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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론
Traite sur la tolerance 볼테르 / 송기형,임미경 / 한길사 / 1763→2001 / 305p / 22,000원
18세기 볼테르가 치열하게 전개해온 사상의 한 정점을 보여 주는 역작으로, 종교적 편견과 맹신에 저항해서 인도주의적 관용을 호소하는 내용이다. 이 책의 저술 계기가 된 장 칼라스 사건을 개관하고, 여기에서 얻은 각성의 내용을 서술했다.
볼테르(1694~1778). 본명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 작가. 계몽사상가. 파리에서 유복한 공증인의 아들로 태어나 예수회 학교에서 공부했다. 1717년 오를레앙 공의 섭정을 비방하는 시를 써서 투옥되었다. 옥중에서 비극《오이디푸스》를 완성하고 1718년에 상연해 대성공을 거둔 후 볼테르라는 필명으로 바꾸었다. 제정치하의 불평등에 환멸을 느끼고 1726년에 영국으로 갔으며, 종교전쟁을 끝낸 앙리 4세를 찬양하는 서사시《앙리아드》를 출판하고 귀국, 1746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뽑혀 역사편찬관이 되었다. 영국의 정치제도를 이상화하고 프랑스의 앙시앵레짐을 비판한《철학서간》을 출판해 정부의 노여움을 샀으며 디드로, 루소 등과 백과전서운동을 지원, 백과전서파의 한 사람으로서 중요한 역할과 계몽주의의 보급을 통해 대혁명의 정신적 기반을 형성하는데 공헌했다. 저서《관용론》《풍속시론》《철학사전》등.
송기형. 서울대 불문과. 同대학원 박사. 건국대 불문과 교수. 저서 <앙드레 말로, 문학과 행동> <프랑스 문화예술, 악의 꽃에서 샤넬 No.5까지> 등.
임미경. 서울대 불문과. 同대학원 석사.박사. 역서 <민주주의로 가는 길> 등.
인간정신의 자유에 대한 옹호 - 송기형,임미경.
계몽주의의 세기로 불리는 18세기에 활동한 볼테르는 인간을 구속하는 모든 것, 특히 맹신에 물든 종교와 억압적 전제정치를 합리적 이성으로 의심하고 부정할 것을 가르침으로써 구체제를 무너뜨리는 도화선을 제공했다.
<관용론>은 1761년에 일어난 장 칼라스 사건을 계기로 쓰여졌다. 사건의 전말을 우연히 알게 된 볼테르는 재판절차와 야만적 형벌제도에 분개했고, 칩거하던 칼라스 부인을 찾아가 국왕의 재판정에 상고할 것을 권유했다. 장 칼라스가 처형된 지 3년 째 되던 1765년 무죄가 선고되었다.
"광신에 문이 멀어 죄를 범한 쪽은 피고인가 아니면 재판관들인가?"
둘 가운데 어느 경우이든 분명한 점은 '가장 거룩한 신앙심도 그것이 지나쳤기 때문에 무서운 범죄를 낳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어떤 이들은 자비, 관용, 신앙의 자유란 가증스러운 것들이라 주장하지만, 자비나 관용, 신앙의 자유가 그같은 재앙을 초래한 적이 과연 있었던가?"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자 한다면 처형자가 아닌 순교자가 돼라."
우리가 말로는 매일 소리 높여 관용을 역설하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것은 어떤 이해관계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종교적 믿음을 함께 하지 않는 사람들을 박해해서, 그들로 하여금 증오를 품게 하는 일은 아무런 이득도 가져오지 않는다. 볼테르에게 종교는 합리적 이성과 타협하기 힘들고, 따라서 철저히 투쟁해야 할 대상이었다.
사물의 기원을 탐구하는 것이 모든 원리 가운데서도 가장 강력한 파괴원리다. 그는 역사를 이 공격의 수단으로 선택했다. 지금까지 절대적 권위로 무장하고 맹목적 복종을 강요하는 것의 기원을 파고 들어가, 그 권위가 허구임을 폭로하는 방법론을 쓴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에게 무조건적 복종을 요구하는 모든 가치체계를 그 토대로부터 부정하는 근대적 비평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구체제의 권위를 타파하기 위해 무기처럼 치켜들었던 것은 데카르트에게 물려받은 합리적 이성이었다. 이성은 올바르게 판단하고 구별하는 능력으로, 천성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균등하게 배분되어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인간은 행복해지기 위해 억압없이 자유롭게 이성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 요청되었다.
이성은 진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하지만 두 차례의 세계대전, 나치의 유대인 학살, 핵전쟁 위험 등을 목격한 오늘날 우리의 입장에서 합리적 이성이 진정으로 인류의 진보와 행복에 기여했는지에 대해서는 쉽게 동의하기 힘들다. 이성이 그 가치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관용의 정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것이 지금까지의 수많은 좌절의 역사를 통해 얻어낸 하나의 결론이다. ☞ 이성은 인본주의와 짝을 이루지 않으면 일탈하기 쉽다.
관용이 문제로 부각된 것은 절대적 진리를 요구하는 일신교의 정립과 함께였다. 기독교가 국교로 승인된 후부터 종교개혁시대 후까지 관용의 정신은 무시되는 경우가 많았다. 계몽주의시대에 이르러 국가의 종교적 중립성과 함께 관용은 치열하게 요구되기 시작했다.
내가 아무리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어도 다른 사람의 신념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관용의 전제조건이다. 관용은 무엇보다 다른 사람을 자기 생각을 표현하고 자기 생각에 따라 행동할 권리를 가진 자유롭고 동등한 인격으로 인정하는 데 있다.
1. 장 칼라스 사건의 개관
전쟁터에서의 죽음이 곧 잊혀지는 까닭은 적의 칼날 아래 죽어간 사람들 역시 자신의 적을 죽일 기회가 있었으며, 결코 스스로를 방어하지도 못한 채 죽음을 당한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위험과 기회가 동일하게 주어진 경우라면 누군가 희생되었더라도 그리 놀랄 일도 없고 그에 대한 동정심까지도 엷어지는 법이다. 그러나 만약 죄없는 한 가장의 운명이 오류나 편견 혹은 광신에 사로잡힌 자들의 판결에 맡겨진다고 하자. 이 피고인이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해 내세울 것이란 자신의 품성 밖에 없다면, 그리고 그의 생명을 심판하는 자들이 잘못 생각해서 무고한 그의 목을 베도록 한다면, 즉 이 재판관들이 판결을 통해 벌받지 않고 살인을 저지를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다면 공중의 여론이 들고 일어날 것이다.
1762년 3월 툴루즈市의 재판정이 집행한 칼라스의 사형사건은 참으로 특이한 사건으로, 사람들은 이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68세의 장 칼라스는 툴루즈에서 40년이 넘게 상업에 종사하며 살아왔다. 그는 훌륭한 아버지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는 프로테스탄트였으며, 그의 아내와 자식들도 역시 프로테스탄트였다. 그러나 그의 아들 가운데 루이 칼라스만은 카톨릭으로 개종했다. 이 아들에게도 장 칼라스는 약간의 생활비를 대주고 있었다. 그는 종교적 광신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므로 아들의 개종을 용인했으며, 또한 열성적인 카톨릭교도인 하녀 한 명을 30년 동안이나 집에 두고 있었다. 그는 이 하녀에게 자신의 모든 아이들을 맡겨 양육하게 했다.
그의 큰아들 마르크 앙투안은 시 쓰기를 즐기는 28세 청년이었다. 그는 불안정하고 음울하며 격렬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평판이 있었다. 이 젊은이는 장사에 투신하려 했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서 실패했다. 그는 변호사가 되려고 했으나 역시 좌절하고 말았다. 변호사가 되는 데는 카톨릭교도임을 입증하는 증명서가 필요했으나, 그로서는 그것을 얻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그는 자살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자신의 결심을 친구 한 명에게 넌지시 내비쳤다.
어느 날 마르크 앙투안은 도박을 하다가 돈을 잃었다. 그는 바로 이 날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그의 친구이자 칼라스 가족과 친분이 있던 청년 한 명이 마침 전날 보르도에서 찾아와 머물고 있었다. 툴루즈의 유명한 변호사의 아들인 19세 청년 라베스는 품행이 바르고 온화한 성격이었다. 그 날 우연히도 이 청년은 칼라스의 집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장 칼라스와 그의 아내, 맏아들 마르크 앙투안, 둘째 아들 피에르가 그와 함께 음식을 나누었다. 식사 후 이들은 작은 거실로 자리를 옮겼다. 마르크 앙투안이 모습을 감췄다.
