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다큐, 2000]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2001년 2월
여보! 자랑스럽게 싸웠어요
공장의 불빛은 꺼지고 거리에서 불꽃 타오르다
불법한 공권력의 폭력에 맞서 경찰을 체포하다
한겨울이었다. 며칠 전 내린 폭설로 도로는 꽁꽁 얼었다. 그 길을 위태롭게 오토바이가 내달린다. 오토바이 꽁무니에는 빨간 함이 달려있다. 오토바이가 한 아파트 입구에 들어선다. 빨간 헬멧을 쓴 집배원이 오토바이 시동을 끄고 내린다. 기다렸다는 듯 아파트 주민들은 베란다 창문을 연다. 물끄러미 창틀에 매달려 집배원의 행동에 눈을 고정시킨다. 집배원은 허연 입김을 내뿜으며 행낭에서 한 뭉치의 하얀 편지봉투를 꺼내든다. 아파트 현관문을 향해 집배원이 뚜벅뚜벅 걸어간다. 베란다 창문들이 닫힌다.
초조하다. 거실을 서성인다. 귀를 쫑긋 세운다. 계단을 오르는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심장이 쿵쿵 울린다. 두 손을 모은다. ‘제발, 아니 설마…, 절대 우리 집의 초인종은 울리지 않겠지.’ 문밖 발자국 소리가 멈췄다. 순간, 심장도 따라 멈춘다. 몸이 빳빳하게 굳는다. ‘딩동, 딩동’ 초인종 소리가 울린다. 다리에 힘이 쭉 빠진다. 거실 바닥에 주저앉고 만다. 집배원 손에 들린 새하얀 봉투는 ‘살생부’였다.
2001년 2월 17일 오전. 인천 서구 가정동에 자리한 대우자동차 사원 임대 아파트. 270세대가 살고 있는 이곳에 104통의 편지가 동시에 전달되었다. 발신지는 모두 ‘대우자동차주식회사’였다. 편지봉투를 뜯는 순간까지도 설마 설마 했다. 봉투를 찢던 손을 잠시 멈추고 집배원에게 묻는다. “전 사원에게 일괄 발송하는 거죠?” 빨간 헬멧을 쓴 이는 무심하게 툭 던진다. “아닙니다.” 봉투를 쥔 손이 바르르 떨린다. 봉투 안 종이를 꺼낸다. 세 겹으로 접힌 종이를 펼친다. 아, 이럴 수가! 종이에는 ‘근로계약 해지 통보’라고 적혀 있다.
벼랑에 몰린 삶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던 김우중 회장이 이끌던 ‘대우그룹’이 무너졌다. 대우자동차는 1999년 워크아웃 대상기업이 되었다. 독자생존이냐 해외매각이냐의 갈림길에서 대우자동차는 포드에 매각을 추진한다. 이도 여의치 않았다. 2000년 9월 포드는 인수를 포기한다. 대우자동차는 부도 위기에 내몰린다.
2000년 10월에 노동조합 17대 집행부(위원장 김일섭)가 들어섰다. 사면초가였다. 김대중 정부와 회사는 “구조조정 동의서가 없으면 부도처리가 불가”하다고 노동조합을 압박했다. 경영의 실패를 고스란히 노동자에게 돌렸다. 휴업이 반복되었다. 그나마 임금도 체불되었다. 조합원들은 인력시장에 나가 날품팔이를 했다. 이곳저곳 공사판을 전전했다. 은행대출, 신용카드, 마이너스 통장이 급여를 대신했다. 외줄을 타는 심정으로 생활비를 메우고 있었다.
지난 25일 노동조합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남편이 대우자동차에 근무하고 있는데 “분유 값이 없어 애기를 굶기고 있다”며 하루빨리 월급이 나올 수 있도록 노동조합이 힘써 달라고 울먹이며 호소하였다.
또 남편의 월급이 끊기자 맞벌이를 나갔다가 손가락이 잘리는 참혹한 일이 벌어졌다. 나이 먹은 고참 조합원이 공사판 막노동을 하러 갔다가 “아저씨! 나이 먹고 이런 일 못한다”며 문전박대 당하기도 하였다. 그나마 운이 좋아 일자리를 얻어도 일당 3만원에서 5천원을 떼이고 돌아오는 길에 저주스러운 현실을 잊기 위해서 소주 한 잔이라도 하면 빈손이다.
- 대우자동차 노동조합 소식지 민주광장 제279호, 2000년 10월 27일자
조합원의 40%가 일용직 노동자로 나서고 있었다. 배우자들은 십 원 이십 원을 다투는 인형 눈알 달기와 같은 부업을 하였다. 1999년 10.3%였던 조합원 맞벌이 가정은 1년 뒤 37%가 되었다. 김일섭 위원장을 비롯한 집행부들은 조합원들이 막노동을 하고 있는 건설현장을 쫓아다녔다. 사원 임대 아파트를 찾아가 조합원 가족들과 사랑방 좌담도 했다. “모래알에서 바늘 찾는 심정으로” 조합원을 만나러 다녔다.
10년 전 일을 찾아 나섰다. 2011년 12월 6일 ‘금속노조 한국지엠지부’ 사무실이 있는 부평공장을 찾았다. 여전히 그때 그 자리에 노동조합 사무실이 있다. 강산이 변한다는 세월이 흘렀다.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조합 사무실로 오르는 계단 아래에서 걸음을 멈춘다. 흐릿한 글씨가 색이 바란 채 남아 있다. 검정 락카 스프레이로 쓴 구호다. 지워진 부분과 아직 덜 지워진 부분의 퍼즐을 맞추려다 그만 두었다. 철 계단을 올라 사무실로 들어갔다. 당시 경찰의 폭력으로 왼쪽 다리 인대가 파열되고 무릎이 박살이 난 김진택을 만났다. 영상으로 본 10년 전의 얼굴보다 더 야위었다. 여전히 그때의 상처를 몸에 지니고 있다. 김진택은 노동조합 후생복지실장을 맡고 있었다.
“직접 가가호호 방문해 조합원을 만나 ‘민주광장’을 전달하고, 일단 정리해고 통보가 되면 무조건 공장으로 집결하자, 그렇게 알렸다. 아파트 각 동마다 한두 사람씩 전담해서 주소를 들고 찾아다녔다. 조합원들이 저녁식사를 할 때 보면 와이프하고 만찬을 하는 느낌이 들었다. 불안한 거죠. 조마조마하고. 촛불을 켜놓고 소주를 마시면서, 마지막 만찬처럼. 해고라는 통지서가 나에게 안 왔으면 하는 기도 의식, 이런 느낌이었다.”
