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이노의 비가

2006년 <문학과 창작 > 올해의 작품상 수상 - 고명수 시인 인터뷰 대담 기사   동양적 사유와 응전의 시인 -  서안나   <CENTER></CENTER>                                             시인을 만나다 금요일 오후, 시인과 만나기로 약속한 잠실로 갔다. 석촌 호수 정면에 위치한 고급스런 한정식 집이었다. 저녁 식사 시간이라 그런지 봄밤의 정취를 느끼며 시인과 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식당 앞에는 화려하게 핀 벚꽃과 꽃 사이를 산책하는 사람들과 호수의 물빛이 아름답게 조화되어 봄날의 아련함과 희망을 동시에 느끼게 하고 있었다.  식당에 들어서니 잔잔한 가야금 산조가 울려 퍼지고 먼저 기다리던 고 시인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문학행사에서 만날 때가 종종 있었는데, 그 때마다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나눠본 것이 아니라 먼발치서 스쳐 지나곤 했는데, 이번에 시에 관한 깊은 대화를 나누어보니 비로소 시인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시인의 이미지는 한마디로 ‘단아함’이라고 표현 할 수 있을 것 같다. 몇 년 전에 보았을 때보다 얼굴이 더 맑아진 듯했다. 그 말을 전하니 시인이 소년처럼 맑게 웃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냐고 근황을 묻는 질문에, 양평으로 이사를 하여 새로운 출발을 도모한 것이 생활의 가장 큰 변화라고 대답했다. 자연과 가까이하면서 시작에 충실하고 싶어서 양평으로 보금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계간 󰡔문학과 창작󰡕에서 주는 <올해의 작품상>을 수상하신 것을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자 고시인은 졸시를 뽑아준 분들에게 고맙다는 겸손한 인사로서 답해왔다.  이야기를 하는 중간에 고 시인이 미리 예약해 둔 맛깔스런 음식들이 차례대로 나왔다. 고시인의 이미지처럼 잔잔하면서도 맑게 퍼지는 가야금 산조소리가, 깊고 맑은 시인의 내면을 대신해주는 듯하였다. 봄 어스름한 저녁에 정성스럽게 차려져 나오는 음식들을 먹으면서 시인의 유년시절을 비롯한 최근의 근황까지 나누다 보니, 한 시인이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이 조금은 행복한 일이기도 했다.  고시인은 얼마 전 자전거 축제 때 참사가 일어났던 경북 상주의 이천마을에서 태어났다. 그 후 중학을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서 경험한 대학생활과, 다양한 이력들, 그리고 시를 쓰게 된 이야기까지 파노라마처럼 감칠맛 나게 펼쳐놓았다. 독특한 시인의 경험담들이 한 편의 무용담을 떠올릴 만큼 흥미로웠다. 시인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집안에서 장남으로서의 가장 역할이 어찌 보면 시인으로 하여금 좋은 시를 쓰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세일즈맨과 고시생과 국문학도 시인은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고향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을 시도하였으나 실패의 쓴 잔을 마시면서 고졸학력 검정고시에응시하여 합격한다. 그러나 대학 진로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어머니가 권하는 대학을 마다하고, 중학 시절에 희망하던 교사가 되기 위해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입학했다. 시인은 호기심과 도전정신이 강하여 국어교육과에 적을 두면서도 법학과의 강의를 청강하며 ‘고시’를 준비하는, 국문학과 법학을 동시에 공부하는 특이한 학생이었다.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시인은 장교가 되고 싶어 ROTC에 지원하게 된다. 그러나 월반으로 인한 연령미달로 허가되지 않자, 학교를 휴학하고 다양한 사회생활을 체험하게 된다.  이때 시인이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고 석 달 간 일 했던 곳이 경기도 부천에 소재한 ‘소신종계원’ 이라는 곳이었다. 그 곳에서 숙식을 하며 시인은 수백 마리의 닭 떼가 있는 닭장을 관리하게 되었다. 