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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처럼 우리가 함께 부를 찬송
2026년 9월 6일 베드로전서 1:2-3
1.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의 찬양
사도 베드로는 고난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자고 했다.
벧전 1:2-3(현대어성경) /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오랜 옛날에 여러분을 뽑으셔서 당신의 자녀로 삼을 것을 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역사하셔서 여러분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케 하시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풍성한 은총과 평화를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 모든 찬양을 드립시다. 하나님께서는 헤아릴 길 없는 자비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거듭나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 하나님과 한 가족이 되어 영원한 희망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찬송은 오직 성도만이 진정 부를 수 있고,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특권이다. 자, 그렇다면 고난 가운데서도 성도들이 이처럼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마음의 동기가 어디에서부터 나올까? 이에 대해서 베드로는 말씀에서 총 3가지를 언급하였다. 하나는 과거의 사건, 또 하나는 현재진행 중인 사건, 마지막 하나는 미래에 나타날 사건이다.
먼저 베드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근거로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언급하였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로 멸망할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다. 우리가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하기에 합당한 사건이다.
다음으로 베드로는 현재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언급하였다.
벧전 1:5 /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베드로는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그 날까지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고 있다고 했다. 여기서 사용된 ‘보호하심’이란 단어는 본래 군사용어이다. 적의 공격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만든 ‘요새’를 가리킨다.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 달려오는 세상과 원수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하나님이 능력으로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 철이나 무쇠로 만든 보호막은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온몸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다.
창세기 15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람아, 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의 방패다!’(Do not be afraid Abram, for I will protect you. I am your shield)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방패가 되어 주시니까 그 어떤 적군도, 원수들도 아브라함을 건들지도 못하고 이길 수 없었다. 하나님은 그의 택하신 백성들의 ‘방패’가 되어 주신다. 파도를 막아주는 방파제처럼, 하나님은 세상의 모진 풍파로부터 우리를 완벽하게 지켜주시는 방패가 되신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완전한 보호를 받게 된다. 이러한 믿음은 우리의 삶이 고난 가운데 있어도, 여전히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가 된다.
하나님을 찬양할 미래의 사건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상속받게 되기 때문이다.
벧전 1:4 /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유산은 썩지 않는다. 더럽혀지지 않는다. 쇠하지 않는다는 것은 낡아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 하늘에 간직된 이 엄청난 유산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아직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곧 일어날 사건이다. 사도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이와 같은 산 소망이 있기에 비록 현재 고난 가운데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베드로전서 1장 3-5절은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이 찬양할 수 있는 근거를 과거, 현재, 미래의 관점에서 하나씩 정리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거듭났고, 지금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고 살아간다. 미래에 하나님 나라를 유산으로 상속받을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고난에 처한 성도들에게 이와같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은 축복을 기억하며 주님께 찬양하며 살아갈 것을 권면하였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가 이 세 가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일상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가 많이 있다. 식탁에 음식이 있고, 추운 겨울에도 우리 두 어깨와 등을 덮어줄 옷이 있고, 따뜻한 집에서 살아가는 일상 자체가 하나님을 향해 찬양을 부르게 한다.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올려드리는 주 찬양 사람들이 되시길 바란다.
2.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의 기쁨
사도 베드로는 성도들이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벧전 1:6 /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베드로는 성도들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때로는 몸이 아프고, 경제적인 어려움도 찾아오고, 가정의 문제, 개인적인 신변의 문제들도 찾아온다. 그로 인해 근심하게 될 때도 있다. 그러나 주를 믿는 우리에게 찾아온 근심은 영원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하게 만들어 주신다.
여기서 베드로는 한 가지 삶을 바라보는 관점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일어나는 일련의 시련들은 아무 의미 없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믿음을 단련하여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 하나님으로부터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는 목적을 갖고 계신다.
벧전 1:7 /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지금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잠깐 있다가 지나가는 것이며, 그 후에는 우리를 위해 영원한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다.
