌 수가 있다. 쇼핑가인 에스피넬 거리에서 가장 많은 것이 단연코 레스토랑 들이다. 골목 도로쪽으로 빼곡히 의자들이 놓여진 노천카페도 여기저기 상당히 많이 있다. 다음으로 기념품을 파는 상점과 가죽옷이나 여성 의류 명품을 파는 가계들이 눈에 들어온다. 론다는 인구가 채 4만에 이르지 못하는 아주 작은 도시이다. 하지만 사계절 내내 거주 인구보다 더 많은 여행자들이 이 아름다운 도시를 찾아와 머문다.
론다의 모든 볼거리는 누에보 다리를 건너 구도시에 있다는 속설이 있지만, 이곳 신도시에도 투우장과 알라메다 타호 공원의 전망대 같은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관광명소가 많이 있다.
중심 번화가 에스피넬 거리를 걷다보니 유독 현지인들이 줄을 서는 허름한 카페가 번화가 한가운데 떡하니 자리를 잡고 영업을 하고 있다. 남미 국가의 수도 지명인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간판으로 내걸고 있다. 노천에 걸터앉은 손님들 상당수가 현지인 풍모를 내비치고 있다. 다른 여러 여행자들이 즐비한 카페와는 확연히 달라보였다. 그래서 우리도 슬쩍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 앉았다. 메뉴판을 살펴 볼 이유도 없었다. 우선은 무더위에 시원한 생맥주가 우선 필요했고 옆테이블에서 현지인들이 가장 많이 먹고 있는 음식을 시켰다.
육안으로 비춰지는 단순한 요리는 별 볼일이 없어 보였는데......... 이거 기대했던것 보다 상당이 감칠맛이 있다. 현지인들의 가정식 백반을 맛보는 중이라 할까? 결국 우리는 다음날도 또다시 이곳을 찾게 되었다.
번화가 골목길을 두리번 거리면서 걷다 보면 눈 앞에 아름다운 광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스페인의 어느 도시에나 있는 중심축 (스페인 광장)이다.
광장으로 들어가면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면 저만치에 그 유명한 론다의 투우장이 슬쩍 옆모습을 내보이고 있다. 그런데 지금의 관심은 온통 누에보 다리을 어서 만나보아야 하겠다는 간절한 마음뿐이다.
'누에보 다리(Puente Nuevo).'
여기에서의 누에보는 영어에서의 'New' 그러니까 나중에 놓여진 '새로운 다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아래쪽의 '아랍인 다리'에 이어서 세웠졌으니까.
그런가 하면 스페인어에서 '누에보'는 '벼락 부자' 또는 '졸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어쩌면 이 새로운 다리가 세워지면서 새롭게 등장한 벽락 부자를 쫄부로 비아냥 거리는 의미로 쓰여지기도 한것은 아닐까?(어디까지나 나만의 생각)
쿠에바데라필레타(Cueva de la Pileta) 동굴에서 동굴 벽화가 발견되었기 때문에인근 지역에 있는 론다는 신석기 시대부터 이미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찌기 기원전 6세기 경에 켈트족에 의해 아룬다(Arunda)라는 마을 이름으로 불리워지기 시작했다. 또한 지중해를 무대로 무역을 시작한 페니키아인들은 이 마을을 아시니포(Acinipo)라 부르며 내륙으로 향하는 중간 거점으로 삼았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론다를 역사의 전면에 등장시킨 사람으로는 로마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장군이었을 것이다.
이탈리아 반도를 2년이상 휩쓸고 다니며 로마제국을 공포에 떨게했던 한니발의 군대를 상대로, 스키피오는 스페인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 군단을 이끌고 카르타고의 본토인 튀니지 지역으로 쳐들어 갔다. 카르타고는 한니발을 불러들였다. 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나면서 로마는 겨우 숨통이 트였다. 하지만 지중해를 놓고 카르타고와 로마의 전쟁이 모두 끝난것은 아니었다. 스키피오는 로마에 피해가 가장 적은 최후의 전쟁을 준비했다. 그곳이 바로 스페인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론다라는 천험적인 요새를 스키피오는 택했다. 스키피오는 론다에 머물며 요새를 구축하고 한니발을 기다렸다. 젊디 젊은 스키피오에게는 충분한 시간이 남아있었지만 이미 나이를 먹은 한니발에게 시간은 늘 부족했다. 결국은 일평생 자신을 연구하고 대비책을 마련한 스키피오의 바램대로 한니발은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한니발의 일생을 통털어 처음으로 타의에 의한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스키피오에 의한 스키피오가 선택한 스키피오 방식의 전쟁이 안달루시아 평원에서 시작된 것이다. 결국 3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은 패할 수 밖에 없었고 카르타고는 멸망했다.