얼마 후 라베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떠나는 라베스를 배웅하기 위해 피에르가 그를 따라 계단을 내려왔다. 마르크 앙투안의 모습을 발견한 것은 이 두 사람이었다. 마르크 앙투안은 아래층에 있는 가게 문틀에 목을 매 죽어 있었다. 그는 셔츠 차림이었으며, 겉옷은 개어져 계산대 위에 놓여 있었다. 그의 몸에는 어떠한 상처도 나 있지 않았다. 머리카락도 단정히 빗질된 그대로였다.
여기까지가 변호인들이 제출한 문서에 적힌 사건의 세부정황이다. 그런데 아들을 잃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느꼈을 고통과 절망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이웃이 부모가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라베스와 피에르는 정신이 달아날 만큼 당황해서 의사를 부르러 달려갔고 치안판사에게 신고했다.
툴루즈의 시민들이 칼라스의 집 주위에 모여들었다. 이들은 맹신에 빠져 있고 걸핏하면 극단적 감정에 휘말리는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은 자신들과 같은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들을 마치 괴물 보듯이 했다. 한편 이 도시는 해마다 2백여 년 전 이단종교를 믿던 4천 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학살되었던 날이 돌아오면 성대한 축제를 벌였다.
모여든 군중 가운데 어떤 광신자가 '장 칼라스가 자신의 아들 마르크 앙투안을 목매달아 죽였다!'고 외쳤다. 이런 외침이 여러 번 되플이되자 순식간에 모든 사람들이 이에 동의했다. 다른 이들은 한술 더 떠서 '죽은 아들이 다음날 카톨릭으로 개종할 예정이었다'고 수군거렸다. 그런데 그의 가족과 라베스가 카톨릭을 증오한 나머지 그를 목매달아 죽였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아무도 이런 이야기를 의심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생각이 일단 동요하기 시작하면 진정시키기 어려운 법이다. 곧 소문이 퍼져 나갔다.
툴루즈市 행정관인 다비드氏는 규칙을 무시한 법적 절차를 통해 장 칼라스 가족과 하녀, 그리고 라베스를 투옥시켰다. 교회는 파렴치한 계고장을 인쇄해서 유포했다. 마르크 앙투안은 신교도인 채로 죽었고, 그의 죽음이 자살이었던 만큼 그 시신을 말 뒤에 매달아 끌고 다니며 모욕을 퍼부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대한 장례식을 갖추어 그를 교회에 묻었다.
랑그도크에는 백색회(카르멜 수도회), 청색회(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회색회(프란체스코 수도회), 흑색회(도미니쿠스 수도회) 등 4개의 수도회가 있었다. 카르멜 수도사들은 마르크 앙투안 칼라스를 마치 순교자인 양 정중하게 장례를 지냈다. 자살한 이 불행한 청년은 성인의 예우를 받았다.
툴루즈 사람들이 매년 벌이는 끔찍한 축제가 다가왔다. 200주년이 되는 4천 명의 위그노를 학살했던 일을 기념하는 의식이었다. 그것이 장 칼라스의 고통스런 운명을 결정했다. 꾸며진 이야기들로 격앙되어 있던 사람들에게는 이런 일조차 한층 큰 자극이 되었다. 이번 축제의 백미는 처형단 위에서 칼라스 일가를 바퀴에 매달아 죽이는 행사가 될 것이라고 누구나 거리낌없이 말했다.
사건을 매듭짓기 위해 13명의 판사가 매일 회합을 가졌다. 칼라스 가족의 유죄를 입증할 증거란 없었지만, 증거의 빈자리를 어긋난 신앙심이 대신 채웠다. 장 칼라스에 대한 거열형 선고가 확정되었다. 허약한 노인의 처형이 고통을 이길 수 없을 것이고, 그래서 형틀에 묶이면 죄를 자백하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인은 바퀴에 묶여 죽어가면서도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했으며, 오히려 잘못을 저지른 판사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원했다.
판사들은 아들 피에르 칼라스를 추방했다. 사람들은 칼라스의 딸들을 어머니에게서 빼앗아 수녀원에 유폐시켰다. 칼라스의 아내는 맏아들을 잃었고, 다른 아들은 추방당했으며, 이제는 딸들마저 빼앗겼다. 그녀는 모든 재산을 몰수당했고, 희망도 없이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 이 끔찍한 사건의 정황을 꼼꼼히 검토해보고 몹시 충격을 받은 몇몇 사람이 홀로 칩거하던 칼라스 부인을 찾아, 왕에게 가서 재심을 호소하라고 촉구했다.
영국 출신으로 프랑스의 시골로 와서 살았던 그녀는 파리라는 왕국의 수도라면 랑그도크의 중심지인 툴루즈보다 훨씬 무자비한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죽은 남편의 오명을 씻어야 한다는 의무 때문에 결국 그녀는 자신의 연약함을 떨치고 일어났다. 그녀는 목숨을 던질 각오로 파리로 왔다. 놀랍게도 그녀를 맞이한 것은 따뜻한 환대와 동정 어린 도움의 손길이었다. 지방에서는 광신이 거의 언제나 이성을 무력하게 만들고 있었지만, 파리에서는 아무리 광신이 기승을 부리더라도 이성이 그에 대항해 더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파리와 온 유럽이 이 불행한 여인에 대한 동정으로 술렁였으며, 재심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 갔다. 세간의 여론이 국무회의의 판결에 앞서 이미 오래 전에 판결을 내렸던 것이다. 동정심은 행정부에까지 퍼졌다. 관료들까지도 이 사건 앞에서는 마음을 열었다. 어머니는 딸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상복을 입은 이들 모녀가 눈물을 흘리는 정경으로 인해 입회인들마저도 눈물을 흘려야 했다.
툴루즈 판사들이 군중의 광신에 휩쓸려 죄없는 한 가장을 처형했다는 것은 전례없이 끔찍한 일이다. 혹은 부모가 맏아들을 목매달아 죽였고 다른 가족들과 죽은 이의 친구가 거들었다는 것도 인간본성에 어긋나는 일이다.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경우든 분명한 점은 가장 거룩한 신앙심도 그것이 지나쳤기 때문에 무서운 범죄를 낳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신앙심이란 자비로운 것이어야 할지 아니면 가혹한 것이어야 할지를 검토하는 일은 우리 인간을 위해 도움이 될 것이다.
2. 장 칼라스의 처형에서 얻은 각성
카르멜회 수도사들의 행동은 한 죄없는 사람을 극형으로 몰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들이 한 자살자를 서둘러 성인으로 추대하는 바람에 선량한 한 가장이 수레바퀴에 묶여 고문을 당한 끝에 죽었다. 이들 수도사들은 판사들과 더불어 뉘우침의 눈물을 흘려야만 한다. 수도회들이 세워진 바탕은 종교적 열정인데, 랑그도크에서는 이 열정이 카톨릭교도들로 하여금 위그노들을 배척하도록 부추기고 있었다. 광신자들이 수도회를 이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편을 갈라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는가? 자신들이 더 완전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랬다면 그것은 나머지 국민에 대한 모욕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기독교도들이 교리를 둘러싸고 논쟁을 벌여 온 이후로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 왔는지 익히 알고 있다. 4세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사람들이 공개처형장에서 혹은 전쟁터에서 피를 흘렸다.
3. 16세기 종교개혁에 대한 이해
문예부흥을 통해 인간의 정신이 계몽의 빛을 맞이하기 시작하자 악습에 대한 비판이 전반적으로 제기되었다. 이러한 비판은 정당한 것이었다.