한국 태릉선수촌에서 국가대표 선수들은 종일 고되게 훈련한다. 때로는 온몸이 끊어질 것처럼 격렬하게 운동하고 땀을 흘린다. 만일 평생 훈련만 해야 한다고 하면 얼마나 끔찍할까? 그러나 있을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을 바라보며 지금 흘린 땀 한 방울 한 방울이 우승과 승리의 기쁨을 주는 밑거름이 될 것을 믿으며 자원하여 훈련에 임하는 것이다.
이처럼 성도들이 겪는 시련과 고난은 믿음을 단련시켜준다. 더욱 하나님만 바라보게 해주고, 더욱 하나님만 붙들고 의지하며 살아가도록 변화시켜 준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그 날,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들에게 존귀와 칭찬과 영광의 관을 씌어 주신다.
그러나 국가대표 선수들도 훈련이 힘들고 고되게 느껴지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고난당하는 것 자체를 기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고난당하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이 다 지나간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할 미래의 영광스러운 소망이 있어서 기뻐하는 것이다.
어머니가 아이를 임신하여 출산하는 과정이 얼마나 힘들까? 품 안의 생명으로 인해 산모들이 많은 불편을 겪고 고생한다. 이 세상에서 출산의 고통과 견줄 만큼 힘든 것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나 아무리 힘들어도 조금만 참으면 ‘응애!’하고 울며 이 세상에 태어날 고귀한 새 생명, 내 생명보다도 더 귀한 자녀를 만나는 기쁨이 있어서 산모는 그 모든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이 세상에서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은 우리들의 믿음을 더욱 정결하고 단단하게 연단한다고 했다. 우리가 다 이해할 수는 없을지라도, 지금 우리 삶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 하나님의 크신 계획안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하루에 약 130명 정도 자살한다. 미국에서 사람들이 죽는 이유를 조사해보니까 자살이 10위를 차지했다. 지난 2017년 기준 미국에서만 한 해 동안 총으로 자신을 쏴 죽은 사람, 목매달아 죽은 사람, 독극물을 먹고 죽은 사람 등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스스로 자해하여 Emergency를 방문한 사람들의 숫자를 다 합치면 47만 9천 명이나 되었다.
사람들은 왜 자살할까?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본능이 살고자 하는 욕구인데, 어떻게 이 사람들은 그와 같은 극단적인 선택까지 나가야만 했을까? 표면적으로 보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하나로 결론을 내자면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살아갈 가치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 목적과 ‘오늘’이라는 하루를 살아가는 일상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면 허무주의에 빠지게 된다. ‘내가 살아간다는 의미가 무엇일까?’ ‘내가 겪고 있는 이 고난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런 질문들이 해결되지 않으면 아무런 희망도 발견하지 못한 채, 더 이상 고난을 견디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면 ‘시지프스’라는 사람이 나온다. 신화 속에서 시지프스는 매우 지혜로운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 사람은 얼마나 똑똑한 사람인지 마음만 먹으면 신들도 기만할 정도였다. 결국 신들의 노여움을 산 시지프스는 벌을 받게 된다. 그가 받은 벌은 ‘의미 없는 노동’이란 벌이었다. 시지프스는 커다란 바위를 산 정상으로 굴려야 했다. 시지프스가 낑낑대며 힘겹게 산 정상에 돌을 올려다가 놓는다. 그런데 그 산의 정상은 평지가 아니라, 돌을 올려놓기 무섭게 다시 저 산 아래로 굴러간다. 그러면 시지피스는 다시 산 아래서부터 그 돌을 다시 굴려야 했다. 이것이 무한 반복되는 것이 시지프스가 받은 벌이었다. ‘의미 없는 노동’은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끔찍한 형벌이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에프스키는 그의 책에서 말하기를, ‘만일 누군가를 완전히 파괴하고 짓밟아 버리고 싶다면, 그 사람에게 끔찍한 벌을 주고 싶다면 전적으로 무의미하고 쓸모없는 노동을 시키는 것으로 충분하다.’라고 썼다.