론다는 로마의 명장 스키피오에 의해서 철저하게 요새화된 난공불락의 성채였다.
후에 이곳을 다스리게 된 율리우스 카이사르(시저)에 의해 비로소 '론다'라는 도시의 칭호를 얻게된 것이다. 론다는 대단히 유서 깊은 고대 도시인 것이다.
이 난공불락의 요새는 철저하게 외부와 단절된 깍아지른 바위벼랑 위에 설치된 군사 기지였다.
그러다 이 요새가 외부와 연결되어 공개 된것은 로마가 멸망하고 시간이 한참 지난 8세기경에 리베리아 반도를 침입한 아랍인(이슬람 교도. 무어인)에 의해서 였다. 이 요새의 빼어난 지리적 요건을 알아 챈 아랍인들은 깊고 깊은 타호 협곡의 비교적 낮은 지점에 협곡의 양쪽을 잇는 다리를 처음으로 건설하였다. 바로 '아랍인 다리' 이다. 현존하는 이 다리는 나름 실용성을 뛰어넘는 운치로 여행자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스페인의 펠리페 국왕은 이곳 론다에 새로운 다리 건설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처음 1735년에 착공된 새로운 다리는 높이 35미터의 아치형 다리로 계곡의 한참 아래쪽까지 걸어내려가서 건너는 방식으로 세워졌으나 완공 직전에 무너져 50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말았다. 이에 커다란 충격을 받은 왕은 충분한 시간과 경비를 들여 튼튼한 다리를 다시 짓도록 명령하였고, 총책임자로 건축가인
José Martin de Aldehuela를 임명하였고, 시공 책임자로는 Juan Antonio Díaz Machuca를 임명하였다. Juan Antonio Díaz Machuca는 다리 건축 시에 필요한 거대한 돌들을 들어올리기 위해서 획기적인 기계들을 고안해냈다. 그 결과로 탄생한 다리의 높이는 98m이며 건설에 쓰인 돌들은 타호 협곡(El Tajo Gorge)으로부터 가져와 축조하였다. 120미터의 거대한 협곡 위에 장엄한 위용의 누에보 다리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42년이라는 오랜 건축 기간이 소요되다 보니 어느 정도의 설계 변경과 시공상의 어려움을 해소해 가면서, 누에보 다리는 다양한 견축기법과 당시의 시대상황들을 그대로 간직하고 드러내 보여준다.
다리 중앙의 아치 모양 위에 위치한 방은 오랜 세월동안 감옥부터 바까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1936년~39년에 일어난 스페인 내전 기간 중에는 양 측의 감옥 및 고문 장소로도 사용되었으며, 포로 중 몇몇은 창문에서 골짜기 바닥으로 던져져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현재 이 방은 다리의 역사와 건축에 대한 전시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스페인 내전의 깊은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역사적 장소가 바로 론다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시기를 돌이켜보게되면 우리는 그 즈음에서 대문호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떠올리게 된다.
'파파'
'마초와 같은 전형적인 아메리칸'
'후런티어 정신으로 무장한 뛰어다니는 지성'
'20세기의 살아있는 지식인, 행동하는 양심'
누에보 다리에 서면 낭떠러지 위에 우뚝 솟은 다리의 위용에 감동하는것 외에도 주변의 빼언난 경관과 풍취에 깊이 빠져들게 된다.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새하얀 집들과 그 아래로 거미줄처럼 협곡 아래로 향하는 산책로들과 여행자들로 가득찬 협곡의 전망을 그대로 내려다 볼 수 있는 카페나 레스토랑들이 즐비하게, 그리고 조금은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것이 대단히 매혹적인 모습이다. 계곡 깊숙한 곳까지 새하얀 계단길이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가는 무어인의 집과 론다를 론다스럽게 자랑하고 있는 파라도르(고성이나 수도원을 개조한 초특급 호텔)들이 나의 시선을 넘어 그 어떤 그리움을 마구마구 양산해 내고 있다. 자유로운 여행자 치고 이런 멋진 파라도르에서 묵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이 파라도르의 비용은 특급호텔 사용료를 초과한다고 한다. 건축학적 가치나 의미로 보아도 어찌 아니 그러하겠는가? 그저 파라도르의 한 구석에 딸린 카페에서 나름 파라도르의 향취를 간접적이나마 경험해보면서 스스로 위안을 삼을 수 밖에........
