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 내 곁에(고죽 최경창 편)
해동공자 최충의 후손인 고죽 최경창
그는 조선 선조 시대 1568년에 문과에 장원 급제하고 선조 6년 1573년에 그의 나이 34세에 여진 정벌의 임무를 띤 북도평사(병마절도사의 부관)가 되어 임지인 함경도 경성으로 부임하고 있었다.
도중에 홍원 땅 홍원 군수가 베푼 환영연에서 술자리에 나온 기생을 만나게 되고 그 기생 홍랑이 애송시 몇 수를 읊었는데 그 시가 바로 고죽의 시였다.
그 시는 삼당시인의 한사람인 옥봉 백광훈의 형 백광홍이 평안도 평사로 있을 때 애송하며 타인들에게 전해져 널리 사랑을 받게 되어 홍랑(본명 애절(愛節)도 그 시를 사랑하게 되었고 고죽이 그 자리에 앉아있는 줄도 모르고 고죽의 시를 읊조리고 있었다.
나중에 고죽이 시를 쓴 장본인 줄 알고 서로 사랑하게 되었고 경성에 부임한 후로도 홍랑과 함께 기거하면서 헤어질 때까지 진정한 사랑을 했으며 심지어 근무하는 군막에까지 따라다니기까지 했다고 한다.
홍랑은 아마 고죽에게 첫정을 바친 순진한 어린 기생이리라.
다음 해 봄
고죽은 관직이 바뀌어 서울로 올라오게 되니 홍랑은 고죽과 헤어지기가 싫어 쌍성까지 따라왔고 더 따라가 배웅할 수도 없는 함관령(평안도 함경 도민의 한양 출입을 제한하기 위하여 책정한 경계선) 고개에서 마지막 작별을 하게 되었고 돌아오다 문득 생각난 듯 비 내리는 산기슭에서 묏 버들가지를 꺾어서 아래와 같은 시조도 곁들여 종자에게 보냈다.
묏 버들 가지 꺽어 보내노라 임의 손에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곧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묏 버들(갯버들과 구분됨)은 산에 어느 곳에서도 잘 자라는 잡목이다.
홍랑은 고죽에게 이 묏 버들을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밤비에 새잎이 나거들랑 나인 줄 아시라고 노래한다.
그리운 임과의 이별을 애틋이 여기고 묏 버들잎을 자기처럼 보아 달라는 구절이 시풍을 자아낸다.
그녀는 첫사랑 고죽을 잊지 못하다가 함관령에서 헤어진 지 1년 후에 1575년부터 고죽이 서울에서 병을 앓고 누워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 소식을 듣고 홍랑은 7일을 주야로 달려와서 고죽을 성심껏 간호하여 나중에는 쾌차하게 된다.
그런데 이 일이 크게 문제가 될 줄이야.
그 당시 평안도, 함경도 사람이 한양에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양계(兩界)의 도”를 홍랑이 어겼으니 더군다나 명종 왕비 인순 왕후의 국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두 사람은 사랑놀이에 빠져들게 되었으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수 밖에...
그래서 고죽은 벼슬을 내려놓게 되고 홍랑도 한양을 떠나 함경도로 가게 된다.
고죽은 홍랑과 이별을 하면서 홍랑에게 한시 두 수를 지어준다.
이 시가 바로 송별(送別)이다.
(전략)
아쉬워 보고 또 보며 그윽한 난초 드리오니 相看脈脈贈幽蘭
이제 가면 머나먼 곳 어느 날에 다시 오리 此去天涯幾日還
함관령의 옛날 노래 다시 불러 무엇 하리. 莫唱咸關舊時曲
지금은 궂은비 내려 청산이 어두워라. 至今雲雨暗靑山
이별이 너무 아쉬운 시.
언제 다시 홍랑을 만날 수 있을지 기약이 없는 가운데 유란(幽蘭)한 분과 함께 마지막 선물이 되었다.
