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연혁
남원(南原)은 오늘날 전라북도 남원시 일원의 지명으로 16년(백제 온조왕 34) 무렵에 고룡군(古龍郡)이라 불렀다가 196년(초고왕 31)에 백제의 5방 중 대방군(帶方郡)이 되었다. 685년(신라 신문왕 5)에 9주 5소경의 하나로 남원소경이 설치되었고, 757년(경덕왕 16)에는 남원군으로 개칭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5현을 관할하는 남원부로 개편되었다. 1018년(현종 9) 지부사(知府事)로 고쳤다. 1310년(충선왕 2) 대방군(帶方郡)으로 강등되었다가 1360년(공민왕 9) 부로 승격되었다. 1413년(태종 13) 남원도호부로 승격되었으며, 1457년(세조 3)에는 남원진영을 두었고, 1654년(효종 5)에는 전라좌영을 설치하였다. 1740년(영조 16) 일신현으로 강등되었으나 이듬해 환원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전라 4부 중 하나인 남원관찰부가 되었다가 1910년 남원 48방을 22개면으로 통폐합하고 1914년 군면 폐합으로 남원군으로 개칭하였다. 1931년 남원면이 남원읍으로 승격되었고, 1981년에는 남원읍이 시로 승격하여 남원시와 남원군으로 분리되었다가, 1995년 남원군이 남원시에 통합되었다.
성씨의 역사
승씨(昇氏)는 중국에서 시작된 성씨로 대하국 황제 명옥진(明玉珍)의 아들 명승(明昇)이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리다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워 통일을 하자 고려에 망명하여 승씨의 시원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공민왕은 그를 국빈으로 대우하며 노비와 주택을 하사하였다. 조선 태종 때 화촉군(華蜀君)에 봉해졌고 식읍도 하사받았다. 그의 어머니 옥경화(玉京華)는 우리나라에 신부예복인 원삼과 족두리를 보급한 사람으로 전해진다. 그는 송도에 정착해 명의(明儀)·명현(明俔)·명준(明俊)·명신(明信) 4형제를 두었다. 특히 막내 아들 명신은 망국 황족의 후손됨을 부끄럽게 여겨 벼슬의 뜻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세파에 물들기를 거부하여 본성인 명(明)자를 버리고 부친의 이름자인 승(昇)자로 성을 삼았다. 그가 승씨의 창씨 시조라 하겠다. 그 후 명씨와는 같은 혈족이라하여 혼인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주요 세거지
전라남도 나주시, 화순군과 경상남도 창원시, 김해시 등지에 약 80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남원승씨는 183가구 총 613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