위에서 내려다 보는 풍광이 이럴진대 저만치 계곡의 아래에서 올려자보는 누에보 다리의 위용을 과연 어떨까?
그런 궁금증을 이대로 지나칠 우리가 결코 아니다. 그 확인은 내일로........
이렇게 누에보 다리와 깍아지른 벼랑 아래로 펼쳐지는 평원을 바라보면서 산책을 하면서 걷다보니 돌아가는 건물의 모서리에 낯익은 모습이 눈에 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대문호가 한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이 주변 산책을 즐겼다고 해서 '헤밍웨이 산책로'라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명이었다.
헤밍웨이라..........
그러고 보니 여러 잡지나 여행 안내서와 여행기에서 '헤밍웨이가 사랑한 도시 론다'라는 표현을 제법 여러번 접했던 기억이 새롭게 떠올랐다.
그런가?
하지만 내 기억 어디에도 내가 익히 어느정도 잘 알고있는 헤밍웨이가 론다라는 도시를 정말로 사랑했다는 기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헤밍웨이가 론다에 머물렀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헤밍웨이가 정말 사랑했던 도시는 쿠바의 하바나라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사랑했음으로 죽을때까지 체류한 하바나를 제외하고는 프랑스 파리에 가장 오래 머물렀고 수많은 사람들과 어울렸던 것을 기억한다. 아프리카에 매료되어 한동안 머물렀던 것도 기억한다. 그런데 하나 같이 많은 여행자들은 '헤밍웨이가 론다를 특별히 아주 사랑했던 것'처럼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어떤 근거로?
여기 이 '헤밍웨이 산책로'를 근거로?
어떤 여행자가 말씀하시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론다를 특별히 사랑하고 아꼈다'라고 표현한 것을 기억한다.
하지만 나의 소견은 '과연 그럴까?' 이다.
릴케는 1913년에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분명하게 론다를 다녀갔다. 하지만 다녀갔다고 해서 특별히 사랑했다는 표현은 아니지 싶다.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시간동안 가장 많은 지역을 여행다니며 가장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사귄 사람 중에는 릴케가 단연 돋보이는 유별나고 독특한 시인이자 예술가가 아니었을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아마도 릴케는 자기가 다녀온 수많은 여행지랑 만났던 사람들을 모두 다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단순하게 여행만을 생각한다면 릴케의 삶이야 말로 나에게 가장 부러운 대상이자 로망이 아닐까?
릴케는 론다를 다녀갔고 누에보 다리 풍광을 아주 인상깊게 보았다고 했다.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에 대해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고 남겼을 것이다. 그저 단순하고 일반적인 평가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릴케와 론다가 어떤 특별한 관계처럼 포장되는 것은 좀.........
헤밍웨이와 론다의 관계에 대해서도 비슷한......... (어디까지나 나의 견해)
헤밍웨이를 이야기 하자면 우선 쿠바의 하바나. 그리고 파리. 다음으로 아프리카가 아닐까?
암튼 우리는 지금 론다에 있다.
헤밍웨이의 산책길을 알고 걸은것이 아니라 실컷 걷다보니 불쑥 여기가 헤밍웨이가 즐겨 걸었던 산책로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이 산책로의 한족 끝은 누에보 다리이고 다른 한쪽 끝은 버스 터미널 뒷쪽의 도심을 벗어나 평원으로 내려가는 포장도로가 있는곳까지 이어진다.
그렇게 산책로를 거꾸로 거닐고 있는데....... 왁짜지껄...... 인파로 가득한 광장과 숲이 우거진 공원이 나타났다.
알라메다 델 타호 공원이다.
그리고 그곳에 지금 한바탕 축제 현장이 벌어지고 있다. 투우 축제의 마지막 날 야시장(?)이 펼쳐지고 있었다.
어쩌겠는가? 축제라면 당연히 뛰어들어 맘껏 즐겨야지.
그것이 바로 자유 여행자의 당연한 책무가 아니겠는가?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알라메다 델 타호 공원 주변으로 많은 사람들이 익히 알아볼 수 있는 유명인들의 기념비가 서 있다.