종계원에는 사회에서 주류의 흐름에 속하지 못하는 밑바닥 인생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 곳에서 다양한 삶의 방식을 지닌 이들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많은 간접체험을 하게 되고, 이러한 경험과 그 곳에서의 생활이 시인에게 있어서 문학적 삶의 밑바탕이 이루어지는 계기로 작용했다고 한다.  그 곳에서 석 달 후에 나와서 세일즈맨으로 취업하게 된다. 1주일간 스파르타식의 세일즈맨교육을 받고 현장에 투입되었는데, 결정하면 밀고나가는 추진력이 강한 성격 덕분에 고 시인은 과장으로까지 진급하는 등의 성과를 올리게 되었다. 여러 명의 부하 직원들을 거느리고 세일즈맨으로 활동하다 사법시험을 공부해 보라는 주위 사람들의 권유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학교로 돌아오게 된다.  험난한 사회생활을 거치고 다시 복학한 학교생활은 시인에게 있어서 새로운 삶의 계기를 생각하게 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 후 시인은 동국대학교를 졸업하고 중․고등학교 국어 선생으로 재직하게 된다. 그러던 중 또 다시 학문에의 갈증을 느끼게 되어 대학원에 진학하였고, 석․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지금도 대학에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세 권의 시집을 상재하고, 시와 평론을 겸하면서 시인과 비평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나는 스승 복은 타고난 사람이오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스승들을 만나게 된다. 그런 만남은 한 사람의 일생을 뒤바꿔 놓을 만큼 커다란 의미로 작용하게 된다. 고명수 시인의 경우에도 시인의 일생을 인도하는 등대 같은 역할을 해준 세 사람의 스승이 계시다. 시의 매력과 시의 본질을 일깨워 준 서정주 시인, 그리고 시인이 지녀야 할 고결한 삶의 태도와 진지한 자세를 가르쳐 준 이형기 시인, 시 쓰기의 즐거움과 시의 진면목과 다양한 시 창작의 방법론을 알게 해준 박제천 시인을 그는 시의 스승들로 꼽는다.  이 세 분은 고명수 시인에게 시의 뼈대와 시인의 자존과 시인이 갖추어야 할 덕목들을 몸소 가르쳐준 스승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나는 스승 복은 타고난 사람이오.”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대학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 놓으면서, 고 시인은 학부 시절에 아마도 자신이 무애 양주동 선생의 강의를 들은 마지막 세대일 것이라고 말했다. 고시인은 무애선생의 향가와 고려가요 강의, 미당 서정주 선생의 시 창작 강의, 조연현 선생의 한국현대문학사 강의, 장호 선생의 비교문학론 강의, 이병주 교수의 한문학 강의, 이동림 선생의 국어학 강의 등의 명 강의를 기억하면 지금도 그 감동을 잊을 수 없다고 하였다. 고학으로 학교를 다닌 탓에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로 근무하던 1981년에 동아문화센터에 최초로 개설된 시 창작반에 등록하여 서정주, 황금찬, 정진규, 허영자 선생으로부터 강의를 듣고 창작에 입문하게 되었으니 출발이 비교적 늦은 편이라 하겠다. 그는 당시에 명동의 카페였던 <설파>에서 매달 있었던 시 낭송회에 가면서부터 <숫돌> 동인(후에 <영혼과 형식>으로 개명)으로 참가하여 앤솔로지를 내기도 하였으며, 김혜수 ․ 최창균 ․ 최종천 ․ 백태종 ․ 김윤자 ․ 심종록 시인 등과 명동 시절을 보낸다. 뒤에는 다시 아지트를 인사동으로 옮겨 한 동안 인사동을 누비기도 하였다 한다. 한편 고 시인은 당시에 조향 시인이 주도하던 초현실주의 문학예술연구회인 <오브제>동인으로 활동하며, 초현실주의를 비롯한 20세기 초 서구의 아방가르드에 심취하게 되어 그 영향으로 석사논문을 ｢한국에 있어서의 초현실주의문학 고찰｣로 쓰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시인의 시에서도 시적 테크닉은 모더니즘을 갖다 쓰면서도 시의 주제는 동양의 사상과 정신을 강조하는 양면성을 보인다. 그는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1990년대부터 도올 김용옥 선생이 지도하던 동양고전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동양사상에 심취하게 된다. 따라서 폭넓은 동양사상과 초현실주의를 비롯한 서구의 모더니즘은 고 시인의 시 정신과 시적 방법론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고 시인은 1992년 2월 월간 󰡔현대시󰡕 2월호에 이형기, 김광림 선생의 추천으로 신인추천 작품상을 수상하면서 시단에 데뷔하게 된다. 이후 시인은 세 권의 시집과 다수의 평론집을 발간했다.  