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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기도는 반(半)펠라기우스적이 아니다
관상기도는 여느 기도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능력으로 하는 기도이다
- 이승구, 김재성의 잘못된 관상기도관 비판 :
-관상기도는 ‘반(半) 펠라기우스적’이 아니다
이승구는 관상기도가 반 펠라기우스적이라고 비판한다.
“관상기도의 정체나 그 방법을 살필 때나 또한 그 역사적 흐름을 살펴 볼 때나 더구나 관상 기도의 주창자들이 나아가는 방향을 볼 때에도 관상 기도는 아주 좋게 평가할 경우에라도 은혜의 주입(infusion)과 하나님과의 합일(合一)을 추구하는 반(半)-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적 특성을 지닌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신비주의적 성향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주 심각하게 평가할 때는 동양 종교나 이슬람교 안의 관상적 특성들과 잘 조화되는 소위 보편적 영성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한다”(이승구. “합신측 96회 총회 ‘관상기도 운동’ 연구보고서.”『교회와 신앙』2011.10.28).
펠라기안주의(Pelagianism)가 무엇인가?
펠라기안주의는 약 370년경에 영국에서 태어난 수도승인 펠라기우스(Pelagius)의 주장인데, 그는 사람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면서 사람에게는 선이나 악을 행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 선택의 자유는 사람의 의지에서 나온 것이며 하나님은 사람에게 선한 일이나 악한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만 주신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이 없어도 어떤 일을 할 수 있는데 단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더 쉽게’ 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어거스틴(Augustine)은 이런 견해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어거스틴은 타락 이전의 자유의지를 절대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사람은 아담 안에서 타락한 결과 죄를 피하고 선을 행할 수 있던 자유를 상실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죄를 피할 수 없고 특별한 은총 없이는 선을 행할 수도 없다.
펠라기우스와 달리 어거스틴의 중생론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총 중심이고 인간이 협력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총 덕분이다. 세드(Shedd)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 은혜를 죄악된 인간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은 인간이 믿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믿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믿음 자체도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루이스 벌콥. “2. 펠라기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죄론과 은혜론.” 『기독교 교리사』143).
한편, 펠라기안주의는 431년 에베소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선고될 때까지 그 사상을 전파하다가 431년 이후에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지만 이후 반 펠라기안주의로 그 모습을 다시 드러내었다. 반 펠라기안주의(Semi-pelagianism)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의지 양쪽이 모두 인간을 새롭게 함에 있어서 대등한 요인이라고 주장한다.
반 펠라기안주의는 인간의 본성이 타락에 의해 치명적으로 훼손되었다는 어거스틴주의(Augustinianism)의 주장과는 달리, 사람의 본성은 타락으로 인해 약화되거나 병들었다고 보며,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는 여전히 자유의 요소가 있으므로, 중생은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의지의 협력의 산물이며, 중생의 역사를 시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반펠라기안주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알미니안주의와 로마 가톨릭 교회가 따르는 주장이다.
어거스틴주의와 반 펠라기안주의는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이 협력한다는 점에서는 유사하지만 전자는 사람의 협력 또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지만 후자는 사람의 협력은 하나님의 은혜와는 별개인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 이제 독자들은 반 펠라기안주의가 대충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승구는 반 펠라기안주의 교리에 입각하여 개신교 신자들이 하는 관상기도가 반 펠라기우스적이라고 비판한다. 가톨릭 교회에서 관상기도를 장려하고 가톨릭 교회가 반 펠라기안주의를 채택하기 때문에 개신교에서 관상기도를 하는 사람도 반 펠라기안주의자라는 주장이다. 이승구의 주장에 따르면 감리교도 반 펠라기안주의자들이다. 한국에서는 감리교를 이단이라고 정죄하지는 못하므로 간접적으로 신학으로 정죄하는 셈이다.
그러나 관상기도는 반 펠라기우스적이 아니다.
관상기도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신자의 책임있는 반응이기 때문이다. 개신교 관상기도는 하나님이 은혜에 의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능력으로 그 은혜에 순응하여 은혜에 자라가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자라가는 한 가지 방법이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9).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2-13).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 3:18).