게릴라 파업
정리해고 통보가 임박했다. 설 연휴를 마친 노동조합은 2001년 2월 1일부터 부서를 돌아가며 갑작스럽게 라인을 멈추게 하는 ‘파상(게릴라)파업’에 들어간다. 언제 어느 곳에서 파업이 시작될 줄 모른다. 파업의 전권은 위원장에게 위임되었다. 위원장과 집행부가 조립2공장에 들어섰다. 라인이 차례로 멈춘다. 공장 안 수밀장으로 조합원들이 모인다. 구호와 함께 ‘철의 노동자’가 울려 퍼진다. 김일섭 위원장은 호소한다. “남이 나가주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다 같이 투쟁해서 같이 살고 같이 죽는다는 생각으로 어려운 시기를 이겨냅시다!” 조립2부 파상파업은 성공했다. 파상파업에 참여한 조합원들은 조립1부로 몰려간다. 조립1부 조합원들도 장갑을 하나둘 벗고 모여든다. 오후에는 차체, 프레스, 공기, 도장부로 파상파업이 이어졌다. 평소 파업 참여율이 낮았던 부서들이었다. 이날은 직․조장을 제외한 전체 조합원이 참여했다. 누구도 파상파업이 성공하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간부가 결의하니 조합원은 움직였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파업에 참여하지 않은 조합원들도 많았다. 함께 하자고 외치는 목소리를 피해 슬금슬금 탈의장으로 향하기도 했다. 농성장에 앉은 이나 그렇지 않은 이나 심정은 마찬가지다. 웃음 끼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얼굴에 절망이 가득 내려앉았다. 지난 4년, 끝없는 추락이었다. 대우그룹 부도, 워크아웃, 해외매각 시도 실패, 부도, 법정관리, 희망퇴직자 모집으로 이어진 숨 가쁜 시간들. 그리고 끝내 정리해고 통보를 눈앞에 둔 이들. 농성장으로 향하든 집으로 가든,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부평공장 출고사무소 맞은쪽 편의점 2층에 ‘한국지엠지부 민주세력 통합 추진위원회(민추위)’ 사무실이 있다. 그곳에서 당시 쟁의부장이던 김창곤을 만났다. 패기가 용광로처럼 끓었던 사나이였다. 어느덧 중년 가장이다. 희끗한 머리카락 사이에 그 시절의 고통이 자리 잡고 있다. 정리해고를 앞둔 상황을 물었다. 김창곤의 목소리가 떨린다.
“여기서 희망퇴직을 하는 사람은 절대 공장에 다시 못 들어온다. 차라리 짤리면 복직할 수 있는 기회라도 생기지만 희망퇴직을 받는 사람은 영원히 못 들어온다. 그 점 감안해서 개겨라. 끝까지. 정말로 목에 피가 나올 정도로 떠들고 다녔다. 그때는 현장 다니면서 자그마한 스피커를 승용차 뒤에다 올려놓고 마이크 잡고 운전하고 다니면서 목이 찢어져라 다녔다.”
이 광경을 가수 박준도 기억하고 있다. 2011년 12월 8일 저녁,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거리에서 죽어가는 노숙인을 추모’하는 집회장에서 만났다. 공연 시작 전 잠깐의 짬을 낸 박준은 자판기 커피를 뽑아 건네며 말한다. “차를 끌고 돌아다니면서 창곤이가 처절한 목소리로 ‘동지들 함께 싸우자’고 독려했던 모습이 지금도 가장 가슴에 남아요.”
부평공장 정문 앞에 가면 당시 희망퇴직자들을 만날 수 있다. 아침마다 복직을 요구하며 일인 시위를 하고 있다. 김창곤은 출근길에 이들과 마주친다. 만감이 교차한다. “희망퇴직자들? 개인적으로 측은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들도 희생자다. 하지만 그때 정말 내가 목에 피가 나올 정도로 떠들고 다녔다. 하지만 몸이 불구가 되며 싸운 김진택이랑 당시 정리해고자들을 생각해봐라. 그렇게 싸웠던 사람들도 있는데, 나가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이제와 도와 달라하는데…, 해 줄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그때 희망퇴직서만 쓰지 않았어도 지금 공장에서 함께 일할 동료들이다.
파상파업 둘째 날인 2월 2일은 엔진부에서 파업이 시작되었다. 부서별로 파업이 이어지고 조립1부로 조합원들이 모였다. 이날 김일섭 지부장은 삭발을 한다. 검은 머리카락이 떨어질 때마다 김일섭의 얼굴에는 눈물이 주르륵 흐린다. 공장 바닥에 앉은 조합원들은 작업복에서 담배를 꺼낸다. 누구도 삭발을 하는 위원장을 바라보지 않는다. 고개를 푹 숙이고 바닥에 짙은 담배연기만을 내뿜는다. 눈물을 흘리는 조합원도 있다. 슬픈 영화를 보아도 나오지 않던 눈물. 아니 눈물샘이 자극되면 ‘싸나이’의 기개로 억눌렀던 눈물. 그 눈물이 저절로 흐른다.
김일섭은 지금은 차체2부에서 라인을 타고 있다. 평 조합원이다. 훤칠한 키에 쌍꺼풀이 또렷한 눈, 그의 눈빛은 십년이 지난 지금도 날카로웠다. 2011년 12월 14일 민추위 사무실에서 세 시간을 기다린 끝에 어렵사리 만날 수 있었다. 늦어서 미안하다며 허리를 구십 도로 꺾으며 손을 내민다.
“삭발하던 날? 정리해고 싸움은 우리가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싸움임에도,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인데,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느냐. 바위에 계란을 깨뜨려서 그 바위를 헤쳐 나갈 수 없다 할지라도 그 바위를 더럽힐 수 있지는 않겠느냐. 결국은 이길 수 없더라도 우리가 최선을 다하자. 이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조합원들도 내 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들 담배만 피면서 내 얼굴을 제대로 못 보더라.”
32년만의 폭설
정리해고 통보를 하루 앞둔 2월 15일, 32년만의 대폭설이 내렸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대우자동차의 현실을 거침없이 내리는 눈발이 대변하였다. 부평공장 조립사거리에 의자들이 놓인다. 간부들이 차례로 앉는다. 위원장의 삭발에 이은 간부들의 삭발이다. 쉼 없이 쌓이는 눈 위로 검은 머리카락이 떨어진다. 하지만 속절없이 쏟아지는 눈에 떨어진 머리카락은 흔적이 없다. 삭발된 머리 위에는 눈이 쌓이지 않는다. 간부들은 머리띠를 이마에 질끈 맨다. 이어서 김일섭 위원장이 나왔다. CNN을 비롯한 외신 기자와 함께 국내의 수많은 언론사의 카메라가 일시에 위원장을 향했다. 마이크 위에는 눈이 소복이 쌓였다. 긴급히 비닐을 전원선 위에 덮었다. 회사는 15일부터 전 공장 휴무를 통보했다. 정리해고 통보 발송을 앞두고 조합원들의 공장 결집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이에 노동조합은 ‘최후의 결전을 준비합시다’라는 호소문을 통해 ‘16일부로 전면 총파업을 선언’한다. 거침없이 쏟아지는 눈발 속에 유독 붉게 도드라지는 머리띠를 묶은 김일섭 위원장 손에는 ‘대우자동차 정리해고에 맞선 결사투쟁 선포 기자회견문’이 들려 있다. 기자회견문을 읽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한 문단을 채 읽기도 전에 회견문 위로 눈이 쌓여 활자를 지워버렸다. 손으로 눈을 쓸어가며 읽기를 반복하였지만 손에 쥔 회견문은 촉촉이 젖어 너덜 해졌다. 옆에 서있는 간부가 새 회견문을 건넨다.