동양사상과의 조우 그의 시에서는 유달리 명상과 수련 그리고 동양적 사유가 강하게 드러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시인의 시 한 편을 보자. 목숨의 팔만대장경 어디엔가 숨겨진 얼굴이 있다 문자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얼굴,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얼굴이 있다 행복한 순간에만 살짝 나타나는 얼굴이 있다 삶의 그늘, 찌든 계곡 속에 숨어 있다가, 해맑은 웃음 사이로 잠간 나타났다가는 가뭇없이 시간 속으로 사라지는 얼의 모습 사진관에 가서 여러 컷을 찍어 보아도 그 얼굴은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사진이란 사람을 온전히 보일 수가 없는 법, 찰나로 변해가는 어느 지점에 셔터를 누를 것인가 적중의 플래시를 터뜨릴 것인가 칠백만 화소는커녕 천만 화소를 잡아낸다는 최첨단 카메라로도 안 잡히는 얼굴, 사람의 참 얼굴은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인가 앨범 속 어느 갈피에선가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얼굴, 흐린 눈으로는 도무지 잡히지 않는 얼굴, 초고속 디지털 카메라로도 잡을 수가 없는, 사람에게는 술래처럼 꽁꽁 숨은 얼굴이 있다                       -'숨은 얼굴' 전문 -  이번 <문학과 창작>에서 올해의 작품상을 받게 된 시이기도 하다. 이 시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시인은 “흐린 눈으로는 도무지 잡히지 않는 얼굴,/ 초고속 디지털 카메라로도 잡을 수가 없는,/사람에게는 술래처럼 꽁꽁 숨은 얼굴이 있다”라고 진술하고 있다. 기계문명이나 물질문명으로는 그려내지 못하는 “목숨의 팔만대장경 속에 숨겨진 얼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시인이 말하는 숨은 얼굴 혹은 잡히지 않는 얼굴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의 이러한 성찰과 사유는 곧 근대성 비판 담론과 연결된다. 합리성과 효율성을 근간으로 하는 근대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가 초래한 폐해를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각성에 근거한 근대의 과학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사고가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 인간소외, 소통의 부재 등을 우리에게 선사했다. 자연과의 조화나 상생보다는 자연을 정복의 대상이나 공격의 대상으로만 파악하는 근대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의 비판에서 그의 사유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흐린 눈’이란 자본의 논리에 물들어 ‘돈’을 최우선으로 자리매김하는 가치의 전도현상으로 인해, 인간 내면의 아름다움을 중요시하지 않고, 더 이상 읽어내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상징일 것이다. 초고속 디지털 카메라로는 감지할 수 없는 따뜻한 얼굴을 바라보는 선명한 눈을 통해 시인은 시대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있다. 이는 곧 시인이 말하는 시정신과도 통한다. 자연과 적대적인 시선으로의 시각보다는 조화로움을 추구하는 그의 세계관과도 연결되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손톱 다듬기를 압수당했다 뾰족하다는 것이 이유다 뾰족한 것은 무조건 안 된단다 (항상 뾰족한 것들이 문제다) 뾰족한 것들은 언제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뾰족한 코를 한 놈들의 잔인한 살육을 기억한다 문명의 탈을 쓴 야만이 얼마나 많은 인디오를 죽였던가 록키산맥을 우러르며 평화로이 살던 그들, 그들은 이제 빅토리아 시의 박물관의 모형집 안에서 탄식하며 웅얼웅얼 영혼으로 살아있다   공항 검색대를 통과할 때마다 노트북이 폭탄이라도 되는 양 꺼내보란다 카메라가 수류탄이라도 되는 양 눌러보란다 이봉창 열사의 도시락 폭탄도 주먹밥 수류탄도 아닌데 말이다 이런 젠장, 몸을 한번 부르르 떤다 평화를 깨뜨리는 뾰족한 이데올로기들... 