비판자들은 걸핏하면 성령운동파가 자기들이 하지 못하는 어떤 일에 열심을 내면 ‘반 펠라기우스적이다, 인위적으로 무엇을 하는 자들이다’고 비판하면서 자기들이 하지 않는 것을 정당화 한다.
만일 그렇다면 성경에 왜 ‘~을 하라’, ‘~을 하지 말라’는 물론 ‘’힘써라, 열심을 내라’는 구절들이 그렇게 많은가?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신 4:9).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수 23:6).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벧후 1:10).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고후 11:12).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벧전 3;13).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9).
이처럼 신자가 성경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말씀 공부, 기도, 봉사, 전도 등-에 열심을 내는 것은 잘못된 일이기는커녕 오히려 장려해야 할 일이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다만 구원을 받았어도 여전히 죄인이기 때문에 신자 중에 하나님이 주는 열심과 자기 열심을 분별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것은 신학의 문제라기 보다는 신앙 성숙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 정통(?) 장로교회에 다닐 기회가 있었다.
이 교회는 주일에는 약 150명 정도 출석하는 중형교회인데 주중 예배는 노년층만이 겨우 20명 정도 참석하는 것에 불과했다. 열심 있는 집사들이 주중 기도회를 가지려고 한 장로에게 건의했더니 ‘신앙생활 그렇게 별 나게 하는 것 아니다’면서 만류 하더란다. 그런 장로가 주중에 골프 연습장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골프 연습을 한다. 세상 일에 열심 내는 것은 당연하고 하나님 일에 열심 내면 인간적 열심이라고 비판한다.
물론 요즈음에는 다소 나아졌겠지만 정통 장로교회는 대부분이 이렇다. 그런데 성령운동하는 교회는 대부분이 매일 모일 정도로 뜨겁다(습 2:1; 히 10:25). 이것도 인간적인 열심이고 반 펠라기우스적인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장로교 계통에 신학자가 제일 많다고 한다.
이승구에게 묻고 싶다. 박사 학위 취득하려고 수년 동안 힘들게 공부한 것이 하나님의 절대적 은총인가, 인간의 노력인가? 만일 인간의 노력으로 그렇게 했다고 말하면 반 펠라기안주의자가 될 것이요 하나님이 다 해주셨다고 하면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공부는 성령님도 감당하시지 못한다’는 속설이 있지 않은가?
희한하게도 이런 점을 신학적으로 문제 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수년 동안 인간적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전파하는 신학자’가 된다? 그들은 머리가 터질 정도로 많은 책을 보고 글을 썼으면서도 말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공부했다고 한다. 물론 맞는 말이지만 사람도 엄청난 노력을 한 것 또한 사실 아닌가?
그럼 점에서는 관상기도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다 한 것 같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능력으로 하는 것이다.
-신학적 용어와 경험적 용어
또한, 이승구가 비판하는 ‘은혜의 주입’(infusion of grace과 ‘하나님과의 합일’(unity with God)은 ‘신학적 용어’라기보다는 ‘경험적 용어’이다.
처음 기도를 시작할 때는 인간의 의지적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성령님께 의지하면서 기도를 하다 보면 성령이 이끄시는 기도의 상태로 들어가게 된다. 이때 부어지는 은혜를 경험적으로 느끼기 때문에 ‘은혜의 주입’이라고 한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이런 기도를 한번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이제부터 기도를 다시 배울 필요가 있다.
또한, 신자는 누구나 회심할 때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신분이 된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 6:5).
개혁주의 구원론의 핵심은 신자가 회심할 때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와 연합’(Union with Christ)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분적 연합이고 신자가 연합된 신분이 주는 혜택을 실제로 누리는 것은 별개이다.
어떤 남녀가 결혼하여 법적으로 부부가 되었지만 실제로 결혼생활이 주는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것은 별개인 것과 같다. 이런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어떤 비판자는 ‘우리는 연합으로 시작하는데 그들은 연합으로 끝난다’고 비판한다. 관상기도가 말하는 ‘합일 체험’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신분을 실제로 경험적이고 관계적으로 누리는 것을 말한다.