5. 조합원들은 길게는 4년 전부터 휴무, 반복되는 휴업, 그리고 체불임금 등 수많은 고통 속에서 부도 이후 4,091명을 떠나보내는 참혹한 시기를 보내왔다. 정든 동료를 눈물 섞인 이별주로 떠나보내는 참혹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정상화의 희망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분노를 분노답게 표현하지도 못했던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6. 그러나 이제 우리는 모든 상황을 기꺼이 각오하며 결사투쟁에 돌입할 것을 선언한다. 우리의 투쟁은 잘 나갈 때는 한 가족이라고 외치다 집안 살림이 어렵다고 가족을 쫓아내는 비인간적인 행위에 맞서는 투쟁이다. 합리성을 상실하고 정권과 채권단을 위한 명분을 차리기 위해 수천의 가장을 생존의 위기로 모는 반인륜적인 행위에 맞서는 투쟁이다. 오직 GM만을 짝사랑하면서 대우차는 물론 수십만의 협력사 사원 및 가족의 생존을 외면하는 반국민적인 정부에 맞서는 투쟁이다.
- 대우자동차 정리해고에 맞선 결사투쟁 선포 기자회견문, 2001년 2월 15일
기자회견문을 낭독하고 자리에서 일어선 김일섭 위원장. 조립1공장을 향해 걷다가 걸음을 멈춘다. 힐끗 고개를 돌려 조합원을 바라본다. 조합원들은 눈 바닥에 그대로 자리하고 있다. 김일섭의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2월16일 오전 11시. 긴급히 노사가 만났다. 정리해고 통지를 발송하기로 한 날이었다. 마라톤 회의였다. 노동조합은 무급순환휴직을 제안했다. 회사는 받아들이지를 않았다. 희망퇴직을 인정하는 노동조합의 최종안을 제출했다. 회사는 거부한다. 오후 5시, 노사 협상은 결렬되었다.
회사 노무부에는 이미 정리해고 우편물이 봉투에 풀칠이 된 채 대기하고 있었다. 이날 협상은 명분 쌓기에 불과했다. 정리해고 통지서는 우체국으로 발송되었다. 지역 별로 분류된 우편물은 17일 아침 각 가정으로 송달되었다.
그날(16일) 저녁, 벌써 일주일째 들어오지 않아 아빠 얼굴을 잊어가는 아이를 재우고 이후 어떻게 해야 할지 밤새 뒤척이며 고민했습니다. 생각하다 지쳐 울고, 울다 잠이 들고, 깨면 다시 가슴 졸이면서 뜬 눈으로 새우고. 해고 통지서를 받는 날, 집 안팎을 수십 번씩 나갔다 들어갔다 안절부절못했습니다. 이건 부당해고다, 절대 인정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제발 우리 집에는 그 통지서가 배달되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습니다.
- 정리해고자 전종운 씨의 부인 서정희 씨의 글
정리해고자는 어찌할 줄 몰랐다. 김창곤은 말한다. “정리해고 통보받고 첫날 이튿날까지는 사람들이 멍한 상태인 거죠. 이걸 싸워야 해, 공장에 가야 해, 말아야 해. 이런 자괴감이 동시에 엄습해 버리니까 조합원들이 패닉 상태였던 것 같아요. 통지서를 받지 않은 사람은 노가다라도 가지만 잘린 사람은 노가다도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싸우러 올 수도 없는 정신적 공황 상태가 있었던 것 같다.”
노동조합은 ‘정리해고 통지를 받은 사람은 가족들을 데리고 공장에 들어오라’는 지침을 이미 내렸다. 하지만 17일에 오전에 모인 정리해고자는 오십 명 남짓. 어찌할지 몰라 하던 정리해고자들이 그날 저녁부터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다. 1750명의 정리해고자 명단. 적힌 이름만으로도 책 한 권은 됨직했다. 공장으로 모인 조합원들은 명단에 이름이 오른 조합원에게 전화를 건다. 하루 이틀 갈등하던 노동자들이 점차로 공장으로 집결한다. 오십 명이 백 명이 되고, 백오십 명, 그렇게 삼사백 명으로 늘었다. 몇몇 가족들은 아기를 업거나 손을 잡고 공장으로 모였다. 어깨에는 기저귀와 분유가 담긴 가방을 메었다.
나그네 설움
가족대책위원회(가대위)도 꾸려진다. 대표는 정순희가 맡았다. 정순희의 남편은 노동조합 간부로 징계해고자다. “정리해고 통보 받은 그날, 당시에 임대 대우 사원 아파트에 살았어요. 문이 많이 와서 바닥에 쌓여 있는 때인데, 우편배달부 아저씨가 오토바이 타고 와서 집집마다 노크하고 정리해고 통지서를 건네고 받는 과정을 봤어요. 애(당시 17개월 된 아들)를 등에 업고, 이불로 싸매고 공장으로 왔더니 가족은 아무도 없어요. 제가 맨 처음 온 거죠. 그래서 전화를 해서 엄마들 오라고 했죠. 가대위 대표는 얼떨결에, 다들 도와준다니까 했어요. 남편이 그러더라고. 정리해고자들이 가대위를 만들었는데, 왜 징계해고자 아내인 니가 했냐? 무심하게 말하더라고요.”
이미 공장 밖에는 경찰 병력들이 공장을 둘러싸고 있었다. 경찰의 공장 침탈에 맞서려고 쇠파이프를 준비했다. 부서 별로 조합원을 나눠 4개 대대로 구성했다. 각 대대는 동서남북 공장 출입문에 배치되었다. 한밤중에 비상 훈련을 하기도 했다. 사이렌이 울리면 자다가 벌떡 일어나 쇠파이프를 들고 자신의 담당 구역으로 달려 나갔다. 실제로 밤중에 잠이 든 사람은 없었다. 조립1공장 탈의실의 캐비닛을 전부 밖으로 꺼냈다. 그곳에 은박 스트로 폴을 깔고 농성 숙소를 만들었다. 석유난로 넉 대가 공간을 데우고 있었다. 하지만 몸은 데워지지 않는다. 잠 들 수 없는 밤이다. 공권력 침탈은 두렵지 않다. 무너진 미래가 몸을 오싹하게 만든다.
조립1공장 앞 식당에는 농성장이 만들어졌다. 천오백명이 한꺼번에 밥을 먹을 수 있는 너른 공간이었다. 출입문 쪽으로 식탁들을 모아 무대를 만들었다. 투쟁연설과 연대사가 이어지고 노래공연과 율동패의 힘찬 몸짓이 이어졌다. 무대를 바라보고 앉은 조합원들의 얼굴은 수심이 가득한다. 파업가에 맞춰 율동을 한다. 손이 올라갈 때도, 앞으로 찌를 때도, 빗금을 그으며 내려칠 때도 맥아리가 없다. ‘동지’들과 어깨를 걸고 ‘투쟁’을 외치지만 보이지 않는 미래에 마음은 심란할 뿐.
