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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부, 고려 무신정권수립의 주역이 되다
“무인은 국가의 간성(干城)”이라고 한다. 나라를 지키는 일이 무인의 어깨에 달렸다는 뜻이다. 과연 고대부터 오늘날까지 무인은 군사기술의 전문가이면서 나라와 고향을 지키는 고귀한 사명을 띤 사람들로서 긍지를 가져왔다. 그러나 바깥을 향해 겨눈 총칼은 언제든지 안을 향해서도 돌려질 수 있다. 무인의 규모가 지나치게 비대해지거나, 무인의 긍지가 인정받지 못하는 일이 거듭되면 군사반란의 동기가 부여되었다. 다만 순수한 무인은 군사기술의 전문가이되 나라를 운영하는 기술은 미숙하다. 삼국시대가 끝나고 나서 이 땅의 정권은 고려의 문벌귀족들이 가지고 있었다. 기득권 세력인 문신이 무인을 홀대하는 상황이 계속되자, 정중부(鄭仲夫, 1106~1179)는 불만이 쌓인 무인들을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켜, 첫 번째 군사정권을 창출하였다.
근본적인 시스템상의 문제점
고려에서 군사반란이 일어나 무신정권을 시도한 경우는 ‘정중부의 난’이 처음은 아니었다. 현종 5년(1013년) 11월에 상장군 김훈∙최질 등이 경군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군인들에게 주는 영업전을 빼앗아 문신관료들의 녹봉에 충당하려 했던 황보유의∙장연우 등의 대신을 숙청하고는 무신들도 대신이 될 수 있게 하는 체제를 마련했었다. 하지만 오래 버티지 못하고, 1014년 3월에 주모자들이 주살되며 끝났다.
군사반란을 부추기는 시스템적인 문제점은 고려 초기 광종~성종의 개혁 때부터 싹텄다고 볼 수 있다. 이들 군주는 태조 왕건이 말 위에서 세운 나라를 말에서 내려 다스리는 체제로 바꾸려 했으며, 과거제와 전시과 제도를 수립해 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관료제가 국가를 운영하게 하였다. 그러나 조선과는 달리 이 시스템에는 무과 제도가 없었다. 따라서 무인은 과거를 통하지 않고 특채되거나 아버지의 직위를 세습해서 충원되었으며, 3품 이상으로 승진할 수 없을뿐더러 그나마 장군직은 문관이 맡는 경우가 많았다. 그만큼 무인은 고려왕조의 시스템에서 주어진 자리가 분명치 않았기에, 김훈 등이 난을 일으킨 계기가 된 “군인들의 영업전을 임의로 전용”하는 일도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무인을 충원하는 제도가 엄격히 정해져 있지 않았다는 것은 무인이 필요 이상으로 많이 충원될 수도 있음을 뜻한다. 의종 때 일어난 무신정변은 고질적인 무신 경시의 문제점 외에 그러한 비정상적인 무신 규모 확대가 초래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만의 리그’를 보는 시샘과 분노
고려 제18대 왕 의종의 시대는 고려왕조를 통틀어 ‘평화 속의 사치’가 가장 두드러졌던 시대였다. 성종 이래 이어진 북방민족과의 갈등은 중국이 금-남송 체제로 정리되면서 잠잠해졌고, 개경파와 서경파의 대립도 선왕인 인종 때 묘청의 난이 진압되면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이런 가운데 금나라와 남송의 사신과 무역상들이 어느 때보다 빈번히 고려를 드나들며 온갖 기화요초∙향료∙비단∙장신구 등 사치품들이 벽란도에서 개경으로 끊임없이 넘쳐흘렀다. 의종은 이런 사치품을 앞장서서 애용했을 뿐 아니라 궁궐을 새로 짓고 지방을 유람하며 잔치를 벌이는 일로 날을 지새웠다.
