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한부선 선교사의 서간집 이야기 (641:426) / 조재태
며칠 전 전원호목사님을 통하여 뜻밖에 귀한 선물을 받았다. 한부선선교사님의 서간집이다. 선교사님은 이미 우리와 유명을 달리한지 오래되었지만, 나는 그분에게서 전도학을 배웠다. 1965년에는 선교사님을 모셔다가 초역으로 섬겼던 진성교회에서 부흥집회를 갖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너무나 반갑고 귀한 선물로 내게 다가왔다. 돌아오자마자 서간집을 펼쳤다. 그 분의 인터뷰까지 포함하여 다섯 권의 방대한 분량에 놀랐다. 눈에 와 닿는 여기저기 두 어권을 읽다 말고 자판기 앞에 앉았다.
“어! 오늘 양코백이 한 놈 탔네” 의령군 칠곡 아랫마을에서 꽤나 어깨에 힘주면서 사는 전씨 성을 가진 동네 유지 한분이 부산을 가려고 버스를 탔는데, 혼자 앉아있는 큰 몸집의 서양 사람을 발견하고 혼자서 크게 중얼 댄 말이다. 빈자리라고는 선교사 옆자리뿐이어서 어쩔 수 없이 그는 그 빈자리에 거서 앉았다. 의령, 군북, 가야, 마산을 거쳐야 부산에 이른다. 군북 버스정류소에서 선교사님은 깨엿을 샀다. 그것을 옆에 앉은 그 전씨에게 내밀면서“깨엿 하나 잡수시지요”라며 말을 건넸다. 깜짝 놀란 그는 당황하여 안절부절 어쩔 줄 몰랐다. 한국말 모르는 줄 알고 무심코 내 뱉은 막말 한 마디 때문에, 너무나 무안했던지 그는 도중인 가야에서 도망치듯 내리고 말았다. 선교사님은 칠곡교회 부흥집회를 인도하고 부산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1952년 겨울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한부선(1903.6.4.-1984.7.8.) 선교사님은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란 후, 한국의 선교사 인 부친 한위렴 선교사에 이어 2대째로 한국 선교사로 파송 받았다. 학교공부를 위하여 미국에 머문 10여년을 제외한 대부분을 한국에서 살았다. 그래서인지 그는‘한국인보다 한국말을 더 잘하는 선교사’‘가장 한국적인 미국 선교사’로 알려져 있다. 만주에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하는 동안, 9개월의 옥고를 치른 유일한 선교사로, 우리 모두의 추앙을 받는다. 하나남 말씀 앞에 절대순종의 사람이다. 장로교 제27회 총회 홍태기총회장의 불법가결선포에 대한 유일한 항의자이기도 하다. 그의 전도에 대한 열정은 사도 바울을 닮았다고 말하고 싶다. 조금은 근엄하면서도 한없이 겸손한 선교사님이시다. 그는 고려신학교 송도 캠퍼스를 건축하는데 크게 기여하신 분이시다. 선교사님은 우리에게 전도학을 가르쳤는데, 니비우스 전도정책에 대한 그의 강의를 들었던 우리 동기들은 그의 열강을 지금껏 잊지 못하고 있다. 그가 우리 고려파 초창기에 기여한 숨은 공로와, 한국 장로교에 대한 애정과, 우리 국민에 대한 사랑을, 나는 그의 편지 여기저기에서 수없이 발견할 수가 있었다. “방금 10시 뉴스를 들었습니다. 우리(미국)가 왜 일본은 발전하도록 밀어주고, 훌륭한 나라인 한국은 둘로 나뉘도록 버려두는지 모르겠습니다”“오늘 오후에 국제 뉴스를 들었습니다. 요즈음에 한국이 훨씬 더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Ⅱ권 p23, 38)
1947년 1월 14일에 쓴 편지를 읽었다. 나는 이 날의 편지를 주목하였다. 왜냐하면 너무나 중대한 어떤 사실을 예언하는 듯한 편지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로부터 4년 후에 비극의 6. 25가 발발했다. 그 분의 선지자적 영적 혜안과 통철력, 그리고 예리한 판단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공산주의자들의 활동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 이곳에서 우리가 어떤 힘든 날을 맞게 될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당신이 이곳으로 오기를 고대하고 있는 한편, 우리가 그분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여러 일들이 어렵게 진행될 줄을 알기 때문에 나는 조바심을 내지 않습니다. 오늘 아침에 한 남자가 말하기를, 이북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독주하지 못하는데, 주로 기독교인들의 반대 배문이라고 합니다. 이남의 기독교인들도 그처럼 강했으면 좋겠습니다. 이 사람들을 깨우기 위해 공산주의라는 채찍이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무수한 사람들이 음식의 부족으로 고생하고 있는데, 이 나라 사람들은 가내 양조와 조상 제사를 위한 음식 장만으로 물질을 헛되이 낭비하고 있습니다. 산들은 헐벗어가고 있고, 도로는 주저앉은 채 방치되어 있으며, 공공건물들은 보기에 험악합니다. 불쌍한 한국! 그들은 아직도 위에서 어떤 것을 해주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나는 그러한 생각은 오직 노예 상태로 이끌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 나라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주세요”(Ⅰ권 p222-223)
641:426? 설명 없이는 그 어떤 수학천재라도 풀지 못할 숫자의 배열이다. 641은 한부선선교사님께서 한국선교를 위하여 홀로 마린 쾌른호에 승선하여 동경을 거쳐 한국에 도착한 날들의 수이다(1946. 10. 2-1948. 7. 11).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아내에게 펀지를 쓰기 시작한 날부터 편지쓰기를 그친 날까지의 일수이다. 그는 2년이 채 못 되는 641일 동안에, 아내에게 쓴 편지가 무려 426통에 이른다. 원문으로는 1,500매나 된다고 한다. 이 편지 말고도, 선교 본부와 후원교회와 지인들에게도 많은 편지를 썼을 것이다. 5남매 아이들에게도 썼다고 밝힌 곳이 있다. 내가 읽은 그의 편지들은 결코 짧지 않았다. 어떤 편지들은 11면, 12면, 14면이 넘는 편지도 있었다. 평균으로는 3페이지가 넘는 긴 편지들이다. 어떤 날은 하루에 두 통의 편지를 쓴 곳이 여덟 군데나 되었다. 흔들리는 대구 가는 기차 안에서, 부산가는 화물차 안에서 편지를 쓴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항상 피곤에 지쳐 있었던 것 같다. 어떤 날은 편지 첫 줄을 써 놓고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고 했다, 다음날 편지를 이어 쓴다는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줄줄 흐르는 눈물을 도저히 주체할 수가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