-관상기도는 ‘인위적 방법에 치중하는 기교’가 아니다
김재성은 관상기도 훈련을 ‘성경보다 인위적 방법에 치중하는 기교’라고 폄하한다.
“현대 영성신학에서 거론되고 있는 핵심 본질들은 인간 중심적 신학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영성이 너무나 기교위주로 추구되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영성신학의 방법론은 너무나 천차만별이다.”(김재성. “영성신학, 성경보다 인위적 방법 치중”).
김재성에게 묻고 싶다.
자신이 박사 학위 논문을 작성할 때 성경을 많이 사용했는가, 인위적 기교를 많이 사용했는가? 물론 담는 내용은 성경이나 관련 서적이겠지만 담는 형식은 인위적인 것이다. 성경 어디에도 ‘박사학위 논문 작성’에 대한 구체적 ‘방법’을 제시하는 곳은 한 군 데도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김재성은 인위적이고 논리적 기교를 바탕으로 논문을 작성했을 것이다.
박사 학위 취득하려면 엄청난 책을 읽어야 함을 물론 원어 연구, 관련 성서 언어 연구, 배경 연구 등 인간적으로 연구해야 할 분야가 많다. 또한 요즈음에는 컴퓨터를 동원하여 성경 원어의 구문(Syntax)을 연구하고 구조(Structure)를 연구한다. 만일 기도를 많이 하는 영성가들이 이런 연구 방법을 보았다면, ”기도는 하지 않고 인간적 기교로 말씀을 연구하는 자들”이라고 비판했을 것이다.
실제로 필자도 설교 준비를 하거나 성경 공부를 인도할 때, 신학교에서 배운 대로 본문을 읽고, 주석을 보고, 궁금한 단어를 원어로 보고,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연구하여 본문 해석을 한 후 설교문이나 교안을 작성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성경 본문에 익숙해 지면서 주석이나 단어 연구 보다는 본문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음성듣기를 활용하여 지금의 회중이나 청중에게 꼭 필요한 말씀을 달라고 기도한다. 이때는 QT를 통한 묵상기도와 말씀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기도한다. 그러다 보면 이전에는 전혀 몰랐던 의미가 전광석화처럼 떠오른다. 이때는 빨리 요점을 빨리 메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각이 금방 사라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렇게 준비하여 말씀을 전하면 전하는 필자도 열정이 생기고 듣는 사람도 은혜를 받는다.
언젠가 필자가 어느 여 집사와 대화하던 중, 어떤 구절을 풀이하는 데 필자가 전혀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의미였다. 그 구절은 필자가 다른 용도로 여러 번 사용한 적이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 그 의미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 집사는 필자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의미로 해석했는데 듣는 순간 감동이 오고 큰 은혜가 되었었다. 그러다가 중세의 마담 귀용이 이런 식으로 강해한 『아가서』를 미국의 청교도들이 애용했다는 글을 읽은 것이 생각났다. 그때만 해도 한국 교회에 말씀을 쪼개는 것이 유행하여 귀납적 성경공부가 인기를 끌 때였다.
동양식은 말씀을 뭉터기로 보면서 성령의 조명이 주는 직관에 의해 말씀을 연구하는 성향이 강하다면 서양은 말씀을 분석하고 쪼개는 방법을 선호한다. 필자는 서양 식 방법도 좋아하지만 관상기도를 통해 말씀을 뭉터기로 깨닫는 동양 식 방법도 좋아한다. 특히 문제가 심각하고 삶이 곤고할 때는 더욱 그렇다.
필자는 어느 한 방법이 다른 방법 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유 의지와 함께 창조적 능력도 주셨기 때문에 사람이 어떤 한 가지 방법에 만족하지 않고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는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이자 사람의 본성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주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만나를 한 가지 방법으로만 요리한 것이 아니라 맷돌에 갈기도 하고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아서 과자를 만들었다(민 11:8).
말씀 연구나 기도도 마찬가지다.
어떤 것이든 많이 깊이 하다 보면 다양한 방법이 개발되기 마련이다.