어네스트 헤밍웨이가 있고 오손 웰스가 있고 미키 하루타의 기념비 등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여기 론다와 인연이 있다고 하여 세워두었는가 본데...... 이런 정도라면 어딘가 반듯이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기념비도 서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공원이나 광장이나 골목 곳곳을 모두 누비지 못하였을 뿐, 아마도 어딘가에는 릴케는 물론 보다 많은 유명인들의 기념비가 서 있지 않을까?
론다에서의 헤밍웨이라면 다시 거론할 기회가 있겠지만......... 20대 후반에 이미 (시민 케인)으로 헐리우드의 위대한 감독이자 배우로 눈부시게 성장한 웰스는 이후 (제인 에어) (우주 전쟁)( 제 3의 사나이)를 거쳐 세익스피어의 연극을 연출한다. 이 시대의 풍운아이자 천재인 오손 웰스는 하지만 그를 견제하고 내치려는 헐리우드에 철저하게 배제되다가 결국 낙심과 좌절을 격게되고 방황으로 이어진다. 이 시기에 그는 유럽여행을 떠났으며 그 여정중에서 여기 론다에 한동안 머물렀다. 그게 전부다. 오손 웰스의 전기 어디에도 뭔가 특별한 론다와의 인연은 찾아볼 수 없는데 여기 론다사람들에게는 그것이 크게 자랑거리가 되었다.
미키 하루타는 일본의 화가다. 수채화를 주로 그렸다. 올드 시티에 하루타의 작은 기념관이 있는데 바쁘게 쏘다니다 보니 아쉽게 들려보질 못했다. 하여 그의 작품세계나 론다에서의 삶에 대해서 알아 볼 수는 없었으나, 그가 일본인 수채화가로서 론다를 여행하다가 이곳의 풍광에 심취해서 나머지 생을 이곳에 머물면서 작업활동을 벌였다고 전한다.
스페인 마요르카 섬에 오래 거주하시던 안익태 선생님이 론다엘 다녀가셨더라면 지금쯤 여기 어딘가 기념비가 서 있었을텐데.......
이 사람들 참으로 유명인 기념비 좋아한다.
이제 어느정도 론다가 어떤곳인지 대충은 알아본것 같아서 우리는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아뿔싸........
바르헨 데 라 파스 거리를 가로질러 숙소로 향하는데....... 그토록 많은 사람들로 붐비던 노천 카페들이 벌써 문을 닫고 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카페 하나만 문을 닫고 있는 것이 아니다. 론다의 모든 카페와 레스토랑과 바르가 일제히 페점을 준비하면서 청소를 하고 있다.
시계를 보니 이제 겨우 오후 3세50분. 시계가 잘못되었나 싶어 핸디폰으로 확인을 해 보아도 똑 같다. 시계 고장이 아니다.
밤 9시반은 되어야 해가지는 나라에서 오후 4시쯤 점심 장사를 마치자마자 일제히 모든 음식점이 문을 닫고 있다.
헐.
청소중인 한 직원에게 물어 보았다.
'지금 사흘째 축제중이잖아요. 축제 기간동안에는 모든 음식점들이 모두 오후 4시에 문을 닫아요. 축제 주체측과 상호간 협동의 의미도 있고, 또 우리도 축제를 즐겨야 하지 않겠어요? 오늘이 마지막 날이예요. 식사를 하시려면 축제장으로 오시면 됩니다.'
명쾌한 답변이었고 현명한 조치라 생각되었다.
일부 몇몇 가계만 문을 닫는다면 분란의 소지가 있겠지만 론다의 모든 음식점이 불문율처럼 일체히 모두 문을 닫고 그들도 축제를 즐기러 간다. 이는 또한 론다가 자랑스레 내세우며 벌이는 투우축제 주체측에 온 시민들이 적극 협조하는 참여 정신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그렇게 하나되어 먹고살아가는 것이다.
100% 절대 공감!!!!!
저녁때가 되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축제장으로 갈 수밖에 없게되었다.
론다의 노을과 누에보 다리의 야경도 있겠지만, 우선은 민생고를 해결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호텔 주변에 있던 대형마트들 마저도 무두 문을 닫고 축제장으로 몰려간 탓에 저녁을 해결하려면 야시장으로 가는 수 밖에 없었다. 저녁무렵에 론다에 열려있는것은 기차역과 버스터미널과 경찰서와 기념품 판매점 뿐이다. 흡사 도시가 파업한 그런 분위기다.
야시장이라는게 좀 그렇다.
