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 왕국이 중세 유럽을 주도하던 시기, 바이킹의 침공은 2차 민족 대이동이라 불릴 정도로 대규모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범위를 살펴보자면 서쪽으로는 북아메리카 연안, 동쪽으로는 카스피해, 남쪽으로는 지중해와 북아프리카 연안에까지 이르렀습니다. 10세기말에 바이킹은 유럽인으로는 최초로 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콜럼버스와 그 뒤를 이은 스페인 정복자들처럼 대형 범선을 타고 대서양을 횡단한 것은 아니지만 바이킹 선을 타고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아이슬란드, 그린란드를 거쳐 북아메리카에 도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바이킹은 유럽을 약탈할 때에도 수로를 이용하였습니다. 수로의 이용은 바다를 통한 연안 항해 뿐 아니라 강을 통해서도 이루어졌는데 가깝게는 잉글랜드의 템즈 강, 프랑스의 센 강, 독일의 라인 강과 엘베 강을 바이킹선을 타고 내륙 깊숙이 진출하였고 멀리는 다뉴브 강을 타고 흑해로, 드네프르 강을 타고 카스피해로 진출하였습니다. 다뉴브 강을 통해 흑해로 진출한 바이킹은 키에프 루시를 세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모태를 들었고 일부는 비잔틴으로 가서 와리아기 친위대가 되기도 했습니다. 와리아기 친위대는 1081년 두라초 전투에서 같은 바이킹의 후손인 시칠리아의 노르만 기사들과 전투를 벌이기도 합니다. 바이킹 선의 속도에 관해서는 1893년에, 바이킹 선을 재현하여 대서양을 횡단했는데 28일만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평균적으로 하루에 185KM를 이동한 것입니다. 유럽을 공격했을 때 몽골군의 이동속도가 3일에 280KM였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바이킹의 수로 이동은 당시 육상에서의 이동보다 훨씬 빨랐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바이킹의 수로 이용은 나중에 러시아에서 중앙아시아 스텝 유목민들을 정복하는 데에도 응용됩니다.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에서 러시아가 아시아 유목민들을 정복한 수단에는 유목민들로부터 받아들인 기마전술과 서유럽으로부터 받아들인 화약무기 뿐만 아니라 수로의 이용이 큰 역활을 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대지를 가로지르는 수로는 기병의 원활한 기동을 방해하는 장애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로를 잘 이용하면 유목민들이 잘 이동할 수 없는 곳으로 가서 배후를 공격할 수 있고 수로 주변에 진지를 구축하면 기마병에 의한 포위 공격에도 잘 대처할 수 있는 이점이 있습니다.
바이킹이 전투에서 주로 사용한 전술에는 방패벽 전술이 있습니다. 이 방패벽은 바이킹의 라운드 쉴드를 겹쳐서 쉴드 월을 만드는 것인데 주로 중장기병의 돌격을 저지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방패벽 전술은 지형지물과 결합되어 사용되었다는 점입니다. 사방이 탁트인 평야에서 방패벽을 만들면 중장기병의 돌격을 막아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언덕위에서, 또는 시냇물이나 습지와 같이 기병의 기동을 방해하는 지형지물에서 진을 치고 방패벽을 만들면 기병의 돌격을 막아내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이 방패벽 전술은 바이킹 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프랑크군도 사용하였는데 대표적으로 732년의 투르 푸와티에 전투가 있습니다. 이때 프랑크군은 언덕위에 진을 치고 방패벽을 만들어 아랍 기병의 돌격을 효과적으로 저지하였습니다. 아랍군의 기록에는 프랑크군의 방패벽이 마치 얼음장같이 흔들림이 없어 어떤 공격에도 돌파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바이킹의 전술을 받아들인 잉글랜드의 허스칼도 1066년 헤이스팅즈 전투에서 노르만 중장기병의 돌격에 대항하여 방패벽 전술을 사용합니다. 언덕위에서 진을 친 잉글랜드 군에 대해 노르만 기사들은 거듭된 돌격을 시도하지만 모두 실패합니다. 그러나 노르만 군은 잉글랜드 군 배후에 있는 더 높은 언덕으로 올라가 화살비 공격으로 방패벽을 흐트러트리고 기사들이 돌격함으로써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방패벽 전술은 십자군 전쟁에서도 사용됩니다. 1191년의 아르수프 전투에서 리처드는 살라딘 군의 화살비 공격을 방패벽으로 막아내고 화살이 떨어진 틈을 타서 기사들이 돌격함으로써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바이킹의 방패벽 전술은 수로의 이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강과 연안을 따라 이동하면서 동시다발적인 약탈 공격을 함으로써 유럽 국가들의 군대를 분산시키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유럽 국가들은 한곳의 바이킹에 대해서 대규모 기병을 집중하여 공격하기 어려웠고 이는 방패벽 전술의 효과를 증대시킬 수 있었습니다.
바이킹이 주로 사용한 무기는 도끼였습니다. 바이킹 소드로 알려진 검은 전체 바이킹 전사의 1할 정도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외 창과 장궁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바이킹 전사들은 배틀 엑스를 무기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는데 바이킹이 살던 북부 유럽은 그 지형이 대부분이 삼림이라 평소 도끼가 잘 사용되었고 당시 철 제련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도검보다는 도끼를 만들기가 훨씬 수월했습니다. 실제 전투에 있어서도 기사들의 체인 메일에 대해서 칼보다는 도끼가 훨씬 큰 위력을 발휘하였고, 도끼는 요새를 만드는 공병장비로도 유용하게 쓸 수 있었습니다. 바이킹 요새는 수로 가까이에 있는 언덕위에 건설하였는데 주변에 해자를 파고 뾰족하게 깎은 목재를 바깥으로 향하게 해서 만들었습니다.
바이킹의 방패벽과 도끼, 수로의 이용은 당시 유럽에서 보병이 기병을 상대로 해서 매우 효과적인 전투를 벌일 수 있도록 해 주었으나 노르망디 공국처럼 평야에 정착한 바이킹은 프랑크와 같이 중장기병의 전술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아무래도 바이킹 전술은 수로를 통해 이동하면서 약탈 전쟁을 벌이는데는 유용하였으나 사방이 탁 트인 평야에 정착하여 그 곳의 주민을 지배하기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출처:<디펜스 코리아>, 글쓴이:<김 근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