교황 알렉산데르6세(1431~1492~1503)는 돈으로 지위를 샀으며, 그의 다섯 명의 사생아들은 부친의 지위를 이용해 이익을 나누어 챙겼다. 그들 중 한 명인 추기경 체사르 보르자(1475~1507) 공작은 부친인 교황과 합세해 비텔리家,우르바노家,그라비나家,올리베레토家를 비롯한 수많은 귀족가문을 파멸시키고 재산을 가로챘다. 마찬가지로 야심가였던 교황 율리우스2세(1443~1503~1513)는 프랑스王 루이12세를 파문하고 왕의 영토를 가장 먼저 점령한 자에게 넘겨주었으며, 그 자신도 투구와 갑옷 차림으로 이탈리아의 한 지역을 전쟁의 참화로 몰아넣었다. 후임 레오10세(1475~1513~1521)는 자신의 향락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면죄부를 만들어 마치 시장에서 상품을 매매하듯이 팔아 넘겼다. 이처럼 거듭되는 파렴치한 행위에 항의한 사람들, 즉 종교개혁가들은 적어도 도덕적으로는 아무 잘못이 없다.
분명한 것은 프랑수아1세 이후 250년 동안 1억 2천 5백만 프랑에 달하는 돈을 우리가 교황청에 지불해 왔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화폐가치의 차이를 고려할 때 이러한 금액은 오늘날에는 약 2억 5천만 프랑에 이른다.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세금을 폐지하자고 주장했던 사람들이 프로테스탄트교도들이었다. 그러므로 이 점에서 그들이 프랑스 왕국에 큰 해악을 끼친 것은 아니라는 사실, 또한 그들이 어리석은 신하들보다 뛰어난 회계사였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신성모독이라고 할 수는 없다.
종교개혁자들은 성직자들에게 많은 수익을 가져다 주는 연옥의 존재를 부정했다. 그들은 성직자들에게 더 많은 이익을 남겨 주는 성유물에 경배를 거부했다. 그들은 지극히 존중되어 온 교리들을 공격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에게 돌아온 대답은 화형이었다.
독일에서는 국왕이 종교개혁자들을 보호했고 급료를 주면서 고용했다. 반면 파리에서는 신교도들을 박해하는 행렬을 벌였고 왕이 행렬의 선두에서 행진했다. 행렬의 절정은 수많은 불쌍한 신교도들의 처형이었다.
1545년 프랑수아1세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프로방스에서는 고등법원의 몇몇 판사들이 주민들에게 반감을 지닌 성직자들의 사주를 받아 국왕에게 군대의 파견을 요청했다. 명분은 지방 주민 19명에게 사형판결을 내렸는데 판결의 집행을 지원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죽인 사람은 여자,노인,아이의 구별없이 6천 명에 달했으며, 서른 개의 마을이 잿더미가 되었다. 프랑수아1세가 죽은 후 수많은 신교도들이 겪어야 했던 수난과 박해는 더욱 심해졌고, 그로 말미암아 박해받던 사람들은 스스로 무기를 들게 되었다. 신교도들은 화형대의 불꽃에 삼켜지고 사형집행자의 칼날 아래 쓰러지면서도 그 수가 더욱 늘어났다. 처음의 인내는 곧 분노로 바뀌었다. 그들은 적이 보여 준 잔인성을 그대로 모방했다. 아홉 번의 내전이 프랑스를 살육으로 뒤덮었다. 1572년 샤를9세의 어머니 카트린 데 메디치의 음모에 따라 진행된 성 바르톨레메오 대학살도 그중 하나였다. 이는 인간이 저지른 죄악의 연대기 속에서도 결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사건이었다.
카톨릭 동맹은 1589년 앙리3세를 암살한 데 이어 1610년 앙리4세를 암살했다. 어떤 이들은 자비나 관용, 신앙의 자유란 가증스러운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반문하건대 자비나 관용, 신앙의 자유가 그같은 재앙을 초래한 적이 과연 있었던가?
4. 신앙의 자유란 과연 위험한가?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 역시 가혹한 박해가 유발했던 것과 같은 반발을 가져오리라고 우려하는 태도가 실제로 타당한 것일까?
시대가 다르면 처방도 달라야 한다. 지난 시절 소르본大學의 신학자들이 잔 다르크를 화형시키자는 청원서를 제출한 적이 있다고 해서, 앙리3세의 통치권 상실을 선언하고 파문했다고 해서, 위대한 앙리4세의 추방을 결의했다고 해서, 오늘에 이르러 소르본大學을 벌한다면 어처구니없는 일이 될 것이다. 광란의 시대에 유사한 극단적 행위를 저질렀던 프랑스 안의 다른 기관,단체들을 규명하려는 일도 분명 어리석다. 과거의 일에 대해 시대가 다른 오늘날에 죄를 묻는 것은 정당하지 않은 일이다.
독단적인 정신이 불러일으키는 광분과 극단적 기독교 신앙은 프랑스에서 그랬듯이 독일,영국,네덜란드에서까지 참으로 많은 피를 뿌리고 참담한 재앙을 불러왔다. 그렇지만 오늘날 그들 나라에서는 신앙의 차이가 아무런 갈등도 불러일으키지 않고 있다. 유대교,카톨릭교,그리스정교,루터파,칼뱅파,재세례파,소치니파,메노파,모라비아교를 비롯한 수많은 교파의 신도들이 형제로서 더불어 살면서 그들 사회의 행복에 함께 기여하고 있다.
오스만제국의 황제는 서로 다른 종교를 믿는 20개의 부족을 평화롭게 통치하고 있다. 콘스탄티노플에는 20만에 달하는 그리스정교도들이 아무런 위험 없이 생활한다. 오스만제국에는 야고보파,네스토리우스파,그리스도단의론자,콥트교회,성요한기독교도,유대교도,조로아스터교도,바니아 등 그 어떤 종파도 반란을 일으켰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인도,페르시아,타타르에서도 사람들은 신앙의 자유를 누리고 있지만 마찬가지로 평화롭다. 표트르 대제는 자신의 광대한 제국에 온갖 종류의 종파를 허용했다. 그의 제국에는 상업과 농업이 번성했다. 다양한 종파 때문에 피해를 입은 적이 없다.
중국의 통치자들은 4천 년보다도 더 오랜 세월 동안 유일신에 대한 단순한 경배를 근간으로 하는 단 하나의 종교만을 채택해왔다. 그렇지만 중국의 통치자들은 백성들이 부처를 믿는 것도 수많은 불교승려들도 용인했다. ☞ 유교에 대한 오해.
중국 역사상 가장 지혜롭고 너그러운 통치자인 옹정제(1678~1722~1735)가 예수회 선교사들을 추방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황제가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회 선교사들이 신앙의 자유를 부정했다는 데 있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진귀한 편지>라는 그들의 책 속에서 황제가 자신들에게 했던 말을 스스로 이렇게 옮기고 있다.
"짐은 당신들의 종교가 다른 사람들의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당신들이 마닐라와 일본에서 어떻게 했는지도 안다. 당신들은 先皇이던 부친을 기만했다. 짐까지 속일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말라."
일본인은 신앙에 대해 너그러운 국민이다. 일본에는 12개의 온화한 종교가 이미 뿌리내리고 있었고, 이 나라에 들어간 예수회는 그들의 13번째의 종교가 되었다. 그러나 예수회가 다른 종교를 용인하지 않았던 탓에 알다시피 내전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내전은 온 나라를 비탄으로 몰아넣었다. 기독교는 결국 자신들이 불러온 피바다 속에서 종국을 맞이했다. 일본인들은 문을 닫아걸고 세계에 등을 돌렸다. 일본과의 교류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한 재상 콜베르는 그들과 통상관계를 수립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전혀 필요하지 않은 터라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콜베르의 제의를 완강하게 거부했던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유라시아 대륙을 통해 입증되는 사실은 종교적 불관용을 공포하거나 그것을 정책으로 시행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점이다.
대서양 건너편의 캐롤라이나에서도 종교의 자유 때문에 무질서가 초래된 적은 없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점은 신앙의 자유가 극단적으로 허용된다 하더라도 아주 사소한 불화조차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신앙의 자유는 결코 전란을 초래한 적이 없다. 오히려 불관용이 파괴와 살육을 야기했다.
모든 공정한 독자께서는 위의 사실들을 고찰해 이를 바로잡고 널리 퍼뜨려 주었으면 한다. 관심있는 독자들이 서로의 생각을 나눈다면 언제나 글쓴이보다도 더 깊이 있는 성찰에 도달하는 법이다.
5. 신앙의 자유를 얻으려면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해 신앙의 자유를 얻지 못했다면, 독일은 아마 서로가 살육한 각 종파들의 유골들로 뒤덮인 폐허가 되었을 것이다.
