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일 군사협력이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과 그 보좌관들은 일본과의 동맹을 추진하는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가치 동맹이라고 합니다. 북한, 중국, 러시아의 공산주의 혹은 독재 체제에 맞서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의 단결을 공고히 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한국 전쟁에서 북중러가 침략 세력이고 한미일이 그에 맞서 자유 진영을 지켜냈다는 점은 평가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일본은 제국주의 시대 우리 민족을 정복하고 아예 민족을 말살하려고 하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과거의 일본과 현재의 일본은 다르다고 합니다. 현재 일본국 헌정 체제가 과거 일본 제국 헌정 체제보다 개명되었음을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참으로 자유민주 체제로 환골탈태하였는지는 의문입니다.
과거 일본 제국주의 헌정의 가장 큰 특징은 일본 천황제와 민족종교 체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이 타국을 침략 정복하고 타 민족을 학살하고 또 자민족의 희생을 강요한 것은 모두 일본 천황제와 민족종교에 기초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일본 천황제와 민족종교가 지속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일본의 민족 종교는 신도(神道)입니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자신들은 천조대신(태양신, 아마테라스)의 후손들이며 천황은 ‘사람으로 나타난 신(現人神, 현인신, 아라히토가미)’으로서 신과 소통하며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태양은 만물 원기의 원천으로 태양이 비추는 모든 곳은 일본이 지배할 수 있으며, 그 후손인 일본은 바로 신국(神國) 혹은 신주(神州)라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사람들은 천황의 수족이 되어 그러한 천황이 영광에 복무해야 한다는 국가종교(국가신도)가 정립됩니다.
일본의 제국주의는 이러한 민족적 종교적 우월주의와 배타주의에 토대를 두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양의 제국주의 역사 역시 기독교라는 종교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독교는 원칙적으로는 민족을 초월하는 보편 종교입니다. 그러나 일본의 종교는 민족종교이며 따라서 이민족에 대한 편협함과 차별성이 더욱 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편협과 차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일본 민족, 일본 종교에 동화되고 귀의하는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국가적으로 강요되면 바로 ‘내선일체’, ‘민족 말살’ 정책과 같은 것이 됩니다.
이렇기 때문에 일본 패전 이후 승전국 미국은 일본에 국가 신도를 철폐할 것을 주문하였습니다. 헌법에 신앙의 자유를 명기하고 정교분리의 내용을 규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 천황제를 바꾸지 못하였습니다. 물론 천황주권에서 국민주권으로 바꾸긴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 민족의 상징, 민족종교 제사장으로서의 천황, 국가의 원수로서 천황의 지위를 박탈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한 근본적 체제 변혁은 미국의 일본 지배를 어렵게 할 것으로 판단했던 때문입니다.
그 결과 일본은 아직 과거의 국가 신도로부터 결별하지 못하였습니다. 천황은 여전히 일본 민족종교의 제사장으로서 그가 하는 가장 큰 일은 일본의 민족신, 즉 천조대신(天照大神, 태양신, 아마테라스)에게 제를 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천황은 국가의 대표로서 국정의 행위를 합니다.
천황은 국회의 지명에 의거하여 내각총리대신을 임명하고, 내각의 지명에 의거하여 최고재판소의 장인 재판관을 임명합니다(일본국 헌법 제6조). 천황은 내각의 조언과 승인에 의하여, 국민을 위하여 헌법 개정, 법률, 정령 및 조약을 공포하고, 국회를 소집하고, 중의원을 해산하고, 국회의원 총선거 시행을 공시하는 등(일본국 헌법 제7조) 국가 중대 헌정행위를 합니다.
물론 천황의 국사에 관한 모든 행위는 내각의 조언과 승인을 필요로 하며, 내각이 그 책임을 지며(일본국 헌법 제3조), 천황은 헌법이 정하는 국사에 관한 행위만을 행하며, 국정에 관한 권능을 지니지 아니한다(일본국 헌법 제4조)고 하여 실질적 권력은 부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본국 헌법은 천황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헌법 제1조에서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자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며, 이 지위는 주권을 지닌 일본 국민의 총의에 근거한다”고 하여 국민주권이지만, 여전히 군주국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군주는 일본 민족 종교의 제사장의 지위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습니다.
천황의 황실에서는 지금도 매년 1000회의 제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천황이 직접 집전하는 제사로서 신상제(新嘗祭, 니이나메사이)가 가장 중요합니다. 이는 매 년 수확된 신곡과 신주를 천조대신(아마테라스)에게 바치면서 감사하고 천황 자신도 함께 먹는 일종의 추수감사제 의식입니다. 이와 같은 신상제가 새로 즉위한 천황에 의해 최초로 행해질 때 그것을 대상제(大嘗祭, 다이죠사이)라고 합니다.(박규태, “마쓰리와 신찬: 이세신궁과 천황의 제사를 중심으로”, 종교문화비평, 제32권, 2017, 34-35쪽) 이 대상제는 천황이 군주와 민족 제사장의 지위를 계승한다는 의미가 있는 행사로서 황실은 물론 일본 국가에서도 가장 중요한 행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 나루히토 천황의 대상제도 2019년 11월 14-15일 밤샘 행사로 치러졌습니다. 도쿄 왕궁의 동쪽 정원인 히가시교엔(東御苑)에 이번 제사만을 위해 일본 열도 동·서 지방을 각각 상징하는 '유키덴'(悠紀殿)과 '스키덴'(主基殿)을 포함해 30여채의 건물로 이뤄진 대상궁(大嘗宮·다이조구)이 세워졌습니다. 대상제 전체 비용은 가건물인 대상궁 건립비(9억5천700만엔)를 포함해 24억4천만엔(약 260억원)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는 국가 예산으로 지원됩니다. 그리고 당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 등 행정, 입법, 사법 등 3부 수장과 국회의원, 각계 대표 등 500여 명이 대상제에 참석했다고 합니다.(연합뉴스, 나루히토 일왕, 반대 시위 속 밤샘 제사의식 치러, https://www.yna.co.kr/view/AKR20191114168651073, 2019-11-14)
이렇게 거국적으로 성대하게 치러지는 대상제는 일본이 아직도 천황 중심의 신도 국가라는 점을 시사합니다. 고대 일본에서 정치는 신에 대한 제사를 뜻하는 ‘마쓰리고토’라고 불렸으며, 천황의 최대 역할은 바로 신을 모시는 데에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일본에서 정치란 신에게 신찬과 공물을 바치고 그 가호를 기원하는 데에서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일본 민족의 전통에서 정치의 원형은 종교이고, 인민의 대표는 천황이었던 것입니다.