가수 박준이 왔다. 금속연맹에서 파견된 조건준 정책실장이 박준의 옆구리를 쿡 찌른다. “오늘은 투쟁가 말고 뽕짝을 한번 불러줘요.” 박준은 그 말뜻을 단박에 알아챈다. “못할 것 뭐 있나요.” 박준은 회심의 미소를 띠며 답한다. 기타를 비스듬히 메고 박준이 무대에 오른다. 사회자가 힘찬 박수를 보내달라고 한다. 박수 소리는 요란했지만 무대 아래 조합원들의 목은 축 쳐져 있다. 박준이 기타를 튕기며 노래를 시작한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 지나온 자욱마다 눈물 고였다 / 선창가 고동소리 / 옛 님이 그리워도 / 나그네 흐를 길은 한이 없더라
- ‘나그네 설움’ 1절
일제강점기인 1940년에 백난설이 불렀던 ‘나그네 설움’이다. 이 노래가 2001년 공장에서 쫓겨나는 정리해고자의 숙여진 고개를 들게 하였다. 연신 담뱃불을 붙이던 조합원들도 담배를 끄고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누가 시키지 않았다. 조합원들은 나그네 설움을 불러 제치기 시작했다. 차츰 차츰 들려지던 고개는 한껏 뒤로 젖혀지고, 가슴 앞에서 움직이던 두 손바닥의 폭은 더욱 벌어졌다. 움츠렸던 가슴이 짝 펴졌다. 터져 나온 것은 노래가 아니었다. 목소리가 아니었다. 답답했던, 미치고 말 것 같은, 울화통이, 가슴속에 박혀 누르고 있던 돌덩이가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절규였다.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당시가 떠오르지 않는다던 박준. 나그네 설움을 이야기 하자 기억을 한 줌씩 꺼내기 시작한다. “정말 그랬어요. 노래 때문만은 아니고, 일단은 침울했던 분위기가 스멀스멀 사라지며 숙여진 고개가 일어서며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한 거야. 눈을 질끈 감고 부르는 동지들도 있고. 굉장히 쇼킹했어.”
당시 서른셋이었던 정순희. 태어나 처음으로 남편을 지키기 위해 쇠파이프를 들었다. 아기를 등에 업은 가족들도 손에 쇠파이프를 들고 공장을 돌아다녔다. 정문 앞에 서서 쇠파이프로 바닥을 두들기며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저는 애를 업고 쇠파이프를 들고 공장을 한 바퀴 돌면서 출입문에서 조합원과 전경이 대치하고 있으면 저희도 구호를 따라 외치고, 그 추운 데 그랬어요. 그게 가슴이 막 떨리고 긴장됐어요. 공장 안에서 쇠파이프를 들고 뭘 쳤는지는 모르는데 막 뭘 두들기고 그랬어요. 소리를 지르며. 가슴에 담긴 분노를 분출하려고 그랬던 거 같은데, 처음 해 본 일이라 재밌었던 거 같아요.”
공장에서 쫓겨나다
2월 19일 공장 안에는 정리해고자를 비롯해 오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 공장 밖에도 정리해고자들이 몰려와 공장 진입을 시도했다. 삼십만 평에 이르는 부평공장은 이미 4,200명의 경찰 병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공장 밖에서는 공장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 경찰들과 싸우고, 공장 안에서는 바깥에 있는 노동자들이 공장에 들어올 수 있는 통로를 만들려고 경찰과 싸웠다. 가족들도 서로의 손을 잡고 늘어서서 때론 구호를 외치고, 때론 경찰의 폭력에 항의하였다. 정문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 되었다. 소방호스에서 거친 물살이 쏟아졌다. 한겨울 추위에 작업복은 꽁꽁 얼었다. 2001년 대우자동차 정문 앞에는 얼음꽃이 피었다.
오후 4시가 되어서야 정문 앞 충돌은 멈췄다. 온몸이 땀과 물로 흠뻑 젖은 노동자들. 휴식 시간을 갖으며 저녁 식사를 하였다. 밥을 먹은 이도 있었고, 밥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가는 이도 있었다. 오후 5시 30분이 무전기에서 다급한 소리가 들린다. 경찰은 포클레인 4대를 동원해 공장 안 진입을 시도했다. 공중에는 경찰 헬기가 맴돌며 즉시 해산하라는 선무 방송이 시작되었다. 전쟁터였다. 공포가 몰려왔다. 오후 6시, 정문 옆 철망을 포클레인으로 걷어냈다. 경찰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농성장이 있는 조립사거리로 사방에서 몰려왔다. 10분 남짓 되었을까, 조립사거리는 경찰들만 있었다. 순간 몇 개의 화염병이 경찰들을 향해 던져졌다. 하지만 저항의 무기는 되지 못했다. 경찰이 장악한 조립사거리에는 농성 천막이 불타고 있었다.
“정말 겁이 났던 순간이었다”고 정순희는 회상한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어슴푸레 했어요. 그때 머리 위에 헬기가 뜨고 사이렌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밥을 먹고 나오는데 분위기가 이상해진 거예요. 조합원 아저씨들이 피하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래도 (남편들을) 지켜야 된다는 생각에 남문으로 갔어요. … 길가에 애를 업고 서 있었거든요. 엄마들 몇 명이서 해본다고 하는데 도저히 감당을 못하죠. 개미떼가 들어오는 광경이었어요. 새카맣게 오는데 겁나더라고요. … 아저씨들은 조립 사거리로 막 뛰고, 그 광경을 지켜봤죠. 어떤 엄마는 밀려가가지고 자빠지고 난리가 났었죠.”
정순희는 이야기를 멈춘다. “시간이 지나면 그냥 괜찮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또 이야기를 하려니 눈물이 난다”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잠시 뒤 돌아 와 화장지로 눈물을 찍어가며 이야기를 잇는다. “정말 이게 우리나라야! 이런 거 있잖아요. 내가 불법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도둑도 죄인도 아닌데, 나를 보호해 줄 경찰들이 이리 하니까 진짜 그때는 지옥 같았어요.” 결국 정순희를 비롯한 가족들도 경찰버스에 실려진다. 이날 공장에 투입된 병력은 5,400명이었다.
경찰이 밀고 들어온 순간 김일섭 위원장은 김현기 조합원과 함께 프레스 공장으로 들어간다. 공장 지하로 통하는 엘리베이터를 작동했다. 엘리베이터를 층과 층 사이에 세웠다. 전원을 끈다. 아수라장인 바깥의 온갖 소리들이 고스란히 귀에 매달린다. 호주머니를 뒤져 담뱃갑을 찾는다. 한 개피 밖에 없다. 둘이서 담배를 한 모금씩 나눠 핀다. 바깥이 조용해지기를 기다린다. 휴대폰이 있었지만 켜 둘 수가 없다. 혹 휴대폰 소리가 울리면 발각되기 때문이다. 어느덧 자정이 넘었다. 바깥 동정을 살피려고 엘리베이터를 작동시킨다. 공장 밖은 가로등이 환하게 켜져 있다. 소대 병력의 경찰들이 쉼 없이 공장 주변을 순찰한다.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다. 계속 이곳에서 버틸 수는 없다. 경찰들이야 공장 구조를 몰라 자신을 찾지 못하지만 내일 공장 직장들이 출근을 하면 발각될 것이 분명했다. 새벽녘 다시 공장 밖의 동정을 살핀다. 여전히 온 공장에 불을 환하게 밝혀두었다. 경찰들도 그대로다. 그런데 안개가 장난이 아니다. 바로 눈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다. 하늘이 내린 기회였다. 김일섭은 프레스 공장 지붕으로 올라간다. 지붕에는 손가락이 푹 들어갈만큼 먼지가 두툼하게 쌓여 있었다. 20일 오전, 공장 지붕에 숨어있던 김일섭 위원장은 잠시 휴대폰의 전원을 켠다. “위원장님, 지금이 기횝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린다. 경찰들의 식사 시간이었다. 겨우 몸이 들어갈 정도의 자그마한 창문을 깨고 정비사업소 건물로 훌쩍 몸을 던진다. 공장을 탈출했다. 점심때였다.