광신도들의 수를 감소시킬 묘안이 있다면 그것은 광신이라는 정신의 질병에 이성의 빛을 쬐는 방법일 것이다. 이성이라는 요법은 인간을 계몽하는 데 효과는 느리지만 결코 실패하지 않는 처방이다. 유럽에는 주술에 관련된, 그리고 진짜 마녀와 가짜 마녀를 구별하는 방법에 관련된 1백여 권이 넘는 판례집이 전해온다. 이런 광증은 아직도 때때로 고개를 들곤 한다.
6. 불관용이란 과연 자연법인가?
자연법이란 자연이 모든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는 법이다. 인간의 법은 반드시 자연의 법을 토대로 만들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 대원칙, 보편적인 원칙은 세상 어디서나 바로 다음과 같은 것이다. "네가 타인에게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너 역시 타인에게 행하지 말라."
그러니 이러한 원칙에 따른다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내가 믿는 것을 믿어라. 만약 믿지 못하겠다면 너를 죽이겠다."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것은 스페인,포르투갈에서 사람들이 외치고 있는 것이다.
종교가 다르다고 서로가 서로를 박해하는 법이란 어리석고 잔인한 것이다. 이것은 호랑이 따위의 맹수들에게나 어울릴 만한 법이다.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끔찍하다. 호랑이들은 먹을 것을 다툴 때만 서로를 물어뜯지만, 우리 인간은 말 몇 마디 때문에 서로를 죽인다.
7. 그리스인에게도 종교적 박해가 있었을까?
역사를 통해 우리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는 민족들은 모두 자신들이 섬기는 다양한 종교를 서로를 이어 주는 연결고리로 여겼다. 즉 종교를 통해 그들은 서로의 공통점을 확인했던 것이다. 인간들 사이에서와 마찬가지로 신들 사이에도 일종의 상호환대가 있었다. 어떤 마을에 한 이방인이 들어오면 그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고장에서 숭배하는 신들에게 경배하는 일이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리비아 사막으로 가서 아몬 신에게 신탁을 구했다.
문명을 지닌 고대 민족들 가운데 그 어떤 민족도 각각 자신들의 종교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을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신들을 대했다. 즉 그들 모두는 어떤 최고의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그 최고의 신 아래 그와 연결된 수많은 하위 신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다양하고 개별적인 방식을 허용했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종교적 감정이 매우 강한 민족이지만, 에피쿠로스 학파가 신과 영혼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을 기꺼이 용인했다. 아테네인들은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이방의 신들을 위해서도 제단을 세웠다. 그들은 다른 모든 민족들에게 너그러웠을 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들의 종교에 대해서도 존중심을 지니고 있었다.
8. 로마인들도 인정한 신앙의 자유
로물루스 시대부터 기독교도들이 제국의 신관들과 논쟁을 벌이던 시대에 이르기까지 고대 로마인들 가운데 어떤 사람도 자신이 지닌 종교적 신념 때문에 박해를 받은 적이 없다. 키케로는 종교의 모든 것을 회의했으며, 루크레티우스는 모든 종교를 부정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는 아주 작은 비난도 돌아가지 않았다. 무신론적 견해들조차 아주 작은 논란도 불러일으키지 않은 것으로 보아 로마인들은 아주 너그러운 사람들이었다. 로마의 원로원과 국민이 고수한 대원칙은 이러한 것이었다. "신들을 향한 모욕에 분개하는 일은 오직 신들의 몫이다."
카이사르는 우리를 굴종시켰고 법률과 놀이를 주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지배자 로마의 대신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로 하여금 드루이드(갈리아족 신관)들을 외면하도록 강요하지는 않았다. 로마인들은 모든 종교를 신봉한 것은 아니었지만, 모든 종교를 허용했다.
우리가 들은 바로는, 종교를 이유로 누군가를 박해한 적이 없는 로마인들이 기독교도들이 출현하자마자 이들을 박해했다고 한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러한 이야기는 아주 틀린 말이다. <신약성서>에도 로마인들은 종교적 박해자가 아니며 공정했다고 나와 있다. 바울을 미워해 반기를 들었던 사람은 로마인들이 아니라 유대인들이었다. 예수의 동생 야고보를 돌로 치라고 지시한 자도 사두개파 유대인이었다. 스테판에게 돌을 던진 자들도 유대인들이었다. 그리고 바울이 개명하기 전 사형집행자의 망토를 두르고 있었을 당시에도 분명 사울은 로마 시민으로서 집행했던 것은 아니었다.
네로 황제는 기독교도들을 박해했다고 한다. 타키투스에 의하면, 기독교도들은 로마에 불을 질렀다는 죄를 뒤집어쓰고 성난 군중들의 보복의 손길에 내맡겨졌다고 한다. 기독교도들이 그런 혐의를 뒤집어쓴 이유가 그들의 신앙 때문인가? 아니다. 사회적 재앙을 당할 때 정치적 희생자들은 언제나 이방인들이었다. 종교적 불관용 탓이 아니라, 유대인들과 기독교도들이 이방인이었기 때문이었다.
9. 순교자들
이후로 기독교의 순교자들이 생겨났다. 이들 순교자가 어떤 이유로 사형을 언도받고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기란 극히 어렵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초기 로마 황제 치하에서는 어느 누구도 단지 자신의 종교 때문에 죽음을 당하지는 않았다. 모든 종교가 용인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종파가 허용되는 마당에 일개 종파에 불과한 하찮은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박해받고 쫓겨났다는 말인가?
로마의 종교가 아닌 이시스 여신, 미트라 신, 아시리아 여신 등을 숭배하는 이교도들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은 터에, 오직 기독교도들에게만 죄를 물었겠는가? 기독교도들이 박해를 받았다면 다른 이유가 있었음이 틀림없다. 즉 로마의 국익에 반하는 특별한 것이 작용했으리라는 것이다. 당시 순교자들이 생겨났던 이유는 그들이 다른 신들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기존의 종교에 격렬하게 맞섰던 이상, 그들은 신앙의 자유를 부정한 것이다.
테르툴리아누스(155~220)도 자신의 <호교서>에서 당시 기독교도들이 정치적 반란분자로 간주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기독교도들이 로마 행정관들을 격앙시킨 이유가 단지 그들의 종교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기독교도들은 황제들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한 국가적 축제가 열렸을 때 집 문을 월계수 가지로 장식하기를 거부했다. 이는 대역죄로 비칠 수 있었다.
만약 로마인들과 로마 원로원이 그토록 많은 기독교도들을 끊는 기름 속에 던지고, 벌거벗겨 원형경기장에 던져 맹수들에게 찢기게 했다면, 어째서 기독교 초창기의 로마 주교들은 모두 그대로 두었단 말인가? 2세기 무렵 이레나이우스는 초기 로마 주교들 가운데 단 한 사람 텔레스포루스만이 139년에 순교했음을 인정했는데, 사실 텔레스포루스가 죽음을 당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사실 초대 교회의 순교자 명부에는 최초의 교황들이 거의 전부 들어가 있다. 그러나 이는 당시 순교라는 말이 증언의 의미였지 고난의 의미가 아니었던 것에 기인한다.
교회 저술가들에 따르면, 그리스도 탄생 이후 3백여 년 동안 56회의 종교회의가 열렸다고 한다. 기독교도들이 누린 이러한 자유를 무자비한 박해와 어떻게 양립시킬 수 있겠는가? 자신의 글을 통해 기존의 종교를 맹렬히 공박했던 테르툴리아누스도 편안한 죽음을 맞이했다. 오리게네스(185~245)도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독교를 거침없이 공개적으로 설파했지만 죽음을 당하지 않았다. 오리게네스의 제자인 이적의 사도 그레고리우스는 이교도 제사장들이나 총독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던 사람이지만 그 역시 아무 박해도 받지 않았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키프리아누스(200~258)는 첫 번째 처형당한 주교였다고 한다. 따라서 그가 순교한 258년까지의 아주 긴 기간 동안 카르타고에서는 종교 때문에 죽음을 당한 주교는 없었다는 말이다. 그가 무슨 이유로 처형당했는지는 역사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바가 없다. 이적의 사도 그레고리우스와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였던 디오니시우스는 키프리아누스와 같은 시기에 생존해 있었다. 이들은 적어도 카르타고의 주교인 키프리아누스만큼은 알려져 있었지만 박해를 당하지 않고 평온했다. 키프리아누스만 죽음을 당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정치적 동기가 있었을 것이다.