❚ ‘라비 제커라이어스’라는 세계적인 기독교 변증가가 하루는 자기 집 앞 공원을 걷고 있었다. 그는 공원에서 주인과 놀고 있는 강아지를 보았다. 주인이 원반(Frisbee)을 던지면 개가 신나서 달려간다. 입에 물고 주인에게 돌아온다. 그럼 주인이 또 던진다. 계속해서 반복한다. ‘저게 그렇게 재미있나? 저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 모습을 바라보던 라비 제커라이어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렇게 주인이 던져준 원반을 계속해서 물어 오는 저 강아지와 매일 아침이 되면 9시까지 차 타고 회사로 출근해서 5시가 되면 차 타고 집에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하는 인간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지금 이 사람이 무슨 질문을 하는 것일까? ‘What’s the meaning of life?’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의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면 허무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해서 호텔 방에서 홀로 수면약을 과다 복용하고 쓸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내가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이유, 저 원반을 잡기 위해 달려가는 강아지, 아침 차를 타고 회사로 출근하는 인간이라는 실존이 살아가는 목적과 의미가 무엇이 다른지 답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삶은 의미 없는 인생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해 주신다. 하루하루 하나님과 눈을 마주치고 주님과 교제하며 살아가게 하시고, 이 세상에서 주님의 나라를 세우며 살아가게 하신다! 그리고 마침내 죽음 이후에는 이 세상을 떠나 그토록 사랑하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완전함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인생이 가진 진정한 존재의 목적이다.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심지어 그에게 찾아온 고난도 의미가 있고 목적이 있다고 했다. 그 의미와 목적이 무엇일까? 고난과 시련이 성도들의 믿음을 연단하여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시는 그 날 존귀와 영광과 칭찬을 얻게 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달은 성도는 고난 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3.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의 사랑
베드로는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이 여전히 사랑할 수 있음을 가르쳤다.
벧전 1:8-9 /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지금 베드로의 편지를 받은 그리스도인 중에는 예수님을 실제로 본 사람은 별로 없었다. 우리와 같이 한 번도 예수님과 만나서 인사를 나눈 적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 계시고, 함께 하심을 믿을 수 있다. 그 결과 예수님을 본 적 없으나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으며, 예수님을 믿고 즐거워한다.
장거리 연애하는 청년을 보면, 매주 서울에서 버스 타고 사랑하는 이를 보기 위해서 지방으로 내려간다. 그래도 요즘에는 스마트폰이 있으니까 차에서 할 일이라도 있다. 예전에 그 먼 길을 가는 서너 시간 동안 얼마나 따분하고 심심했을까? 때로는 배도 고프다. 화장실도 마음대로 못 가서 불편하다. 그래도 멀어도 상관없다. 그 긴 기다림 끝에 가면 버스 정류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그 사람 얼굴 볼 생각하면 충분하다.
우리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마치 장거리 연애하는 사람들과 같다. 아직 예수님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 인생의 마지막 정류장에 가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그 주님을 만나 볼 소망이 있는 성도는 그래서 불편함도 고통도 사랑으로 감내한다. 고난 가운데서도 성도는 여전히 주님을 사랑할 수 있다.
고난 중에도 찬양, 기쁨, 사랑이 풍성한 삶을 살아가자.
혹시 성인이 된 후, 어린 시절 다니던 초등학교를 찾아가 본 적이 있는가? 아니면 혹시 성인이 된 후, 어린 시절 살던 동네를 방문해 본 적이 있는가? 어른이 되고 난 후에 어린 시절 다니던 초등학교를 가보면 깜짝 놀란다. ‘내가 친구들과 뛰놀던 운동장이 이렇게 작았나?’ ‘우리 집 골목이 이렇게 좁았었나? 그때는 엄청 넓어 보였는데 ….’ 학교 운동장이 작아진 것이 아니다. 동네 골목길이 좁아진 것도 아니다. 뭐가 달라졌는가? 우리가 그만큼 크고 성장한 것이다.