언젠가 교회에서 새벽 기도 후 각자 기도를 하는데 한 집사가 한 시간 정도 동안 계속 해서 말로 기도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좀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구체적 내용은 몰랐지만 속으로 “어떻게 저렇게 한 시간 동안 말로 기도할 수 있나?”라면서 신기해 한 적이 있다.
필자는 말로 하는 기도는 연속하여 십 분도 잘 못한다. 그리고 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이 주신 기도의 다양한 기도와 방법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어떤 주제에 대해 조금 말로 한 후 바로 방언기도로 들어가고, 방언기도를 한 후에는 십자가나 부활하신 주님을 보는 상상기도를 하거나 주님의 얼굴을 상상하면서 기도하는 임재기도를 하거나 원수를 대적하는 기도를 단순하게 명령하는 기도를 하거나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임재기도(관상기도)를 혼합하여 하기 때문이다. 이런 긷고를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하다 보면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하게 된다. 이런 노하우를 사람들에게 알려주면 신학 강의나 말씀 강의 못지 않게 사람들이 좋아한다.
지금까지 좀 장황하게 설명한 감이 없지 않지만 김재성은 기도의 이런 ‘노하우’를 ‘기교’라고 폄하한다. 그렇다면 김재성이 학위 취득하기 위해 원어 연구하고 컴퓨터로 구문 분석하는 것도 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인위적 기교’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김재성은 그런 걸 기교라고 생각할까, 아니면 내가 박사 학위 후보자니까 남들이 하지 않는 전문적 방법으로 성경을 연구한다고 자부심을 가졌을까? 모르긴 몰라도 후자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관상기도의 방법도 ‘기교’가 아니라 ‘영적 노하우’이고, 신학의 학설이 많은 만큼 설명하는 방법도 각양각색이다. 무엇이든 많이 하고 오래 하면 다양한 노하우도 쌓이기 마련이다.김재성은물론 대부분의 관상기도 비판자들은 기도로 오래하지 않거나 기도의 다양항 방법을 섭렵하지 못했기 때문에 비판한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방언을 비판하는 글이나 책을 슨 사람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방언 비판하려고 자료 모으고 글 쓰는 그 시간에 차라리 방언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 보라. 그러면 하나님이 주실 것이다.”
관상기도를 비판하는 자들에게도 똑같은 말을 해주고 싶다.
“관상기도 비판하려고 자료 모으고 글 쓰는 그 시간에 차라리 방언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 보라. 그러면 하나님이 지금까지 몰랐던 놀라운 영의 세계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
이처럼 김재성과 같은 성령운동 비판자들은 대부분이 자기 중심적 성경해석과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기적중지론자인 존 맥아더는 성경에서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귀신을 쫓는 것은 ‘계시사적 사건’이나 ‘독특한 행위’라며 치켜세우지만 오늘날 신자들이 귀신을 쫓으면 ‘기술’이나 ‘방법’이라고 폄하한다.
그 이유는 영적인 전쟁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품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도들이 기록한 서신서들의 거의 모든 강조점들이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신약의 서신서들을 읽어 보라. 오늘날의 교회를 특징 짓는 귀신의 세력들에 대한 병적인 고집은 어디에서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사실 신자들에게 귀신들을 찾고, 귀신들에게 말하고, 귀신들을 대항하고, 조롱하고, 쫓아내라고 가르치는 것을 한 군데에서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John MacArthur, How to Meet the Enemy, p. 84).
존 맥아더 같은 기적중지론자들에게는 서신서만 오늘날의 신자를 위한 성경이고 다른 성경은 오늘날의 신자들에게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잘못 주장한다.
김재성도 마찬가지 논리를 펴고 있는 것이다.
자기들의 박사 학위논문 작성하기 위해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신자들이 기도 잘 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면 ‘기교’라고 폄하한다.
성경을 보자.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귐나조) 육체의 연단(귐나시아)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7-8).
여기서 말하는 ‘연단하라, 연단’은 헬라어 귐나조(동사), 귐나시아(명사)이다. 이단어에서 체육 전문가(Gymnast), ‘체육관’(Gymnasium) 등과 같은 단어가 파생되었다.