10. 거짓 성인전설과 박해의 위험성에 대해
거짓이 너무나 오랫동안 사람들을 속여 왔다. 그러한 거짓들이 타키투스와 수에토니우스의 시대 이후로 로마의 역사를 가리고 있으며, 또한 다른 고대 민족들의 역사에 거의 언제나 덧씌워져 있었다. 이제 진실을 가려내야 할 때다.
뤼나르(1657~1709)의 <순교자 열전>은 파렴치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이 저서를 우리가 <사도행전>을 믿듯이 믿어야만 하는 것일까?
고대의 박해에 대한, 사실임이 입증된 이야기들 가운데 성 바르톨레메오 대학살이나 아일랜드의 학살사건과 비슷한 점을 단 하나라도 찾을 수 있는가? 그 가운데 지금도 툴루즈에서 매년 열리는 잔인한 축제, 영원히 폐지되어야 할 그 축제와 닮은 모습이 하나라도 있는가?
나는 혐오스런 마음으로, 그러나 진실하게 말하는 바이다. 박해자였던 사람은, 살인자였던 사람은 바로 우리 기독교도들이다. 누구를 박해했는가? 바로 우리의 형제들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절부터 손에 십자가나 성서를 든 채 수많은 도시를 파괴했고, 끊임없이 피를 뿌리고 화형대의 장작에 불을 붙인 사람은 바로 우리들인 것이다. 우리는 언제쯤 잘못을 고칠 것인가? 우리는 뉴턴이 증명했던 법칙을 인정하는 데 60년이나 지체했다. 인간의 올바른 원리는 언제부터 실천하려 하는가?
11. 종교적 불관용이 불러온 불행한 결과들
한 사회의 지배적인 종교를 믿지 않는 것은 죄악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만약 당신이 그렇다고 말한다면, 당신 스스로 우리 선조인 초기 기독교도들을 단죄하고, 그들을 박해했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정당화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당신은 이렇게 답변할 것이다. "거기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 다른 모든 종교는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지만, 사도 전승의 로마 카톨릭 교회만은 하느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냐!"라고 말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묻건대, 우리의 종교가 신의 것이라고 해서, 이 종교의 군림 방식이 미워하고, 분노를 퍼붓고, 추방하고, 재산을 빼앗으며, 감옥에 가두어 고문하고, 처형하며, 또한 살인행위에 대해 신에게 감사기도를 올리는 것이어야만 하는가?
기독교가 하느님에게 속한 것일수록 인간이 이 종교를 좌우할 수 있는 몫은 줄어든다. 신께서 기독교를 만드셨으니 당신이 개입하지 않아도 신이 이 종교를 지켜 주실 것이다. 당신도 알다시피 신앙의 불관용이 낳은 것이라고는 위선이거나 반역 밖에는 없다. 당신은 박해자의 방식을 빌려 기독교를 지키려 하는가?
알다시피 우리 기독교 교회에서 모든 교리들이 언제나 명확히 설명되었던 것은 아니며, 또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것도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이 어떻게 행사하시는지에 대한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던 탓에, 오랫동안 로마카톨릭 교회는 그리스정교회와 마찬가지로 성신은 성부로부터만 발현한다고 믿어 왔다. 나중에 로마카톨릭 교회는 교리에 덧붙이기를 성신은 또한 성자로부터도 발현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결정이 내려진 다음날 어떤 사람이 여전히 그 전잘의 신경만 암송하고 있다면, 그는 죽음을 당해야 마땅한가?
성모의 무염시태(無染始胎, 원죄 없이 잉태함)가 교의로 확립된 것도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도미니쿠스회 수사들은 아직도 無染始胎를 믿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도미니쿠스회 수사들도 이 세상에서는 마땅히 처형되어야 하고 저 세상에서는 지옥에 떨어져야 할 텐데, 그 시점을 언제로 정해야 하는가?
마태는 다윗에서 예수까지의 세대가 28대라고 주장했다. 반면 누가는 41대라고 보았다. 게다가 계보의 내용에서도 두 사람의 주장은 완전히 달랐다. 그러나 제자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명백한 대립을 두고 어떠한 논쟁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후 이 대립은 교부들에 의해 화해되기에 이르렀다.
바울은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에게 보낸 편지(로마서)에서 3장의 뒷부분을 온통 할애해 다음과 같이 설파하고 있다. '하늘의 영광(천국)을 얻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며, 행위는 아무 소용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 야고보는 세계로 흩어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게 보내는 편지(야고보서)의 2장에서 거듭 말하기를 '믿음을 실천해 선함을 행하지 않으면 구원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이러한 기본적인 차이로 인해 오늘날 우리의 교회는 크게 두 종파로 갈라섰지만, 사도들 자신은 전혀 분열을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대립하는 견해를 지닌 사람들을 박해하는 행동이 성스러운 것이라면 천국에서는 이교도들을 가장 많이 죽인 사람이 가장 위대한 성인이 될 것이다. 로마 교황과 추기경들은 성 바르톨레메오 학살 행위를 승인하고 찬양했으며 심지어 신성화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것이 영원한 복을 얻을 자격이라니 참으로 기괴하기 그지없다.
12. 유대교에서 불관용은 신의 율법인가?
아모스는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늘 몰록,레판,기윤 신을 숭배해 왔다고 했다. → 아모스 5:26.
예레미야도 자신들의 조상이 이집트에서 나왔을 때 하느님은 번제나 희생을 요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 예레미야 7:22.
스테판은 유대인들에게 행한 설법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저들은 40년을 광야에서 희생도 제물도 바치지 않았다. 저들은 몰록 신의 장막과 레판 신의 별을 받들었다." - 사도행전 7:42~43.
성서연구자들은 많은 이방 신들이 숭배되었다는 사실에서 모세가 신들의 숭배를 묵인했을 거라고 추론한다.
"우리가 오늘날 여기서는 각기 좋은 대로 했거니와, 너희가 가나안 땅에 이르러서는 그렇게 하지 말라." - 신명기 12:8.
유대인들이 광야에 있을 때 행한 종교적 행동에 대해 성서 속에는 유월절을 지켰다는 기록도, 오순절에 대해서도, 장막제를 올렸다는 기록도 없으며, 그 어떤 공적 제례가 제정되었다는 말도 나오지 않는다. 더구나 할례도 전혀 실천되지 않았다. 모세 시절에 이스라엘 민족이 아도나이 이외에도 다른 신들을 섬겼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유대인들이 신앙 문제에서 오랫동안 전적인 자유를 누렸다는 사실은 성서가 충분히 증명해 주고 있다. 비록 그들이 황금송아지를 숭배했다는 이류로 유달리 가혹한 징벌을 받아야 했던 일이 있지만 말이다.
짐작하건대 모세는 자신의 형 아론이 황금송아지를 빚어 섬긴 일에 대한 벌로 2만 3천 명을 죽인 일을 통해 마침내 신앙은 가혹한 통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일찍이 모세 스스로도 자신이 수립한 계율을 어긴 적이 있다. 그는 모든 우상을 금지했으면서도 청동으로 뱀을 만들어 세웠다(민수기 21:9). 모세의 계율에 어긋나는 예가 이후 솔로몬의 신전에서도 있었다. 솔로몬은 12마리의 황소를 조각해 신전의 거대한 세례반을 떠받쳤다(역대하 4장). 또 케루빔들을 언약궤에 세겨놓았는데 머리 하나는 독수리이고 다른 머리 하나는 송아지였다.
이방의 신들을 섬기지 못하게 했어도 아무 소용 없는 일이었다. 솔로몬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우상을 숭배했다. 이스라엘 왕국의 10개 지파의 왕인 여로보암은 황금송아지 둘을 만들고, 왕이자 대제사장이 되어 22년 동안을 다스렸다. 유다 왕국의 왕 르호보암은 이방의 신들을 섬기기 위해 제단과 조각상을 세웠다. 아사 왕은 이 신전들을 부수지 않았다. 대제사장 우리야는 번제의 제단 자리에 아시리아 왕의 제단을 본뜬 다른 제단을 세웠다. 요컨대 종교적 숭배에 가해진 어떠한 구속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유대 왕들은 서로 멸망시키고 죽였지만, 이해관계 때문이었지, 종교적 믿음 때문은 아니었다.