삶의 고난을 바라보는 시선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찬양과 기쁨과 사랑이 자랄수록, 고난은 작게 느껴진다. 물론 신앙이 성장한다고 해서 삶이 전혀 안 힘들어진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고난은 여전히 고난이다. 힘든 것은 힘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기쁨과 사랑은 고난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고, 그 고난을 감내하는 힘을 실어준다. 그리고 고난이 지나가고 다 끝난 후에는 더 큰 존귀와 영광과 칭찬을 받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축복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 가운데 살아가는 여러분, 비록 힘들고 어려운 광야 같은 이 세상이지만, 이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기쁨 사랑이 날마다 자라가기 바란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시는 그 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과 칭찬받는 모든 분이 되시기를 소원한다.
4. 베드로와 함께 불렀으면 하는 찬송
3년 동안 수제자로 자처하며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라고 말씀하시자 이렇게 호언장담하였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 26:31-35)
그러나 예수님께서 군병들에게 잡혀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가셨을 때, 멀찍이서 예수님을 따라 대제사장의 뜰에 들어간 베드로는 아무런 권력도 가지지 않은 한 천한 계집종 앞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다. 세 번째에는 저주까지 하며 주님을 알지 못한다고 부인하였다. 그러자 예수님 말씀처럼 닭이 울었다. 닭 울음소리를 들은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였다(마 26:75). ‘심히 통곡했다’라는 말은 눈물을 펑펑 흘리며 크게 소리내어 울었다는 말씀이다. 베드로가 왜 울었을까? 왜 눈물을 펑펑 쏟아가며 울어야 했을까? 불과 몇 시간 전에 자신이 한 말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은 다 주를 버리고 도망갈지라도 저는 절대로 도망가지 않겠습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호언장담했던 자신이 미천한 계집종 앞에서 주님을 부인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참담한 일일까?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배우고, 성장시켜왔던 자신의 믿음이 겨우 이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자괴감과 함께, ‘내가 내 입으로 주님을 부인했다’라는 죄책감이 그를 엄습한 것이다. 그래서 회개의 눈물을 흘린 것이다.
예수님은 실패와 죄책감에 빠진 베드로를 찾아오셨다(요 21:2-19). 베드로는 큰소리쳤던 자신과 달리 예수님을 배반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다시 옛 직업인 어부로 돌아가 있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를 찾아가 꾸짖지 않으시고 조반(식사)을 차려주셨다. 그리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물으시며 베드로의 사랑을 재확인시켜 주셨다. 과거의 수치심에서 벗어난 베드로는 초기 교회의 가장 강력한 지도자로 회복되어 자신의 목숨까지 아끼지 않는 사명자로 거듭났다.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의 행적을 볼 수 있지만 베드로전후서를 볼 때 하나님의 일꾼이 된 베드로가 얼마나 많은 수고를 했는지, 강조하는 것을 보면서 그렇게 변화되기를 노력했는지를 알 수가 있다.
설교를 마감하면서 내가 만일 베드로라면 나는 죽기까지 이 찬송을 불렀을 것으로 생각한다.
♬ 314장 ❶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엎드려 비는 말 들으소서 내 진정 소원이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❷ 이전엔 세상 낙 기뻤어도 지금 내 기쁨은 오직 예수 다만 내 비는 말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❸ 이 세상 떠날 때 찬양하고 숨질 때 하는 말 이것일세 다만 내 비는 말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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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송가 314장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의 유래
작사: 엘리자베스 프렌티스(Elizabeth P. Prentiss, 1818-1878)
작곡: 윌리엄 하워드 돈(William Howard Doane, 1832-1915)
엘리자베스 프렌티스(Elizabeth Payson Prentiss)는 많은 작품을 남긴 19세기 여류 시인이다. 에드워드 페이슨 목사의 딸로 독실하고 교양 있는 환경에서 자라난 그녀는 고향인 미국 포틀랜드와 여러 도시에서 교사로서 활동했다. 27세 때 장로교 목사인 조지 프렌티스(George L. Prentiss)와 결혼하면서 직장을 그만뒀지만 연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쉴 새 없이 집필 활동을 계속했다. 그 당시 베스트셀러의 기준은 20만 부가 팔리는 것이었는데, 프렌티스가 쓴 ‘천성을 향하여’의 판매량은 그 기준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녀의 다른 책 ‘가정의 꽃’(The Flower of the Family)도 거의 베스트셀러의 기준에 가까웠으며, 123편의 시를 모아놓은 ‘신앙적인 시(Religious Poems)’ 또한 굉장히 많이 팔렸다. 그녀는 두 아이를 기르며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살고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불행이 덮쳤다. 1856년 결혼한 지 11년이 되던 해였다. 뉴욕을 중심으로 번져나가던 전염병은 삽시간에 많은 아이의 목숨을 앗아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프렌티스의 두 아이도 모두 세상을 떠나게 됐다. 연약한 그녀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이었다. 숨쉬기조차 힘든 날들이 시작됐다. 모든 희망이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난 것 같았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이었던 남편은 계속해서 믿음의 말과 사랑으로 위로해주었다. 서서히 남편이 믿는 하나님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외아들인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의 치욕을 받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을 다시 깨닫게 됐다. 온갖 견디기 어려운 고난을 당하시고 죽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엘리자베스 프렌티스는 주님에 대한 원망이 크신 사랑으로 다가오는 영감을 시로 적었다.