“민가를 헐어 대평정자를 짓고, 태자에게 현판을 쓰게 한 뒤 사방에 기화요초를 심었다. 정자 남쪽에 못을 파고 관란정을, 북쪽에는 청자로 덮은 양아정을, 남쪽에는 댓잎으로 꾸민 양화정을 지었다 … 뭇 소인들이 왕의 비위를 맞추느라 민간의 진기한 물건은 닥치는 대로 가져다 바치게 했으므로, 길이 그런 물건을 올리는 대열로 메워지다시피 해 백성이 몹시 괴로워했다.” ([고려사] 의종 11년)
“한정과 김돈중이 절 북쪽 산의 초목이 죄다 베어져 벌거벗은 채임을 보고, 백성을 동원하여 소나무∙삼나무와 각종 기화요초를 빼곡히 심고 단을 쌓아 임금이 오르게 했다. 모두 단청으로 장식하고 기암괴석을 썼다 … 왕이 또한 물놀이를 보고자 해 내시 박희준 등이 배 50여 척을 모두 채색비단으로 장식하고는 물놀이를 벌였다. 한 사람이 귀신놀이를 하며 불 뿜기를 보여주던 중 잘못 옮겨 붙어 배 한 척이 불타 버리자, 왕이 손뼉를 치며 크게 웃었다.” ([고려사] 의종 19년)
여기에는 왕이 귀족들이 즐기는 사치품을 모아서 하사하고, 또 재미난 볼거리를 마련함으로써 귀족들의 환심을 사려는 뜻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의종 자신이 즐기려는 의도도 컸던 것 같으며, 이러느라 민생은 과도한 세금과 부역으로 허덕였다. 그리고 이런 의종의 행동에 먼저 제동을 걸고 나선 쪽은 무신이 아니라 문신이었다. 왕과 관료의 비리를 탄핵하는 임무를 맡은 대간들이 연일 궁궐 문 앞에 엎드려 사치를 자제하고 민생을 돌볼 것을 호소했고, 일부 대신들도 왕의 행동이 지나치다며 간했지만 의종은 듣는 체 마는 체 했다. 그리고 이들 문신을 견제하기 위해 두 가지 친위세력을 크게 늘렸다. 하나는 환관과 근시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무신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정식 관료조직과 동떨어져서 왕의 가까이에 머물며 시중과 호위를 맡는 집단이었다. 특히 의종은 호위대인 견룡을 크게 늘리고 순검과 지유 역시 확대했다. 정중부∙이의방∙이의민 등도 이때 발탁되었다.
흔히 의종과 문신들이 무신들을 지나치게 천대해서 무신의 난이 벌어졌다고 하지만, 원래는 도리어 왕권 강화를 위해 특별히 강화된 세력이 무신이었던 것이다. 의종은 재위 1년(1147년)에 정중부가 궁궐 문을 무단으로 출입한 일이 적발되어 처벌될 위기에 처했을 때도 이를 불문에 부치게 했다. 운명의 날, 보현원에서 오병수박희를 열었던 까닭도 본래 무신의 노고를 위로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고위직에 오를 수 없는 무신의 처지에 불만인데 힘은 한껏 커져 있으니 ‘다른 생각’이 드는 게 자연스러웠다. 당시의 정치에 대한 백성의 불만이 커질 대로 커져 있는 점도 유리하다 여겨졌다. 여기에 의종 21년(1167년)에 일어난 ‘화살 사건’이 결정적이었다. 왕의 행차 도중 좌승선 김돈중의 말이 잘못 어느 무사의 말과 충돌했고, 그 바람에 화살통에서 날아간 화살 한 대가 왕의 가마 옆에 떨어졌던 것이다. 왕은 이를 암살 미수 사건으로 알고 충격에 빠졌고, 후환이 두려운 김돈중은 입을 닫아버렸다. 그래서 ‘화살을 날린 자’를 찾느라 한동안 벌집 쑤시듯 했는데, 성과가 없자 ‘왕의 호위에 소홀했다.’라는 이유로 견룡∙순검∙지유들 중 14명을 귀양 보내는 조치를 했다. 이는 정중부 등에게 ‘지금은 왕이 우리를 아낀다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라는 불안을 심어주었고, 여기에 그칠 줄 모르는 왕의 나들이를 호위하는 병력이 늘게 되자 병사들이 먹을 밥이나 잘 숙소가 모자라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불만이 치솟기 시작했다. 이제 쿠데타까지는 한 걸음이었다.
보현원의 깊은 밤, 마침내 터져버린 무신의 불만
이때 왕이 시도 때도 없이 나들이를 하면서 경치 좋은 곳에 이를 때마다 행차를 멈추고 가까이 총애하는 신하들과 술과 글에 취하여 떠날 줄을 모르니, 호종하던 장군과 군사들의 피곤이 극에 달했다. 대장군 정중부가 소변을 보러 나가자, 견룡행수 이의방
그 해 8월, 의종은 흥왕사로 행차했다. 정중부는 이의방과 이고에게 “때가 왔다. 다만 흥왕사에서 환궁하면 다음 기회를 노리고, 보현원으로 옮겨간다면 일을 벌이자.”라고 말했다. 의종은 무신들을 위로한다며 오병수박희, 즉 맨몸으로 벌이는 권법 경기를 열게 했는데 대장군 이소응이 젊은 사람과 겨루어 패배했다. 그러자 왕의 총신 중 하나였던 한뢰가 “형편없기는, 네가 무슨 대장군이냐”라며 이소응의 뺨을 때렸다. 왕과 주변의 신하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이때 정중부가 앞으로 나서며 “이소응은 무신이나 벼슬이 3품인데 어찌 이리 심한 모욕을 주느냐!”라고 외쳤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의종은 정중부를 가까이 오게 해서 손을 잡고 달랬다. 이때 이고는 칼을 빼고 당장 일을 벌이려 들었으나, 정중부가 얼른 말렸다.