선지자들 가운데는 자신의 개인적 복수를 하늘에 호소한 경우도 있었다. 엘리야는 바알의 제사장들을 처단하기 위해 여호와께 빌어 불을 내리게 했다. 엘리사는 어린아이들이 자신을 대머리라고 부르자 여호와의 이름으로 곰을 불러 아이들 42명을 해치게 했다.
모세는 미디안과 치른 전쟁에서 미디안의 모든 사내아이와 어머니들을 죽이고 전리품을 나누어 가지라고 일렀다. 뿐만 아니라 성서연구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스라엘인들은 여호와께 32명의 처녀를 번제의 제물로 바쳤다고 한다(민수기 31:40). 실제로 유대인들은 신에게 사람을 제물로 바치곤 했다. 입다는 자신의 딸을 제물로 바쳤으며, 사무엘은 아말렉 왕 아각의 몸을 칼로 찍어 조각냈다. 심지어 에스겔은 유대인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 그들이 인간의 살을 먹게 되리라고 약속하기도 했다(에스겔 39:18~20).
그러나 야만성으로 뒤덮인 길고도 무자비한 시대에도 보편적인 관용의 빛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신의 계시를 받고 자신의 딸을 제물로 바친 입다는 암몬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적어도 이 구절은 여호와가 그모스 신을 용인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
"너의 신 그모스가 네게 준 땅은 너의 것이 아니더냐? 그러니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땅은 우리가 얻으리라." - 사사기 11:24.
기드온이 죽은 후 히브리 사람들은 20년 가까이 여호와를 거부하고 바알-베리트 신을 숭배했다. 그러나 족장이나 사사나 대제사장들 가운데 그들에게 보복을 다짐했던 사람은 없었다. 이러한 우상숭배조차 너그러이 받아들여졌던 이상, 그들의 실제 신앙생활에서는 얼마나 많은 일탈이 용인되었겠는가! 고대 유대민족의 법,관습,경제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구약성서 시대의 관습은 오늘날 우리의 관습과는 전혀 닮은 데가 없다.
여호와가 예레미야에게 명하기를 줄을 만들어 목에 걸고 굴레를 만들고 또 멍에를 짊어지고, 이것들을 모압,암몬,에돔,두로,시돈의 왕들에게 보낸 뒤, 그들에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렇게 이르도록 했다. 여호와는 우상을 섬기는 바빌론 왕도 자신이 아끼는 종이라고 말하고 있다.
"내가 너희들의 모든 땅을 나의 종 바빌론의 왕 느부갓네살에게 주었다." - 예레미야 27:6.
여호와는 키루스 왕에게도 이에 못잖은 사랑을 베풀었다. 여호와는 키루스를 가리켜 자신의 크리스트, 즉 자신의 기름 받은 자라고 불렀다. 그렇지만 키루스는 조로아스터교를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여호와는 그를 나의 목자라고 불렀다. 비록 사람들이 보기에 그는 약탈자였지만 말이다.
멜기세댁은 유대인이 아니었으나 여호와의 제사장이 되었고, 발람은 우상을 섬겼음에도 선지자였다. 이처럼 성서가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은 하느님이 다른 모든 민족들의 종교를 용인했으며, 그들을 돌보았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찌 다른 종교를 용인하지 못하는가!
13. 유대인들의 크나큰 관용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유대민족에게는 모세가 다스릴 때에도, 사사들의 시대에도, 왕들의 시대에도 언제나 관용이 존재해왔다. ☞ 불관용을 격렬하게 주장한 자들은 성서의 저자들, 즉 사제들 뿐이었다.
모세는 몇 번씩이나 말하기를 "하느님은 아비의 죄를 그의 아들에게로 미루어 4대까지 벌하시리라."고 했다(출애굽기 20:5). 이러한 위협은 하느님으로부터 영혼불멸성도, 내세에서 받을 영원한 벌도, 천국이라는 보상도 계시받은 적이 없는 한 민족을 다스리는 데 꼭 필요한 것이었다.
그런데 영혼불멸성, 永罰, 천국의 보상과 같은 진리들은 십계명에도 없으며, 레위기나 신명기의 어떠한 율법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페르시아인이나 바빌론인, 이집트인이나 그리스인, 크레타인의 종교에서는 교리가 되었지만, 유대인의 종교에는 들어 있지 않다. 모세는 그들이 죽은 후에도 영혼은 죽지 않고 남아서 고통을 당하거나 영원한 복을 누리리라는 이야기는 어떤 경우에도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지상의 삶과 관련되어 있었다.
모세의 말과 달리, 에스겔은 "아들은 그 아비의 죄를 짊어지지 아니할 것이라(에스겔 18:20)."고 했으며, 심지어 여호와가 자신들에게 '선하지 않은 계율들'을 주었다고 인정하게 한다(에스겔 20:25). 그럼에도 <에스겔서>는 교회의 정경에 포함되었다.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 씌어진 경전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이 모세의 계율과 정면으로 배치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바빌론 유수 시대 이후 영혼의 불멸성이 교리로서 확립되었을 때에도 사두개 지파는 고집스럽게도 여전히 영혼불멸성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두개는 죽은 다음에는 永罰도 永福도 없으며, 느끼고 생각하는 기능도 육체의 소멸과 더불어 사라진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천사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 지파는 계속해서 자신들이 유대인들과 동일한 믿음을 지닌 형제라고 자처했고, 훌륭한 목자들까지 배출했다. 바리새인들은 숙명론과 영혼의 전생을 믿었다. 에세네파는 선한 자의 영혼은 복받은 섬으로 가고, 악한 자의 영혼은 일종의 타르타로스로 가게 된다고 생각했다.
14.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친 관용
내가 알고 있는 한 복음서에는 他종교에 대한 박해를 주장하는 자들이 불관용,억압이 정당하다는 근거로 제시할 수 있을 만한 구절은 거의 없다.
성서에는 호기심은 많아도 진실을 발견하는 데는 무력한 우리의 정신에 당혹감을 안겨 주는 부분들이 있다. 그러한 부분들은 모두 그 자체로 존중해야지, 그것을 그릇되게 해석해 가혹한 박해의 명분으로 삼아서는 안 될 것이다. 불관용의 정신은 모든 것을 왜곡한다. 상인들이 성전에서 쫓겨나는 이야기도, 예수가 광인의 몸에서 악마를 몰아내 2천 마리의 더러운 동물 몸에 대신 들어가 살게 했다는 이야기도 박해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돌리려 한다. 이러한 예들은 종교적 박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불관용의 정신은 아주 빈약한 근거에 기대고 있다. 보다시피 그것은 어디서든 가장 쓸데없는 구실만 찾고 있지 않은가.
과연 신의 법이 규정하는 것은 신앙의 자유인가, 아니면 다른 종교에 대한 불관용인가? 당신이 예수를 닮고자 한다면 처형자가 아닌 순교자가 돼라.
15. 종교적 박해에 대한 반론들
"종교에서 사람들로부터 자유를 빼앗아 각자가 자신이 섬길 신을 선택할 수 없게 하는 것은 신을 모독하는 일이다. 강요된 복종을 달가워 할 인간이 없듯이, 그 어떤 신도 강요된 숭배를 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테르툴리아누스. <호교서> 24장.
"강요된 신앙은 더 이상 신앙이 아니다. 그러므로 강요할 것이 아니라 설득해야 한다. 신앙은 명령한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결코 아니다." - 락탄티우스.
"어떤 종교의 강요된 신봉은 그러한 강요의 토대가 되는 정신이야말로 진리의 적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입증한다." - 디루아. 소르본대학 신학자.
"폭력은 위선자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어디서든 위협이라는 방법을 쓰면서 설득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 - 틸몽. <교회사>.
"경험이 우리에게 가르친 것은, 폭력이란 정신에 뿌리내리고 있는 악을 치유하기보다 악화시킨다는 사실이다." - 드 투. 앙리4세에게 바친 서간체 헌사.
"신념이 마치 강요에 의해 생길 수 있거나 한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속에 신앙을 심고자 하는 것은 야만적 열정이다." - 불랭빌리에. <프랑스 국가>.