‘오, 그리스도여, 주님을 더욱 사랑합니다.’ 이 시가 바로 찬송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이다. 이 찬송은 견딜 수 없는 슬픔을 말씀으로 극복한 후 주님에 대한 간절한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1절은 ‘주님께 엎드려 비는 말은 오직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한다’라는 고백이다. 2절은 ‘이 전에 세상의 낙을 기뻐했지만, 이제는 예수님만 기뻐하겠다’라고 지나온 삶에 대한 후회와 새로운 다짐을 하고 있다. 여기까지 쓴 후 프렌티스는 더 이상 생각이 떠오르질 않아 글쓰기를 멈췄다. 13년이 지난 1869년 프렌티스는 쌓여있는 종이 무더기를 정리하다가 미완성으로 남겨놓은 그 시가 적힌 메모장을 발견했다. 당시 뉴욕 유니언 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의 교수였던 남편은 그 시를 마저 완성해보라고 아내를 격려했다. 프렌티스 부인은 아이들을 잃은 슬픔을 다시 들춰내는 것이 괴로웠지만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돌아가신 주님의 사랑이 주는 기쁨과는 견줄 수 없었다. 다시금 주님의 크신 사랑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그녀는 미완성으로 남겨진 3절을 써 내려갔다. ‘슬픔이 찾아와도, 절망과 고통이 밀려와도, 달콤하고 달콤한 주님 말씀이 나를 노래하게 합니다.’ 그녀는 이제 더 큰 슬픔이라도 오려면 오라고 강하게 외친다.
❚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기 위해 나아가야 할 길 / 314장 찬송가 가사처럼, 우리는 날이 갈수록 주님을 ‘더욱 사랑’해야 한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이렇게 몇 가지를 적어본다.
① 세상의 소리보다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기 / 우리는 매일 수많은 뉴스와 사람들의 평가, 세상의 성공 기준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그러다 보면 마음이 쉽게 흔들리고 주님과의 거리가 멀어진다. 찬송가 2절의 고백처럼, ‘주께로 가까이 정론함은 내 삶의 소원’이 되어야 한다. 세상이 주는 칭찬과 안락함보다, 주님과 깊이 교제하는 골방의 시간이 우리 삶에서 가장 소중한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
②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주님 붙잡기 / 우리가 주님을 더욱 사랑하기 어려운 순간은 바로 고난이 찾아올 때이다.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라며 원망하기 쉽다. 그러나 베드로와 바울처럼 고난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여하자. 시련은 우리를 하나님한테서 멀어지게 하는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손을 가장 꽉 붙잡게 만드는 축복의 통로이다.
③ 날마다 나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기 / ‘더욱 사랑’은 과거의 한순간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매일의 삶 속에서 내 자아와 교만이 살아날 때마다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는 훈련이 필요하다.