이로써 장군부터 병사까지 ‘더는 못 참겠다.’라는 마음이 끓어 넘치는 상황이 되자 그날 밤, 마침내 무신정변은 시작되었다. 왕의 행차가 보현원에 가까이 갔을 때 이고와 이의방이 왕의 지시라고 속여 호위하는 순검들을 물러나게 하고는, 직속 병력인 견룡을 동원해 한뢰∙ 임종식∙이복기∙이세통 등 왕을 수행하던 문신과 환관들을 사정없이 쳐죽였다. 이때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머리에 쓴 복두를 벗는 것으로 같은 편임을 표시했기 때문에, 그런 차림을 하지 않은 자까지 잘못 죽은 경우가 많았다. 김돈중은 재빨리 도망쳤는데, 만약 개경으로 돌아가 태자를 내세우며 진압군을 동원한다면 쿠데타 세력에게는 치명타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감악산으로 들어가 숨었고(나중에 잡혀 죽었다.), 정중부 등은 개경에 잠입하여 숙직하던 관료들을 모조리 죽이고 태자를 사로잡아 대세를 장악했다.
정중부 등은 얼마 뒤 의종은 거제도로, 태자는 진도로 유배 보냈으며 태손은 살해했다. 그리고 의종의 동생인 익양공 왕호를 왕위에 앉히니, 이가 명종이다. 이후 정중부∙이의방∙이고 세 사람은 스스로 신하의 최대 명예인 벽상공신에 오르고, 장군직과 문관 고위직을 겸하여 나라를 다스렸다. “무인천하”가 열린 것이다.
‘삼두정치’에서 정중부의 독재까지
황해도 해주 출신이며, 보통 병졸이었다가 군공으로 차차 승진해 대장군(상장군이었다고도 한다.)까지 되어 있던 정중부는 이때 65세.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의방·이고보다는 상당히 연장자였던 것 같으며, 그래서 그런지 두 사람에 비해 신중하고 온건한 편이었다. 수박희 현장에서 곧바로 일을 벌이려던 이고를 말린 것도, “문신이란 놈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죽여버리자.”라는 주장을 억제한 것도 정중부였다. 그런데 보통 이 정변을 ‘정중부의 난’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이의방과 이고가 주역이고 정중부는 따라가는 입장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구체적인 거사를 처음 제의한 사람이 그들이었고, 쿠데타의 주력인 견룡을 이끌던 사람은 이의방이었으며, 정변 후 1년 뒤에는 이의방이 이고를 제거하고 사실상 일인자로 행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정중부의 신중함과 온건함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고 그가 마냥 뒷전에 만족하고 있지는 않았다. 우선 이고의 죽음 후 모든 직위에서 물러나겠다고 하고는(그러자 이의방은 정중부의 집에 찾아가 “앞으로 아버지처럼 모시겠다.”라고 해서 은퇴를 철회시켰다고 한다.) 아들 정균과 함께 또 다른 거사를 준비했다. 명종 3년(1173년)에 동북면병마사 김보당이 의종 복위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키고(이 때문에 유배되어 있던 의종은 결국 무신정권에 의해 살해된다.), 다시 이듬해에는 서경에서 서경유수 조위총이 반란을 일으키는 사태가 이어지자 이의방의 리더십에 대한 의심이 불거졌다. 더욱이 이의방은 자신을 반대하는 승려들을 학살하고 절들을 불사르는가 하면 하급 무인들의 처우를 개선하지 않는 등 원성을 많이 샀다. 이를 틈타 정중부는 명종 4년(1174년) 12월에 이의방을 암살하고는 마침내 일인자로 떠올랐다.
무신정권이 가진 한계가 드러나
정중부는 이의방을 죽인 직후 문하시중이 되어 종래 문관의 최고 지위를 차지했으나, 나이가 이미 칠십에 이르러 있었기에 이듬해에 표면적으로 은퇴하고는 아들 정균과 사위 송유인(그는 정중부와 비슷한 연배의 대장군이다. 본래 유력한 문신의 딸과 혼인해 출세했으나, 무신정변이 일어나자 그녀를 버리고 정중부의 사위가 되었다.)을 내세워 막후에서 권력을 행사했다. 정중부∙정균∙송유인 등은 의종이 건설했던 궁궐들을 하나씩 차지하여 집으로 삼는 등 안하무인인 점도 있었으나, 대체로 온건한 정치를 했으며 왕실 및 문신들과도 화해하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명종에게 어느 정도의 권한을 보장해 주었고, 정변 이래 유명무실해져 있던 과거를 제대로 시행하여 한때 무신 일색이던 조정에 다시 문신들이 넘치게 되었다.