관련하여 천황이 다스리는 나라 즉 일본이 식국(食國)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대 일본 민족학의 대가 오리구치 시노부(折口信夫)는 “식국(오스쿠니)이란 (신 혹은 천황이) 드실 것을 만드는 나라를 뜻하는데, (천황이) 통치하는 나라라는 후대의 어법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 ‘드시다(食す, 오스)’는 말에서 ‘다스리다(治める, 오사메루)’라는 말이 나왔음은 의심할 나위 없다고 해석합니다. 식국(오스쿠니)이란 천황이 지배하고 통치하는 영역을 뜻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오스’란 ‘다스리다’, ‘먹다’, ‘마시다’, ‘옷을 입다’는 말의 존경어이고, ‘오스쿠니’라는 말의 어원이 원래 ‘천황이 먹는 음식물을 만드는 나라’에서 비롯된 것이며, 거기서 ‘통치하는 나라’라는 뜻이 파생되었다고 본 것입니다. (박규태, 앞의 글, 42쪽)
이러한 민족 종교적 전통, 그리고 의연 존재하는 천황제 속에서 일본 극우 민족주의가 다시 부활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2000년 5월 15일 당시 수상이었던 모리 요시로(森喜朗)가 “일본은 참으로 천황을 중심으로 한 신의 나라”라고 한 발언을 상기할 수 있겠습니다. 당시 모리 수상은 일본 신도정치연맹(神道政治連盟) 국회의원 간담회에서 그런 발언을 공개적으로 하였습니다. 이후 모리 수상은 김대중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후의 기자회견에서 그에 대하여 사과하고, “천황을 신과 연결시키려는 생각에서 말씀드린 것이 아니며, 전쟁 이전에 천황 주권 하에서의 국가 신앙을 부활시킨다는 것은 개인적 신조로도 그런 생각이 없다”고 해명하였지만, 그 진심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동아일보, 日 모리총리 "神國발언 깊이 반성, https://www.donga.com/news/Inter/article/all/20000529/7540534/1, 2009-09-22).
모리 수상이 ‘신국’을 얘기한 신도정치연맹이란 어떤 단체인가? 이는 현대 일본 우익의 본산인 ‘일본회의(日本会議)’의 정치적 전위그룹입니다(김정기, 모시 요시로 총리, “일본은 신의 나라” 망언의 뿌리, Asean Express, https://www.aseanexpress.co.kr/mobile/article.html?no=6744). 일본희의는 1997년 5월 30일 결성되었고 2020년 기준 4만명의 회원을 가진 거대 조직입니다. 2014년 기준으로 480명의 일본 중의원들 가운데 289명을 차지하고 있고, 내각의 주요 멤버들도 여기 출신입니다. 아베, 스가, 기시다 등 최근 총리대신들이 모두 여기 출신입니다. (영문 위키백과, Nippon Kaigi, https://en.wikipedia.org/wiki/Nippon_Kaigi)
이 단체는 태평양 전쟁의 범죄성을 부인하고 그것을 서구 제국주의로부터 아시아의 해방으로 미화하고 있으며, 도쿄 전범재판의 정당성도 부인하고, 중일전쟁 시 난징 학살, 위안부 문제도 부인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목표는 바로 ‘평화헌법’의 개정이며, 전전의 일본 민족주의와 전체주의를 희구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이른바 ‘혐한’의 진원지입니다.
일본인들과의 우호적 관계는 소중합니다. 그러나 일본 극우 정치를 잊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반일, 항일을 합니다. 그런데 일본은 '혐한'을 합니다. 우리는 일본의 압제에 저항하였고, 일본의 배타성과 차별성에 반대합니다. 그러나 일본의 배타적 민족주의자들은 한국을, 한민족을 그 자체로 경멸하고 열등하게 취급합니다.
물론 한국인들 중에서 일본을 무조건 미워하고 증오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는 잘못된 것이며 고쳐야 합니다. 그러나 일본의 '혐한'에는 눈을 돌리며, 우리의 '혐일'만 비난하는 것은 우스운 일입니다. 일본의 선민적 민족주의와 배타적 우월성은 그냥 넘어 갈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는 과거 한일 관계의 고통을 연장시키는 것이며, 한일 우호와 동양 평화를 해치는 것이며, 일본의 진정한 헌법정신에도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어느 덧 이러한 극우 세력이 다시 일본 정계의 주류가 되었습니다. 현재 일본 정치는 자유 민주주의가 아니라 극우 민족주의로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일본 정계와 이념을 공유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자유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어떤 배타적 이념과 종교를 부정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어떤 종교 혹은 이념보다 공존과 관용 그리고 평화와 우호를 우선시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배타적 민족주의의 선민의식은 그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일본 헌법은 정교분리를 말합니다. 민족 종교에 앞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중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일본의 정치는 그러한 헌법을 배반하고 있습니다.