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역사를 고대, 중세, 근대의 세 가지 시대로 나누는 데 너무나 익숙하다. 시대구분은 연구의 편의만을 위한 것이 아니며, 어떤 시대가 다른 시대와 구별되는 특징을 정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사실 역사학의 많은 논쟁들이 시대구분을 둘러싼 것들이다. 요컨대 역사학에서 시대구분은 연구를 위한 틀이라기보다는 연구의 결과이거나 때로는 그 목적이기도 하다. 시대구분의 보편성 문제도 간단치 않다. 고대, 중세, 근대의 삼분법이 어떤 사회의 역사에나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구분일까? |
역사에서 시대구분을 하는 이유가 너무 긴 시간의 역사를 한 번에 다루면 불편하므로 몇 도막으로 나누어 이해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이야기할 수만은 없다. 시대를 구분한다는 것은 곧 각 시대의 성격이 무엇인가, 그 시대가 다음 시대나 이전 시대와는 성격이 어떤 다른가에 대해 질문한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역사의 발전방향과 그 의미에 대한 성찰이 수반된다. 역사인식이 곧 우리의 정체성을 호가인하는 것이라고 할 때, 시대구분은 우리의 정체성이 어떤 경로를 거쳐 어떤 방향으로 발전해 왔는가를 단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를 바라보는 학자의 시각이 다른 만큼 시대구분에 대한 견해도 모든 학자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시대구분의 문제가 언뜻 기술적(技術的)인 단순한 문제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역사인식의 모든 문제들이 여기에서 충돌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3분법의 발전
시대구분 가운데 전통적으로 가장 널리 사용되는 것은 ‘고대-중세-근대’라는 3분법이다. 이것은 유럽의 전통에서 형성되어 나왔고 유럽의 근대역사학에서 완성된 개념이다. 따라서 우선 서구의 3분법의 발전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3분법은 르네상스 시대(대체로 14~15세기) 사람들의 자기 시대인식에서 처음 등장하였다. 그들은 바로 자기들 때에 새로운 시대가 도래 했다는 의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의 새로운 시대란 정말로 역사상 처음 맞이하는 시대라기보다는 이전에 있었던 영광의 시대가 다시 찾아왔다는 의미였다. 이에 의하면 과거 그리스 ? 로마 시대에 이미 찬란한 문화의 꽃이 만개했으며 그때야말로 황금기였다. 그런데 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북유럽에서 게르만족이라는 ‘야만족’이 밀고 내려와서 ‘야만의 시대’가 되었는데 이때는 문화의 빛이 완전히 죽어버린 암흑기였다. 르네상스라는 것은 죽었던 고대문화의 빛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르네상스(Renaissance)라는 말은 재생(再生)이라는 의미이다.〕이것을 정리하면 먼 과거의 황금시대인 고대가 있고, 그것을 되살린 오늘날의 시대가 근대이며, 그 중간이 야만의 시대인 중세(문자 그대로 중간에 낀 시대)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점은 유럽에서 형성된 이 ‘근대’란 개념이 오늘날의 우리 시대 혹은 우리 시대와 아주 가까운 과거 시기라는 단순한 시간상의 단위가 아니라 ‘발전’의 뜻을 내포한 개념이라는 점이다. 그것도 중세의 ‘암흑’으로부터 ‘빛’의 시대로 나아갔다는 극적인 발전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이제 새로운 빛이 다시 켜졌으니 이 빛의 인도를 받으며 인류의 역사는 진보해 나가게 된다. 이런 사고는 다음 시기인 계몽주의 시대에도 그대로 전달되었다. 계몽이라는 말이 영어로 ‘Enlightenment(빛을 비춤)’인 점에서 이런 뜻을 쉽게 읽을 수 있다. 이와 같은 3분법적인 시대의식은 19세기 중엽 이후 유럽의 역사학에서 완전히 확립되었다.
