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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달별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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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유산자료 스크랩 사랑 거연대 이야기
으뜸빛 추천 0 조회 79 11.10.21 07:49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거연대(居然臺)
소재지역 :  경북 울진군 북면 소곡리 910

경관연혁
- 경관연혁

거연대(居然臺)는 영양김씨 연재(然齋) 김형문(金炯文)이 조성한 넓고 큰 암반으로 치헌(致軒) 전열(田列), 남준(南俊), 만운(晩耘) 김형규, 두곡(斗谷) 전광호(田光瑚), 죽포(竹圃) 전영직(田永稷), 정재(正齋) 남대년(南大秊), 무실재(務實齋) 남진영(南軫永) 등과 더불어 학문을 논하며 수창(酬唱)과 함께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김형문은 당시 본가의 사랑방에서 서재를 운영하였는데, 여름철이면 이곳 거연대에서 학동들에게 강학을 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지금은 본래의 모습을 많이 잃은 채 쇠락했으나, 주위의 경관은 옛 모습을 더듬는 데 손색이 없을 만큼 수려하다. 거연대는 울진 소곡리 각석문으로도 알려있다.
연재 김형문과 교유하며 강학과 수창을 즐기던 치헌 전열은 ‘거연대기’에서 “이 대(臺)를 얻기 이전부터 거연(居然)히 이 대를 얻기까지, 이에 올라보기 전부터 거연히 이 대에 올라보기까지, 거연이란 이름을 붙이기 전부터 거연이란 이름을 얻게 되기까지 자연의 묘리를 알게 된 연후에 진실로 거연이란 참 의미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문현(文顯)이 거연에 살면서 거연의 뜻을 얻고 거연의 철학을 배운다면 오늘날 한 바위에 붙여진 거연의 이름이 몇 천 년 후에도 거연(居然)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을 것을 누군들 아니라 할 수 있으며 개울은 한없이 흘러가고 돌은 영원히 늙지 않겠지만, 오늘에 잠깐 붙여진 거연이란 이름이 천 년 백 년 거연으로 남아 있으리라고 어찌 또한 누군들 장담할 수 있으리오. 그러나 나는 지금부터 이 대가 김씨 집안의 소유물임을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다.”라 하며 자연과 합일된 유가(儒家)의 자세를 추구했다.

 