거만한 제국주의자들의 호들갑서슬에 코털 깎던 작은 가위도 함께 커다란 자루에 던져졌다 자루 안이 그득하다 뾰족한 놈들 때문에 평화로운 나의 일상마저 일그러진다  뾰족한 자들의 횡포가 나에게까지 이르다니 내 이것들을 구부려보리라 금강망치로 두드려 모난 것들을 구부리면 원융무애한 세계가 올까마는, 나는 나의 모든 뾰족한 것들을 구부려 원융무애의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본다 -'뾰족한 것들이 문제다' 전문 -  이 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시인은 뾰족한 것들로 상징되는 서구의 공격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성과 저항을 나타내고 있다. 곧 시인은 반성과 저항에 대한 대안으로 동양적인 원융무애(圓融無碍)의 이데올로기를 제시하고 있다. 세상의 어떤 갈등과 이견이라도 받아들이고 녹여내서 걸림 없는 원융무애의 세계인 불교의 사상을 통해 백과 흑 또는 동지와 적 등의 이항대립을 해체하고 있다. 시인은 동양 사상이라는 창을 통해 근대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고 나아가 새로운 해결책으로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서양사상의 원류가 동양에 있다고 역설한다. 요즘 서양철학자들도 동양 사상에서 그 출구를 찾고자 하는 학문의 세계적인 동향을 강조한다. 이는 그 자신이 오랜 시간 동안 동양사상서들을 탐독하고 세미나에 참가하면서 실천적으로 시를 쓰고 사유하며 활동해 온 내공이 쌓인 시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쇼핑 카트를 밀며 간다 이제 막 구워낸 향긋한 빵 냄새, 종가집 김치의 풍성한 맛이며 맛있게 구워진 은행 알 노릇한 빛깔처럼 생활이 충만한 미로 속을 간다 카트 위에 어린 딸을 앉히고 화엄의 미로 속을 간다 자본이 미만해 있는 통로들엔 요염한 자태를 뽐내며 상품들이 손짓한다 두둑한 지갑만 있다면야 무슨 불행이 있으랴마는 밖으로 소비를 부추기는 미녀들과 안으로 번쩍이는 골드 카드의 유혹, 자본화엄이 아니라 화염이다 언제나 모자라는 현금의 고통이여 리비도는 폭발하여 열반하려 한다 경계를 부수고 환상적 소비를 해 볼까? 전자상가에 번쩍이는 현란한 디지털 화엄의 번뇌여! 오늘도 숨을 몰아쉬며 허덕이며 고달픈 자본의 언덕을 기어오른다 금강의 바위를 지나 반야의 언덕을 지나니 거기 열반화엄의 파노라마가가 펼쳐진다 번뇌가 곧 열반이리라 극빈의 화엄풍요, 환상의 화엄극빈 조금 무거워진 쇼핑 카트를 밀며 황홀한 통로를 나온다 어린 딸과 함께 자본화엄 미로 속을 빠져나온다 언제나 내 번뇌의 뿌리인 자본의 궁핍 언젠가 내 기쁨의 화엄인 어린 딸아이가 거실에서 손바닥만한 화엄경을 가지고 놀았었지 선재동자인 양 착각했었지 화엄경은 내 어린 딸의 장난감이었지 화엄은 내 기쁨의 뿌리요, 자본은 내 번뇌의 뿌리요, 열반의 근거이다 -'자본과 화엄' 전문- 이 시에서도 시인이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의식과 더불어 고발의 목소리를 읽을 수 있다. 시인은 어린 딸과 함께 쇼핑을 한다. 물질의 총화인 쇼핑센터는 곧 천국처럼 달콤하고 요란한 손길을 인간들에게 뻗어 욕망을 자극한다. 그러나 시인은 이에 매몰되지 않고 그 세상이 곧 숨 가쁜 디지털의 화엄의 세상이라는 발견을 통해 욕망의 파노라마를 목격하게 된다. 시인은 곧 “언제나 내 번뇌의 뿌리인 자본의 궁핍”이란 인식에 도달하면서 자본주의의 모순을 날카롭게 투시하고 있다. 폭풍한설에도 혼신의 힘을 다해 냉이는 자란다 낙엽과 지푸라기 아래 숨어 봄을 기다리는 냉이, 행여 들킬세라 등 돌리고 있는 냉이를 장모님은 귀신처럼 찾아내신다 검불을 뜯어내고 흙을 씻어내고 정갈하게 씻어 바구니에 담아 둔 냉이, 그 귀한 걸 몽땅 다 비닐주머니에 담아주신다 봄내음이 나는 냉이국을 먹으며 낙엽과 지푸라기 속에서도 목숨을 지켜 마침내 싹을 틔워낸 냉이를 생각한다 겨울 냉이가 자신을 이기듯이 몰래 숨어 자란 냉이가 시원한 된장 국물이 되듯이 우리도 누구에겐가 시원한 국물이 되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온 시야를 앗아가는 강풍, 강설 속에서도, 청빙(淸氷)을 뚫고 겨울 냉이는 자란다 아니 자라야 한다 -'겨울 냉이' 전문- 눈은 영혼이 드나드는 곳이니 두 영혼이 만나는 창이 눈이 아니고 무엇이리!      -'사랑은 영원 하리' 부분- 자본주의의 논리에 매몰되어가는 현대인들의 흐린 눈과 디지털 화엄의 세상을 노래한 시인은 곧 그 “팔만대장경 속의 얼굴”을 읽어내는 ‘맑은 눈’에 대한 사유를 통해 아름다운 사랑을 만나게 되고, 디지털 카메라로는 볼 수 없고 찍혀지지 않는 인간의 맨얼굴, 살아있는 얼굴을 만나게 된다. 그 공간이 바로 ‘자연’이다. 그래서 시인의 시편에서는 자연에서의 조그맣고 소박한 것들에서 거대한 삶의 지혜나 사유를 발견하는 시적 소재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시인의 발견은 위 시에서도 장모님이 캐어서 건네 준 ‘냉이’에 가 닿는다. 한겨울의 폭풍 한설을 뚫고 혼신의 힘을 다해 자란 생명체의 미덕과 아름다움을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는 곧 자연과의 조화를 통해 “한겨울의 폭풍 한설”같은 현실의 고통을 원융무애의 사유로 품어 안는 지혜를 통해서이다. 