보편법칙과 단계설, 그리고 유럽 중심주의
19세기 유럽에서 3분법이 정착될 때 또 한 번 아주 중요한 의미가 덧붙여졌는데, 이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마르크스주의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유럽사만이 아니라 세계사 전체를 보편법칙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법칙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어느 사회의 구성방식을 생산양식(생산력 수준과 거기에 대응하는 생산관계의 총체)을 기준으로 하여 파악한다는 것으로, 고대는 노예제 사회, 중세는 봉건제 사회, 근대는 자본제 사회라는 특정한 의미를 담고 있다. 1930년대 소련에서는 여기에 노예제 이전의 원시사회와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주의 사회를 합쳐서 다섯 시대로 확대시켰다.
이것이 가진 중요한 의미는 세계 역사가 반드시 이와 같이 정해진 발전단계를 거치며, 따라서 어느 지역의 역사를 이해하려고 할 때는 이 발전단계의 어디에 도달해 있는가를 파악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역사학의 단계설이다. 여기에서야말로 시대구분이 단순히 역사시기를 몇 도막으로 나눈다는 것 이상의 아주 강한 의미를 띤다. 우선 시대에 대한 단절적인 파악의 경향이 더욱 강하다. 노예제와 봉건제, 그리고 자본주의는 각기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사회구성체이다.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이행해 가는 것은 이런 질적인 차이, 완전히 다른 차원의 시대로 들어간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런 단계적인 이행은 역사적인 필연이다.
이런 인식이 가지는 좀 더 중요한 의미는 이런 시대구분이 유럽이라는 한 지역에 대해서만 타당한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 공통적으로 적용된다는 믿음이다. 예컨대 중국이나 인도의 고대문명들도 노예제 사회라는 점에서는 로마 제국과 똑같다. 이처럼 전 세계의 역사를 하나의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고, 그에 따라 현재에 대한 인식과 미래에 대한 전망 역시 이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 세계에 대한 설명이라는 뜻의 보편성이 결코 전 세계에 대한 불편부당(不偏不黨)한 설명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이든 혹은 그 영향을 받은 다른 유럽 역사학이든 전 세계에 대한 설명은 곧 자문화(自文化) 중심주의, 혹은 유럽 중심주의(Eurocontrism)로 귀결되었다. 유럽은 중세의 암흑을 벗어나서 찬란한 근대문화가 만개하였으나 다른 지역은 유럽 기준으로 볼 때 아직 중세적, 혹은 고대적 단계에 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과 다른 dr사적 발전양상은 비정상적인 혹은 무의미한 현상으로 치부되곤 한다. 결과적으로 3분법은 유럽인들이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타자(他者)를 재단하는 잣대로 쓰이는 경향이 있다.
우리 역사의 시대구분
우리에게도 《삼국사기》나《삼국유사》와 같은 발전된 역사서술의 전통이 있었지만, 현재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학, 그리고 일반적으로 널리 퍼진 역사서술은 유럽에서 들어온 근대역사학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다. 따라서 우리의 기대구분 역시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서구의 3분법을 기본바탕으로 삼고 있다. 즉, 언제까지나 고대인가, 언제부터 언제까지가 중세이며, 근대의 시작은 언제인가 하는 문제들이 계속 제기되어 왔다. 물론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각 시대의 기본특징을 어떻게 파악하느냐의 문제, 그리고 역사인식의 기본철학의 문제와 연결된다.
여기에서 흥미롭게 지켜볼 점은 남한 역사학계와 북한 역사학계의 시대구분의 차이이다. 이것을 비교해보면 시대구분과 관련된 문제들을 예민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남한 학계에서 대체로 받아들여지는 정설은 고조선부터 통일신라시대까지를 고대, 고려시대 이후부터 개항까지를 중세, 그리고 그 이후시기를 근대로 잡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 여러 반대의견들이 많으며, 따라서 이 구분이 누구나 다 받아들이는 오나결된 결론은 결코 아니다. 북한과 비교해볼 때 이처럼 여러 가지 시대구분 방법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남한의 특징이다.