"사랑에서 그러하듯이 종교적 믿음에서도 명령으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억압은 그보다 더 무력하다. 사랑과 신앙만큼 예속시킬 수 없는 것은 없다." - 아믈로 드라 우세. <도사 추기경의 편지에 대해>.
우리와 종교적 믿음을 함께 하지 않는 사람들을 박해해 그들로 하여금 우리를 증오하게 하는 것은 아무런 이득도 가져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말하건대, 종교적 불관용이란 어리석음의 소산이다.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양심을 구속하는 데서 자신의 이익을 얻는 사람들이라면 어리석은 게 아니라고 말이다.
16. 죽음 앞에서 나눈 두 사람의 대화
"당신을 기쁘게 하려고 거짓 맹세를 하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겠소?"
"위선은 좋은 것이오.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위선이란 악함이 선함에 바치는 존경 아니겠소. 친구여, 약간의 위선이 무슨 해가 되겠소?"
17. 어느 성직자가 보낸 편지
18. 불관용이 인간의 정의의 일치하는 경우들
사람들이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그것이 범죄가 아닌 경우라면 통치자에게는 그것을 벌할 권리가 없다. 사람들이 저지른 잘못은 그것이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해칠 때에만 범죄가 된다. 그런데 이러한 잘못이 광신을 불어넣는다면 그 때부터 사회를 불안하게 한다. 따라서 관용을 누리기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광신을 거부하는 것이다.
예수회 회원들이 퍼뜨린 교리가 죄가 되는 것이고, 그들의 교단 규칙이 프랑스 왕국의 법과 어긋나면, 예수회를 해체시키고 교단 성직자들의 직위를 빼앗아 일반시민이 되도록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들이 성모 마리아에 대한 경건한 열정에 취한 나머지, 그들과는 달리 마리아가 원죄를 지고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도미니쿠스회 수도사들의 교회를 부수러 갔다고 하자, 그러면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들은 예수회 수도사들에게 내려졌던 것과 같은 처분을 받아야만 할 것이다.
'우리는 양심의 명령을 따른다. 인간에게 복종하기보다는 신에게 복종하는 편이 낫다. 우리야말로 주님의 진정한 양떼들로서, 늑대들을 쳐부수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들이 아무리 이렇게 주장한들 소용없는 일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순간 그들 자신이 곧 늑대라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덴마크의 어떤 작은 종파는 광신의 가장 경악할 만한 예를 보여 주었다. 그들은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아이들은 모두 지옥으로 떨어지며, 다행히도 세례를 받은 즉시 죽은 아이들은 永福을 누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 세례를 받은 남녀 아이만 보면 목을 졸라 죽였던 것이다.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아이들에게 자신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을 내리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 자비로운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점들을 생각하지 못했다. 즉 더 큰 선을 이루기 위해 작은 악을 행해도 된다고 그 누구도 허락받은 적은 없으며, 자신들에게는 어린 아이들의 생명을 좌우할 어떠한 권리도 없다는 사실, 그리고 대부분의 부모는 자신의 아들과 딸들이 천국으로 가기 위해 목 졸려 죽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지상의 약한 존재로나마 자신의 곁에 두고 싶어한다는 사실, 요컨대 살인행위가 아무리 좋은 의도에서 저질러진 것이라 해도 사법관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들은 벌을 받아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여호와는 때때로 유대인들에게 명하기를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결혼적령기의 소녀들만을 제외하고 모두 죽이라고 했다. 그들이 보기에 우리는 모두 우상숭배자들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아무리 유대인들을 관용으로 대한다 해도 그들은, 자신들이 우세한 위치에 올라서는 순간, 우리의 딸들을 제외하고 우리 모두를 죽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무는 그들의 신앙에 비쳐 볼 때 당연한 것이다. 만약 유대인들이 이와 같은 사고방식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면, 이러한 불관용은 합당한가?
19. 중국에서 벌어졌던 논쟁에 대한 보고서
중국에서 예수회 신부가 도미니쿠스회 선교사가 거리에서 서로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싸웠다. 중국 관리가 모두 감옥에 넣었다. 관리의 부하 한 사람이 관리에게 물었다.
"그 두 사람을 얼마 동안 가두어 두실 생각이십니까?"
"그들이 서로의 견해에 동의할 때까지 가두어 둘 생각이다."
"아, 그렇다면 그들은 평생을 감옥에서 지내야 되겠군요."
"저런, 그럼 두 사람이 서로 용서할 때까지로 바꾸어야겠다."
"그들은 결코 서로를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그들을 잘 알거든요."
"아뿔싸, 그렇다면 그들이 서로 용서하는 시늉을 할 때까지로 정하자." ☞ 신앙의 불관용이 낳은 것이라고는 위선이거나 반역 밖에는 없다.
20. 사람들을 맹신에 묶어 두는 것이 유용한가?
인간은 참으로 연약하고 뒤틀린 존재인지라, 차라리 온갖 종류의 맹신에 붙잡혀 있는 편이 그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일만 없다면 신앙 없이 사는 것보다 인간을 위해서 더 나은 일임은 분명하다. 인간은 언제나 어떤 구속력을 필요로 해 왔다. 또한 半人半獸神, 숲의 수호신, 물의 요정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무리 우스꽝스럽게 보일지라도 이러한 신성한 가공의 존재를 숭배하는 편이 무신론에 빠지는 편보다는 더욱 온당하고 유용하다. 만약 어떤 무신론자가 무엇이든 따지기 좋아하고 난폭하고 강력하다면, 그는 믿음을 위해 주저없이 사람을 살육하는 맹신자보다 훨씬 불길한 재앙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 무신론자보다는 차라리 미신숭배자가 낫다거나, 무신론자들을 광신자와 동일시하는 것도 지독한 편건이다.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사는 곳이면 어디든 종교는 꼭 필요하다. 법이 공개적으로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역할을 하는 반면, 종교는 개인이 숨어서 행할지도 모를 범죄를 막는다. 그러나 일단 인간이 진실하고 거룩한 종교를 받아들이는 수준에 도달하면, 그 때부터 맹신은 쓸모가 없어질 뿐 아니라 아주 위험한 것이 된다.
종교를 천문학이라고 한다면 맹신은 점성술과 같은 것으로, 맹신이나 점성술은 현명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어리석은 딸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딸이 오랫동안 전 세상을 지배해왔던 것이다. ☞ 종교와 맹신(미신)의 경계는 그리 뚜렷하지 않다.
프랑스는 하루가 다르게 이성의 힘으로 깨어났다. 이성은 귀족들의 저택에 스며드는 것만큼이나 상인들의 물건 진열대에도 스며들었다. 그러므로 이성이 맺은 꽃들은 필연적으로 만개할 것이고, 그런 만큼 그 결실을 거두어들일 일이 남았다. 파스칼,니콜,아르노,보쉬에,데카르트,가상디,벨,퐁트넬과 같은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를 이성의 빛으로 밝혀 왔다.
위대한 스승으로 통해온 사람들 가운데는 오랫동안 인류를 우둔함 속에 붙들어 둔 공적으로 보상을 받고 명예를 누려온 사람들이 있다. 오늘날에도 이렇게 오류로 무장한 대가들이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믿으라고 요구한다면, 즉 씨앗은 썩어야 싹을 틔운다든가, 지구는 결코 태양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든가, 무지개는 빛의 굴절과 반사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친다면, 그리고 자신들의 주장을 떠받칠 근거로 성서에서 자신들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구절들을 끌어다 댄다면, 나아가 그들이 강압과 박해를 동원한다면, 그들을 멍청하고 잔인한 짐승이라 부르더라도 안 될 일도 없을 것이다. 교황권 지상주의자들이 강요한 맹신들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것은 자신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이웃을 미워할 것을 가르치는 맹신이 아닐까? 자신의 형제를 증오하고 박해하는 믿음에 비하면 성스러운 배꼽, 성스러운 음경포피, 성모 마리아의 젖과 옷을 숭배하는 편이 이성에 비추어 차라리 훨씬 합당하지 않은가?
21. 미덕이 앎보다 더 소중하다는 점에 대해
우리가 지켜야 할 교리가 적을수록 논쟁은 줄어들 것이다. 논쟁이 줄어드는 만큼 참화를 겪을 일도 없어질 것이다. 종교는 인간에 세상을 사는 동안, 그리고 죽은 후에도 행복해지기 위해 만들어졌다. 행복한 삶을 맞으려면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 그러려면 관용을 알고 베풀 줄 알아야 한다.