낮보다는 밤이 더 휘앙찬란하고 눈이 부시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마친가지로 야시장이라는 시끌벅쩍한 분위기를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어찌되었든 일단 찾았다 싶으면 이것저것 먹고 싶은것이 얼마나 많은지......... 한국이나 스페인이나 야시장은 야시장이다. 고로 실컷 즐기고 엄청 먹고 마셨다.
그리고 나서....... 소화 운동을 위해서 산책로로 발걸음을 옮겨 론다의 노을도 보고 누에보 다리의 야경도 감상해 본다.
론다의 새벽 산책길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것은 투우장이다.
정렬의 나라 스페인을 대표하는 무형의 유산이 바로 투우와 풀라멩코가 아니겠는가.
스페인의 상당수 대도시마다 투우장이 있고, 또 도시 축제 기간동안에는 몇일씩 연일 투우 경기가 열려서 사람들의 피를 들끓게 만든다.
손에 꼽히는 투우장으로는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세비야. 발렌시아. 사라고사. 발바오. 코르도바를 포함하는 7개 도시에서 펼쳐지는 투우경기를 1급으로 친다. 그 중에서도 세비야와 마드리드의 투우 경기를 스페인 사람들은 가장 선호 한다.
그래도 투우 하면 론다의 정통성을 결코 무시할 수가 없다.
론다의 투우장은 스페인 전체에서 가장 오래된(1785년 준공) 투우 경기장으로 유명하며, 더욱이 스페인 근대 투우의 발상지라고도 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볼 수있는 근대화된 투우가 바로 이곳 경기장에서 프란시스코 로메오에 의해서 처음 선을 보였으며, 론다는 그가 태어난 고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투우에 대한 론다인들의 자부심은 실로 엄청나다고 하겠다.
1868년 스페인의 변호사이자 고미술품 수집가였던 ‘마르셀리노 산스 데 사우투올라’는 사냥을 하기 위해 스페인 북부 칸타브리아 지방 산티야나 델 마르 마을을 찾아가게 되었으며, 사냥 중에 그는 잃어버린 사냥개를 찾기 위해 사냥터를 둘러보다 우연히 동굴을 하나 발견했다. 그것이 그 유명한 후기 구석기 시대에 그려진 (알타미라 동국 벽화)이다.
석회암 동굴 속에 그려진 알타미라 동굴 벽화는 기원전 3만~2만 5000년 사이에 그려진 것으로, 형태가 분명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매우 섬세하며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 동물을 보는 듯한 생동감까지 느껴지게 만든다. 한마디로 알타미라 동굴 벽화는 구석기 시대 사람들이 얼마나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는지 잘 보여 주는 작품이다.
그러다보니 투우라는 것이 스페인에서 탄생했고 스페인 사람들이 죽고 못사는 고급 스포츠라는 사실이 결코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않나 생각하게 된다.
야생 들소는 커다란 몸집에 사납고 빨라서 고대의 인간들이 결코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무서운 동물이었다. 그러나 불이 발견되고 사냥법도 진보하여 무리를 지어 사냥감을 유인하거나 몰아 붙여서 잡는 방법등이 새롭게 등장했다. 칼이나 창에 이어서 등장한 활은 사냥에 있어서 첫번째 아주 커다란 혁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으로 두번째 혁명은 바로 말이었다. 인간이 말을 조련하여 타면서 부터 인간은 그 어떤 동물에도 뒤지지 않는 스피드와 파괴력을 보유하게 된 것이다. 말을 타고 들판을 내달리며 야생의 들소를 사냥했다. 그것이 바로 투우의 시작이었다. 사냥에서 시작된 투우가 점차 로마시대의 콜로세움에서 벌어지는 검투경기 방식으로 여러가지 형식이 첨가되면서 고급 오락경기로 발전해 갔다.
다른 한편으로는 부족과 국가의 개념이 생겨나면서 전쟁이 생겨났고, 말을 타고 싸우는 기마병의 중요성이 점차 부각되어갔다. 하여 사냥. 격구. 집단 투우 등은 놀이가 아닌 군대의 훈련방식으로 진화되어 가기도 했다.
로마와 중세에 이르는 투우 경기는 마상 투우 경기가 전부였다. 말에 올라 탄 기사가 긴 창을 가지고 경기장 안에서 날뛰는 소를 몰아가고 쫓아가면서 종국엔 창으로 찔러 죽이는 경기가 바로 투우 경기였다.