눈물로 주님을 찾던 그 순전한 마음을 잃어버렸다면, 오늘 이 예배를 통해 굳어진 마음을 깨뜨려야 한다. ‘주 예수보다 귀한 것은 없네’라고 진심으로 고백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메마른 심령에 생수의 근원을 부어주실 것이다.
➃ 주님 향한 첫사랑의 회복 /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하루 세상의 수많은 유혹과 근심이 여러분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지라도, 우리의 중심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고정하자.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찬양이 오늘 입술의 고백뿐만 아니라, 삶의 실천이 되기를 소원하자. 세상의 모든 화려한 것들을 뒤로하며, 받은바 은혜를 깊이 마음에 되새기며 오직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날마다 주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은혜의 찬송을 부르고 또 부르자.
❚ 주후 64년 7월 18일에 로마 대화재가 발생했다. 휴가 중이던 네로(Nero, AD 54-68) 황제는 휴가지에서 급하게 돌아와서 화재 진압에 앞장섰다. 이재민들에게 비상식량과 생필품을 지급했다. 로마 시내의 작은 기름 창고에서 불붙기 시작한 불은 삽시간에 시 전체로 번져갔다. 시민들에게는 황제 네로가 방화한 것이란 소문이 나돌았다. 민심이 어수선해져만 갔다. 황제 네로는 민심 수습책으로 기독교도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로마에 의해 십자가에 처형된 그리스도를 믿는 사교 집단인 기독교도들에 의해서 방화가 시작됐다는 헛소문이 퍼져나갔다. 네로 황제는 로마 화재의 원인을 기독교인들에게 뒤집어씌우고 기독교도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기독교인들을 화형에 처하는 방법으로 제물로 삼았다. 12사도를 핍박하기 위해서 색출에 나섰다. 후대에는 이 엄청난 사건을 근거로 한 실화 소설과 영화도 제작되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쿼바디스’이다. 그 뜻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 질문형식으로 되어 있다. 네로가 시작한 기독교에 대한 핍박은 열 명의 황제에 의해 약 25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베드로가 박해를 피해 로마의 서남쪽으로 가고 있을 때 주님이 나타나셨다. 이때 주님을 뵙게 된 베드로는 쿼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물었다. 그때 주님께서 ‘나는 네가 버리고 가는 로마의 영혼들을 위해서 로마로 간다’라고 하셨다.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충격을 받고 다시 로마로 돌아가서 순교했다고 한다. 베드로가 순교할 때 함께 끌려왔던 베드로의 아내 컨콜디아(Concordia)는 사랑하는 남편을 향해 ‘여보, 주님을 기억하세요. 승리하세요’라고 외쳤다고 한다.
사도 베드로의 두 편지 중의 첫 편지인 베드로전서는 주후 64년의 로마 화재와 네로 황제의 대박해가 심각해져 가기 직전에 쓰인 것으로 전해진다. 베드로는 이 두 편지를 끝으로 주후 68년쯤에 순교 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 영국에 에드워드 모우트( Edward Mote)라는 37살 난 캐비닛 제조공이 있었다. 이 사람은 젊은 시절 공장에서 일하면서 열등의식과 반항심,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삶은 그에게 전혀 의미가 없었고 소망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겨울, 그가 런던 거리를 배회하다가 자그마한 교회를 보고는, 들르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예배당에 들어갔다. 마침 John Hyatt 목사님이 요한복음 3장을 가지고 거듭나는 도리에 대해 설교하는데, 그 말씀을 듣는 순간 그래, 나도 거듭나야 한다는 강렬한 소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성령께서 그의 마음의 문을 열어 주셔서 그는 예수를 영접하고 거듭나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에드워드 모우트는 거듭난 후 그의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내 망치 소리는 이제 노래하기 시작했다. 내 망치는 이제 춤을 춘다. 그리고 내 눈동자는 생기가 돌고 내 마음속에는 생수가 솟는다. 예수께서 내 마음에 오셨기 때문이다. 나는 거듭났다.’ 그는 전에 하던 목공 일을 계속했지만, 완전히 변했다. 