사실 정중부 시대에는 고위 무신들의 협의기구였던 중방(重房)이 사실상의 최고 권력기관이 되기는 했으나, 예전의 관제는 기본적으로 유지되었으며 이의방이나 정중부도 최고 무관으로서가 아니라 문관의 대표로서 권한을 행사했다. 그리고 일본의 무신정권인 바쿠후의 무사들은 무사들 사이의 주종관계에 따라 쇼군에서 하급 무사까지, 중앙에서 전국까지를 망라하는 위계조직을 갖고 있었던 반면, 고려의 무신정권은 하급 무인 및 지방과는 별다른 연계가 없었다. 말하자면 기존의 체제에서 고위직만을 무신 출신으로 충원한 격이었다. 그런 점에서 왕실 및 문신과 권력을 나눠 갖는 방식은 정권을 오래 유지하기 위해 불가피했던 셈이다. 또한 정중부는 불교계를 건드려 원성을 샀던 이의방과는 달리 승려들을 우대하여 환심을 사려 했다.
그러나 신하가 정변을 일으켜 왕을 갈아치우고, 시해하며, 그들 사이에서도 암살이 거듭되는 권력 상층부의 혼란을 목격한 지방과 하층민들의 동요는 그치지 않았다. 이의방을 없애고 나서도 2년이 더 가서야 조위총의 난이 평정되자, 이번에는 공주의 천민 망이∙망소이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밖에도 크고 작은 변란이 끊일 사이가 없었다.
정중부는 정권을 안정시키려면 다시는 무신들이 딴마음을 품을 수 없도록 문관의 입지를 더욱 늘리고, 지방의 민심을 다독여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양계의 판관을 종전대로 문신이 맡도록 하고, 무관이면서 실제 직위가 없던 산관들이 문관이 차지하던 하급직을 빼앗으려는 시도를 차단했다. 그리고 명종과 의논하여 11명의 찰방사를 11도에 나눠 보내 백성을 착취한 탐관오리를 적발하도록 했다. 이때 천 명에 이르는 지방관들이 탄핵을 당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문신 우대와 지방행정 개혁은 무신들의 불만과 불안을 불러왔으며, 그리하여 다시 한 번 쿠데타가 일어나고 말았다. 명종 9년(1179년) 9월, 청년 장교 경대승이 정중부∙정균∙송유인 등을 암살하고 정권을 잡았다. 경대승은 집권 직후 찰방사들의 감찰에 부정이 많았다는 이유로 그들이 한 탄핵을 모두 무효로 했다. 하지만 군부 중에서 정중부를 지지하는 세력의 반발을 겁낸 그는 중방을 무력화하고 특수 무사집단인 도방(都房)을 만들어 자신을 호위하게 했다. 그리고 결국 정중부의 문신 우대책을 답습할 수밖에 없었다. 칼을 쥔 무신들에게 권력을 많이 주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스스로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정중부와 무신정변이 가진 의미
정중부와 무신정변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이를 계기로 문신, 그것도 특정 문벌에 국한되어 있던 고위직에 새로 물갈이가 이루어진 점은 분명하다. 또한 정중부 이후 무신정권은 자신들의 지지세력을 늘리고자 평민이나 천민 중에서도 관료를 많이 임용했다. 하지만 그들의 쿠데타에는 단순한 정권장악 외에 어떤 비전이 없었다. “국왕의 폭정을 종식하고, 참된 신앙의 나라를 만든다.”라는 올리버 크롬웰과는 달랐던 것이다.
그리하여 전체적으로는 무신정권 동안에 백성의 고통과 신분에 따른 차별은 개선되지 않았다. 무인이 정권을 잡았음에도 고구려처럼 상무(尙武)에 입각한 국가를 만들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으며, 국방력이 전보다 더 튼튼해지지도 않았다. 이후 몽골이 침공해 왔을 때, 앞장서서 싸우며 나라를 지킨 무신정권의 주역은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다. 최씨 무신정권이 왕실과 함께 강화도에 들어가 여유로운 생활을 즐기는 동안, 본토에서 몽골군과 필사적으로 싸웠던 사람들은 평범한 민초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