다행이었다. 김일섭 위원장은 물론이고, 김성갑 수석, 박재근 부위원장 등 노동조합 핵심간부는 어느 누구도 잡히지 않았다.
불길이 솟은 부평
19일 공권력이 투입되자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 사회단체는 산곡동 성당에 모인다. 20일에 규탄집회를 열기로 결의한다. 하지만 과연 몇 명이나 집회에 참여할까, 설왕설래가 되었다. 갑작스레 노동자들을 동원하기 힘드니 고속도로 점거와 같은 선도투쟁을 벌이자는 의견도 있었다. 대중 집회를 열 것이냐 선도투쟁을 할 것이냐를 두고 집회 당일 새벽까지 엎치락덮치락 했다. 전술의 결정은 쉽지가 않았다. ‘부평역에 500명 이상이 모이면 집회와 가두시위를 한다. 500명이 안 모이면 고속도로를 점거한다.’ 두 개의 투쟁 방안을 준비했다.
20일 오후 2시 부평역. ‘정리해고 분쇄, 대우자동차노조 탄압 김대중 정권 규탄대회’가 열렸다. 이날 집회에는 울산의 현대자동차 노동자 가족도 나왔다. 정리해고 이후 겪어야 했던 절절한 고통을 쏟아냈다. 집회를 마친 노동자들은 거리 시위를 시작했다. 갑자기 쇠파이프가 도로에 쏟아져 나왔다. 동시에 누군가가 화염병이 담긴 종이 상자를 거리에 펼쳐 놓았다. 아이엠에프를 거치면서 시작된 정리해고의 고통과 비정규직의 양산은 노동자의 삶을 끝없이 추락시켰다. 김대중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노동자에게 끝없는 희생을 강요했다. 이 분노가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및 공권력 투입 사건을 통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모자와 마스크를 둘러 쓴 노동자와 학생들은 전투경찰을 향해 화염병을 던졌다. 경찰들은 계속 뒤로 밀렸고, 노동자의 행진은 거침없이 앞으로 나갔다. 이날 집회 참가자들은 공장 앞까지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공장 안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이날 가두시위에 혼비백산한 경찰은 다음날부터 부평 일대를 계엄령을 방불케 하는 경계에 들어간다. 대우자동차 관련 집회와 시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21일에는 집회가 시작되기도 전부터 집회 참가 예상자를 불심검문과 함께 연행하였다. 역사 플랫폼까지 경찰이 들어와 시민들에게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다. 부평역 인근에서 약식집회를 벌인 노동자들 가운데 일부는 경인고속도로를 점거하고 시위를 벌였다.
김재복 수사의 도움으로 산곡동 성당 옆 피정의 집 마당에 텐트를 치고 농성에 들어간다. 이곳은 1년 가깝게 정리해고 저지 투쟁의 거점이 된다. 가발을 쓰거나 모자를 눌러쓰고 수배자들이 피정의 집으로 잠복해 들어왔다. 김일섭은 승용차 뒷좌석 바닥에 뱃가죽을 바짝 붙이고 들어올 수 있었다. 김성갑 수석부위원장은 이곳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구속을 각오하고 홍길동(?)이 된다. 집회와 거리 시위에 대우자동차 노동조합을 대표해 마이크를 잡았다. 거리로 조합원만 내보낼 수 없었다.
취재과정에서 만난 이들은 입을 모아 김재복 수사에 대한 고마움을 말했다. 피정의 집이 없었더라면 정리해고 저지 싸움을 벌이지 못했을 거라고 한다. 지금은 인천시 노인요양원으로 바뀌었다. 건물이 새롭게 리모델링되어 더욱 높게 치솟았다. 노동조합 사무실을 대신해 노동자의 잠자리가 되고, 집회장이 되고, 식당이 되었던 피정의 집 마당에는 지금도 당시의 모과나무가 모과를 달고 서있다. 모과나무 밑에 김일섭 위원장의 텐트가 있었다.
수배 기간 영세를 받아 베드로라는 이름을 얻은 김일섭 위원장은 말한다. “김재복 수사님을 떠올리면 너무나 죄송스럽고 여전히 빚으로 남아 있다. 김재복 수사님이 저희들 사건으로 수도회에서 쫓겨났던 거랑 다름없다. ‘앞으로도 그런 일(노동자들이 피정의 집에서 농성)이 있으면 받아들일 것이냐’ 라고 했을 때, 수사님은 ‘받아들이겠다’고 하면서 결국 쫓겨난 거다.”
대전에 살고 있다는 김재복에게 수차례 연락을 했다. 하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문자 메시지를 보냈건만 답변이 없었다. 김재복은 수도회에서 나온 뒤로 인천에서 주유소 주유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노동자들은 복직을 한 뒤에 매달 조금씩 성의를 모아 지난해까지 김재복에게 전달했다. 그는 이 돈을 고스란히 소년소녀 가장을 돕는데 썼다.
아름다운 연대
회사는 휴업 중이던 직원들에게3월 7일 조업을 재개할 것이라고 출근을 지시한다. 오전 6시까지 백운공원을 비롯한 몇몇 곳에 출근 차량을 배치한다. 비표를 지닌 직원들만 차에 타게 하였다. 정리해고자와 가족들은 백운공원으로 갔다. 차량 바퀴 밑에 드러눕고, 버스 문에 매달리고, 스크럼을 짜고 길을 가로 막았다. 소용없었다. 경찰들은 출근차량 출발을 저지한 203명을 연행하였다.