명소 이야기
- 경관이야기
거연대는 김형문의 집이 있는 ‘평지마’로 오르는 고개 아래에 있다. 지금은 마을로 드나드는 마을길을 포장하여 고개가 많이 낮아졌으나, 과거에는 매우 높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거연대는 계곡으로 급하게 내리쏟는 내의 복판에 규모가 제법 큰 자연석 바위들이 군락을 이룬 곳이다. 주위에는 수백 년은 됨직한 참나무와 가죽나무가 ‘쑤(?)’를 이루고 주위의 경사지 언덕에는 대숲이 우거져 풍광이 수려하다.
치헌 전열선생이 거연대기(居然臺記)에서 “그 돌의 크기는 만여(萬餘) 이상이며 계곡의 물은 일곱 번이나 굽이친다.”라고 풍광을 노래했다.
거연대는 자연석 입석 화강암 전면에 가로 80㎝ × 세로 50㎝의 직사각형 홈을 파고 동국진체형(東國眞體型) 행서로 ‘거연대(居然臺)’라 음각했다. 글자의 규모가 매우 크며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서체에 호방한 기운이 풍긴다. 명필로 이름을 떨친 옥람(玉藍) 한일동(韓溢東: 1879~1951)이 썼다.
옥람 한일동은 한 시대를 풍미한 서예가이다. 1880년(고종 17)에 동해시 부곡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로 시조 한란(韓蘭)의 28세손이다. 45세 때 강릉시 박월리로 옮겼다가 53세에 부곡동 고향에 돌아와 시서화(詩書畵)의 길에 정진하고 후학을 지도하면서 영동지방의 선비정신과 문기(文氣)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데 크게 공헌했다. 조부인 춘사 한진유에게 한학을 배웠고, 글씨도 가학으로 입문했다고 한다. 중년 이후로 그가 동해를 중심으로 영동지역에서 활동한 것이 아니라 함경도, 평안도 등지에서 활약하며 많은 제자를 배출시켰다고 한다. 따라서 그의 명성은 관북지방과 관서지방에서 더 떨쳤다. 44세 되던 1924년에 평양의 ‘만경대(萬景臺)’ 편액을 썼다.
50대 초반 이후 동해시 부곡동에 있는 집으로 돌아와 활동했는데 만재와 계남 등 지역서예가들과 교유가 깊었다. 옥람의 옥호(屋號)는 만권제(萬卷齊) 만권당(萬卷堂)이라고 불렀다. 서책 만권을 쌓아놓고 학문을 닦는 도장(道場)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연재 김형문이 옥람과 교유한 것은 옥람이 동해지방으로 돌아온 1940년대 무렵으로 짐작된다.
연재 김형문은 영양인(英陽人)으로 용모가 빼어나고 기질이 쾌활하며 문사(文詞)가 넓고 높았다. 집으로 오르는 계곡의 거연대(居然臺)에서 벗과 손님을 맞이하여 부드럽게 정을 나누었으며 시고(詩稿)가 있다.
거연대기를 남긴 치헌 전열은 신재(愼齋) 하구(夏九)의 손이다.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1910년 국치(國恥) 후 의기가 복받치어 원통해하고 나라를 다시 일으킬 계획을 도모했다고 문집(文集) 4권이 전한다.
거연대가 있는 ‘평지마’는 영해박씨가 처음 마을을 닦았다고 하며 영해박씨와 영양김씨가 주성이다. 평지마는 ‘아랫마’와 ‘웃마(새터)’로 구분한다. 마을이 한창 번성하던 시기인 해방 무렵에 38호가 거주했다.
평지마의 앞에 펼쳐진 들이 ‘평지들’이며 약 100두락 규모였다. 마을 수호신인 성황당은 김일순씨 집 옆에 있다. 매년 정월 보름 자시에 동제를 지낸다.
김형문의 손인 김일순씨 가옥은 100년 전에 건립한 것으로 알려지며 1996년경에 내부 일부를 고쳤다. 본채는 동향이며 지붕은 팔작기와집이었으나 올해 경량철판으로 고쳤다.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집이며 대문을 중심으로 좌측으로는 뒤주, 우측으로는 마구간을 배치했다.
소곡1리의 속명은 ‘소야’이다. 지역 사람들은 소야마을을 두고 ‘소야 열두 골’이라고 한다.
인근 마을처럼 특정한 한 장소에 모둠살이를 형성한 것이 아니라 계곡마다 마을을 이루고 살아오고 있기 때문이다.
소야마을은 북동쪽으로 ‘섬바우골 등미’를 경계로 주인1리와 닿아 있고 남동쪽으로는 ‘저태골 어귀’를 경계로 소곡2리와 접해 있다. 북쪽으로는 ‘샘당골 거랑’을 두고 주인2리와 경계를 이루며 남쪽으로는 ‘중노골’을 경계로 사계2리와 닿아 있다. 동쪽으로는 ‘붉은등미’를 경계로 신화2리인 화동마을과 고목1리인 지정동과 접해 있다.
소야마을의 행정구역은 8개 반으로 나누어져 있다.
먼저 행정구분상 1반은 ‘평지마’이다. 평지마는 영해 박씨가 처음 마을을 닦았다고 하며 영해박씨와 영양김씨가 주성이었다.
평지마는 ‘아랫마’와 ‘웃마(새터)’로 구분된다. 마을이 한창 번성하던 시기인 해방 무렵에 38호가 거주했다.
평지마의 앞에 펼쳐진 들이 ‘평지들’이며 약 100두락 규모였다. 마을 수호신인 성황당은 김일순씨 집 옆에 있었으며 김일순씨 조부인 김형규씨(작고)가 서당을 열고 직접 학동을 가르쳤다.
2반은 ‘골마’로 불리며 ‘골마’와 ‘복상골’로 나뉜다. 울진장씨가 개척한 것으로 알려지며 30여 호가 거주했다. 마을 옆으로 형성된 계곡에 논이 발달했으며 약 7~80여 마지기 규모였다. 마을 성황당은 ‘장씨할배’를 모셨으며 20여 년 전에 개축했다.
3반은 ‘굿마’이며 ‘굿마’와 ‘고상골’로 나눈다. 영양남씨가 개척한 것으로 알려지며 영양남씨 집성촌이다. 15호가량 거주했으며 굿마의 성황은 노송이다. 주변에 논과 밭이 있으며 약 7~80여 마지기 규모이다.
4반은 ‘웃마’로 부르며 안동권씨가 처음 마을을 개척한 것으로 알려지며 주로 영양김씨와 울진장씨, 담양전씨가 세거해 왔다. 주인2리로 넘어가는 길목인 마을 어귀에 마을회관이 있다. 소야마을의 본 마을이다. 마을 앞으로 천수답이 펼쳐져 있는데 약 100여 두락 규모이다.
5반은 ‘도록마’이며 ‘도록마’와 ‘종교터’로 나뉜다. 안동권씨가 처음 마을을 개척한 것으로 확인되며 주로 담양전씨가 세거하고 있다. 마을이 흥성하던 1960년대까지 12호가량이 거주했으며 7~80여 두락의 논을 경작했다.
6반은 ‘웅동골’이며 울진장씨가 개척한 마을로 알려졌으며 소야 마을회관이 있는 도록마에서 주인1리로 넘어가는 ‘섬바우골’ 우측 계곡에 자리한 마을이다. 20여 호가 거주했으며, 섬바우골 등지에 100두락 규모의 논이 있다. 최근에는 대규모 축산농가가 들어섰다.
‘새터’는 행정구분상 7반이며 소곡2리에서 주인1리로 연결되는 ‘15호 군도’를 따라 주인리 쪽 우측인 ‘불근디기재 밑’에 자리한 마을이다. 영양김씨와 안성이씨가 주로 세거했다. 1960년대 말까지 20여 호가 거주했으며 현재는 5호가 살고 있다. 주변에 100두락 규모의 논이 있다.
8반은 ‘고로기’마을로 담양전씨가 주성이다. 6년 전에 소야마을의 작은 계곡에 살던 사람들이 이주하여 새로 형성한 마을이다. 소곡1리를 이루는 마을을 다시 살펴보면 ‘평지마’, ‘새(間)터’, ‘굼말’, ‘웃마’, ‘평밭’, ‘골마’, ‘복사골’, ‘종지터(웅덩골)’, ‘도림마’, ‘텃재’, ‘옛터’, ‘새(新)터’로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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