바울은 당시 성행하던 스포츠의 용어를 신앙훈련과 관련하여 많이 사용한다. ‘쳐서 복종하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푯대를 향해 달려가다. 등. 스포츠와 신앙훈련을 목표를 이루기 위해 ‘특정 방법으로 열심히 반복하여 훈련한다’는 점에서 신앙훈련과 비슷하다.
스포츠 선수들이 어떻게 훈련하는가? 재능을 타고 났으니 대충 훈련하는가?
아니다. 요즈음에는 과학적 데이터를 통해 철저하게 분석하여 부진한 분야는 소기의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체계적인 시스템과 방법으로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훈련한다.
일전에 유승민 올림픽 탁구 선수는 백 핸드 스트로크(backhand stroke)를 제대로 하기 위해 하루에 같은 동작만 수천 번씩 훈련한다고 말했다. 김연아가 피겨 스케이팅에서 기계 같이 정확한 동작을 연출하는 것도 동일한 행위를 수천 번씩 반복하기 때문이다. 물론 훈련도 많이 하지만 대충 하는 것이 아니고 정확한 분석과 처방-방법-으로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훈련 방법이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경건의 연단’도 이런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경건’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꾸준한 연단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것이 바로 비판자들이 주장하는 ‘점진적 성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필자가 사역을 하면서 발견한 사실은 한국 신자들의 대부분은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능력을 통해 자신이 스스로 무엇을 변화시키려고 하기 보다는 유명 강사나 능력 사역자의 기도나 안수 한방으로 해결하려는 성향이 짙다는 사실이다. 물론 문제 해결이나 병 고침 같은 경우는 하나님이 직접 해주시는 경우도 있지만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능력으로 본인이 직접 해야 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내면 변화와 인격 성숙의 분야는 더욱 그렇다.
관상기도의 핵심은 하나님을 더 잘 알아가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자라가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는 것이다. 범신론적 방법은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내면의 빛’과 ‘깨달음’을 통해 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관상기도는 성령의 조명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에 힘입어 자신의 완악함과 부족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더 잘 알아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해 가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목적을 위해 기도하다 보면 성령께서 그 ‘방법’을 하나하나 알려주시거나 이미 사람에게 알려진 ‘방법’을 사용하게 된다.
-동양 식과 서양 식의 차이
동양인이 대체로 두루뭉실하고 직관적이라면 서양인은 체계적이고 분석적이다.
요즈음은 좀 달라졌지만, 아직도 동양 식은 신입 사원이 오면 알아서 눈치껏 일을 배워야 하지만 서양 식은 신입사원에게 업무 매뉴얼을 준다. 그렇다고 서양 식이 기교인가?
언젠가 인터넷에서 누군가가 ‘기도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내었더니 ‘기도는 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이게 한국적 동양적 대답이다. 한국에서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은 기도원이나 산에 들어가서 기도를 많이 오랫동안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소나무 뿌리도 몇 개 뽑으면서 예수님도 보고 능력도 받은 것을 자랑 삼는다.
미국인들도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은 한국인에게 배웠다고 한다. 그런데 이제 한국인이 미국인이나 서양인의 중보기도와 영적전쟁, 관상기도 등을 도입하고 있다. 구역모임도 한국에서 시작한 것이지만 이제는 한국 것에 체계와 형식을 갖춘 셀모임이나 G-12등을 역수입하고 있다.
왜 그런가?
단순하게 기도 많이 하는 것과 체계적으로 제대로 하는 것, 그냥 구역 모임을 가지는 것과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소그룹 모임을 가지는 것에는 열매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재성은 ‘관상기도 방법은 기교’라고 폄하하고 원론적인 주장만 하고 있는 것이다.
원론과 각론: 각론 없는 원론은 구호에 그치는 수사에 불과하다
더 나아가서, 김재성도 정이철과 같이 늘 지당하고 당연한 말씀만 한다.
“영성을 거론하는 모든 사람들이 “성령을 좇아 행하며”(갈 5:16), 죄로 인하여 부패한 영혼이었음을 회개함으로써 합당한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날로 자라나서 그리스도의 날에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받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김재성).