세월이 한참 지나고 1582년에 종성부사로 복직이 되어 부임했다.
조정의 대간들이 다시 들고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특진을 문제 삼자 성균관 직강으로 강등하여 발령이 났다.
부임하자마자 서울로 다시 돌아가는 길에 함경도 경성 객사에서 병으로 세상을 하직했다.(1583년 당시 나이 45세)
그리던 홍랑을 만났으나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불귀의 객이 되었으니 애달픈 사랑의 한을 어이 하리오.
이때 이율곡은 반장*(返葬)을 주장하며 경기 파주시 월롱면 영태리에 장사 지냈다.
고죽이 경성에서 사망했을 때 율곡 이이 선생이 반장(返葬)을 주장한 이유도 파주가 고향 그리고 친지들이 그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영암과 파주 2곳 중 한 곳이 분명히 고죽이 태어난 고향이리라.
고려 성종 때 해주의 목민관(牧民官)을 거쳐 판이부사(判吏部事)를 지냈던 최온(崔溫)이 해주 최씨의 시조이며 해주 최씨가 고려의 국성(國姓)이라 할 만큼 튼튼한 기틀을 마련한 것은 해동공자 최충의 영향이 컸다.
조선 시대
옥봉 백광훈, 손곡 이달과 함께 삼당시인으로 유명한 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 1539-1583)은 서울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영암은 고죽 선생이 이곳 부호였던 해남 임구령(위사공신 2등 남원부사)의 딸에게 장가를 들어 토지 일부를 상속받아 구림에서 살았다.
처가살이를 시작하면서 학문과 문장을 닦으며 문과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갈 때까지 20여 년간 왕성한 활동을 펼쳤던 곳으로 고죽을 영암사람이라 부르는 근거가 되었다.
해주 최씨가 구림에 처음 터를 잡을 때는 시조 최온의 19세손 고죽 최경창 때부터이다.
고죽의 증손자 석징(1604~1667)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구림에 정착하며 할아버지 재산을 관리하며 터전을 넓혔고 고죽과 임씨 부인 사이에는 운서·구서·인서의 삼 형제를 두었다.
또한 홍랑과 최경창 사이에는 아들 한 명을 두었는데 그가 최경창의 서자 “최즙”이다.
각설(却說)*하고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고죽이 죽자 홍랑은 고죽의 무덤이 있는 경기도 파주에서 9년 동안 움막을 짓고 그의 무덤을 지킨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자기의 얼굴에 흉터를 내면서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넘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더군다나 임진왜란 때에는 홍랑은 고죽이 쓴 한시 시고(詩稿)들을 감싸 안고 피난을 가 유고(遺稿)들을 안전하게 잘 간수 하였다.
난이 끝난 후 시고를 최씨 문중에 전한 홍랑 뒷날 고죽집을 낼 때 시의 대부분은 홍랑이 보존했던 시였다.
고죽의 묘 앞에서 자결한 홍랑의 이런 뜻을 가상하게 여긴 해주 최씨 문중에서는 고죽의 묘 바로 건너편에 홍랑을 묻어 사후에라도 그 넋을 달래고 있으며 지금도 문중에서는 홍랑의 일부종사를 가상히 여겨 홍랑 할머니라 부르고 제사도 받들고 있다고 한다.(초장지 :파주시 월롱면 영태리)
이런 고죽 최경창과 기생 홍랑의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 이야기는 2000년 11월에 묘 이장 시 홍랑의 시조 육필 원본과 최경창의 한시 두 수가 공개되어 더욱 화제가 되었다.
흔히 고죽 선생의 애정행각에 대해서는 말들이 많지마는 우리는 두 시인의 사랑 문제보다도 고죽의 유고를 보전하기 위해 난을 피해 짊어지고 다니면서 유고를 온전하게 보관해온 홍랑의 노고 국문학사에 끼친 공에 대하여 높이 평가해야 하리라고 본다.