형이상학의 문제에서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주 터무니없는 욕심일 것이다. 한 마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정신을 예속시키고 통제하려 하기보다는 차라리 무력으로 세계를 굴복시키는 편이 훨씬 쉬우리라.
유클리드는 모든 사람에게 기하학의 진리를 쉽게 설득할 수 있었다. 2+2=4라는 이 간단한 공리를 벗어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이상학과 신학이 얽힌 문제에서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알렉산드리아 대주교 알렉산드로스와 성직자 아리우스 신부가 성부가 어떤 방식으로 로고스를 내렸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논쟁을 시작하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구절을 적어서 보낸 적이 있다. 그 내용은 에우세비오스도 소크라테스도 말한 적이 있는 것으로, "당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논쟁을 벌인다면 당신은 대단히 어리석은 자이다."라는 것이었다. 만약 논쟁의 두 당사자가 아주 현명해서 황제의 충고가 옳다고 시인했더라면, 기독교 세계는 3백 년 동안이나 피로 물들지 않았어도 되었을 것이다.
당신들이 하느님 가족의 계보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할 자격이 있는가? 로고스가 만들어졌든 생겨났든 그것이 당신들과 무슨 상관인가? 우리가 도덕적 가치를 가르치고 실천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 신성 논쟁은 결국 신의 개념화 논쟁으로 인간이 만든 신에 대한 논쟁이다.
어쩌면 황제는 붉은 색의 긴 옷을 입고 머리에는 보석관을 쓰고 종교회의를 주재하는 데 만족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로부터 모든 재앙을 불러들이는 문이 열렸다. 이 재앙은 동방에서 밀려와 유럽을 덮쳤다. 성서 구절을 둘러싼 논쟁은 매번 궤변적인 언설과 칼로 무장한 광포한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그로 인해 모든 사람들이 광기와 잔인함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훗날 유럽을 침략해온 훈족,고트족,반달족이 가져온 불행은 이에 비하면 훨씬 적었다. 이들 침략자가 끼친 해악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이들 자신도 결국에는 이 피비린내나는 논쟁 속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22. 신앙의 자유는 보편적이라는 점에 대해
어떤 사람들이 우리와 견해가 다르다고 해서 이 짧은 생애를 사는 동안 그들을 박해하는 것은 참으로 잔인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永罰을 선고해 영원히 지옥에 떨어뜨리는 것은 정말 뻔뻔한 일이다. 조물주가 내려야 할 판결을 티끌과도 같은 인간이 미리 가로챌 권한은 없다.
만약 당신들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을 제1의 교리로 가르치는 하느님을 섬기면서, 그 순수하고 신성한 교리를 억지 이론과 풀리지 않는 논쟁으로 덧씌운다면, 만약 당신들이 새로운 단어 혹은 단 하나의 알파벳 철자(Homoiousios)를 두고 분란을 일으킨다면, 만약 당신들이 몇 마디 말, 몇 가지 의식을 빠뜨린 데 대해 永罰를 선고한다면, 인류의 운명을 한탄하는 눈물을 쏟아야 할 것이다.
23. 신에게 올리는 기도
부디 우리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된 죄들을 가엾게 여기소서.
우리가 서로 도와서 힘들고 덧없는 삶의 짐을 견디게 하소서.
우리의 허약한 육체를 가리는 의복들, 불충분한 언어들, 가소로운 습관들, 불완전한 법률들, 분별없는 견해들, 우리의 작은 차이들, 즉 인간이라 불리는 티끌들을 구별하는 이 모든 사소한 차이들이 증오와 박해의 구실이 도지 않도록 해주소서.
노동과 정직한 생업의 결실을 강탈해가는 강도들을 증오하듯이, 그들의 영혼에 가해지는 폭압을 증오하게 해주소서.
24. 후기
과장이란 거의 모든 역사가들이 빠져 들기 쉬운 잘못이다.
"누군가를 본받으려 한다면 그가 가진 장점을 취해 따라야 한다." - 몰리에르. <여학자님들>.
"본인은 프랑스의 제조공장들이 홀란트로 옮겨와 세워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 우려를 감추지 못하는 바입니다. 이제 그 공장들을 이곳에서 도로 가져갈 방법은 없을 것입니다." - 아보 백작. 1685~1688년까지 홀란트 대사를 지낸 프랑스 외교관.
과연 낭트칙령(1598)의 폐지(1685)한 결과는 이익보다는 손해가 막심했다.
평화와 화합의 정신과 불화와 증오의 정신 가운데 과연 어느 것이 더 바람직한가?
25. 칼라스 사건의 귀결 및 우리의 결론
1763년 5월 국무회의 가 열렸다. 전체 장관이 참석하고 대법관이 주재한 이 회의에서 소원심사관 크론氏가 칼라스 사건을 보고했다. 크론氏의 보고는 재판관으로서의 공정함, 사건에 정통한 사람의 정확성, 유려한 언변의 정치가다운 명료함과 솔직성을 갖춘 것이었다. 사실 국무회의 같은 회합에서는 이러한 웅변만이 통용되는 법이다.
자연은 우리 인간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당신네 인간 모두는 연약하고 무지한 존재로 태어나서, 이 땅 위에서 짧은 시간을 살다가 죽어 그 육체로 땅을 비옥하게 할 것이오. 당신들은 연약한 존재이니 그런 만큼 서로를 도우시오. 당신들은 무지하니 그런 만큼 서로를 가르치고 용인하시오. 만약 당신들 모두가 같은 의견이고 단 한 사람만이 반대의견이라면 당신들은 그 한 사람을 용서해야 하오.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데는 당신들 각자가 책임이 있기 때문이오."
1763년 3월 재심 이후 최종판결이 내려진 날까지 또다시 2년의 세월이 걸렸다. 광신이 무고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기란 그만큼이나 쉽고, 이성이 광신을 누르고 정의를 회복하기란 그만큼이나 어려운 것이다.
당시 프랑스의 모든 재판정들은 다른 중요한 사건에 매달려 있었다. 예수회 회원들이 쫓겨나고, 프랑스 안 그들의 수도회는 폐쇄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불관용의 대명사였고, 박해자들이었으나, 이번에는 반대로 그들이 박해받고 있었다. 몇몇 예수회 지지자들에 의하면 종교에 대한 모욕이고, 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당연한 죄과인 이 대사건이 여러 달 동안 공중의 관심을 사로잡고 있었던 터라, 칼라스 소송은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국왕 루이15세(1710~1715~1774)이 사건의 최종판결을 최고재판소에 위임하자, 공중이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칼라스 부인과 딸들에게 쏟아진 도움의 손길은 인도주의라는 고귀한 정신의 발로였지, 사람들이 흔히 자비라고 부르는 감정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자비는 대체로 인색하고 모욕적인 독신자(성직자)들의 몫이었고, 독신자들은 여전히 칼라스 가족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던 탓이다.
마침내 1765년 5월 9일 판사 전원은 툴루즈 고등법원에 의해 잔인하고 부당한 판결을 받았던 칼라스 가족에 대해 만장일치로 무죄를 선고했다. 또한 칼라스 가족에게는 툴루즈의 재판관들에게 책임을 물을 권리가 주어졌으며, 아울러 자신들이 입은 고통과 손실에 대해 배상을 신청하는 일이 허락되었다. 툴루즈의 재판관들이 자진해서 배상을 부담하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어느 재판정이나 선행의 의무까지 수행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최고재판소의 재판관들은 국왕에게 건의문을 써서 빈궁한 칼라스 가족을 구원해줄 것을 호소했다. 국왕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칼라스 부인과 자녀에게 3만6천 리브르의 연금을 내렸다. 그중 3천 리브르는 자신의 주인을 변호함으로써 변함없이 진실을 지킨 충실한 하녀의 몫으로 주어졌다. 국왕은 은혜를 베풂으로써 미덕의 본보기가 되었다.
우리는 종파간 갈등이 빚어 낸 미치광이 짓 때문에 지금까지 수많은 가정이 희생되어 왔음을 알고 있다. 신앙의 자유가 없다면 광신이 이 땅을 유린해 폐허로 만들 것이며, 우리는 늘 비탄에 잠겨 있어야만 할 것이다.
'160403日 安晋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