이걸 모르는 신자가 누가 있나?
이것은 당연한 원론(原論)이다. 그러나 관상기도는 이러한 원론을 실천하는 각론(各論)이다. 관상기도를 제대로 하면 김재성이 말하는 바로 그러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그런데 김재성은 과연 그러한 원론을 달성할 각론이 있는가? 그저 말씀 많이 보고, 기도 많이 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면 되는가? 원론을 실제 생활에 적용하는 각론이 없으면 원론은 슬로건이나 수사(修辭)에 불과하다.
그래서 요즈음은 많은 사람들이 ‘무엇’(what)도 중요하지만 ‘어떻게’(how)를 추구하는 것이다.
‘어떻게’가 왜 중요한가?
첫째, 기도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
기독교는 실용을 추구하는 종교는 아니지만 실제로 말씀에 순종하면 결과적으로 영혼육의 유익을 가져온다. 그러므로 같은 노력을 기울이더라도 제대로 된 ‘방법’으로 하면 훨씬 효과적이고 상당히 유익하다.
20년 동안 부부관계가 힘든 전도사 한 분이 있었다.
남편이 결혼해 주면 교회 나간다고 약속했지만 결혼 후 교회 몇 번 나가다가 나가지 않게 되자 전도사는 남편을 ‘거짓말쟁이’, ‘마귀 새끼’라고 퍼붓기 시작하자 둘 사이는 금이 갈 데로 가버렸다. 전도사는 남편의 회심을 위해 20여년 간 온갖 방법을 동원했지만 관계 개선은커녕 개악만 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용서 기도하는 방법’을 제대로 배웠다.
방법 대로 2개월 정도 집중적으로 했더니 자기부터 변하면서 남편이 변하여서 가정 천국을 누리게 되었다. 이런 기도가 기교인가? 관상기도에서 말하는 방법은 ‘기교’가 아니라 관상기도를 잘 하여서 하나님을 더욱 잘 아는 것을 돕는 방법이다. 김재성이 성경을 더 잘 알기 위해 헬라어나 히브리어를 공부하고 문화적 역사적 배경을 공부하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둘째, 체계화된 방법을 통해 제자화와 재생산이 가능하다
신학 공부를 조직신학, 성서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으로 분류하여 가르치는 것도 체계적인 분류와 방법을 통해 효과적을 교수하고 동일한 교리와 가르침을 반복적으로 전수하기 위한 것이다. 옥한음 목사의 제자훈련, 조용기 목사의 4차원 영성훈련, G-12나 알파코스 등과 같은 성경공부나 영성훈련은 모두 열매도 좋고 체계적인 시스템과 반복을 통해 재생산이 가능하기 때문에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 것이다.
동양 문명은 19세기 중반만 해도 서양문명을 앞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부터 서양은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방법을 도입하여 과학 발전과 보편적인 교육에서 동양을 단숨에 앞질러서 서양이 동양을 지배하는 서세동점(西勢東漸) 시대를 열었다. 그때까지 동양은 비법이나 노하우를 사장하거나 소수에게 전수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물론 이제는 동양도 정신을 차려서 서양의 과학정신과 교육방법을 도입하여 서양을 닮아가고 있지만 아직도 배울 점이 많다.
신앙에서도 마찬가지다.
서양인은 무엇이든 방법을 체계화하고 조직화하여 누구나 쉽게 배우고 전수하게 한다.
예를 들어, 요즈음은 좀 나아졌지만 한국인은 특별한 은사나 능력을 받으면 혼자 간직하고 잘 나누어주지 않는다. 배우고 싶은 사람은 ‘가방 모찌’를 하면서 그 사람을 따라다니면서 어깨 너머로 배워야 한다. 그러나 서양인은 좋은 것이 있으면 금방 체계화 하고 매뉴얼화 하여 누구나 쉽게 가르치고 배우게 한다.
성령의 임파테이션(Impartation)이 대표적이다. 그외에 중보기도와 영적전쟁, G-12, 찬양과 경배 등, 성령의 인도하심을 강조하면서도 배운 사람이 쉽게 수용하고 다시 전파할 수 있도록 가르친다.