그러나 2,000년 훨씬 전부터 영태리는 군작전 지역으로 편입되어 파주 교하읍 다율리로 이장했고 1969년 6원에는 홍랑의 묘비를 세웠다.
비제(碑題)를 '시인 홍랑지묘(詩人 洪娘之墓)'라 하고 고죽의 15대손 최태호 씨가 비문을 찬(撰)하였고 그 후 홍랑의 묘소 아래에는 1981년에 전국 시가 비 건립 동호회의 회원 50여 명이 추렴하여 세운 홍랑가비(洪娘歌碑)도 서 있다.
작가가 세종 문학상을 받는 자리에서 이 혼란한 고죽과 홍랑의 묘 주변을 다시 한번 둘러보러 소주 3병을 사 들고 안주도 곁들여 현장을 가 보겠다고 큰소리친 터인지라 다음 날(2022년 9월 29일) 오후 3시쯤 묘소를 둘러보러 갔을 때 나는 또 한 번 놀라 자빠질뻔했다.
교하 신도시 개발 지구로 지정되어 아파트 건설이 시작된 묘지 뒤편에 종중산 일부가 도로로 편입되는 바람에 묘 뒷덜미 산자락은 도로 개설로 인해 까까머리가 되었고 종중 묘 일부(최태호씨 묘)는 어디로 이장이 벌써 끝난 상태이었고 옆에는 편도 2차선 대로가 건설 중이었다.
고죽의 유고 중 고묘(古墓)라는 시 한 수를 올린다.
고묘무인제(古墓無人祭) : 옛 무덤에 아무도 제사 드리지 않아
우양답성도(牛羊踏成道) : 소와 양이 밟아서 길을 만들었네
연년야화효(年年野火燒) : 게다가 해마다 들불 타들어
묘상무여초(墓上無餘草) : 무덤 위엔 풀마저 남아있지 않네.
들은 얘기로는 고죽의 묘 이장을 놓고 파주, 안성, 영암 등으로 이장 하는 문제로 시끄럽고 도시계획으로 인한 보상 문제로 종중 간에 이권 다툼을 하는 것 같았는데 추석이 지난 지금까지 고죽 부부와 홍랑의 묘에는 벌초도 하지 않았다.
억새가 무성한 수풀 뱀 나올까 무서워 조심조심 헤쳐 가노라니 울화통 이 터진다.
홍랑 묘 아래 가까운 조상은 벌초를 하였고 꽃다발도 보이지만 고죽과 홍랑 묘에는 추석에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것 같다.
나는 마음의 방명록에 내 이름을 적고 고죽 선생 마음 같은 소주를 가득 따라 석상 위에 올려놓고 긴 서러움에 잠기며 선생의 처지를 생각해 보았다.
옥골선풍의 외모 고결한 선비(청백리)였던 고죽 선생 시(詩), 서(書). 활(弓)의 명인이며 거문고 피리(笛)의 달인이기도 한 삼당시인(三唐詩人) 고죽 선생.
오늘의 처지가 측은함을 넘어 눈물이 앞을 가려 애꿎은 돌부리만 걷어차니 내 발등이 아프다.
이름 모를 꽃들만 피어나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고죽의 묘를 뒤로하고 서산에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산마루 외로운 나그네가 서러움 한 아름 부여안고 미끄러지듯 하산했다.
뭉개진 뒷산 기슭 움푹 팬 시름 자국
떠나려는 마음 안고 돌아선 발자국들
묘지에 피는 꽃들도 번뇌 속에 허덕인다.
구르는 밤톨 인양 황금 줍기 여념 없는
잔 잡아 권해오던 자손들 다 어디에
홍랑아 너만 믿는다 하얗게 핀 풀꽃들도.
두봉의 시조에서
*반장(返葬): 객사한 사람을 그가 살던 곳이나 그의 고향으로 옮겨다가 장사를 지냄.
*각설(却說) : 화제를 돌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