이날 경찰이 한 여성을 거칠게 연행해 유산을 하게 만든다. 정순희의 기억이다. “거의 잠을 못 잤어요. 새벽 네 시엔가 일어나서 택시타고 백운공원으로 갔죠. 빨리 간다고 갔는데, 벌써 차에 다 탑승해 있더라고요. 타는 걸 막을 수도 없었어요. 나중에 한두 명 늦게 와서 타는 분이 있으면 우리가 문을 못 닫히게 하고 그랬어요. 문 두들기면서 소리 지르고. 소용없더라고요. (버스 안에 탄 사람들은) 아무도 꼼짝 안 하고, 창문 커튼을 치고, 거기에 탄 아저씨들도 암울하죠. 애를 데려온 엄마도 있었는데, 경찰들이 와서 막 끌어내 닭장차에 태우고. … 연행되는 과정에서, 아마 임신한지를 몰랐나 봐요. 여경들이 우악스럽게 연행을 하는데, 막 옷이 다 들춰지고, 정말 내가 저러면 미치고 수치스러울 정도로 끌고 간 거예요. 그렇게 연행됐는데, 계속 몸이 안 좋아서 산부인과에 입원했다는데, 유산했다고 한다. 이걸 가지고 싸우려고 했는데, 당사자들이 원하지 않았다. 열심히 싸웠는데, 이후로 나오지 않았다.”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저지 싸움은 그야말로 연대가 큰 힘을 차지했다. 특히 초창기 싸움은 이들이 없었으면 힘들었을 거라고 한다. 정리해고가 임박하자 민주노총을 비롯해 민주노동당, 사회당, 노동자의 힘 등 25개 노동, 사회단체는 총력투쟁을 다짐하며, ‘대우자동차 노동자 생존권 쟁취, 구조조정 분쇄, 해외매각 저지를 위한 공동투쟁본부(공투본)’을 1월 11일에 출범시킨다. 금속연맹 문성현 위원장은 2월 15일부터 부평공장에 들어가서 노동조합 간부들과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단병호 민주노총 위원장은 산곡동 성당에서 투쟁계획을 짜는 회의를 주도했다. 금속연맹은 연대파업을 준비한다. 2월 28일에는 54개 사업장 3만여 명이 파업에 들어갔다. 부산, 경기, 경주, 울산을 비롯한 전국에서 연대 집회를 열고 격렬한 가두시위를 벌였다. 창원에서는 파업에 들어간 3천명의 조합원이 가음정 체육공원에서 집회를 연 뒤 창원대로 8차선을 장악하고 거리행진을 벌였다. ‘김대중 정권 규탄대회’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김대중 정권 퇴진 결의대회’로 바뀐다. 간간히 외쳐지던 ‘정권 퇴진’ 구호가 대우자동차 싸움으로 공식적으로 등장하였다.
단병호 민주노총 위원장, 문성현 금속연맹 위원장을 비롯한 노동운동 핵심 지도부만이 아니라 기아자동차 노동자 18명을 비롯한 118명이 구속 또는 수배가 된다. 인하대, 연세대, 항공대를 비롯한 대학생들의 연대도 빼놓을 수 없다. 초창기 정리해고자들이 주저주저할 때 전국에서 연대를 온 노동자나 학생들이 앞장섰다. ‘노동자의 힘’ 김혁이나 남궁원 같은 경우는 화염병 시위를 주도하였다는 이유로 구속이 된다.
김혁은 현재 금속노조 단체교섭실장이다. 2011년 11월 29일 서울 정동의 한 식당에서 그를 만났다. 김혁은 쌍용자동차 정리해고에 맞선 77일간 옥쇄투쟁을 함께 하다 구속되었다. 2011년 8월에 석방되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높낮이가 없다. “당시 정리해고가 법제화 되고 현대자동차, 만도기계로 정리해고가 이어졌다. 대우자동차 투쟁은 민주노총뿐만 아니라 전체 노동계를 정리해고 저지 투쟁의 중심으로 끌어들였던 싸움이었다는데 의미가 있다.”
정리해고 저지 싸움은 3월 7일 이후 소강상태에 들어간다. 긴박하게 배치되었던 민주노총과 금속연맹의 투쟁일정도 3월 7일 민주노총 결의대회 이후로 피로감이 역력했다. 2002년에 대우자동차 노동조합에서 펴낸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철폐 투쟁백서 ‘공장으로 돌아가자’에 나타난 당시의 평가를 들춰본다.
둘째, 공권력 침탈에 맞선 투쟁이 연대투쟁으로 나아갔지만 대우차 조합원들의 참가는 제한적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문제이다.
셋째, 투쟁의 전술과 관련된 문제이다. 공권력 침탈에 맞서는 격렬한 가두시위는 그 자체로서 노동자의 분노를 전국적 차원에서 조직해 내는 데는 일정한 효과를 발휘하였다. 그러나 투쟁이 장기화되면서 이는 대중적이고 조직적인 연대의 확대로까지 나아가진 못했다. 이점에서 볼 때에 가두시위와 함께 지역시민과 노동자대중투쟁을 조직하는데 필요한 적절한 대중적 투쟁전술의 필요성에 대한 제기들도 있었다. 투쟁에 결합한 대우차 조합원들도 가두에서의 강력한 물리전에 익숙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또한 정리해고자만이 아닌 대우차 조합원의 참가를 조직하기 위한 차원에서의 효과적인 대중투쟁전술에 대한 반성적 평가가 필요할 것이다.
- ‘공장으로 돌아가자’ 122쪽
공장으로 돌아가자
3월 7일을 거치면서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저지 싸움은 공장 진입 투쟁에 집중된다. 정부와 회사는 법으로 보장된 노동조합 사무실 출입마저 공권력을 앞세워 저지하였다. ‘삼엄한 경찰병력의 봉쇄망과 비표를 통해 공장진입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금속연맹 변호인단은 ‘노조출입 가처분신청을 내고 4월 6일 법원으로부터 노조 출입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결정을 확보’한다.
김기덕, 박훈 등 금속연맹 소속 변호사들이 앞장섰다. 조합원을 이끌고 노조 사무실을 찾아간다. 경찰의 방패가 가로막는다. 노란색의 변호사 신분증을 내밀며 노조 사무실을 열라고 하지만 경찰은 막무가내였다.
4월 9일, 금속연맹 조건준 정책실장은 승용차를 몰고 서울 봉천동으로 향한다. 이곳에는 박훈 변호사의 신혼 단칸방이 있다. 몸살감기를 심하게 앓은 박훈은 으슬으슬 춥고 온몸에 열이 나 꿈쩍을 할 수 없었다. 대우자동차 투쟁이 시작되며 한 시도 쉴 틈이 없었으니 당연한 노릇이었다. 2월 19일 이후로 날마다 벌어지는 싸움과 그로 인해 연행되거나 구속된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때론 변론보다는 법과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사회에 맞서 투쟁을 해야 했다. 조건준은 피로에 지쳐 쓰러진 박훈을 깨웠다. 초췌한 박훈을 보는 순간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노동조합 출입 투쟁의 돌파구를 열어야 하는 일이 절박했다. 노동조합 지도부들은 수배나 구속이 된 처지였다. 어떻게든 싸움을 이어가려면 박훈의 힘이 필요했다. 하루만 더 쉬자는 박훈의 사정에도 불구하고 조건준은 야멸치게 자신의 승용차에 박훈을 밀어 넣는다. 승용차는 산곡동 성당 피정의 집에서 멈췄다. 박훈은 변호사에서 야전사령관으로 변신한다.
수배 중이어서 성당 밖으로 나가지 못했던 김창곤은 묘한 웃음을 띠며 말한다. “쟁의부장이 가지고 있는 모든 권한을 성당 밖으로 나가는 순간부터 박훈 변호사한테 일임을 하겠다. 그러니 박훈 변호사의 지도에 철저하게 따라 줄 수 있느냐, 그러니까 조합원들이 ‘투쟁’으로 답했다. 오늘부터 박훈 변호사는 쟁의차장이다!”
성당 밖 투쟁의 전권을 위임받은 박훈 변호사는 조합원을 이끌고 피정의 집을 나섰다. 조합 사무실이 있는 부평공장 남문으로 향했다. 박훈은 4월 9일 노조 사무실을 향할 때만 해도 “가처분 신청이 받아들여졌으니 당연히 조합 사무실을 열어 줄 줄 알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컨테이너로 남문은 막혀 있었다. 경찰들은 법의 집행관이 아니라 법을 가로막는 ‘범법 행위’를 벌였다. 서너 시간이 넘는 실랑이 끝에 ‘조합원 10명만 조합 사무실에 들어갔다 나오는 조건’으로 이날 진입 싸움은 끝났다.