그는 행복한 목공이 되었다. 그의 삶은 점점 풍요로워졌다. 자기가 일하던 목공소가 그의 소유가 되었고 그 목공소는 점점 확장되었다. 에드워드 모우트는 성공적인 사업가가 되었다. 그가 55되던 해에, 자기를 거듭나게 하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 놀라워 그 주님께 자신의 전 재산을 바치고 싶었다. 그래서 그의 사업을 정리하여 런던에 교회를 하나 지었다. 그리고 신학을 공부하여 나중에 목사가 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가 복음을 전한 첫날, 자기가 37살 때 거듭나게 하셨던 주님의 첫사랑을 기억하면서 그 소망을 주신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격스러웠던지 주님을 향한 감사의 시를 썼다. 그것이 오늘 찬송가 488장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 1892년 11월 시카고 맥콜래 신학교를 졸업한 윌리엄 스왈른(William L. Swallen)이 한국에 선교사로 나왔는데 한국말을 열심히 배웠고, 48년 동안 이 땅에서 선교사를 했는데 그가 이해한 한국 조선인의 모습은 ‘고난의 민족이다. 이 민족들에게 정말로 은혜가 될 수 있는 찬송가를 하나 내가 기도하고 만들었으면 좋겠다.’ 우리 민족을 대상으로 찬송가 하나를 지었다. 거기에다 존 더글러스 스코트(John Douglas Scott)라고 하는 사람이 곡을 붙였더니 한국 사람들이 그 찬송 때문에 얼마나 은혜를 많이 받는지 아마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부른 찬송가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 찬송가가 바로 ‘하늘가는 밝은 길이’이다.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슬픈 일을 많이 보고 늘 고생하여도 하늘 영광 밝음이 나의 지상의 이 어둔 그늘을 헤치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빛을 보도다. 내가 걱정하는 일이 세상에 많은데 속의 극심 밖의 걱정 늘 시험하여도 예수 보배로운 피 모든 것을 이기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이기리로다. 내가 천성 바라보고 가까이 왔으니 아버지의 영광 집에 가 쉴 맘 있도다.’
❚ 시베리아의 한 교도소에 수녀들이 수감되었다, 그런데, 수녀복을 벗고 죄수복으로 갈아입으라는 명령을 수녀들이 듣지 않는 것이다. 형무소 당국은 수녀들이 목욕하는 동안 옷을 죄수복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런데도 수녀들은 죄수복으로 갈아입기를 거부하였다. 교도소 측에서는 수녀들을 영하 40도가 넘는 추위 속에 떨게 했다. 그러면 죄수복을 입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수녀들은 추위를 겁내지 않고 알몸으로 앉아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한 의사가 와서 당신들 그러다가 모두 얼어 죽는다고 충고했지만, 수녀들은 듣지 않고 계속 기도만 했다. 시간이 흐르자 수녀들의 몸은 파랗게 얼기 시작했다. 형무소 당국은 이러다가 큰일 나겠다 싶어 그들을 감방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수녀들은 눈길을 걸어 감방으로 들어가면서 오래된 그레고리안 멜로디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노래했다. 감방에 들어온 수녀들은 다른 죄수들이 건네주는 담요를 몸에 걸쳤다. 수녀들이 맨몸으로 추위 속에 떤 시간은 모두 6시간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무도 앓는 사람이 없었다. 형무소의 의사들이 서로 얘기를 주고받았다. ‘의학적인 소견으로 볼 때, 이들 중 한 사람도 병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한 의사가 이렇게 대답했다. “그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노래 부르지 않았습니까? 다른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 워싱턴에 가면 링컨이 애용하던 성경이 보관되어 있다. 그런데 그 성경 속에 손때에 이겨져 눌린 손가락 자국이 있다. 여러 번 같은 장소를 손가락으로 눌러서 생긴 자국이다. 그곳은 시편 34편 4절이다.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시리로다.’
링컨은 남북전쟁과 그의 평생에 걸친 그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은 반드시 대답해 주신다는 확신과 모든 두려움에서 건져주신다는 소망’을 가지고 살았음이 눌린 자국까지 나도록 되풀이 읽은 시편에서 엿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