이에 비해 북한에서는 논쟁을 거쳐 누구나 받아들이는(받아들여야 하는) 하나의 표준적인 시대구분을 정하는 특징이 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사적 유물론의 방법에 입각하여 논쟁을 거듭하다가 도달한 결론에 따르면, 원시공동체 해체 이후부터 고조선까지를 고대 노예제사회, 삼국성립 시기부터 조선 말기까지를 중세 봉건제사회, 그 이후를 근대로 규정하고 있다.
이 중에서 특히 근대의 기점, 그리고 근대의 성격에 관한 논쟁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일제시대와 해방 직후 남한에서는 단순히 왕조별 시대구분에 따라서 조선시대를 ‘근세’, 한일합방을 ‘최근’으로 규정하였다. 이병도의 이와 같은 견해는 식민사관의 연장이라는 강한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우리 민족의 주체적인 발전에 근거하여 우리 역사를 서술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 따라서 1960년대 이후 근대의 기점을 새롭게 잡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자본주의 발전의 맹아(萌芽)가 분명하게 싹트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고(이 맹아는 결국 일제침략에 의해 꺾였다고 설명한다.) 그 기점으로 18세기의 영 ? 정조시대를 지목하는 견해가 대두하였다. 또 다른 견해는 우리의 반식민주의 투쟁을 근대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아서 반일투쟁이 본격화된 개항기를 근대의 시작으로 보기도 하였다. 또 다른 견해에 따르면 개화 ? 척사운동이 전개되는 대원군 집권기를 근대로 보기도 한다.
이에 비해 북한 학계에서는 1950~1960년대의 논쟁과정에서 계급투쟁과 민족투쟁이라는 두 가지 기준 가운데 어느 것을 더 중요하게 보느냐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1866년 병인양요라는 민족투쟁을 근대의 시작으로 보았고, 1945년 해방 이후를 현대사로 보았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변화가 생긴 것은 주체사상이 북한사회를 완전히 지배하게 된 1970년대이다. 주체사관에 따르면 반침략 ? 반봉건의 부르주아 민족운동의 시대가 근대여야 한다. 시기적으로는 근대의 시작이 ‘1860년대’여서 이전의 시점과 큰 차이는 없는 듯 보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예컨대 김옥균이 주도한 갑신정변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규정하는 등 남한 학계와는 상당한 차이가 보인다. 이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 이전 단계인 부르주아 혁명 단계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욱 큰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현대의 기점인데, 이는 노동계급과 수령의 지도가 결합되는 시기로서 김일성이 항일유격대를 결성했다는 1926년으로 명확하게 규정하였다.
이처럼 시대구분은 해당 사회가 자신을 어떻게 규정하느냐 혹은 어떻게 바라보고 싶어하느냐 하는 점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
결론
시대구분은 역사연구의 성과들이 종합적으로 발현되는 계기이며, 그런 점에서 역사가 개인 혹은 그가 속한 학파, 더 나아가서는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역사인식의 기본성격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역사가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핵심이라 할 때, 시대구분은 곧 우리는 어떤 발달과정을 거쳐서 살아와서 오늘의 우리가 되었으며, 그렇게 도달한 현재의 우리는 누구인가를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은 주체적인 발전을 해왔는가 아니면 다른 민족에 비해 불구의 역사전개 과정을 거쳤는가, 일제시대가 우리 민족의 발달에 긍정적인 역할을 했는가 혹은 전적으로 파괴적이었는가, 남북한 정권의 성격이 무엇인가와 같은 극히 중요하면서도 민감한 문제들에 대해 어떤 태도로 어떤 대답을 나느냐가 곧 시대구분에 반영되는 것이다. 현실의 변화는 곧 역사인식의 변화를 가져오고, 그에 따라 시대구분 역시 새롭게 변화하는 경향이 있다.
■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일제시대의 한국사 서술에서 시대구분이 왕조중심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2. 우리나라의 역사도 세계사 공통의 단계를 따른다고 보는 견해는 어떤 강점과 약점을
가지고 있는가?
3. 사회적 ? 정치적인 변화에 따라 시대구분이 크게 변화한 사례를 소개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