조합 사무실 가는 길은 비참했다. 남문에서 사무실까지 컨테이너로 벽을 쳐놓았다. 그 길을 따라 사무실로 들어가는 조합원의 심정은 찢어질 듯 아팠다. 계단을 오르는데 교도소처럼 사방에 철창을 쳐두었다. 이건 감옥에 수감되는 기분이었다. 50일 만에 찾은 조합 사무실, 문을 열고 불을 켜니 휑하다. 책상이며 모든 집기들이 사라졌다. 텅 빈 사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조합원 한 명은 벽을 붙잡고 펑펑 눈물을 흘렸다. 아, 우리의 흔적이 이렇게 사라졌구나. 세상에서 버려진 정리해고자의 가슴처럼 뻥 뚫린 듯 비어버린 사무실. 저절로 무릎에 힘이 빠져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공권력의 야만, 4월 10일
4월10일, 박훈은 “대판 붙어야겠다”며 단단히 결심을 하고 피정의 집 농성장을 나선다. 2000년 연수원 시절에 금속연맹에 온 박훈은 2001년 2월에 변호사 신분증을 받았다. 아직 잉크도 마르지 않은 신분증이 공권력 앞에서 무력하다는 걸 뼈 절이게 느꼈다. 치욕이었다. 법치국가에서 법이 무시되는 상황을 묵과 할 수 없었다.
도로로 행진을 하지 않았다. 인도를 따라 삼삼오오 걸어갔다. 법원에서도 인정한 정당한 노동조합 출입을 하기 위해서. 산곡사거리에서 군부대 길을 따라 10분 남짓 걸었다. 남문을 600미터 앞둔 대성자동차 정비코너 앞에 이르자 전투경찰들이 인도와 도로를 원천 봉쇄하였다. 박훈은 현장 경찰 지휘자인 이기호 경감에게 길을 막는 법적 근거를 대라고 따졌다. 지휘자는 “상부지시로 막고 있을 뿐 (이유는) 모른다”라며 길을 터주지 않았다. 박훈 변호사는 경찰들을 향해 법원 결정문을 수차례 읽어주며 길을 열어달라고 했다. 법원 결정문에 대한 답변은 경찰 방송 차량을 통해 나왔다. 해산을 명령하는 선무 방송이었다. 몸싸움이 일어났다. 맨손의 조합원을 향해 곤봉이 날아왔고, 방패가 춤을 추었다. 박훈 변호사는 조합원을 더 이상 다치게 할 수 없어 한 발 물러나 거리에 앉으라고 했다. 조합원이 자리에 앉자 박훈은 왼쪽 어깨에 메가폰을 메고 발언을 시작했다.
“소화기를 뿌려대고 방패로 찍고 무지막지하게 긴 몽둥이로 뚜드려 패고 있습니다. 제가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불법한 공권력에 대항하여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정당방위로서 무죄입니다. 여기에 비켜나지 않는 사람, 전경들을 두들려 패도 결코 죄가 되지 않음을 알려 드리오니 패셔도 되지만 죽지만 않을 정도로 패고, 끌려 나온 전경들은 절대 패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뜯어져 나온 순간 한 개인에 불과하기 때문에 폭력은 안 됩니다. 그렇게 하실 수 있죠?”
“예!” 박훈의 제의에 조합원들은 크게 답한다.
이때의 박훈 변호사의 발언을 경찰은 앞뒤를 자른 채 편집해 노동조합을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했다. 하지만 당시 촬영된 영상이 경찰의 주장을 무력화 시켰다.
이십 분 남짓 앉아있던 조합원들은 다시 박훈의 지시에 따라 경찰들에게 향한다. 하지만 맨손으로 경찰에 달려들어서는 방패를 뚫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죽을힘을 다해 달려든 조합원들이 경찰 세 명을 대오에서 끌어낼 수가 있었다. 조합원들은 다시 거리에 앉아 파도타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그렇게 세 시간이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맨 손으로 달려들어 경찰을 끌어내어 조합원들이 빙 둘러쌓았지. 내가 경찰들이 지금 업무방해죄를 범하고 있으니 체포하라고 했지. 그러고 나서 내가 검찰에 전화했어. 현행범(경찰)을 체포했으니 데려가라고. 그런데 갑자기 경찰병력이 늘어나고 새카맣게 몰려오더라고. 경찰이 강경 진압을 할 것 같아. 그래서 우리가 비무장이며 평화적이라는 걸 보여주려고 내가 먼저 웃통을 벗은 뒤 조합원들도 웃통을 벗고 거리에 들어 누우라고 했어.” 경찰의 폭력을 막으려고 웃통을 벗고 거리에 누우라고 지시했다고 박훈은 당시 긴박했던 순간을 말한다.
그 순간 “멍해가지고 울기만 했다던” 정순희는 증언한다. “그날 오전 광화문에 일인시위를 하고 부평으로 와서 청천동의 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아저씨(조합원)들이 회사 쪽으로, 남문으로 행진을 한다고 들었어요. 그럼 우리(가족들)도 가자. 그때 엄마들이 일곱 여덟 명쯤 갔어요. 대치 상황이었던 거예요. 우리는 뒤쪽에서 경찰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고 쭉 서서 손을 잡고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 숫자가 너무 적잖아요. … 아무것도 무장한 게 없었어요. 너네(경찰)들이 우리를 밟고 가려면 가라, 다 웃통을 벗고 뒤로 딱 눕는데, 전경들이 밀고 들어오며 사람을 밟기도 하고, 끌어가기도 하고 그랬어요. 벗은 상태에서 막 두들겨 막고 아예 누워서 있는 사람도 있고, 밟고, 난리가 났죠. 저희가 덤벼들어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하지 말라고 하지 말라고 소리나 지르지 어떻게 하지는 못하겠더라고요. 앞쪽으로 달려가니 도망간 사람은 도망가 있고, 다쳐가지고 누워 있는 사람도 있고, 그 상황에서 걔네들 진짜 눈이 이상했어요. 전경들 눈에 살기가 가득해가지고, 진짜 약 먹은 사람처럼 그러더라고요. 아저씨들 일으켜 세우고, 구급차가 오고, 피 흘리고, 다 봤죠. 가대위 서정희 씨는 너무 놀라 소리치다가 기절하고.” 정순희는 연신 헛구역질이 났다고 기억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뱃속에 아기가 자리 잡았다.