자연과의 조화로운 상생을 통해 소외와 단절과 소통부재의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세계의 발견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나는 죽어 가죽으로 태어나 그대의 추운 손을 감싸주고 싶어요 나의 눈은 그대를 오래도록 사랑하다가 증류되어 향기로운 화장품이 되고 싶어요 아름다운 그대가 더욱 아름다워지도록 말이예요 더운 여름날은 나를 잘 벗겨서 햇볕에 말리세요 오랜 뒤에 그걸 물에 넣고 달여서 드세요, 그대의 아픈 곳을 다 낫게 해 드릴께요 -중략- 곡우가 되거든 저의 팔뚝에 상처를 내어 뚝뚝 떨어지는 제 피를 마셔 보세요 그러면 그대 무병 장수할 거예요 귀한 손님이 오면 그걸로 접대하세요 잘 발효시키면 기막힌 술이 되지요 아무리 마셔도 한 시간이 지나면 깨끗하게 술이 깨는 명주죠 나는 오직 그대를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바치고 싶어요 - '자작나무 사랑' 전문- 시인의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얻은 사랑의 눈은 곧 자신마저도 희생할 수 있는 <소멸의 미학>까지도 가능하게 하고 있다. 내가 죽어 소멸함으로써 누군가의 아픔을 감싸주는 보살행을 깨닫게 된다. 소멸하여 사라지는 것으로서의 ‘죽음’ 보다는 “내가 죽어서 너가 되는” 순환론적인 세계관을 통해, 나와 너의 경계가 없어지고, 삶과 죽음이 하나가 되고, “세상 천지에 내가 있다”는 금강경의 공사상과도 연결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불교의 순환론적인 세계관은 서구의 이분법적이고 흑백논리를 강요하는 선택의 논리에서 자유롭게 만든다. 만물과 내가 하나가 되는 불이(不二), 불이(不異) 사상이 고명수 시인의 시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사유는 자연에 대한 외경심과 더불어 곧 자연과의 조화를 꾀하는 생명사상과 연결되는 시편들도 많이 볼 수 있다. 제 1시집의 <체질론>, <섭생론> 등에서도 알 수 있듯이 상생의 조화를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날마다 파미르 고원을 향해 떠나는 순례자 타클라마칸 사막 지나 파미르고원을 너머 나 오늘 너에게로 간다 - '旅路' 부분-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시인은 날마다 파미르 고원을 떠나는 낙타 혹은 순례자인지도 모른다. 그의 제 1시집 자서에서처럼 시는 곧 “내면의 사유 여행”이라는 고백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 주변에 산재해 있는 사물과 사건을 통해 시인은 현상과 본질 그리고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자본의 논리와 대결하는 사유를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응전 의식은 서구의 그것처럼 날카롭거나 뾰쪽한 공격적인 대항이 아니라, 원융무애의 사상을 통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게 하고 있다.  위의 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인은 날마다 어디론가 떠나간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언제나 열이 펄펄 끓는 고통의 사막이기 때문이다. 그는 온갖 상념과 번뇌가 끓어 넘치는 세상을 지나 순결무구한 공간인 파미르 고원으로 나아가려 한다. 유토피아로 상정되는 ‘파미르 고원’ ‘그 곳’에는 바로 완전한 ‘너’, 훼손되지 않는 ‘너’가 기다리고 있다. ‘너’는 곧 ‘나’의 다른 이름이며 새로운 ‘나’를 향해 떠나는 여행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고명수 시인의 작품들이 이 시대에 주목 받는 이유는 현실을 제거하거나 삭제시키지 않고 현실의 뜨거움을 온 몸으로 느끼며 시의 사원을 향해 느린 발걸음으로 나아간다는 점이다. 그의 시가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것도, 관념적이고 특수한 현실이 아니라 보편적이면서도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현실이 밑그림으로 존재하기에 그의 시는 우리 삶의 아픈 곳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영혼의 안식처로 자리매김 되는 것이다.(*)     '문학과창작' (2006년 여름호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