관상기도가 ‘특정 방법’을 사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 방법은 오랜 세월에 걸쳐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검증된 방법들이기 대문에 초보자들이 따라 하기 좋다. 물론 숙달되면 한 과정 한 과정 거칠 필요는 없지만 숙달되기 전까지는 체계적인 방법에 의해 하는 것이 좋다.
위대한 예술 작품도 모방-창조적 모방-창조의 과정을 거치듯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성숙하고 숙달된 자의 방법을 배우고 본을 받으면서 성장해 가는 것이다다.
검증된 체계적 방법에 의해 훈련하면 훈련 받는 자가 나중에 훈련자가 되어 제자화가 가능하다. 신학교에서 교수들이 교수법에 의해 내용을 나누고 분석하여 강의하고 제자훈련이나 영성훈련이 체계적 방법에 의해 반복적으로 가르치듯 기도훈련이나 말씀훈련도 가장 중요한 것이 성령의 인도하시지만 인간의 조직력과 체계도 필요하다. 어떻게 보면 서양의 이런 방법의 가장 큰 수혜를 받아 신학 학위를 취득한 자들이 오히려 ‘서양식 방법’을 비판하고 있다.
관상기도로 얻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성령의 조명과 인간적인 방법의 결합체인 관상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을 추구하다 보면 논리나 이성으로 얻을 수 없는 직관적인 지식이나 경험을 얻게 된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부흥』(Revival)에서 이런 체험을 통해 얻는 지식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어느 날 산길을 걷다가 어떤 체험을 한 연로한 청교도인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길이 메말라서 그는 우물가에 앉아 식사용으로 호주머니에 간직한 빵과 물을 조금 마셨다.
거기서 갑자기 주 예수 그리스도가 그에게 다가오셔서 그분의 모습을 드러내셨다. 그리고 이 사람은, 자기가 오십 년 동안 읽고, 연구하고, 묵상한 것을 통해 얻은 지식보다 짧은 한 순간의 체험을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기도의 용사인 브리지 허만은 『창조적 기도』(Creative Prayer)에서, “한 시간 동안 (임재기도와 듣는기도를 통해 주님을) 그렇게 듣는 것이 일 년 동안 열심히 공부하거나 피상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보다 인간성의 신비와 신적인 것의 가치에 대한 더 깊은 통찰력을 가지게 된다”고 말했다
관상기도를 통해 얻는 유익
관상기도를 실제로 해 보면 유익이 너무나 많다.
이러한 유익을 제대로 알면 왜 요즈음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에 상관 없이 관상기도나 명상기도를 추구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범신론적 관상기도에 몰려들고 개신교도 관상기도를 한다고 비판하기 전에 사람들의 이런 영적 필요를 발견하고 충족시키면 전도의 문도 넓어지고 신자의 신앙 성숙도 도모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릴 수 있지 않겠는가?
관상기도를 통해 얻는 영적 유익 몇 가지를 살펴보자.
ㆍ보이는 것 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것을 더 귀하게 여긴다(요일 2:15-17).
ㆍ사람 보다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한다(갈 1:10).
ㆍ사람의 외모 보다 중심-마음의 동기, 마음의 상태-를 더 귀하게 여긴다(약 2:9; 삼상 16:7).
ㆍ사람의 인정에 연연하지 않는다(마 23:5; 고전 4:3-4; 갈 1:10).
ㆍ마음은 늘 잔잔한 호수 같이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강을 누린다
(요 14:17; 빌 4:).
ㆍ주님이 주시는 기쁨이 늘 마음을 지배한다(롬 14:17).
ㆍ첫 사랑의 감격과 주님에 대한 열정을 유지한다(계 2:4-5;
3:18-19).
ㆍ하나님의 일에는 사자같이 담대해 진다(잠 28:11).
유의 :
관상기도도 기도의 한 가지 종류이므로 관상기도만 하면 한쪽으로 치우치기 쉬우므로 회개기도, 간구기도, 중보기도, 감사기도, 묵상기도 등과 겸하여서 하는 것이 좋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