18세기 초, 이곳 론다에서 투우 경기가 열렸다. 성난 숫소가 투우사가 탄 말을 향해 그대로 돌진을 했던 것이다. 너무나 저돌적인 숫소의 공격에 당황한 투우사는 미처 창으로 숫소의 불 공격을 막아내지 못했고, 뿔은 그대로 말의 옆구리를 관통했다. 쓰러진 말의 안장에 깔린 투우사는 더이상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피투성이의 성난 숫소는 힘찬 뒷발로 흙을 뒤로 걷어찼다. 이제 그대로 투우사를 향해 돌진을 할 찰라였다.
관중석에서 투우 경기를 관람하던 한 사내가 '아레나(투우경기장)'의 담장을 넘어 뛰어 들었다.
그는 자신이 쓰고 있던 '솜브레로(창이 아주 넓은 전통모자)'를 앞으로 내뻗어 돌진해 오는 소의 시야를 가리며 자신의 몸을 비틀어 위기에서 벗어났다. 재차 성난 소가 달려 들자 이번에도 솜브레로로 소의 시야를 가려 위기에서 벗어났다. 동시에 안전요원들이 몰려들어와 부상당한 투우사를 구해냈다. 그리고 다른 투우사들이 뛰어들어 성난 소를 창으로 찔러 잠재웠다. 관중들은 일제히 환호를 보냈고 이것이 바로 근대 투우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솜브레로를 이용해 성난 소를 물리친 사람은 바로 인근에 사는 마을의 목수 프란시스코 로메로 였다.
이후 로메로는 정식으로 투우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등장과 함가ㅔ 투우는 새롭게 대변혁을 가져왔다. 마상 투우가 아닌 지상에서 동등하게 숫소와 맞서 싸우는 오늘날의 방식이 채택된 것이다. 숫소의 부아를 돋구어 다가오게 만들고 뿔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낼 때 쓰는 물레타와 카포테가 이때부터 등장하게 되었고, 말 위에서 창을 이요해 소의 힘을 빼는 피카도르가 생겨났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투우 경기의 하일라이트는 맨몸으로 소의 뿔공격을 아슬아슬하게 비켜나면서 소의 마지막 숨통을 끊는 마타도르의 우아하고 화려한 몸동작이 아닐까 싶다.
소를 유혹하는 물레타와 카포테가 붉은 천으로 만들어 소의 흥분을 절정까지 끌어올린다 하는데....... 소는 색맹이라 색깔을 구분하지 못한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동물 학대 논란'으로 시시비비가 잦은 편이지만........ 투우가 적어도 스페인 사람들에게는 유구한 그들의 전통 풍습이라는 점에 대해서 우선 인정을 해야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만의 자체적인 문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번에도 좀 놀란 사실은..........
명년 전에 조지아. 아르메니아 여행을 다녀와서 여행기를 쓰고 있는 도중에 아주 유명 여행 프로에서 내가 다녀온 루트를 함께 여행한 것처럼 찍어서 방영하기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나서 몇몇 TV프로그램에서 또 방송이 이어졌었다.
이탈리아. 몰타, 터키를 다녀오고 나서도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방송에서 이탈리아와 터키를 묶어서, 몰타는 별도의 프로그램으로 서너번 방송이 이어졌다.
그런데, 포루투갈 스페인을 다녀 온 지금....... 또 포루투갈. 스페인 편이 방송을 타고 있다.
헐. 누군가 내 여행을 뒤쫓아 다니나? 어떠허게 이런 우연이 계속 반복되는 걸까?
이번 겨울여행은 어디로 가야하나?
아니지. 나를 리포터로 아예 써줄 방송은 없는걸까? 혹.......
론다와 세비야 편을 TV를 통해서 볼 때면......... 기억에 생생한 감동에 전율이 느껴지기 보담은......... 나라면 저것 말고도 보여줄께 더 있는데.........
그래서 티비에 잡히던 론다 사진 두 장을 꺼내와 보았다.(저작권 시비에서 빼주세요. 상업적 이용 목적 전혀 없습니다.)
론다 여행편이 꽤나 길어지고 있네요.
아직 누에보 다리는 건너가 보지도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이 절벽 도시 아래의 평원으로 트래킹도 떠나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남들이 흔하게 말하는 '헤밍웨이가 사랑한 도시 론다'에 대해서도 좀 더 설명하고픈 것이 남았고........
이런것들과 사진을 모두 보여드리자니 '론다 여행기'가 너무 길어지는 느낌이 들어서........ 부득이 2부로 나누어서 다음 이야기에 못다한 이야기를 다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감사 합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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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교현초64회 원문보기 글쓴이: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