맨 몸으로 저항하던 노동자 수백 명이 경찰에 집단 폭행당해 39명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중 김진택 조합원은 왼쪽다리 인대가 파열되었으며, 유희태 조합원은 갈비뼈가 부러져 허파까지 손상되었으며, 김낙기 조합원은 다리가 부러지고, 정관채 조합원은 양손 골절, 정상식 조합원은 언어장애현상을 일으키고, 조합원과 동행했던 연맹 법률을 소속 박훈 변호사는 골반 뼈가 부셔져 인천사랑병원 응급실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치료를 위해 입원하는 등…
- 전국금속산업연맹4월 10일 성명
골반 뼈가 부서진 박훈을 경찰은 연행하려고 했다. “내가 아니면 당신들 이 상황 수습할 수 없다”고 항의하자 경찰은 박훈을 풀어준다. 경찰 지휘부도 예상하지 못한 참극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 상황에서도 박훈은 메가폰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박훈은 말을 잃었다. 거리에 나부러져 신음을 하고 피를 흘리고 있는 조합원들을 보며, “아비규환이었다. 처참했다. 아무 생각이 안 들었다”고 회상한다. “나는 그 뒤로 공황장애가 생겨가지고, 지금도 사람들 많은데 들어가지를 못한다.” 한동안 박훈은 변호사 업무를 볼 수 없었다.
피의 현장에 함께 한 카메라
당시 김창곤은 피정의 집 농성장에 있었다. “조합원 두 명이 왔는데 귀가 찢어지고, 피가 덜래덜래 흐르고 있어요. 한 명은 이빨이 깨졌더라고. 장난이 아니라는 거야. 그래서 그 당시만 해도 또 웬만큼 싸웠나 보다 했다. 빨리 병원 가서 치료받고 낼 준비해야 하니까, 이야기하는데 한 친구가 얼굴이 사색이 되어가지고 뛰어 왔어. 사람이 앰뷸런스에 실려 가고, 뭐 죽을 수도 있겠다, 뭔가 상황이 심각한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때 영상을 촬영하던 한 동지가 와서 영상을 틀어주는데, 일이 분 봤는데, 이건 상상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거야. 피가 거꾸로 솟더라고. 수배고 나발이고 경찰서 불질러버리고 구속되던지 말든지 해야겠다. 이런 게 막 떠올랐어.”
이춘상 조합원이 찍었던 동영상은 전국으로 퍼져 나간다. 민주노총 홈페이지는 사흘간 접속수가 284만회를 기록했다. 이 사건으로 인천경찰청장과 부평경찰서장이 직위해제 되고, 김대중 대통령이 나서서 사과를 한다.
이 전환점을 만드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이춘상이다. 취재 중 그와 전화를 시도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카메라에 담긴 10시간 분량의 비디오테이프를 노동조합을 통해 볼 수가 있었다. 이춘상은 당시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동지들이 피 터지게 맞고 피가 낭자한 모습을 촬영만 해야 된다는 것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저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카메라까지 튀어오는 피를 보며 찍어야 할까, 싸워야 할까”를 고민했다고 한다. 이춘상은 ‘싸움’이 아닌 ‘기록’을 택했다. 그의 선택은 수세 국면을 바꿀 수 있었고, 경찰이 내세운 ‘조작’을 뒤집을 수 있는 결정적 자료로 역할을 했다. 산업재해로 척추 디스크를 얻은 이춘상은 당시 영상 카메라로 노동조합과 함께 했다. 당시 사람들은 “이 산재 노동자의 카메라가 공권력의 폭력을 이겼다”고 증언한다.
이 일을 계기로 정리해고자 눈빛이 달라진다. 연대세력에 의존했던 자세에서 벗어나 적극 앞장을 선다. 더 이상 주저함이 없었다. 막혔던 노동조합 사무실도 뚫렸다. 4월 30일에는 구속을 각오하고 강인희 사무국장을 비롯한 집행부는 노동조합 사무실로 들어간다. 또한 지엠 매각 협상이 본격화 되면서 정리해고자 복직 문제도 급물살을 타게 된다.
2002년7월 27일 정리해고자 300명 복직합의가 있기까지 지난한 투쟁이 이어진다. ‘대우자동차 노동조합 정상화 및 공장정상화추진위원회(정추위)’가 만들어지며 노동조합 내부, 산자와 죽은 자간의 갈등이 심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1차 복직자 300명이 발표되던 날은 명단에서 빠진 정리해고자들이 몰려와 조합 사무실을 박살을 낸다.
2011년 현재 복직을 원했던 정리해고자들은 모두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1,650명이 넘는다. 2월 19일 공장에서 쫓겨난 뒤, 김재복 수사가 이들을 피정의 집에서 품지 않았더라면,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 시민단체들이 구속을 두려워하지 않고 연대를 하지 않았더라면, 김일섭을 비롯한 지도부들이 연행이 되어 구속되었더라면, 정리해고자들이 1년 6개월이 넘는 지난한 투쟁을 하지 않았더라면, 먼저 공장으로 들어간 정리해고자들이 ‘정리해고자 원상복직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밖에 남은 정리해고자의 문제를 품지 않았더라면, 아마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일섭 위원장을 비롯한 징계해고자들은 정리해고자들이 공장에 들어간 이후인 2005년 11월에 복직했다. 당시 ‘정리해고자 복직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싸우다가 구속이 되기도 했던 민기는 현재 금속노조 한국지엠지부 지부장이다.
끝나지 않은 싸움
10년도 넘은 일을 왜 들추냐며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왜 취재 하냐고 노골적으로 따진 이도 있었다. 전화를 받지 않거나 취재에 응하지 않은 이도 있었다. 취재를 하면서 2001년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사건은 과거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십 년이 지나고, 다시 복직을 해서 일을 하고 있지만 대부분은 결코 멀지 않은 날 다시 닥칠 수 있는 일이라고 조심스러워했다. 지나간 일이라 지금은 괜찮을 거라고 여겼는데, 말을 꺼내는 순간 심장을 굵은 소금으로 긁는 것처럼 생생하게 아려온다고 한 사람도 있었다. 쌍용자동차, 한진중공업으로 이어지는 정리해고 문제에 당시처럼 민주노총이나 금속노조가 발 벗고 나서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한 사람도 있었다. 정리해고자들은 복직을 했는데, 당시 연대를 하다 해고를 당해 복직을 하지 못한 다른 사업장 노동자들을 챙기지 못한 것이 부끄럽다고 말했다. 정말 헌신적으로 도움을 준 학생들이 많다며 그들을 다시 만나 고마움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고도 했다.
더 많은 이의 목소리를 담지 못해 안타깝다. 게을러서다. 김재복과 이춘상을 만나지 못한 것은 이후의 숙제로 남겨둔다. 권한대행을 맡아 1차로 정리해고자 복직 협상을 이끌어 낸 강인희는 이년 넘게 그날(?)의 상처로 고생을 했는데, 인터뷰를 하지 못했다. 아이의 우유병에 분유를 네 숟가락을 타야 하는데 한 숟가락만 타야 했던 정리해고 가족들의 삶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모금함을 들고 전국을 떠돌며 투쟁기금을 모아 농성자에게 전달했던 가수 최도은의 목소리는 인터뷰를 했건만 적지 못했다. 그에게 남은 분노에 위안이 되지 못해 미안하다. 당시 노동조합 선전부장으로 백서 작업을 했던 노승우는 현재 노동조합 총무부장이다. 그의 자료 도움이 소중했다.
이글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다. 2월 19일 공장에 공권력이 침탈하던 날, 김일섭 위원장의 아내는 눈 쌓인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과 분노를 담아 외쳤다.
“여보, 자랑스럽게 싸웠어요. 정말 자랑스럽게 싸웠어요.”
모두들 자랑스러웠다.
사진 / 금속노조 한국지엠지부
글 / 오도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